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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스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강의
btn : 대승기신론 개론 (3)
1.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란?
제 3강 대승기신론 개론 (3)
전체 내용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얘기를 다 하지 못했습니다. 본문 들어가기 전이라서 내용을 세세하게 설명을 못하고 대충하다 보니까 조금 딱딱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내용을 계속 얘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해석분(解釋分) 현시정의(顯示正義)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하고 심생멸문(心生滅門)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조금 더 얘기를 하자면, 심진여문(心眞如門)이 환멸문(還滅門)이 되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은 유전문(流轉門)이 됩니다. 유전한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고, 환멸은 멸(滅)로 돌아간다는 얘기죠.
심생멸문(心生滅門) 안에는 본체가 공하다는 체공(體空)과 윤회의 길인 성사(成事)가 있습니다. 본체가 비어 있다는 체공(體空)은 심진여문(心眞如門)에서 불변(不變)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몸이든 마음이든 생멸하는 속에서 본질이 비어있는 걸 보게 되면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심생멸문(心生滅門) 속에 있기 때문에 따로 심진여문(心眞如門)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구조가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 빠트린 게 뭐냐 하면, 일심(一心)을 중생심(衆生心)이라고 전 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 중생 마음이 그 본질은 한마음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속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이 나눠졌다고 해도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삼대(三大)에 대한 얘긴데, 삼대는 잘 아시다시피 체(體), 상(相), 용(用)을 얘기 합니다. 삼대에서 대(大)는 대승(大乘)에서 대와 같은 말입니다. 대승(大乘)이 일심(一心)입니다.
상(相)은 모양 상인데, 체(體)는 모양이 없다는 얘깁니다. 텅 비어 있다는 거죠. 그럼 모양[相]은 어떻게 생기는가 하면, 인연이 화합 되었을 때 모양이 생깁니다. 육체는 4대가 화합했기 때문에 육체라는 모양이 생기고 여기 보여 지는 물질도 흙, 물, 불, 바람 4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합이 됩니다. 하나 더 해서 허공까지 넣을 수 있는데, 그러면 이런 모양이 생기는 겁니다. 서로가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는 그 모습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일심(一心)이라는 게 상(相)으로 나타낼 때는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용(用)은 그 쓰임새를 얘기합니다. 실질적으로 몸을 나투어가지고 법신을 깨치고 색신을 구족하게 되면 중생을 구제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늘 열반에 들어 있으면서도 보신과 화신을 내서 중생을 구제하는 게 생기는 거죠. 그게 쓰임새, 용(用)입니다. 그래서 이 삼대(三大)가 일심(一心)이 갖고 있는 핵심 되는 부분들이에요.
현시정의(顯示正義)에 대해서도 지난 시간에 얘기 했죠. 각(覺)과 불각(不覺)이 있고 동(動)과 정(靜)이 있고 염(染)과 정(淨)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심진여문(心眞如門)하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이 있고 이 문의 뜻이 깨쳐 들어가는 문,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이 안에 들어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보통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얘기하면 남방 수행법이라고 다 얘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대승, 소승 할 것 없이 전부다 사마타 위빠사나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게 지관(止觀)이죠.
화두선도 엄밀히 따지면 지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각국사에게 어느 거사가 묻습니다. 지관쌍수(止觀雙修)하고 화두일문(話頭一門)하고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간화일문(看話一門) 안에 지관쌍수가 들어가 있다, 그것을 알려면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서장(書狀)을 봐라, 라고 얘기를 합니다. 간화일문에서 지관쌍수가 다 들어오듯이 바꿔서 얘기를 하면 사마타와 위빠사나 속에 간화선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원효스님 역시 모든 수행은 사마타와 위파사나에서 벗어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 다음에 해석분(解釋分)에 대치사집(對治邪執)에 대해서 얘기를 해 봅시다. 이렇게 일심과 이문과 삼대에 대해서 설명했는데도 불구하고 착각을 해서 삿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게 허공하고 법신(法身)하고 동일하게 보는 착각이 일어납니다. 텅 빈 허공을 여래법신으로 착각을 할 수 있다 이거죠. 그래서 허공을 여래법신으로 보는 것은 삿된 견해에서 근거한다는 거고 그런 삿된 견해를 대치해서 다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허공이라는 것은 물질과 상대되어서 나타나는 거고 물질이 소멸해서 나타나는 것이 허공이고 그것은 우리 분별 의식 속에 나타나는 게 허공이다, 그래서 허공은 여래법신이 아니다, 이렇게 설명 합니다.
