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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3강
지난번에는 삼대(三大) 가운데 용대(用大)와
대치사집(對治邪執)과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가운데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 공부할 내용은 해행발심(解行發心)과 증발심(證發心),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의 사신(四信)을 살펴보고,
다음에 오행(五行) 가운데 사행(四行)을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발심(發心)의 양태인 직심(直心), 심심(深心), 대비심(大悲心)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有三種 云何爲三 一者直心 正念眞如法故
부차신성취발심자 발하등심 약설유삼종 운하위삼 일자직심 정념진여법고
二者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이자심심 낙집일체제선행고 삼자대비심 욕발일체중생고고
[번역] 다시 마음에 신성취발심이란 어떠한 등의 마음을 내는 것인가?
간략히 말하면 세 까지가 있는데,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첫째, 직심(直心)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심심(深心)으로 일체 모든 선행을 기꺼이 모으기 때문이다.
셋째, 대비심(大悲心)으로 일체중생을 고통에서 빼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해설] 위에서는 발심(發心)을 하게 된 인연만을 밝혔고, 여기서는 발현한 마음의 모습을 직접 밝혔습니다. 신성취발심이란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진여의 이치로 향하는 마음에 다른 길이 없는 직심(直心)입니다. 왜냐하면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덕상을 빠짐없이 갖추고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심심(深心)입니다. 왜냐하면 심오한 마음으로 일체 모든 자리행의 근본적인 선행을 기꺼이 모으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광대하게 구제하여 그들이 보리열반을 얻게 하는 대비심(大悲心)입니다. 왜냐하면 대비의 마음으로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의 직심(直心)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는 것이요,
둘째의 심심(深心)은 의심이 없는 깊은 신심을 가지는 것이며,
셋째의 대비심(大悲心)은 부처님의 마음을 일으켜 일체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여 보리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타행의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리이타의 오묘한 수행이 광대하긴 하나
이상의 세 마음으로 총괄하여 수습할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였습니다.
問曰 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 何故不唯念眞如 復假求學諸善之行 答曰 譬如大摩尼寶
문왈 상설법계일상불체무이 하고불유념진여 부가구학제선지행 답왈 비여대마니보
體性明淨 而有鑛穢之垢 若人雖念寶性 不以方便種種磨治 終無得淨 如是衆生眞如之法
체성명정 이유광예지구 약인수념보성 불이방편종종마치 종무득정 여시중생진여지법
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染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修 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
체성공정 이유무량번뇌염구 약인수념진여 불이방편종종훈수 종무득정 이구무량변일
切法故 修一切善行 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체법고 수일체선행 이위대치 약인수행일체선법 자연귀순진여법고
[번역] <묻는다> 위에서, '법계가 일상(一相)이요, 부처의 본체는 둘이 없다'고 말했었다.
무엇 때문에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고 배움을 빌려야 하는가?
<답한다> 비유하면 마치 큰 마니주의 보배가 자체의 성품은 밝고 깨끗하지만 광석의 더러운 때가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써 문질러 관리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청정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진여법이란 자체의 성품은 공적하고 청정하지만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써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때가 한량이 없어서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닦아 이로써 대치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체 선법을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법으로 귀순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진여의 이치는 하나이나 번뇌의 미혹이 다르므로 모든 선행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문답으로 밝혔습니다.
즉, 법계가 일심의 진여인 한 모습이므로 본래 깨달음 자체인 진여의 본체는 법계와 상대적인 두 모습이 없다고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진여만을 올바로 염하지 않고 다시 모든 선행을 구하여 배워야 하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비유와 함께 그 이치를 답변하길, 먼저 큰 마니주의 보배가 자체의 성품은 밝고 깨끗하나 광석의 더러운 때가 있다면 마니보배의 밝고 청정함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처럼, 가령 어떤 사람이 마니보배의 밝고 깨끗한 성품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써 문질러 닦아 관리하지 않는다면 끝내 그 밝고 깨끗한 성품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생들의 진여법도 본체의 성품엔 번뇌가 공적하고 청정하지만 한량없는 번뇌에 오염된 때에 있기에, 가령 어떤 사람이 번뇌가 공적하여 청정한 진여법을 생각한다 해도 갖가지 방편으로 훈습하고 수행하지 않는다면 역시 청정함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뇌에 오염된 때가 한량이 없어 일체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의 선행을 닦는 수행으로써 대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밖으로 허망한 생각의 오염을 어기고 안으로 진여법을 따르는 일체의 선법을 수행한다면 자연히 진여법으로 귀순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번뇌에 오염된 일체법을 대치하기 위해 일체의 선행을 닦는 네 가지 방편을 논합니다.
3. 진여(眞如)에 귀순(歸順)하는 네 가지 방편(方便)
略說方便有四種 云何爲四 一者行根本方便 謂觀一切法自性無生 離於妄見 不住生死
약설방편유사종 운하위사 일자행근본방편 위관일체법자성무생 이어망견 부주생사
觀一切法因緣和合 業果不失 起於大悲修諸福德 攝化衆生 不住涅槃 以隨順法性無住故
관일체법인연화합 업과불실 기어대비수제복덕 섭화중생 부주열반 이수순법성무주고
[번역] 간략히 방편을 말하면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을 넷이라 하는가?
첫째, 수행의 근본방편이다.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이 무생(無生)임을 관찰하여 망견(妄見)을 여의고 생사에 안주하지 않는다.
일체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업과를 잃지 않음을 관찰하여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성(法性)의 무주(無住)를 수순(隨順)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앞에서 말했던 세 가지 발심을 의지한 모든 선행의 4가지 방편 가운데, 먼저 수행의 근본적인 방편을 논한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법의 자성은 생멸이 없다는 것을 관찰하여 나고 멸하는 허망한 견해를 여의고 생사의 업식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법은 원인과 조연이 화합하여 악업과 고과(苦果)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여 대비심을 일으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받아들이어 교화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여의 진리성은 본래 실제로 있지
않으므로 지금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생사는 본래 실제로 없지도 않으므로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기 위해 열반에도 안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여법성을 따라서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집착하여 안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여의 법성을 의지하여 수행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이 유익한 수행의 근본이 됩니다.
진여법성은 본래 생멸하는 현상이 없으므로 생멸하는 허망한 견해를 여의었습니다. 진여인 대지(大智)에 의지하여 번뇌를 끊었으므로 생사에 안주하지 않으며, 다시 일체법은 인연으로 화합하여 악업과 그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잃지 않는 것을 관찰하고 대비심을 의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면서 열반에도 안주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진여의 본성이 텅 빈 열반과 생사의 거짓 존재인 이 둘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않고 자리이타의 이로운 수행을 일제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에 집착하지 않고 실천하는 무주행(無住行)이라고 이름합니다. 진여법성은 본래 생사와 열반 어느 쪽에도 안주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진여인 법성을 따라서 이로운 수행을 닦는 것입니다.
