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류산 화천 사내면 나주 반남면 신안 지도읍
, 1961년 7월 14일[3] ~ )은 대한민국의 배우
1961년 7월 14일(음력 6월 2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에서 4남매의 막내 다른 이름 [1] 직업 배우 활동 기간 1983년 ~ 자녀 이미소
時 日 月 年 胎 壬 戊 乙 辛 丙 (坤命 64세, 만62세6개월) 子 申 未 丑 戌 (공망:寅卯,辰巳)
78 68 58 48 38 28 18 8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卯 寅 丑 子 亥 戌 酉 申
대정수 : 1846
1] 출생 1961년 7월 10일 (62세)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甲 甲 乙 辛 丙 (坤命 64세, 만62세6개월) 子 辰 未 丑 戌 (공망:寅卯,辰巳)
79 69 59 49 39 29 19 9 癸 壬 辛 庚 己 戊 丁 丙 卯 寅 丑 子 亥 戌 酉 申 대정수 : 2162
대정수 : 1559 육효 : 445
음력 時 日 月 年 胎 丙 乙 丙 辛 丁 (坤命 64세, 만62세5개월) 子 酉 申 丑 亥 (공망:午未,辰巳)
76 66 56 46 36 26 16 6 甲 癸 壬 辛 庚 己 戊 丁 辰 卯 寅 丑 子 亥 戌 酉 대정수 : 2038 육효 : 264
대정수 : 1975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은 고대 중국 진(秦)나라 사람이다. 대만 또는 한국이나 일본에 도래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허구로 알려져 있다. 개요[편집] 기원전 255년에 제나라에서 태어났다. 《사기》권6 진시황본기 및 권118 회남형산열전(淮南衝山列伝)에 따르면, 기원전 221년에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서불은 이때 자기가 불로초를 구하러 가야 할 차례임을 알고 기원전 219년(진시황 28년),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리하여 기원전 219년에서 210년 사이에 그의 두번에 걸쳐 불로초를 찾으러 다닌다. 진황도를 떠난 서복은 일본이나 한국에 도래했다는 전설이 있지만 사실성은 없으며 허구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여행에는 60척의 배와 5,000명의 일행, 3,000명의 동남동녀와 각각 다른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했다고 한다. 기원전 210년 그는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중국 남부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승[편집]중국에서의 서복 전승[편집] 중국의 《삼국지》와 《후한서》 기록에는 서불이 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온다.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지금의 타이완을,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 허구이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구양수가 지은 『일본도가』(日本刀歌)에는 「그 조상은 서복이 진의 백성을 꾀어서는/약을 캐러 간다고 동남동녀를 그곳에서 늙게 했지/온갖 장인과 오곡을 그들에게 주어 살게 했으니/오늘날까지 만든 것이 모두 정교하다네(其先徐福詐秦民 採藥淹留丱童老 百工五種與之居 至今器玩皆精巧)」라고 말한 내용에서 일본을 가리킨 부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불이 정확히 어디로 도망하였는지 당시 중국인들도 모르고 있으며 일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옛 허구 전설이 한반도와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이것을 실제로 보는 많은 창작들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록에 의해 현대 중국인들은 서불이 일본에 도착하여 일본 정권을 이룩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허구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의 서복 전승[편집] 서복이 지나갔다고 전하는 서귀포의 정방폭포. 이곳에 '서복과차'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제주도는 이미 《삼국지》 및 《후한서》에 주호(州胡)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제주시 용담동의 산지항에서 전한 시대의 화폐인 오수전을 비롯해서, 신나라 때에 만들어진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화포(貨布) 및 구리거울 등이 발굴되었다. 고려 이인로의 《파한집》 및 조선 초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는 서복이 언급한 삼신산은 모두 한반도를 가리킨 것이며, 봉래산과 영주산, 방장산은 각각 한국의 금강산과 한라산, 두류산이라고 비정하였다.[1] 특히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의 지명 및 정방폭포의 서불과지(徐福過之)라는 글자는 오래 전부터 중국을 떠난 서복이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흔적으로 지목되고 있다.[2] 이 전설에 따르면 당시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바다로 나온 서복이 제주도에 왔고, 이곳을 지나면서 '서복이 이곳을 지나간다(徐市過此)'라는 글자를 암벽에 새겼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제주에서 불로초를 구한 서복이 '서쪽(西向)을 향해 귀로(歸路)에 오른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서귀포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제주도 현지에는 이곳 서귀포에서 북을 두드리며 놀면 교룡이 나와 같이 춤을 춘다는 전설이 전하는 등, 서귀포는 제주도에서도 역사적, 경관적 가치가 있는 명승지로 남아 있다. 한편 제주도에 도착한 서복이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지금의 조천읍 조천포(朝天浦)였다고 한다. 