또 하나는 진여(眞如)에 대해서 잘못 행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진여를 허무(虛無)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여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으니까 허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허무가 아니라는 거죠. 잘 아시다시피 이 진여에는 공(空)과 불공(不空)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거죠. 마치 표면이 맑고 깨끗한 거울과 마찬가지로 공이라는 것은 번뇌가 다 사라져 버린 겁니다. 그게 진여 공인데, 그 상태는 마치 깨끗한 거울과 같은 거예요. 그리고 그 거울이 맑고 깨끗한 상태가 됐을 때 만상이 다 비추듯이 온갖 상이 그 거울에 다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을 불공(不空)이라 그럽니다. 그 나타난 형상[不空]하고 맑고 깨끗한 거울면[空] 그 자체하고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라는 얘기죠. 그게 진여(眞如)입니다. 그러니 허무라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여래장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 여래장은 나중에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여래장에는 오염된 게 있다, 그것은 오염된 게 아니다, 여래장에는 차별상이 없다, 이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대치사집(對治邪執)에서는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면, 지금까지 공부를 해 온 것에 대해서 잘못된 사견에 떨어질 수 있는 부분을 잡아주는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불법 공부를 해서 받아들일 때 자기의 견해에 근거해서 잘못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곤란한 거죠.
그렇게 잘못 받아들이는 데에는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고집을 대치사집(對治邪執)에서 타파하는데, 인아집(人我執)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고, 법아집(法我執)에서 법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현상을 법이라 그럽니다.
그런데 아집(我執), 아(我)가 들어가 있는 거죠. 내 육체 안에 영혼이 있어서 나를 주재하는 자아가 있다,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견해에요. 이것을 다 타파해 버리는 게 대치사집(對治邪執)인데, 구체적으로 진여를 허무(虛無)로 본다든지 허공하고 법신(法身)하고 동일하게 보는 것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공부를 할 때 잘못 된 것을 바로 해야 되거든요. 그것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수행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수행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 두거나 또는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견에 집착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공부를 하긴 했는데 잘못 알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현시정의(顯示正義) 부분에서 정견을 바로 세워서 얘기를 하지만 그 다음에 또 삿된 견해를 가지고 고집하기 때문에 대치사집(對治邪執)에 와서 타파를 하는 거죠.
그 다음이 세 번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 있습니다.
‘발취(發趣)’는 나아간다는 뜻이고‘도상(道相)’은 가는 모습, 길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분별(分別)한다는 거죠. 이 말은 발심(發心)이고 다른 말로 하면 발보리심(發菩提心)이에요. 여기서 보리심(菩提心)은 깨달음의 씨앗입니다. 깨달음의 씨앗을‘발한다’,‘낸다’는 얘깁니다.
여기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믿음을 성취하는 발심,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 있습니다. 수행을 하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가 믿었던 것이 확인이 되는 체험이 있고, 또 하나는 그 믿음이 더 확고해진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험을 받침으로 한 믿음입니다. 그게 신성취발심입에요. 체험을 함으로 해서 지금까지 알고 있던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거죠.
두 번째, 해행발심(解行發心), 진여 법성의 이치를 명확하게 알고 실천해 감으로 해서 깨달음의 씨앗을 계속 키워가는 겁니다.
세 번째 증발심(證發心)은, 진발심(眞發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진여(眞如)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해행발심 까지는 비슷하다는 상사(相似)발심이라고 얘기하는데, 어른과 아이는 비슷하죠? 그래서 해행발심을 어른아이발심이라 그럽니다. 증발심은 초지에 들어가지고 하는 발심이라 어른의 발심, 부처되는 길을 들어선 겁니다. 상사발심의 궁극은 아라한이지만 증발심의 궁극은 부처에요.