二者能止方便 謂慙愧悔過 能止一切惡法 不令增長 以隨順法性離諸過故 三者發起善根
이자능지방편 위참괴회과 능지일체악법 불령증장 이수순법성이제과고 삼자발기선근
增長方便 謂勤供養禮三寶 讚歎隨喜勸請諸佛 以愛敬三寶 淳厚心故 信得增長 乃能志
증장방편 위근공양례삼보 찬탄수희권청제불 이애경삼보 순후심고 신득증장 내능지
求無上之道 又因佛法僧力所護故 能消業障 善根不退 以隨順法性 離痴障故
구무상지도 우인불법승력소호고 능소업장 선근불퇴 이수순법성 이치장고
[번역] 두 번째는 중지할 수 있는 방편이다.
이른바 참괴(慙愧)하고, 회과(悔過)하며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하여금
증장(增長)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성을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선근을 발기하여 증장하는 방편이다.
이른바 삼보를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제불을 찬탄하고 수희(隨喜)하며 권청(勸請)하는 것이다.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淳厚)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될 수 있다. 나아가서 뜻으로는 위없는 도를 구할 수 있으며,
또 불법승의 위신력에 보호받기 때문에 악업의 장애를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를 여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의 두 방편은 심심(深心)을 의지하여 악법을 그치는 지지문(止持門)과 선법을 일으키는 작지문(作持門)의 방편을 닦는 것입니다. 먼저 이미 일으켰던 악을 끊어서 계속되지 않게 하며, 아직 일으키지 않은 악은 일으키지 않고 중지할 수 있는 방편인 능지방편(能止方便)입니다. 이는 아직 짓지 않은 악을 부끄러워하고, 이미 지은 악법은 그 허물을 뉘우치고 일체의 악법을
중지하여 더욱 자라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여법성을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여의는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것을 지지문(止持門)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미 일으킨 선업은 닦아서 더욱 자라나게 하고, 아직 일으키지 않은 선업은 수행하고 선근을 발기하여 더욱 자라나게
하는 방편입니다. 이는 삼보에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찬탄하고 따라서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권청(勸請)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보를 사랑하면서도 공경하고 순수함이 두터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보를 믿는 마음이 더욱 자라나야만 위없는
도를 구하는 데에 뜻을 두게 되며, 또 불법승의 위신력에 보호받기 때문에 악업의 장애를 소멸하고 선근에서 물러나지 않아
진여의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음의 장애를 여의기 때문에 이것을 작지문(作持門)이라 하고, 이상이 자리행입니다.
참고로 "예배"는 어리석은 아만(我慢)의 장애를 여의고,
"찬탄"은 삼보를 훼방하는 어리석은 장애를 여의며,
"따라서 기뻐함"은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장애를 여의게 하는 것입니다.
四者大願平等方便 所謂發願 盡於未來 化度一切衆生 使無有餘 皆令究竟 無餘涅槃 以
사자대원평등방편 소위발원 진어미래 화도일체중생 사무유여 개령구경 무여열반 이
隨順法性 無斷絶故 法性廣大 遍一切衆生 平等無二 不念彼此 究竟寂滅故
수순법성 무단절고 법성광대 변일체중생 평등무이 불념피차 구경적멸고
[번역] 네 번째는 대원(大願)이 평등한 방편이다.
이른바 발원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하여금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성을 수순(隨順)하여 단절함이 없기 때문이며,
법성(法性)은 광대하여 일체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으므로 피차(彼此)를 생각하지 않고
구경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대원이 평등한 방편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대비심을 논하였습니다. 즉, 대원이 평등한 방편이란 먼저 미래제가 다하도록 시간을 초월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가 구경에 무여열반에 들게 하리라고 발원한 것입니다. 다음에 진여의 법성을 따라서 단절함이 없기 때문에, 법성은 광대하여 일체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어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끝내 번뇌가 사라진 적멸이기 때문에 공간을 초월해 중생을 구제하는 제일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비의 평등한 방편에 편승하면 비록 공간적으로 광대하고 시간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친 수행일지라도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자내증(自內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진여에 의지하는 네 가지 방편을 종합하면 근본방편은 수행의 근본방편이요, 자신을 이롭게 하는 방편은 능히 모든 번뇌를 중지하는 단덕(斷德)과 보리심을 발하여 선근을 증장하는 지덕(智德)이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방편은 대원이 평등하고 원만하여 시공을 초월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는 비덕(悲德)을 갖춘 것입니다. 이는 진여법성에 의지하여
직심(直心)과 심심(深心)·대비심(大悲心)을 닦아 단덕(斷德)·지덕(智德)·비덕(悲德)으로 승화시긴 원덕(圓德)이라 하겠습니다.
4. 발심(發心)의 이익
菩薩發是心故 則得少分見於法身 以見法身故 隨其願力 能現八種利益衆生 所謂從兜率
보살발시심고 즉득소분견어법신 이견법신고 수기원력 능현팔종이익중생 소위종도솔
天退 入胎 住胎 出胎 出家 成道 轉法輪 入於涅槃 然是菩薩未名法身 以其過去無量世
천퇴 입태 주태 출태 출가 성도 전법륜 입어열반 연시보살미명법신 이기과거무량세
來 有漏之業未能決斷 隨其所生 與微苦相應 亦非業繫 以有大願自在力故 如修多羅中
래 유루지업미능결단 수기소생 여미고상응 역비업계 이유대원자재력고 여수다라중
或說有退墮惡趣者 非其實退 但爲初學菩薩 未入正位 而懈怠者恐怖 令使勇猛故 又是
혹설유퇴타악취자 비기실퇴 단위초학보살 미입정위 이해태자공포 령사용맹고 우시
菩薩一發心後 遠離怯弱 畢竟不畏墮二乘地 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 勤苦離行 乃得涅槃
보살일발심후 원리겁약 필경부외타이승지 약문무량무변아승기겁 근고리행 내득열반
亦不怯弱 以信知一切法 從本已來 自涅槃故
역불겁약 이신지일체법 종본이래 자열반고
[번역]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하였기 때문에 곧 약간의 분야에서 법신을 볼 수 있다.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을 따라서 능히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이른바 도솔천으로부터 물러나 모태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다가 모태에서 출생하고,
출가하여 성도하고,
진리의 바퀴를 굴리다가 열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은 법신보살이라고 이름하진 못한다.
