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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섬김의교회(최성수목사)
 
 
 
카페 게시글
감성을 깨우고 믿음을 돕는 영화묵상 스크랩 에반 올마이티
고구마 추천 0 조회 202 11.01.21 12: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상을 바꾸기 위한 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에반 올마이티”(톰 새디악, 2007, 전체)

 

입신양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다. 자신이 나서야 하는 이유가 세상이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이나 군사력, 과학과 기술의 힘을 바탕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는 특히 자본의 힘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꾸어보려고 한다. 그것을 ‘개혁’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혁명’이라 일컫든지, 아니면 ‘변혁’이라고 하든지 그것은 단지 변화의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 나타나는 차이일 뿐, 사실은 같은 내용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세상의 변화’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말이다.

요즘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출사표를 던지는 대선주자들과 그들의 갑론을박을 지켜보면서 유권자들의 고민은 분명하다. 누가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적격자를 도대체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적인 분별력과 관련해서 사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는 최종적인 결정이 외부적인 조건에 지나치다 할 정도로 좌우되는 것이다. 어느 종교에 속해 있고, 어느 학교출신이며, 어느 지역 출신인지, 또 어떤 정당에 속해 있는지를 실제적인 실력보다 더 중시한다. 이런 것들이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또 행동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거짓 학벌이 난무하게 된 것이고, 특정 지역이나 종교의 유권자들에 대한 높은 기대심리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맥이 중요하게 여겨지다 보니 누가 그 배경에 있는가 하는 것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변수다. 숱한 문제들을 야기했던 전통유교사회의 허례와 허식은 점차적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단지 모양만 바뀌었을 뿐 거짓과 포장된 이력으로 가득한 사회가 된 것 같다.

좀 더 합리적인 유권자들은 대개 이런 질문과 관련해서, 대선주자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의지를 관철시킬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의지를 실행에 옮길만한 인내와 지구력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모든 유권자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온전하게 식별할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리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충분한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고 또한 그들의 공약들을 꼼꼼히 따지면서 듣지 않으면 눈 깜짝 할 사이에 그들의 논리에 빠져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선택에 있어서 아무리 혼동된다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비록 대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변화인가를 묻는 것이다. 겉으로는 국민과 나라와 세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이나 특정 계층, 혹은 기업을 위한 변화를 추구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숱한 정치인들에게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경유착이니, 뇌물수수혐의나 혹은 권력과 지위 남용이니 하는 죄목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정치인들의 불순한 의도는 다른 누구보다도 부익부 빈익빈을 부추기고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결국 도덕과 윤리를 타락시키고 대다수의 국민을 힘들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비전과 능력은 정치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대의정치 구조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일은 정치의도의 순수성과 신뢰성이다. 정치윤리와 도덕적인 정체성에서 문제가 없어야 한다.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대선주자로 나서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세상을 변화시킬 적격자인지, 그들의 순수한 의도를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만한 사람에게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유권자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적어도 이런 고민에 공감하는 독자라면, “브루스 올마이티”, “패치 아담스”등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톰 새디악 감독의 작품 “에반 올마이티”를 감상하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비록 다소 코믹한 방법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꿈꾸며 국회의원에 당선된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에반 올마이티”에서 톰 새디악은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앵커로서 브루스(짐 캐리 분)의 경쟁자였던 에반(스티브 카렐 분)을 등장시킨다. 에반은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모토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영화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은 그만큼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반영한다. 여하튼 에반은 새 집, 새 자동차, 새 직장이 주는 행복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나 열대우림을 살리자는 환경단체의 경고를 무시하고 부엌가구로 체리원목을 사용하고, 떠돌이 개에게 물 한 모금 줄 여유도 없다. 아이들과의 약속은 식은 죽 먹기로 어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지 의문이다.

새 집에서 설레는 첫 날을 지내면서 가족 모두가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지만, 에반은 기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자신에게는 다른 도움이 불필요할 정도로 충분한 능력이 있고 또한 국회의원 당선과 더불어 정치적인 능력도 갖추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고 시도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모두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에반은 모두가 잠든 사이에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과연 그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을까?

맞추어 놓지도 않은 자명종 시계가 정확하게 6시 14분에 울리고, 차번호도 ‘창614’, 집 앞에는 수많은 목재들이 배달된다. 수많은 동물들이 한 쌍씩 짝을 이뤄 에반의 뒤를 따른다. 이 모든 것들은 에반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암시하는 것들이다. 창세기 6장 14절(“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의 기록대로 노아의 방주를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이 왜 방주를 만들라는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없이 다만 9월 22일에 홍수가 올 것을 대비하라는 말만 듣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에반이 방주를 만들 수 있는 조건들만 만들어 주신다.