서복 집단이 정말 제주도에 이르렀는지, 《사기》에 언급된 영주산이 정말 지금의 제주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으며, 제주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서복 선단의 성격에 대해서는 진시황의 동방 개척 정책의 일환(윤명철)이라는 등의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일본에서의 서복[편집] 서복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중국의 전승은 일본에도 전달되었다. 하지만 서복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일본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서복 전설이 과대 포장되어 일본인들이 서복의 후예라는 잘못된 인식까지 퍼져 있다. 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해당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신숙주가 지은 《해동제국기》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천황으로 분류되는 고레이 천황 때에 불로불사약을 찾으러 온 서복이 일본의 기슈에 닿았으며, 스진 천황 때에 죽어서 신이 되었고 일본 사람들이 서복을 제사지냈다는 전승을 적었으나 이것은 중국에서 퍼진 헛소문을 적은 그대로 적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단고 반도(丹後半島)에 있는 니이사키 신사(新井崎神社)에 전해지는 《신대명신구비기》(新大明神口碑記)라는 고문서에는 중국의 전설을 그대로 인용하여 서복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서복 관련 전설은 중국과 한국, 일본에 흩어져 있으며, 서복 전설의 스토리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후지문헌》(富士文献)은 후지요시다 시의 미야시타가(宮下家)에 전해져 내려온 미야시타가 고문서(宮下家文書)를 포함한 고문서로, 한자어와 만요가나를 사용한 분류로 일본의 역사를 기록하였는데, 이 책을 편찬한 것이 서복이라는 전승이 있다. 《해동제국기》에서 고레이 천황의 대에 서복이 일본으로 왔다는 기술과 미야시타가 고문서의 내용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지적되는데, 다만 미야시타가 고문서는 이른바 「고사고전」(古史古伝)에 포함되는 부류의 책으로 문체나 발음을 보아도 에도 시대 후기나 근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되며, 기술된 내용에 대해서도 정통 역사학자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현재[편집] 1982년에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지명사전』(中華人民共和国地名辞典) 편찬에 즈음하여 현지 조사를 시행했는데, 장쑤 성 롄윈강 시 간위현 금산진(金山鎮)에 있던 서부(徐阜)라는 마을이 청나라 건륭제 시대 이전에는 「서복촌」(徐福村)이라 불렸고, 서복과 관련된 전승과 유적이 소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만 1980년대까지 현지 옛 집에는 「우리 선조는 명대(明代)에 이 땅에 이주하였다」는 전승이 있었고, 서복이라는 인물이 실재했느냐는 자체가 의문스러운 데에서, 이는 「일본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조성한 마을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서부촌에는 일본인 관광객이 다수 찾아오는데, 명물 「서복차(徐福茶)」도 호평을 받는다. 2000년 3월 30일에 츠시 시에는 서복기념관(徐福記念館)이 개관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의 서복 연구자와 중국 현지인과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이듬해 2001년 가을에는 같은 시 삼북진(三北鎮)의 문완남로(文宛南路)에 「서복소학교(徐福小学校)」가 개교하였는데, 학교의 휘호는 일본 서복회(日本徐福会)의 명예회장을 지낸 하타 쓰토무가 썼다. 2013년 6월 6일에는 제10차 한.중 여성지도자 포럼에 참가했던 중국대표단의 이해봉 중국전국정협 부주석 등 15명이 사단법인 제주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이사장 이영근)의 초청으로 서귀포시의 서복전시관을 방문해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황칠나무 두 그루를 기념 식수했다. 서불 관련 유적[편집] 한국 문학 속의 서불[편집]
- 심청가
- 선상탄(船上歎), 노계집(蘆溪集) 중 박인로의 가사, 1605년(선조)
관련 서적[편집]
-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 삼국지(三國志) 오서·오주권전(吳書·吳主權傳)
-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 봉선서(封禪書)
- 서복이 한반도에 남긴 유적과 문명의 성과, 이형석(제6회 서복문화 동아세아 국제학술대회, 200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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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불로초 전설이 살아있는 서귀포 '서복전시관과 서복공원'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카카오스토리(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바로가기 본문 글씨 키우기 본문 글씨 줄이기 제주와 인물sanha7979@hanmail.net다른기사 보기
- 고향 속으로
- 입력 2022.06.15 10:31
- 수정 2022.07.0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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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제주와인물#서복전시관#서복공원#서귀포#진시황 [김요나 객원기자] 서귀포(西歸浦)란 지명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서복전시관과 서복공원을 찾았다. 정방폭포 옆 해안절벽 위 풍광이 기가 막힌 곳에 자리한 이 전시관은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찾아 제주도를 방문했던 서복(서불이라고도 함)을 기념하고,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서복과 정방폭포, 서귀포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2003년에 설립, 개관한 곳이다.