그는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 와서 유루의 업을 아직 결연히 끊지는 못하고
그가 태어날 곳을 따라서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긴 하지만 역시 업(業)에 얽매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대원의 자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저 수다라 가운데, "혹 어떤 이가 물러나 악한 세계로 떨어진다"라고 말한 것은 그것은 실제로 물러난 것이 아니고
초학의 보살이 아직 정위(正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해 두렵게 하여 하여금 용맹하게
하려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은 한번 발심한 후에 겁약함을 멀리 여의고 필경에 이승의 경지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만약 무량무변의 아승기겁토록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부지런히 고행해서 나아가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역시 겁약(怯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체법이 본래부터 저절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앞의 네 가지 방편을 종합하면서 석존의 팔상성도(八相成道)를 나타내어 보살이 실제로 수행하는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어 격려하고 찬탄하였습니다. 먼저 발심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십주위보살(十住位菩薩)은 진여법신을 추리로 관찰하는 비량관문(比量觀門)을 의지하기 때문에 약간의 수행분야에서 진여법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덟 가지 모습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십주위 가운데 초주보살은 팔상성도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팔상성도란 이른바 도솔천에서 내려와 모태에 들어가서 머물다가 출생하고 출가해서 성도(成道)하여 진리를 펴다가 열반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초주보살이 지상(地上)보살과 다른 것은 미세한 변역생사(變易生死, 보살이 일부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고 죽는 것)와 업을 따르는 분단생사(分段生死, 개인의 업력에 이끌려서 나고 죽는 것)의 괴로움이 있기 때문임을 간별하여 밝혔습니다. 이 초주보살은 아직은 진여법신을 증득하진 못하고 단지 십신(十信)을 성취한 힘에 의해서 약간의 수행분야에서만 진여를 보기 때문에 아직은 법신보살이라고 하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 오면서 지었던 유루의 업을 아직은 결연히 끊지를 못하여 태어날 곳을 따르는 이 점에서 법신보살과는 다르다 하겠습니다. 태어난 곳을 따라 변역생사와 업을 따르는 분단생사의 미세한 괴로움과 상응하긴 하지만 역시 혹업(惑業)에 얽매어 받는 중생들의 분단생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대원으로 수명의 길이를 자유자재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경전의 말씀은 방편교에 통한다는 것입니다. 즉 경전에서, "혹 이 보살이 수행에서 물러나 범부의 악한 세계로 떨어진다"라고 말한 경우는 {본업경(本業經)}에서, "십주위 가운데 칠주(七住)보살위의 이전을 수행지에서 퇴전하는 퇴분(退分)이라고 말한다. 칠주 이전의 수행지에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다면 가령 일 겁이나 내지는 십 겁을 지나는 동안에 보리심이 퇴전하여
악지식(惡知識)의 인연을 만나면 범부의 위치로 물러나 좋지 못한 세계로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방편으로 초학자들을
두렵게 하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도를 잘 이해하여 불교의 수행에 박차를 가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실제의 수행을 찬탄하였습니다. 또 이 보살은 한번 발심한 뒤로는 겁을 내는 나약함을 멀리 여의고 아래로 이승과 범부의 과보에 집착심을 내지 않기 때문에 필경에 이승의 경지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약 무량무변의 아승기겁토록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부지런히 고행해야만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위로는 보리열반에 있어서 부지런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모든 고행을 닦으면서 두려운 마음을 내지 않으므로 역시 겁내거나 나약해 하지 않습니다. 겁을 내지 않는 이유는
일체법이 원래부터 자성열반이어서 그것을 끝내 외부에서 얻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이 진여법신을 약간의 수행부분에서나마 보고 나면 일체법이 바로 심의식의 자성이므로 구경에 평등하여 구원겁이 현전하는 일념을 여의지 않았음을 즉시 압니다. 그리하여 일체법이 본래 자성열반임을 알기 때문에 겁내거나 나약하지 않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본업경}에서의 "범부지로 퇴전하여 떨어진다"한 말은 방편의 말씀이지 실교(實敎)가 아님을 나타내어
논한 것입니다.
5. 해행발심(解行發心)
解行發心者 當知轉勝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 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 於眞如法中 深
해행발심자 당지전승 이시보살종초정신이래 어제일아승기겁장욕만고 어진여법중 심
解現前 所修離相 以知法性體無 貧故 隨順修行檀波羅蜜 以知法性無染 離五欲過故
해현전 소수리상 이지법성체무간탐고 수순수행단바라밀 이지법성무염 이오욕과고
隨順修行尸波羅蜜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 隨順修行 提波羅蜜 以知法性無身心相 離
수순수행시바라밀 이지법성무고아진뇌고 수순수행찬제바라밀 이지법성무신심상 이
懈怠故 隨順修行毘黎耶波羅蜜 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 隨順修行禪波羅蜜 以知法性體
해태고 수순수행비리야바라밀 이지법성사정체무란고 수순수행선바라밀 이지법성체
明離無明故 隨順修行般若波羅蜜
명이무명고 수순수행반야바라밀
[번역] 해(解)와 행(行)의 발심이란
마땅히 더욱 수승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된다.
이 보살이 최초의 정신지(正信地)로부터 오면서 제1의 아승기겁에서 장차 (수행을) 원만하게 하고자하기 때문이다.
진여법 가운데서 깊이 아는 것이 앞에 나타나 수행하는 것과 그 모습을 여의었다. 법성의 자체는 아끼고 탐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단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오염이 없어 오욕의 허물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시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괴로움이 없어 성냄과 괴로움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찬제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의 모습이 없어 해태를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비리야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자체에 산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선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자체는 밝아 무명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해설] 여기에서는 십해와 십행이 원만하여 십회향에서 발심한 것을 밝히고 보다 수승한 이유를 밝혔습니다.
십해(十解)와 십행(十行)이 원만하여 십회향(十廻向)에서 발심한 자는
십신(十信)보살을 더욱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왜 더욱 능가하는가 하면 이 보살이 최초의 정신지(正信地)로부터
십지(十地)의 초지(初地)인 환희지(歡喜地)에 이르기까지 제1의 아승기겁의 수행을 원만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보살은 진여법 가운데서 분명하게 나타난 진여의 이치를 깊게 이해하여 수행하는 것과 그 모습에 대한 집착을 여읜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십신을 성취한 보살은 십신(十信)이 원만하여 십주(十住)로 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십주(十住) 다음의 십행(十行)이 원만하여 십회향(十廻向)으로 진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수승(殊勝)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앞의 보살계위에서는 자리이타의 행을 수행하긴 했으나
그래도 진여법신을 추리로 유추해서 아는 관행(觀行)을 실천하면서 진여의 이치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진여에서 다시 나와 세속으로 들어가회향하였기 때문에 더욱 수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더욱 수수한 까닭을 풀이합니다.
다음에 이 보살은 처음 정신(正信)인 초주(初住)로부터 십회향의 마음이
원만하게 성취된 데에 이르기까지 시간적으로
제1무앙수겁을 경유했다면 앞에서 일만겁을 수행했던 것을 능가하고,
차별적인 모습을 떠난 진여행을 닦는다면 앞의 보살이 십선으로 불상에 공양하고
스님을 공경하면서 모습에 집착하여 수행한 것을 능가합니다.
이 보살은 일체법이 심식(心識)에 상즉(相卽)한 자성임을 알아
다른 사람을 경유하지 않는 깨달음으로 지혜의 법신을 성취합니다.
그 때문에 분명히 앞에 나타난 수승한 진여의 모습을 깊게 알며,
진여인 법성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진여법성의 이치를 따라서 집착이 없는 수행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러한 해행발심보살의 수행은 집착하는 형태를 여읜 수행임을 밝혔습니다.