이렇게 세 가지 발심을 분별한다, 잘 가려낸다고 해서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거죠. 그러면 여기「대승기신론」에서는 부처되는 길이니까 결국 끝에 가서는 증발심을 얘기 하겠죠.
이렇게 발심을 하면 그 다음에 수행에 들어가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입니다. 믿는 마음[信心]을 닦아가는[修行] 거죠. 수행은 행을 닦는다는 말이고, 행은 업(業, karma)입니다. 이 업은 뒤틀려 있는 마음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뒤틀려 있는 마음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 그럽니다. 요즘말로 더러운 마음을 청정한 마음으로 바꾸는 게 수행이에요.
그렇게 수행을 하는데 네 가지 믿음[四信]을 닦아가는 거예요.
내 안에 진여(眞如)가 있음을 믿고, 그 다음에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진리[法]와 스님[僧]들을 믿는 거죠.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해서 많은 부처님이 계시듯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법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의해서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을 믿는 거예요.
그리고 승을 믿는 것은, 이렇게 법을 믿고 수행해 갔던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게 수행자고 스님입니다.
이런 것은 무엇을 근거로 얘기할 수 있느냐 하면, 내 안에 진여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믿는 마음이 확신에서 확인되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에요.
그 다음에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은 닦으면 이익이 있다[修利益]는 것을 권(勸)하는 부분이에요. 수행을 하면 이러이러한 이익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어야 무엇인가를 하는데, 그 이익 중에서도 행복을 얻는 게 최대 이익이고, 또 그 행복 중에서도 불생불멸을 얻는 게 최대 행복이죠.
옛날에 와세다 법대 출신이자 한국인 최초의 판사였던 효봉 스님께서 한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됐는데 이로 인해 죄책감과 회의감이 들어 결국 판사를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3년 동안 엿장수를 했답니다. 번뇌는 한 죄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면서 시작됐습니다.‘사람을 죽였다’는 고뇌와 인생이 무상함을 느끼고 판사직을 버리고 중이 됐다고 해서 판사중이라고 했는데, 금강산 마하연에서 석두스님을 만나면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석두라는 노스님이 자네는 얼굴을 보니까 엿장수하면서 떠돌아다닐 상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떠돌아다니느냐고 하니까 저는 죽지 않는 법이 있으면 체득해 보려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노스님 하시는 얘기가, 우리 절집에도 그러한 법이 있는데 배워볼 생각이 있느냐? 그러니까 효봉스님이 배워보겠다는 거죠. 그래서 출가를 하고 깨치게 됩니다.
우리 불교 안에 그런 법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대승기신론」이 따지고 보면 생겼다 사라졌다, 생멸하는 이 세상에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 고통을 다 소멸해 버리고 정말 고통이 없는 행복만 존재하는 진여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르침이에요.
이런 「대승기신론」 공부를 하면 우리가 부처가 되는 거죠. 모든 삶과 죽음을 벗어나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겁니다. 깨달음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수행을 하면 이러이러한 이익이 있다, 어떤 이익이 있느냐, 변하지 않는 법의 성품을 닦는 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 있겠느냐 이거죠. 그러기 때문에 누구에게 공양을 올린다, 이런 것 보다는 차라리 자기 내적 관찰을 해서 법성을 보는 것이
훨씬 공덕이 크다고 얘기를 합니다.
반면에 이「대승기신론」에서 얘기하는 부처님 가르침을 비방하면 큰 죄가 된다고 얘기 합니다.「대승기신론」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인데 그 가르침을 비방한다면 부처되는 길을 막는 게 되는 거죠. 남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고통에서 못 벗어나게 하고 계속 그 고통에 빠뜨린다면 그것보다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승기신론」의 가르침, 부처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은 죄가 크다, 그렇지만 「대승기신론」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한다면 이것 보다 큰 공덕이 없다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향송(廻向頌)을 하고 끝나는 겁니다.
