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가. 박하와 회향과 기도를 거룩하게 행하고 보이는 것은 표면적인 종교 행위에 불과하다.
나.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 마음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로서 속사람(지성소)이다.
2. 본론
가. 박하와 회향과 기도를 거룩하게 행하고 보이는 것은 표면적인 종교 행위에 불과하다.
‘그 박하와 회향’은 기도를 포함하여 거룩하게 행하고 보이는 각종 종교 행위들로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 행위에 필요한 직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 왔으며,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종교에 대한 어떠한 직분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존경받는 원로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나이가 많든 적든 종교 행위는 타파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인들은 이천 년을 넘도록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 왔다. 사실은 그들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였고, 다른 이들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온 셈이 된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성경을 보았고, 장님이 된 그들은 모든 것을 종교 행위로 포장하는데 급급해 온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겉 사람들을 종교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고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키고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여 절대 권력을 갖고 교육해 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빛 안으로 들어와 본 경험이 없는 자들이다.
나.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 마음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로서 속사람(지성소)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몸 된 성전(지성소) 안에만 거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우리 마음(카르디아) 너머(누스)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로서 속사람(지성소)이다. 카르디아 너머의 누스 안에 있는 거룩한 성전은 겉 사람이 속사람으로 회복된 그 안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몸 밖의 돌(리도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 아니다.
돌(리도스) 성전은 각자 마음 안에 있는 몸 된 성전을 오히려 보지 못하게 훼방하고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겉 사람이 세운 돌(리도스) 성전이 무너져야만 내면으로 들어올 수 있다. 몸 밖의 종교 행위를 통해서는 각자 안에서 몸 된 성전이 세워질 수 없다.
참 십일조는 몸 된 성전 안에 계시는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십일조(데카토오)는 돈이나 물질이 아니라 아들을 낳음이다. 내면에 생명의 빛으로 나타나는 십일조와 헌물이며, 죽어 있던 자가 아들로 살아 돌아옴이다. 겉 사람의 정과 욕심 곧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을 내려놓을 때만 거룩한 십일조(데카토오)인 아들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제사장으로서 드리고 왕으로서 받는다. ‘십일조를 드리다’의 ‘데카토오’는 ‘드리는 것’과 ‘받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드리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내가 제사장이 되어서 드리고 내가 하늘의 왕으로서 받는다. 내가 드리고 내가 받는다. 그런데 세상 종교에서는 드리는 자와 받는 자가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이들이 드리는 십일조는 사망의 십일조다.
참 ‘십일조’는 나 자신이 겉 사람에 속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인 강도들에게 빼앗긴 것을 다시 찾아와서 내 안의 몸 된 성전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원래 빼앗겼던 순수한 나(예수 차원)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십일조와 헌 물은 그리스도 예수로서 생명의 그 빛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의 그 빛 안으로 이끄신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