분명하게 나타난 법성의 자체엔 간탐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의 이치를 수순하여 보시(d na)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망상의 오염이 없어 오욕의 허물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지계( rla)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괴로움이 없어 성냄과 번뇌를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인욕(k anti)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身心)의 형태가 없어 해태를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정진(v rya)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 자체에 산란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선정(dhy na)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의 자체는 밝아 무명을 여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성을 수순하여 반야(praj )바라밀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범어로 빠라미따(P ramit )는 한역하면 도피안(到彼岸)이라고 합니다.
피안(彼岸)이란 구경의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이고 도(到)는 도달한다 또는 이른다·완성한다는 뜻입니다.
즉, 생사윤회하는 고통의 세계에서 깨달은 열반의 세계에 이르거나완성한다는 것입니다.
6. 증발심(證發心)
證發心者 從淨心地 乃至菩薩究竟地 證何境界 所謂眞如 以依轉識 說爲境界 而此證者
증발심자 종정심지 내지보살구경지 증하경계 소위진여 이의전식 설위경계 이차증자
無有境界 唯眞如智 名爲法身 是菩薩於一念頃 能至十方無餘世界 供養諸佛請轉法輪
무유경계 유진여지 명위법신 이보살어일념경 능지시방무여세계 공양제불청전법륜
唯爲開導利益衆生 不依文字 或示超地速成正覺 以爲怯弱衆生故 或說我於無量阿僧祇
유위개도이익중생 불의문자 혹시초지속성정각 이위겁약중생고 혹설아어무량아승기
劫 當成佛道 以爲懈慢衆生故 能示如是無數方便 不可思議 而實菩薩種性 根等 發心則
겁 당성불도 이위해만중생고 능시여시무수방편 불가사의 이실보살종성 근등 발심즉
等 所證亦等 無有超過之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 但隨衆生世界不同 所見所聞
등 소등역등 무유초과지법 이일체보살개경삼아승기겁고 단수중생세계부동 소견소문
根欲性異故 示所行亦有差別
근욕성이고 시소행역유차별
[번역] 증발심(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나아가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을 의지함으로써 설하여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여기의 증득이란 경계란 없고 오직 진여의 지혜일 뿐이므로 이름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이 보살은 일념 사이에 시방의 남김이 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진리의 바퀴를 굴리길 청한다. 오직 중생을 개도(開導)하여 이익되게 할뿐 문자를 의존하지 않는다. 혹은 경지를 초월하여 신속하게
정각을 이룸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겁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혹은 나는 무량아승기겁에서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능히 이와 같은 셀 수 없는 방편을 불가사의하게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보살의 종성(種性)과 근기가 평등하여 마음을 발하면 곧 평등하고, 증득할 것도 역시 평등하다.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은 없는데, 일체보살이 다 삼아승기겁을 경유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세계가 동일하지 않는 것을 따라서 보는 것과 듣는 것은 근(根)·욕(欲)·성(性)이 다르기 때문에 수행할 것을 나타내는 것도 역시 차별이 있는 것이다.
[해설] 앞의 해행발심은 아직 진여의 법신을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여기 증발심은 진여법신을 증득한 초지의 정심지로부터 보살의 마지막 경지인 십지만심(十地滿心)에 이르기까지 법신보살이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하면 진여(眞如)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식(轉識)을 의지하기 때문에 진여를 증오할 경계라고 설명하긴 하였으나 실제로 증득한 대상의 경계란 없고 진여의 이치를 근본지로 증득하여 진여와 근본지가 평등한 것을 다만 법신이란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즉, 앞서의 삼현(三賢)보살은 진여법성을 따라서 수행하긴 하였으나 그들은 진여의 이치를 직접 증득하진 못하였고 단지 비량(比量)으로 추리하여 관찰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경지에선 무명을 아직 타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여를 실제로 증득하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지의 법신보살들은 정심지에 깨달아 들어가면서 무명의 허망한 생각의 분별인 두 가지 장애를 이미 여의고 진여가 환하게 나타나 일심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를 진여의 이치를 실제로 증득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발심"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진여의 위대한 작용이 발현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진여의 수승한 작용에 방편과 실지의 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보살은 일념 사이에 시방세계에 남김없이 도달하여 그 모든 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솔선하여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설법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오직 중생을 개발하여 인도하여 이익을 주는 설법은 하지만 언어문자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여를 실제로 증오했다면 시방법계가 평등한 일법계의 모습으로 환하게 나타나 목전에 있는 듯하여 자타의 몸의 형상이 마치 거울과 거울의 광채가 서로 장애없이 하나로 교차하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념에 제망찰토(帝網刹土)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을 섬기고 설법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중생이 진여의 이치로 평등하여 자타의 두 모습이 없음을 봅니다. 그 때문에 일체중생에게 이익을 줄뿐입니다. 그가 하는 설법은 한결같은 진여의 자체에서 불가사의한 업지의 작용이 발현하여 업지인 권지(權智)와 그 자체인 실지(實智)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다음에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어서 진여와 그가 지닌 덕상과 작용에 의지하여 권지(權智)와 실지(實智)의 수행을 나타내었습니다. 우선 권지(權智)의 수행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혹은 점진적인 수행경지를 단박에 초월하여 신속하게 정각을 이루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불도는 장원(長遠)하여 장구한 세월을 부지런히 고행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 겁을 내는 나약한 중생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혹은나는 무량아승기겁을 수행하여야만 불도를 성취하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불과(佛果)를 용이하게 여기는
중생들이게으름과 교만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셀 수 없는 불가사의한 방편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살의 종자인 종성(種性)과 오근(五根)은
일승종성(一乘種性)인 상근(上根)과 평등하며,
보리심을 발하여 두 가지 이로운 행을 수행하는 것도 평등하며,
증득한 이공(二空)의 이치도 역시 평등합니다.
이를 초월해서 능가할 만한 법은 없는데,
왜냐하면 일체보살이 모두가 삼아승기겁의 수행을 경유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중생과 그들이 의지한 세계가 동일하지 아니함을 따라서 보고 듣는 데에 있어서도
근기(根機)와 욕구(欲求)와 종성(種性)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보살이 나타낸 수행도 역시 차별이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7. 발심(發心)의 양상
又是菩薩發心相者 有三種心微細之相 云何爲三 一者眞心 無分別故 二者方便心 自然
우시보살발심상자 유삼종심미세지상 운하위삼 일자진심 무분별고 이자방편심 자연
遍行利益衆生故 三者業識心 微細起滅故
변행이익중생고 삼자업식심 미세기멸고
[번역] 또한 이 보살이 발심한 양상에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양상이 있는데,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진심(眞心)으로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방편심(方便心)으로 자연스럽게 두루 수행하여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업식심(業識心)으로 미세하게 기멸(起滅)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지상(地上)의 법신보살이 권지와 실지의 작용이 있긴 해도 아직은 구경의 극치에 이르진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와 동일하지 않음을 밝혔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의문을 일으키길, "위에서 말한 대로 보살에 이와 같은 진여의 덕성과 작용이 있다면 어찌 부처의 경지와 동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보살은 세 가지 미세하게 발심한 마음의 양상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은 부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진심으로 발심한 양상인데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근본실지인 여리지(如理智)이고, 둘째 "방편으로 발심한 양상"은 방편권지인 여량지(如量智)이며, 세 번째 "업식심"은 미세하게 생멸하는 심상입니다. 이것은 이 보살이 권지와 실지가 있긴 하나 아직은 근본무명 업식심인 이숙식(異孰識)이 공적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미세하게 생멸하는 마음의 양상이 있기 때문에 이 점이 부처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8. 증발심(證發心)의 공덕성만(功德成滿)한 양태
又是菩薩功德成滿 於色究竟處 示一切世間最高大身 謂以一念相應慧 無明頓盡 名一切
우시보살공덕성만 어색구경처 시일체세간최고대신 위이일념상응혜 무명돈진 명일체
種智 自然而有不思議業 能現十方利益衆生
종지 자연이유부사의업 능현시방이익중생
[번역] 또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어서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일체 세간의 가장 큰 몸을 시현한다.
