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선생님
오창혁
이 년 여전, 삶을 글로 남겨두고 싶다는 충동이 슬쩍 들었다. 퇴직으로 시간적 여유가 많이 생겨서일 수도 있고 세상을 떠날 날이 조금 더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훈련된 두뇌와 어린 시절에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글을 쓰려고 하면 역주행하는 운전자처럼 불안해지는 나 자신을 알기에 선뜻 시작할 수 없었다.
나는 수십 년을 수학과 통계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복잡한 것을 요약하는 일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수필 쓰기와 같이 정반대 방향으로 진행되는 일은 시작하기도 전에 갑갑해진다.
나는 산골 초등학교 6학년 때, 군 교육청 주최 글짓기 대회의 학교 대표로 뽑힌 적이 있다. 선발되고 나서 혼자서 나름 글도 쓰고 지도도 받았다. 담당 선생님은 “많이 써 봐라”라고, 아버지는 “잘해 봐라”고 하셨다.
대횟날, 주제는 ‘어머니’였다. 자신있게 써 내려갔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시고, 어쩌고, 저쩌고 ....” 얼마 뒤에 발표된 입상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교무실에 갔는데, 지도 선생님은 옆자리 선생님을 보며 “어머니는 좋은 분, 뭐 그렇게 썼으니까 떨어졌겠지”라고 하셨다. 그 이후 나는 글쓰기와는 멀찍이 떨어져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구청 도서관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수필 교실 안내문을 보았다. 접수를 시작하는 날이었고, 정원이 삼십 명이나 되었다. 인기 좋은 수업일 거라는 생각에 휴대폰을 꺼내 접수하고 수강료를 납부하였다. 날쌔게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등록하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 수업에서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먼저 퇴직한 교수로부터 들은 경험담 때문이었다. 선배는 퇴직 후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문화강좌를 하나 들었는데, 인사 시간에 교수였다고 자기소개를 한 후 한 사람이 적대적으로 대하는 통에 아주 힘들었다고 하였다.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지도편달 습관이 생기기 쉽고 이것이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자신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몇 마디를 나눈 상인으로부터 “혹시 선생님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고 택시를 타고 가며 이야기를 나눈 기사가 경찰이었는지를 물은 적도 있다.
내가 하는 별 의미 없는 말과 행동이 함께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상상되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가 고민되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은 없으니 조심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기로 다짐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관찰하고 배우자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당분간 신분을 감추기로 했다. 어차피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는 이름이니 알게 될 때까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수업 첫째 날이 되었다. 용기를 내느라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시작 시간보다 조금 늦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교실은 여자 수강생들로 가득하고 경륜이 있어 보이는 여자 강사님이 반가워하였다. 남자 한 명이 왔다가 나가버려서 아쉬웠는데, 대신할 남자가 와서 참 좋다는 것이다. 남자라는 이유로 환영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둘러보니 서너 명의 남자가 눈에 띈다. 덕분에 어떻게든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해 중단되었던 수업이 계속되고 수강생들의 소개 시간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서 발표하라고 한다. 삼행시? 시도해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럽기는 하였지만 대충 하나 생각해 놨다.
수강생들이 한 명씩 나가 삼행시를 발표하고 자신을 소개한다. 짧게도 하고 아주 짧게도 했다. 어쩌다 나이를 말하지 않으면 몇 학년 몇 반인지를 물어본다. 육학년 일반도 있고 칠 학년 구 반도 있고 사학년 오 반도 있다. 나이를 스스럼없이 묻고 답하는 '이상한' 세상이 이상했다.
나의 차례가 되었다. 관심의 눈빛을 느끼며 엉거주춤 앞으로 나갔다. 먼저 삼행시를 발표했다. “오 - 오늘, 창 - 창작 교실에 왔다. 혁 - 혁명이다.” 그리고는 자서전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 배우러 왔다는 것만 말하고는 급히 자리로 되돌아오는데, 선생님이 등 뒤에서 몇 학년 몇 반인지 묻는다. 순간적으로 “비밀입니다”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선생님의 표정은 굳어지고 교실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이후 서너 주 동안의 수업에서 매주 글쓰기 숙제가 나왔다. 그리고 선생님은 단톡방 대화,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수필 홍보 행사, 선생님의 전원주택 방문과 같은 과외 활동 많이 참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행사에 수강생들이 참여하면서 그들 사이가 친밀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활동에 하나도 참여하지 않고,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말없이 선생님과 수강생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숙제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관찰만 하는 나에 대하여 선생님의 불편 지수가 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던 어느 날, 선생님이 오래전에 있었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같이 활동하던 작가 한 분이 문인 행사에서 반정부적이라고 여겨지는 발언을 한 후 정보기관에 잡혀가서 여러 날 동안 나오지도 못하고 심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나 보다 하고 흘려들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중에 번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기관의 정보원? 집에 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곧 잘릴 것 같아요.”
그다음 주 수업에 갔다. 둘째 시간이 시작하자 출석을 부르면서 내 이름을 부른다. ‘예’라고 대답하니 묵직한 직구가 날아온다. “공무원입니까?” “아닙니다. 왜요?” “워낙에 점잖아서요.” “신입생이라 눈치 살피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감시원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리고는 수십 명의 여인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여자 회원분, 뭣들 하세요. 오 선생님과 이야기도 나누고 해서 잘 어울리게 만드세요.” 그러고는 나에게는 스타카토로 말끝을 올리며 말했다. ‘다음 주에는 숙제해 오세요!’ 얼떨결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작전 지시가 내려진 이후 여자 몇 분은 인사도 해주고 말도 붙여주며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인사를 해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남자 수강생들은 별 변화가 없었다. 그중 한 분은 팔십 근처이고, 두 분은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많은 것 같았다.