첫 출근과 함께 그에게 정치적인 기회로 다가온 사람은 롱 상원의원이다. 그는 국립공원의 개발을 위한 법 제정을 준비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가인 에반의 지지를 얻고자 그에게 접근한다. 에반의 참모들은 정치적인 출세를 위해 롱의 계획에 협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문제는 에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다. 수많은 목재들이 배달되고, 자신이 사지도 않은 땅을 구입했다는 통보를 받고, 동물들이 에반을 따르는 것은 물론이고, 수염은 깎아도 계속 자라며, 의상은 노아가 입었을 것 같은 고대의상으로 바뀌었다. 다소 비현실적인 연출이지만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족의 오해도 사지만, 특히 롱 의원과의 만남에서 난처하고 곤혹스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에반에게 정말 화가 날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에반이 방주를 만들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인이었다. 결국 이상한 옷차림과 언행으로 인해 에반은 의원직을 일시적으로 정직당하기에 이른다. 가족들은 에반의 변화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좌충우돌의 사건으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에반을 떠나게 된다. 연속적인 불행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된 에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며 방주를 만든다.

남편의 변화와 기행을 이해하지 못해 떠나긴 했지만 가족이 더욱 친밀하게 지내기를 기도했던 아내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하나님은 인내를 구하는 사람에게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시고, 용기를 구하는 사람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말을 들은 에반의 아내는 자신이 했던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남편에게 돌아간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또 온 매스컴이 비난하는 상황 속에서 진행된 방주건설은 가족이 옴으로써 더욱 큰 탄력을 받아 방주는 기일 내에 완공된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홍수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더욱 커지고 에반을 포함한 가족은 큰 실망과 더불어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철거명령을 받은 경찰들이 방주를 철거하려는 찰나에 롱 의원의 의정활동 결과로 세워진 댐이 붕괴된다. 댐 붕괴로 마을은 순식간에 수몰되고, 마을 주민과 동물들은 방주로 피신해 생명을 구한다. 이 사건으로 롱 의원의 국립공원 내의 개발은 단지 롱 의원의 사리사욕과 건설주들의 이익만을 위한 것임이 밝혀진다. 에반 역시 자신이 무엇 때문에 방주를 건설해야만 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세인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에반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드디어 세상이 변한 것이다.

만일 에반이 롱 의원과의 정치적인 공조를 통해 정치적인 입지를 구축하려 했다면, 그에게 세상을 바꿀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에반의 아내에게 했던 하나님의 조언대로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에반의 기도는 에반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응답된 것이다. 이 기회를 얻기까지 어떠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는가! 이 기회는 무엇보다 먼저 에반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세상이 조롱하고, 때로는 가족마저도 외면하는 그런 변화,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변화가 먼저 자신에게 일어나도록 하고 나서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를 받아들였을 때 에반은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소명이 에반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마술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일은 드물게 일어난다. 선택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며,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는 여지도 많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누군가를 통해 반드시 이뤄지는 것이지, 꼭 특정한 누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부르심을 소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반에게 일어나는 것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대하며 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클릭”이 톰 새디악의 극본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세 작품 “브루스 올마이티”, “클릭”, 그리고 “에반 올마이티”는 일종의 시리즈 영화로서 전능의 문제와 관련해서 각각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간다. “브루스 올마이티”는 하나님의 전능을 인간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능력으로 오해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데 비해, “클릭”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기의 뜻대로 통제하려고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를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에반 올마이티”는 정치적인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생기는 부정적인 결과를 제시해주고,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시사해준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무엇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지를 강조한다. 세상의 변화는 나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된다.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의 역사는 먼저 나의 변화를 갈망했던 사람들의 회개로부터 시작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변화를 원했던 사람들의 회개가 한국사회의 변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흥을 꿈꾸는 기독인들 역시 세상의 변화를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나의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에반 올마이티”는 기도와 응답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브루스 올마이티”에서 기도라는 모티브를 다루면서, 톰 새디악 감독은 인간의 기도에 들어있는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의지를 비판하고 있는데, “에반 올마이티”에서 기도는 응답에 이르기 위한 기회를 얻는 방법으로 이해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도하는 사람에게 변화된 세상을 선물로 주기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킬 기회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 기회 앞에서 에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를 감수해야 해야만 했고, 온갖 위기에 맞서야만 했다. 이는 빌립보서 2장 13절의 말씀에 근거해서 볼 때 매우 적합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작게는 대한민국, 크게는 세상을 변화시킬 의지를 앞세우며 출사표를 던지고 있는 대선주자들이 우리 앞에 있다. 앞으로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기독인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다. 누가 얼마나 자기 자신의 변화에 용기를 발휘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사실 이것을 분별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곧 선택의 분별력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이 뜻에 따른 변화의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분별력은 우리가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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