이른바 일념(一念)이 상응한 지혜로써 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업(業)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해설] 여기에서는 구경의 과덕을 밝혔습니다. 즉, 이 보살의 수행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면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의 가장 큰 몸을 낸다는 자수용신(自受用身)입니다. 이는 이른바 일념(一念)이 서로 호응하는 지혜 즉 시각(始覺)이 일심의 근원에
이르러 본각(本覺)과 서로 호응하는 지혜로 근본무명이 단박에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자연히 불가사의한 지혜의 작용이 있어 시방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유익하게 할 수 있기에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수행의 인지가 끝까지 다하고 과덕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을 논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구경처천에서
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나타내어 정각을 성취합니다. 이로써 현보(現報)인 자수용보신(自受用報身)의 이익을 나타내어
불과위(佛果位)를 수용하기 때문이며, 후보(後報)인 타수용신(他受用身)을 나타내어 중생을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근본무명업식이 다한 자는 자연스럽게 불가사의한 지혜작용이 있어 일체종지를 성취한다고 한 것에 해당하겠습니다.
여기서 "색구경처천"은 색계 최고 정상의 하늘인 유정천(有頂天)입니다.
부처님마다 모두 이 하늘의 연화궁(蓮華宮)에 앉아서 가장 높고 큰 몸을
나타내시고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성취한 몸은 자수용보신불입니다.
問曰 虛空無邊故世界無邊 世界無邊故衆生無邊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 如是境
문왈 허공무변고세계무변 세계무변고중생무변 중생무변고심행차별역부무변 여시경
界不可分齊 難知難解 若無明斷 無有心想 云何能了名一切種智 答曰 一切境界本來一
계불가분제 난지난해 약무명단 무유심상 운하능료명일체종지 답왈 일체경계본래일
心 離於想念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 以妄起想念不稱法性故 不能決了 諸佛如來
심 이어상념 이중생망견경계고 심유분제 이망기상념불칭법성고 불능결료 제불여래
離於見想無所不遍 心眞實故 是諸法之性 自體顯照一切妄法 有大智用 無量方便 隨諸
이어견상무소불변 심진실고 시제법지성 자체현조일체망법 유대지용 무량방편 수제
衆生所應得解 皆能開示種種法義 是故得名一切種智
중생소응득해 개능개시종종법의 시고득명일체종지
[번역] <묻는다>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끝이 없으며,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작용하는 차별도 또한 다시 끝이 없다.
이와 같은 경계는 한계 지을 수가 없기에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
만일 무명이 끊어지면 심상(心想)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요해할 수 있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이름하는가?"
<답한다> "일체의 경계가 본래 일심으로 상념(想念)을 여의었다.
중생은 망상으로 경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계가 있게 되었다.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법성(法性)에 칭합(稱合)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단하여 요해하지 못하지만,
제불여래는 허망한 견해의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다. 마음이 진실이기 때문에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이다. 자체가 일체 허망한 제법을 나타내어 비춘다. 커다란 지혜의 작용은 한량없는
방편이 있어서 모든 중생이 응하는 것을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갖가지 법의 의미를 열어 보여준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라는 이름할 수 있다."
[해설] 여기에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개념과 작용을 문답을 통해 확실하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일체종지란
모든 사물의 공통성과 개별성 즉, 허공과 그 안에 있는 세계, 그 속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심념(心念)의 수를 끝까지 낱낱이 다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허공과 세계가 갓이 없기 때문에 중생도 갓이 없으며, 그들의 심의식(心意識)이 진행하는 차별의 모습도 또한 갓이 없어서 이러한 끝없는 세계는 참으로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이 근본무명을 다하여 일체종지가 현전하다면 절대로 망상심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분별로 아는 망상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들을 낱낱이 알 수 있고, 일체종지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는 범부의 사유가 있는 허망한 생각으로써 불가사의한 진여(眞如)의 세계를 헤아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에서, 허망한 생각을 여읜 일심의 세계는 시각(始覺)을 통해서 본각(本覺)을 증오해야만 상응하고 심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체종지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끝없는 일체의 세계가 본래 일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일심진여의 세계는 망상으로 분별하는 허망한 생각을 여의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끝없는 세계를
한계가 있는 망상의 견해로 보기 때문에 마음의 분야를 나누어 한계가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허망하게 상념을 일으킴으로써
진여법성에 걸맞게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밝게 통달하지 못하지만, 제불여래는 허망한 견해의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두루 보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처님의 마음은 일심의 진실을 체득하여 본각(本覺)이 시각(始覺)과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일심이 모든 법의 본성입니다. 제법자체인 이 일심이 일체 허망하게 생멸하는 제법을 환하게 비춥니다. 그러나 그 자체엔 위대한 지혜의 작용인 한량없는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을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감응하면서 모두에게 갖가지 법의 의미를 열어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일체종지라는 하였습니다.
又 問曰 若諸佛有自然業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 一切衆生 若見其身 若覩神變 若聞其
우 문왈 약제불유자연업 능현일체처이익중생자 일체중생 약견기신 약도신변 약문기
說 無不得利 云何世間多不能見 答曰 諸佛如來 法身平等遍一切處 無有作意故 而說自
설 무불득리 운하세간다불능견 답왈 제불여래 법신평등변일체처 무유작의고 이설자
然 但依衆生心現 衆生心者猶如於鏡 鏡若有垢色像不現 如是衆生心 若有垢法身不現故
연 단의중생심현 중생심자유여어경 경약유구색상불현 여시중생심 약유구법신불현고
[번역] 또 묻기를, "만일 모든 부처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일체의 처소에 시현하시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분이라면,
일체 중생이 혹 그 몸을 보거나 혹 신통변화를 보거나 혹 그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세간에는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가?