어떤 지역이나 동네 이름에는 재미있는 설화나 의미가 담겨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귀포(西歸浦)란 지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귀포항에서 정방폭포로 가는 길목 (올레6코스)에 중국풍의 커다란 출입문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절도 아니고 웬 중국풍의 건축물일까 의아하게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그곳이 바로 서귀포란 지명이 만들어진 유래를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기원전 255년 제나라에서 출생한 서복이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의 약초를 찾아 3,000여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제주도 영주산(한라산)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 서불(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기고 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은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에는(1877년 고종 14년) 제주목사 백낙연이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암벽에 새겨진 글자를 탁본하였는데 글자는 모두 12자이나 중국의 고대문자여서 해독하기 어려웠다. 라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서복상을 비롯하여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 진시황의 칙서와 서복의 동도 상서문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진시황과 서복, 서복과 서귀포에 대한 영상 자료들을 관람 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서복 일행의 항해 경로는 명확히 밝혀 지지 않았으나 당시 영주산(한라산)이 있던 제주도 북쪽으로 들어와 불로초를 찾다가 남쪽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서 다시 항해를 떠났다고 전해질 뿐이다. 서복의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은 아요이 문화(일본의 청동기 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지며,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로서 현재에도 한국, 중국, 일본에서 서복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서복이 전설속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인물이라는 증거로 진시황의 칙서와 서복의 동도 상서문을 비롯하여 청동마차와 병마용, 서복 동상까지 중국측에서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전시물 등은 생각했던 것보다 빈약했으나 기념관을 중심으로 벽돌담과 널찍한 잔디광장, 연못, 다리, 돌탑, 돌계단, 정자, 나무그네 등으로 오밀조밀 꾸며놓은 공원은 서귀포 앞바다 천혜의 풍광을 십분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하여 류원산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강대명 중국 국토관리부 장관 등 많은 중국 관료들이 이곳을 방문을 했는데 방문하고 돌아가 승진이나 영전을 했다고 하여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단다. 또 천혜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이 공원에 스토리텔링을 곁들여 서복10경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를 맛보게 한 것도 재미있었다. 1경 서복이 정방폭포 암벽에 새겼다는 '서불과지'. 2경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는 뜻으로 지어진 서귀포란 지명이 유래한 '서귀기원'. 3경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끌고 온 3천여 명을 기리기 위해 1,000개의 기왓장을 썼다는 '동남동녀'. 4경 진시황룡의 병마용 장군의 손을 만지며 소원을 비는 행운의 상징인 '장군수복'. 5경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 이곳을 방문한 중국의 관료들이 승진이나 영전을 했다고 해서 시진핑 방명록 앞의 '승진대로'. 6경 해안절벽의 소나무가지절반이 바다를 향해 기이하게 자라고 있는데 이는 용궁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상징한다는 의미의 '용왕해송'. 7경 주상절리의 해안절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가장 청명하게 들리는 명소로 대 자연의 오케스트라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하여 '해파낙청'. 8경 바다의 맑은 공기와 하늘의 푸르름이 만나는 곳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진시황의 불로장생의 꿈을 잠시나마 생각하게 한다는 '일등천경'. 9경 멸종 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황근이 유일하게 서귀포 바닷가에서 서식하는데 여름에 노란꽃을 피 워 노란 무궁화라 부르는 '황근만화'. 10경 진인은 목구멍이 아닌 발뒤꿈치로 호흡한다고 주창한 장자의 건강요법인 족뜸을 체험할 수 있는 '장자족구'.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1경부터 10경까지 일일히 찾아가 10경의 스토리를 확인하며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서복기념관과 서복공원을 이렇고 알고나니 그 공간이 새롭게 다가왔다. 전시관과 공원을 다 둘러본 뒤 마지막 10경에서 족뜸까지 뜨고나니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색다른 관람여행이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하는 해안절벽이 제주도민의 응어리로 남아있는 4.3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라는 안내판을 보는 순간 마음이 숙연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4.3당시 수용소에 수감자들이 넘쳐나서 취조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이 이 해안으로 끌려와 희생당했다는 안내문이었다. 그 수가 무려 248명으로 산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이라 한다. 아름다운 절경과 함께 제주의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할 공간으로 생각 되었다.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