결국 전체적인 내용이 이 논은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기 위해서 짓게 된 것이고, 그 고통을 제거하는 근원이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이것을 줄이면‘한마음’라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해석분(解釋分)에서 세 가지[顯示正義, 對治邪執, 分別發趣道相]로 나눠서 해석을 합니다. 각(覺)과 불각(不覺), 동(動)과 정(靜), 염(染)과 정(淨)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게 되고, 이렇게 해서 끝나고 나면 내가 가는 길을 확실히 알았다 했을 때 뭐가 생기느냐하면, 발심이 생겨서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마음이 확실히 생기는 거죠. 그게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하는 얘기죠.
그리고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 수행을 하고 수행을 하게 되면 이익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권고[勤修利益分]할 수도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하고 회향송(廻向頌)은 유통분에 속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들이 전체 내용이 어떻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음 시간부터는「대승기신론」의 핵심 되는 부분부터 설명을 하면서 여러분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대승기신론」소를 원효스님의 해동소를 봐야 되는가 하면, 그냥 원문만 보면 자기의 잘못된 견해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것을 원효스님의 글을 빌려가지고 바르게 가고자 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논 자체를 봐가지고는 자기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큰 도인스님의 글을 봄으로 해서 우리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거죠. 경전도 그냥 보는 거 보다 옛날에 깨친 분들의 주석서를 봐 가면서 경전을 봤을 때 그게 제대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논만 보는 게 아니고 논을 해석한 원효스님 글을 같이 공부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내용은 끝났습니다.
아까 체·상·용(體·相·用)에 대해서 질문을 하신 분이 계시는데 거기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체(體)는 본체라는 뜻입니다. 본체는 텅 비어 있고 변하지 않는 공(空)의 그 자리에요.
상(相)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모양을 얘기하고 용(用)은 그 작용을 얘기 합니다. 이 셋을 합하면 일심(一心)이고, 상(相)과 용(用), 둘은 변하지 않는 불공(不空)이라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금 한 덩어리가 있다면 모양은 바뀌더라도 금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 변하지 않는 부분을 체(體)라 그럽니다. 어떤 형상이 있으면 그 형상은 바뀌지만, 형상이 없다면 안 바뀌는 겁니다. 마치 허공이 텅 비어 있을 때는 생겼다 사라졌다하는 게 전혀 없듯이 우리 마음 자체도 텅 비어 있어서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부분이 없는 겁니다. 금으로 말하면 금의 빛깔이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러면 상(相)은 금덩어리를 반지로 만들 수 있고 귀걸이, 목걸이로 만들 수 있습니다. 체(體)라는 것은 자체 성품은 전혀 없지만 인연 따라서 언제든지 모양은 바꿀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바꿀 수 있는 속성을 상(相)이라 그러는 거죠. 아직까지 쓰임새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용(用)이라는 것은 금을 녹이고 모양을 만들어서 세공을 하면 실제로 쓰임새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것을 용(用)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쓰임새를 얘기 하는 거죠. 우리 마음은 텅 비어 있지만 인연을 만나게 되면 언제든지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전에도 얘기 했지만 인연을 만나서 결합 하게 되면 모양이 생기기면서 쓰임새가 나타나는 거죠.
그런데 하나 알아둬야 할 것은 상(相)이나 용(用)은 저렇게 쓰지만, 체(體)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반지, 귀걸이, 목걸이든 어떤 모양으로 변해도 금의 성품은 안 바뀌는 거죠. 우리 마음도 그와 같은 겁니다. 마음이 인연 따라서 여러 가지 생각이 일어나지만 우리 본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거죠. 사실은 텅 비어 있는 자리에서 모든 것은 변하는 겁니다. 실체가 없이 비어 있지 않으면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변하는 것 하고 변하지 않는 것 하고는 분리 되어있지 않고 하나에요. 그래서 체·상·용(體·相·用)을 그렇게 보시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변하는 부분은 상(相)·용(用)으로 보시고 변하지 않는 부분은 체(體)로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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