" 답하길, "제불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일체처에 두루하지만 작의(作意)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연하다고 말하지만 단지 중생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날 뿐이다. 중생의 마음이란 마치 저 거울과도 같아서 거울에 만일 때가 끼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에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모든 부처님은 어디든지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이 도처에 나타나 중생을 유익하게 한다면 제불여래인 진여법신의 위대한 작용인 보신과 화신은 항상 여여하지만 단지 중생이 처한 상황에 밝음과 어두움이 있을 뿐임을 문답으로 밝혔습니다. 즉, 모든 부처님은 무위의 작용으로 법계에 충만하게 나타나 중생을 이롭게 함에 일체중생이 혹 그 몸을 보거나 혹 신통변화를 목격하거나 혹은 그 설법을 들으면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 어찌하여 많은 중생들이 보지 못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제불여래의 법신은 평등하여 일체의 처소에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어느 곳은 비추고 비추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중생의 심의식에 여래의 법신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더러운 때가 끼어 무명의 어두움이 가려졌을 뿐입니다. 그 때문에 보지 못할지언정 그것이 부처님의 허물은 아닌 것입니다. 비유하면 마치 태양이 언제나 밝게 빛나지만 맹인이 보지 못하는 것처럼 거울에 때가 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문제를 {화엄경}에서,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심을 비유한다면 마치 햇빛이 대지를 두루 비추면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보지만, 유독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봉사는 보지 못한다. 봉사가 비록 햇빛을 보지 못한다고 하지만 역시 따스한 햇빛의 혜택을 받는다"라고 설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의도한 것은 여래를 뵙고 못 뵙는 책임은 중생이 처해있는 개별적인 상황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그것은 마치 거울과 같을 뿐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이상은 앞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의 문장에서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간 중생이 법을 의지해 수행하는 모습을 밝혀 바른 종취(宗趣)를 결론짓고, 십신(十信)을 수행하여 십해(十解)를 성취한 의도로써 대(大)와 승(乘)의 의미를 밝혔었습니다. 다음 문장에서 다시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설명하게 된 것은 특별히 정정취에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위하여 신심을 열어 보여주고 올바른 신행(信行)을 발기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설명이 끝난 대승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는 의미를 밝힌 것입니다.
제4장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已說解釋分 次說修行信心分 是中依未入正定衆生故 說修行信心
이설해석분 차설수행신심분 시중의미입정정중생고 설주행신심
[번역] 이미 해석분의 설명하였고 다음으론 수행신심분을 설명할 것이다.
이 가운데 아직 정정취로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다.
[해설] 수행신심분이 해석분의 다음에 오게 된 의도는 위에서 입의분에 수립했던 대승의 정의를 해석함으로써 대승의 올바른 의미를 밝혔고, 여기 수행신심분에서는 해석된 대승에 대한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발기하여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앞의 두 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 가운데 수행한 신심이 아직 십신(十信)에 가득 차지 못한 하열한 근기자가 그 발심이 결단적이지를 못하여 이승에 떨어질까 염려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의 편에 의지하여 신심을 수행하는 방편을 설하고 그가 큰 신심을 일으켜 정정취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여튼 해석분의 설명이 이미 끝났고 여기서 수행신심분을 설명합니다. 이종(二種)의 부정취(不定聚) 중생들 가운데 수행의 신심이 아직 원만하지 못하여 정정취로 아직 들어가지 못한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의지하기 때문에 수행신심분을 설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공부는 믿음으로 시작됨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수행의 바탕이 되면서 도를 성취하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 결정적인 믿음을 가질 때에 바로 불교공부에 들어선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에 대해 여기에서는 앞의 문장을 결론짓고 뒷 문장의 단서를 달았습니다.
1. 사신(四信)
何等信心 云何修行 略說信心 有四種 云何爲四 一者信根本 所謂樂念眞如法故 二者信
하등신심 운하수행 약설신심 유사종 운하위사 일자신근본 소위락념진여법고 이자신
佛有無量功德 常念親近供養恭敬 發起善根 願求一切智故 三者信法有大利益 常念修行
불유무량공덕 상념친근공양공경 발기선근 원구일체지고 삼자신법유대이익 상념수행
諸波羅蜜故 四者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 常樂親近諸菩薩衆 求學如實行故
제바라밀고 사자신승능정수행자리이타 상락친근제보살중 구학여실행고
[번역] 어떤 것들이 신심이고, 어떻게 수행인가?
간략히 신심을 말한다면 네 가지가 있는데, 무엇을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다. 이른바 진여법을 즐겨 염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부처님에겐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항상 친근해서 공양하고 공경하길 염하면서 선근을 발기하여 일체지 구하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스님은 능히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행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항상 즐거이 모든 보살대중을 친근해서 여실(如實)한 수행을 구하여 배우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신심과 수행이 무엇인가를 문답하면서 근본인 진여법에 대한 신심까지 논하였습니다. 신심을 간략히 말한다면 네 가지인데, 첫째는 우주 만물과 모든 수행의 근원인 진여법을 믿을 뿐만 아니라 진여법을 즐겨 염하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처님에겐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가까이 하고 공양을 올리고 공경을 하면서 선근을 발기하여 일체지를 구하고 모든 선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부처님이 증득하신 진여의 공덕을 말한 교법에 큰 이익이 있다는 것을 믿으므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길 염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스님들이 올바른 수행을 하면서 자기도 이롭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믿음으로 자리이타의 올바른 수행을 항상 즐기면서 모든 보살들을 친근히 하고 진여 실제의 수행을 배우길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의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에서 네 가지의 수행방편을 설명하여 수행해 나아가고 닦아 증득하는 것을 빠짐없이 밝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어떤 신심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일으킨 자는 삼심(三心)과 네 가지 방편행(方便行)을 설하여 진여에 대한 신심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바로 진취하여 진여를 수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근기가 하열한 중생은 번뇌의 장애가 지중하여 반드시 많은 종류의 방편을 빌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종신심(四種信心)과 오종방편문(五種方便門)을 설하여 그들을 길들이고 대치하는 방편을 삼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오종방편문으로 하열한 이들을 인도하여 포섭하는 것이지 중복된 설명은 아닙니다.
그리고 진여로써 신심과 모든 수행의 근본을 삼기 때문에 먼저 그것을 즐겨 염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두 가지 부정취(不定聚) 중생들 가운데서 신심의 수행이 십신에 원만한 수승한 근기의 중생은 이미 진여법을 믿었으므로 단지 "곧은 마음으로 진여법을 올바로 염한다"고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십신의 수행이 아직 원만하지 못한 하열한 근기의 부정취중생은 대승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아직 발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즐겨 염한다"고 하였습니다.