숙제는 매주 나왔다. 주제를 정해주고 글을 써서 선생님의 다음카페에 제출하는 것이었다. 주제는 수업 중에 지명된 수강생이 정했다. 보통 대여섯 명이 제출한 숙제를 프린트해서 나누어주고 선생님이 읽어가며 지도하였다.
나는 처음 한 달 동안 숙제를 하나도 제출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첫째 주부터 잘해 보려고 애는 썼다. 첫째 주의 주제는 단풍이었다. 메이플 시럽을 ‘풍당’이라고 번역하여 정한 제목이 그럴듯하여 글도 잘 써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신분 노출 없이, 핫케이크에 메이플 시럽을 부어 맛있게 먹었다는 것만으로는 글이 되질 않았다. ‘썼다가는 지우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풍당에 빠져 풍덩거리고 있었다.
다섯 번째 주의 수업에 참석했다. 첫 시간 수업을 시작하면서 선생님은 나를 부르더니 다음 주 숙제의 글 주제를 정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고참 수강생에게나 부탁하던 주제 정하기가 나에게 떨어졌다.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은근히 좋았고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님’, ‘열심’ 등 몇 개를 정해 놓았다.
둘째 시간은 선생님이 그 며칠 전 할로윈데이에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혹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글 쓰는 사람은 이런 큰일에 대하여도 글을 써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다가 나보고 주제를 정했느냐고 묻기에 “몇 개를 정했었는데 방금 바꾸었습니다.”, “어떻게요?”, “할로윈데이입니다.”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네요.” 수강생들의 웃음과 칭찬에 가슴이 따뜻해지며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선생님이 지시한 ‘떼 미인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오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거나 ‘오 선생님’을 예로 들었다. 특별히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은 부담이 되었으나 희소한 남자이며 적응을 잘못하는 남자 수강생을 잘 어울려 지내도록 애써 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다른 수강생도 이해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한 번은 수업 중에 주제와 글제, 소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선생님에게 물어보았다. 몇 번의 질문과 답이 오가는 중에 시인으로 등단한 남자분이 끼어들었다. 교재에 있는 내용인데 왜 읽어보지도 않았느냐고 질책하였다.
집에 와서 다시 책을 살펴보니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몇 시간 고민하다가 수필반 단톡방에다가 글을 올렸다. ‘x 선생님, 책에는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x 선생님에게 질문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나서서 비난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는 집에서 뭉그적거리다 수업에 결석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이후에는 그 사람은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남아있던 남자 수강생들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남자는 한 번 붙어 싸워야 친해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첫 번째 분기가 끝나고 그다음에도 세 번을 더 등록하여 일 년을 다녔다. 그동안에 두 사람의 ‘교수’를 만났다.
한 분은 내가 등록하기 전부터 다니던 여자분으로 딱 봐도 교수의 포스가 느껴지던 분이었다. 다음카페에 제출한 숙제를 찾아보니 교수로서의 삶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한 여자 수강생과 수필에 관해 작은 토론을 한 뒤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한 분은 세 번째 분기에 처음 등록한 남자분이었다. 첫째 날 자기소개 시간에 편안한 모습으로 길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더 설명해 주겠다고도 하였다. 교직에 근무했을 확률이 매우 높은 분이었다. 그리고는 몇 주 뒤에 사라졌다. ‘교수’가 떠날 때마다 나는 혜분난비의 심정으로 다시 한번 나 자신을 살펴보았다.
일 년이 지나고 나서 더 이상 등록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카페의 정원에서 일행과 함께 지나가던 선생님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하고 아내에게 소개하였다. “이분이 호박 선생님이셔.” 아내와 이야기할 때 호박 그림이 표지인 선생님의 수필집을 '호박 수필'이라고 부르던 습관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선생님은 당황하더니 아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재바르게' 사라져 버렸다.
일 년 동안 나는 강의와 수필을 통해 선생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선생님은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나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을 것이니 내가 먼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필 강좌를 일 년 들은 후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째는 하나의 주제를 긴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일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그라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단톡방에 말없이 머물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선생님의 다음카페를 방문한다. 그 카페에는 나처럼 떠나지 못하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이 이백 명은 되는 것 같다.(2024년 하지)
첫댓글 교수님께서 정년 이후 새 '선생'을 만나는 모습이 '사진'을 보듯이 치밀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교수였음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과 타 교육경력자들을 진단해내는 경험은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상이기도 하지요? 제가 정년을 얼마 앞둔 때 어느 선배 교수님이, "정년을 하면 내가 언제 교수였느냐 라는 마음으로 사세요."라고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새로운 아이로 살아가라는 충고로 받아들였습니다. 전혀 다른 새 소재로 깨우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편, 교수님의 새 선생님의 Teaching skill이 평가받을 만한가 봅니다. - 평소 지니셨던 소질이 드러난 것이겠지만. 글이 무척 정교합니다. 교수님의 '자서전'을 기다리겠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글 부담' 드렸는데, 털어내심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호박 선생님께 힘들게 배운 작문 실력이 '호박 선생님'이란 주제의 수필로 찬란한 무지개 🌈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최고❣️🤩
靑於藍
졸글에 대해 김정숙 편집위원장님, 강용호 교수님, 박종갑교수님께서 과찬을 하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휼륭하신 글들 옆에 못생긴 돌삐 하나 갖다 두는 형국이라 죄송스런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