위에서 진여법을 믿고 즐겼던 것은 내인(內因)의 훈습이 수승한 것이며, 여기에서 삼보에 대한 신심은 외연(外緣)의 자훈(資熏)이 수승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인훈과 외연자훈을 함께 수승하기 때문에 항상 즐기고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생각에 잊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인과 외연이 교대로 훈습하기 때문에 사종신심을 신속하게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앞에서 이승의 경지로 퇴전하여 떨어진 자는 내인과 외연이 함께 하열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논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말법시대에 수행을 하면서 이 내인과 외연을 버린다면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낼 수는 없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수행의 주체인 자기의 굳은 믿음과 물러나지 않는 수행, 그리고 부처님과 보살님의 자비로운 도움이 함께 어우러져 수행을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제1 시문(施門)
修行有五門 能成此信 云何爲五 一者施門 二者戒門 三者忍門 四者進門 五者止觀門
수행유오문 능성차신 운하위오 일자시문 이자계문 삼자인문 사자진문 오자지관문
云何修行施門 若見一切來求索者 所有財物 隨力施與 以自捨 貧 令彼歡喜 若見厄難
운하수행시문 약견일체래구색자 소유재물 수력시여 이자사간탐 영피환희 약견액난
恐怖危逼 隨己堪任施與無畏 若有衆生來求法者 隨己能解方便爲說 不應貪求名利恭敬
공포위핍 수기감임시여무외 약유중생래구법자 수기능해방편위설 불응탐구명리공경
唯念自利利他 廻向菩提故
유념자리이타 회향보리고
[번역] 수행에는 다섯 가지 문이 있어서 능히 이 신심(信心)을 성취할 수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보시문(布施門)이고,
두 번째는 지계문(持戒門)이며,
세 번째는 인욕문(忍辱門)이고,
네 번째는 정진문(精進門)이며,
다섯 번째는 지관문(止觀門)이다.
어떻게 보시문(布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중생이 찾아와서 찾아 구하는 이를 보거든 소유한 재물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베풀어주고 자신의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그를 환희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액난(厄難)과 공포와 위태로운 핍박을 보거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주어야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이 찾아와서 법을 구하는 자가 있거든 자기가 아는 것을 따라서 방편을 해설하지만, 마땅히 명예와 이익과 공경을 탐구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리이타(自利利他)만을 생각하여 보리(菩提)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신심을 성취할 수 있는 육바라밀을 오바라밀로 설명하고 다음에 보시바라밀을 설명하였습니다. 즉, 수행하는 데는 다섯 가지 방편문이 있는데, 이는 앞에서 논한 네 가지 신심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천방편입니다. 이러한 방편문은
첫 번째는 보시(布施),
두 번째는 지계(持戒),
세 번째는 인욕(忍辱),
네 번째는 정진(精進),
다섯 번째는 지관(止觀)입니다.
이상은 앞의 네 가지 신심 모두가 대승을 발기하는 내적인 요인이라면,
이 다섯 가지 방편문을 닦는 것은 내적인 요인을 도와 성취시키는 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믿음과 실천은 서로 서로 기대되는 것으로 믿음이 있어도 실천이 없다면 신심이 확고해지지 못합니다.
여기서 다섯 가지를 들어 실천을 말하였는데,
이는 육바라밀 가운데 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통합하여 지관(止觀)바라밀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止)는 선정(禪定)을 의미하고,
관(觀)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교수행의 가장 요체가 되는 방편으로
지관(止觀) 또는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본론의 주제 즉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
사신(四信)·
오행(五行)을
일목요연하게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다음에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보살이 중생을 유익하게 하려면 세 가지 보시인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를 평등하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만일 일체중생이 찾아와서 찾아 구하는 이를 보거든 소유한 재물을 자기의 능력을 따라서 베풀어주고 자신의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버림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재시(財施)라는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또 삼륜(三輪)이 청정(淸淨)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삼륜(三輪)이란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이 청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정(淸淨)이란 일체의 모든 존재가 텅 비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즉, 모든 행위를 하되 그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마음입니다.
다음에 가령 어떤 중생이 찾아와서 법을 구하는 자가 있거든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을 따라서 설법을 해주되 명예와 이익과 공경을 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며 그 공덕을 보리로 회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법시(施法)는 궁극적으로 최상의 완전한 깨달음의 실현입니다. 끝으로 가령 액운의 어려움을 당하여 공포심을 느끼며 위태롭게
핍박을 당하는 경우를 보거든 자기가 감당할 만한 능력을 따라서 두려움을 없애주어야 한다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무아(無我)의 실현이요, 공(空)의 실현을 말합니다.
제2 계문(戒門)
云何修行戒門 所謂不殺 不盜 不 不兩舌 不惡口 不妄言 不綺語 遠離貪嫉欺詐諂曲
운하수행계문 소위불살 불도 불음 불양설 불악구 불망언 불기어 원리탐질기사첨곡
瞋 邪見 若出家者爲折伏煩惱故 亦應遠離 鬧 常處寂靜 修習少欲知足頭陀等行 乃至
진에사견 약출가자위절복번뇌고 역응원리궤페 상처적정 수습소욕지족두타등행 내지
小罪心生怖畏 慙愧改悔 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 當護譏嫌 不令衆生妄起過罪故
소죄심생포외 참괴개회 부득경어여래소제금계 당호기혐 불령중생망기과죄고
[번역] 어떻게 지계문을 수행하는가?
이른바 살생하지 않음, 도둑질하지 않음,
음행하지 않음과 두 말 하지 않음,
헐뜯는 말하지 않음, 꾸미는 말하지 않음,
허망한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다.
탐욕·질투·속임수·아첨·성냄·사견(邪見)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
만일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조복(調伏)받아야 하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심난하고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곳에
거처하면서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해 할 줄 아는 두타(頭陀) 등의
수행을 수습해야 한다. 나아가서는 적은 죄라 할지라도 마음에 공포와
두려움을 내어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며 고치고 후회하여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계(禁戒)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나무라거나혐의를 보호해야 하며,
중생들로 하여금 허망하게 허물과 죄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계를 지키는 양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계율에는 많은 품목과 종류가 있지만 그 모든 계율을 삼취정계(三聚淨戒)로 포섭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계(持戒)의 방편문을 수행한다고 하는가? 이른바 살생하지 않음·도둑질하지 않음·음행하지 않는 몸의 삼업(三業)과 두 말 하지 않음·헐뜯는 말하지 않음·거짓말하지 않음·꾸미는 말하지 않는 입의 사업(四業)과 탐욕·질투·속임수·아첨·성내는 마음·오종사견(五種邪見)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는 것이 섭율의계(攝律儀戒)입니다.
그리고 가령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조복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심난하고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항상 고요한 곳에 거처하면서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해 할 줄 아는 두타(頭陀) 등등의 수행을 수습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서는 적은 죄라 할지라도 공포스런 두려운 마음을 내어 아직 짓지 않은 악은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고, 이미 지은 악업은 고치고 후회하여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계(禁戒)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섭선법계(攝善法戒)입니다. 이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상대방이 나무라거나 혐의를 가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중생들이 나의 잘못 때문에 비방하는 허물과 죄를 허망하게 일으키게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섭중생계(攝衆生戒)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취정계란 섭율의계(攝律儀戒)와 섭선법계(攝善法戒)와 섭중생계(攝衆生戒)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불살생(不殺生) 등은 세 가지 악업(惡業)을 끊는 섭율의계이며, 욕심을 적게 하고 만족해 할 줄 아는 것은 번뇌를 꺾어 조복 받는 섭선법계이며,
작은 죄라도 두려운 마음을 내고 상대방의 중생들이 비방하며 혐의하지 않도록 보호하여 그들이 나로 인해 삼보(三寶)의 교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은 섭중생계입니다.
즉 스스로 계율을 보호하여 중생들이 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섭중생계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보리심(菩提心)을 항상 가지고 팔정도(八正道)와육바라밀·사섭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3 인문(忍門)
云何修行忍門 所謂應忍他人之惱 心不懷報 亦當忍於利衰毁譽稱譏苦樂等法故
운하수행인문 소위응이타인지뇌 심불외보 역당인어리쇠훼예칭기고락등법고
[번역] 어떻게 인욕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이른바 마땅히 다른 사람이 뇌란시키는 것을 참고 마음으로 보복할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이익과 쇠잔함과 훼방함과 찬탄함과 칭찬함과 나무람과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도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서는 인욕(忍辱)하는 방편문을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 대하는 세계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이 있는데,
이 모두를 참고 견디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을 인욕하는 방편문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다른 사람이 뇌란(惱亂)시키는 것을 참고 그에 대해 보복할 마음도 품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재물과 영화로
자기를 윤택하게 하는 이익과 자기를 손해보게 하고 쇠잔(衰殘)하게 하는 일과 허물의 실제를 과장해서 훼방하는 일과 지닌
덕보다 지나치게 찬탄하는 일과 실제의 덕을 의지해서 칭찬하는 것과 실제의 허물을 의지해서 나무라는 일과 형체를
핍박하는 괴로움과 신심에 알맞아 희열을 느끼는 즐거움 등의 법도 참아야만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심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는 것을 참는 것은 참기 어려운 역경이며, 이익·쇠잔 등 여덟 가지는 역경과 순경 어느 쪽에도 다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재물을 얻는 것을 이익, 재물을 잃는 것을 쇠잔, 다른 사람의 악함에 공격하는 것을 훼방이라고 하고, 자기의 착한 점에 담론하는 것을 찬탄이라 하며,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착한 점을 드날리는 것을 칭찬이라고 하고, 말로써 그의 악한 점을 풍자하는 것을 나무란다고 하며, 자기의 육신을 핍박함이 괴로움이고, 자기의 의식에 알맞은 것을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역경과 순경을 합하여 모두 팔풍(八風)이라고 합니다. 이 팔풍의 경계가 중생의 마음바다를 얽어매어 탐하고, 성내며 어리석어 번뇌의 파랑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참을 수 있다면 팔풍의 역순경계를 따라서 일심이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忍)에 세 종류가 있는데 생인(生忍)·무생인(無生忍)·적멸인(寂滅忍)입니다.
즉, 중생이 역순의 경계를 참아야 하는 것이 생인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남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생인이고,
사선(四禪)·팔정(八定)·구차제정(九次第定)의 수행에서 얻어진 열반이 적멸인입니다.
제4 진문(進門)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
운하수행진문 소위어제선사 심불해퇴 입지견강 원리겁약 당념과거구원이래 허수일
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
체신심대고 무유이익 시고응근수제공덕 자리이다 속리중고 부차약인수수행신심 이
從先世來 多有重罪惡業障故 爲魔邪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
종선세래 다유중죄악업장고 위마사제귀지소뇌란 혹위세간사무종종견전 혹위병고소
惱 有如是等衆多障碍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禮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廻向菩
뇌 유여시등중다장애 시고응당용맹정근 주야육시례제불 성심참회 권청수희 회향보
提 當不休廢 得免諸障善根增長故
리 당불휴페 득면제장선근증장고
[번역] 어떻게 정진문을 닦아야 하는가?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있어서 마음에 게을러서 물러나지 않고 입지를 굳고 강하게 하여 멀리 겁약함을 여의는 것이다.
마땅히 과거 구원한 시간 이래로 일체 신심의 큰 고통을 부질없이 받아들이면서 이익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면서 모든 괴로움을 신속히 여의어야만 한다. 다시 다음에
만약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을 수행하긴 하나 먼저 세상으로부터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사악한 마군과 귀신의 뇌란을 당한다. 혹은 세간의 사무에 갖가지로 이끌려 얽매이기도 하며, 혹은 병고에 뇌란을
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등등의 여러 가지 많은 장애가 있으므로 응당 용맹하게 부지런히 정진하여 밤낮 육시(六時)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성심으로 참회하고 권청하며 따라서 기뻐하고 보리에 회향하여 마땅히 쉬거나 폐지하지
않아야만 한다. 모든 장애를 면하고 선근이 더욱 자라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설] 여기에서는 정진하는 수행의 모습을 밝혔습니다.
우선 착한 마음이 해이하지 않고 입지를 굳세고 강하게 함으로써 정진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이러한 정진의 방편문을 어떻게 닦아야 하느냐 하면 모든 착한 일에 있어서 마음에 게으름을 피우며 물러나지 않고 부지런하고 용맹하게 정진하는 의지를 굳세고 강하게 하여 겁을 내거나 나약함을 멀리 여의어 무너뜨리기 어려운 정진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은 과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체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부질없이 받아들이면서 이익이 없었다는 만족함이 없는 정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면서 모든 괴로움을 신속히 여의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신심을 수행하긴 하지만 오랜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거운 죄와 악업의 번뇌장이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마군과 귀신에게 뇌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업이 두터워 세간의 사무에 갖가지로 이끌려 얽매이기도 하며, 혹은 병고에 뇌란을 당하기도 하는 등등의 여러 가지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응당 용맹하게 부지런히 정진하여 밤낮으로 육시(六時)에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성심을 다해 참회하여 악업의 장애를 제거하고, 권청하여 불법을
비방하는 장애를 제거하고, 다른 사람의 착한 점을 본 따라서 기뻐하여 질투하는 장애를 제거하고, 구경에 보리로 회향하여
삼유(三有)를 즐기는 장애를 제거하되 항상 쉬거나 폐지하지 않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상의 정진을 통하여
모든 장애를 면하고 선근이 더욱 자라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의 다음부터는 구원겁 이래로 신심의 괴로움을 부질없이 받았던 것을 사유하고 정진하도록 경책하여 선근을 닦는 데 있어서 피로의 마음을 냄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번뇌의 장애와 죄없이 무거운 중생의 근기를 대치하기 위하여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제시하였습니다. 또 "예불"은 세간에서 가장 수승한 분에게 귀의하여 부처님 위신력의 가호를 청한 것인데, 이는 장애를 제거하는 총체적인 방편의 양태입니다.
즉, "성심"의 다음부터는 네 가지 장애를 따로따로 제거한 양태입니다.
첫째 "참회"는 악업의 장애를 제거함이며,
둘째 법문을 청하는 "권청"은 법을 비방하는 장애를 제거함이며,
셋째 남의 착한 공덕을 따라서 기뻐하는 "수희"는 상대방의 훌륭한 점을 질투하는 장애를 제거함이며,
넷째 이상의 정진에서 얻은 모든 공덕을 "보리로 회향함"은 삼계(三界)의 이십오유(二十五有)를 즐기는 장애를 제거한 것이며,
"쉬거나 폐지하지 않음"은 이상의 장애를 대치하는 주관을 총체적으로 결론지었고,
"모든 장애를 면한다"함은 대치해야 할 대상인 장애를 총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장애 때문에 수행인이 선행을 발기하지 못하여 보리도로 향해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장애를 끝까지 다스리면 선근이 더욱 자라납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