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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발전은 불가피하게 대결을 낳았다
I. 역사적 묘사의 본분=Bounden Obligations
1. 역사의 불가피한 요건
지금 전개하려는 것은 객관적 진리를 위하여 마지못해서 행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 우리 교회 역사와 진리의 본분을 연구함에 있어서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 제시한다. 우리가 이미 나타낸 바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인용한 좋은 사람들이지만 초월적인 ‘그리스도의 신성’의 두 분명한 영역에 대해서는 진리의 부분적 견해밖에 갖지 못하고 십자가의 행위에 뗄 수 없이 연결된 ‘속죄’의 큰 범주에 관해서도 부분적 견해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이 주장하던 어떤 옹졸한 견해들이 있었다.
이런 견해들을 지지하는 자들은 헌신적이고 정직하고 충실한 자들이었다.-그러나 이런 사상에는 잘못된 자들이었다. 다른 진리들-세째 천사의 기별을 특수 교리들-에 관해서는 저들은 강력한 탑이었다. 그러나 이 두 분야에 있어서의 저들의 견해는 지울 수 없는 기록을 남겨 놓았다.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고 이 영원한 진리들에 관해서 결국은 연합의 더 행복한 수여자가 된 것이다. 여기에 배경이 되는 사실이 있다.
처음에는 이 반 Arian적 사상을 그렇게 믿는 자들의 개인적 견해로서 취급했다. 그러나 조만간 이 사상은 그것을 옹호자들이 공공연하게 옹호하는 자로서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더 이상 가만히 임의대로 놓아 둘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를 하위의 위치에 두기 시작했다.-근원에서 파생된 하나의 그리스도를 더 낮은 위치에 두었다. 그 때 저들은 유감스럽게도 이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Arian 파 교회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생각해야 되고 말해야 하고 연합에 이르러야 할 지점까지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문제를 결정하지 않은 것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서 명백히 알아야 할 기본 원칙이 있다. 그것은 이것이다. 어떤 교리적 가르침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혹은 공동으로 승인하고 받아들여서 확실히 채택되기까지는 한 교파적인 견해라고 할 수 없다. 그때까지는 재림 신앙의 시험하는 진리라고 부를 수 없다.
2. 소수의 견해의 주요한 설계자
무리 대열 중에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에 관한 옹졸한 Arian 견해를 제창한 두 형제가 있었는데 속죄의 큰 범위에 관한 축소된 견해를 가졌다. 이 두 진리에 관한 이 견해들은 서로 연관된 것 같았다.
거치른 New England 사람 Uriah Smith와 완강한 중서부 사람 Joseph. H. Waggorn가 우리 대열 안에 있는 Arian 주의의 뛰어난 옹호자였다. 우리는 저들이 이 중대한 분야에 대하여 가르친 것을 잘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저들이 선포한 견해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피할 수 없는 1888년의 논쟁과 그 불가피한 여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제시한 것을 솔직히 연구함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판적인 시대 위험중에서 하나님의 크신, 위로 앞으로 부르심에 응답으로 연합에 이르게 된 운동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손을 볼 수 있다.
Ⅱ. 수세기간 내려온 Arianism(아리안 주의) 논쟁의 의의
우리가 옛부터 내려오는 Arian 논쟁 속에 포함된 근본적 사상을 합당히 이해하려면 그 논쟁의 의미와 역사적 배경과 우리 교회가 일어날 때 여러 종교단체에서 강력한 현실이 된 이 문제의 기원을 이해함이 필요하다. 우리만이 그 문제에 부딪치지는 않았다.(우리 교회만 홀로 당면했던 문제가 아니었다) 흔히 망각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4세기로 돌아가는 아리안주의 논쟁
역사적으로 Arian 논쟁은 4세기 첫 몇십년간에 그리스도의 신성의 충만함의 문제에 관해서 초대교회에서 신학적 위기가 발생했던 때로 돌아간다. 종속주의의 논쟁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흔들렸고 결과로 생긴 불확실함과 혼돈을 이제 당면케 되었다. 가장 단순한 말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들은 피조물이며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최고의 의미에서 신이 아니다. 한편은 그는 피조되지 않았고 영원하고 참으로 하나님이요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다. 그러나 개성(인격)에 있어서 아버지의 것과 구별된다는 것이다”(Albert H. Newman, 저 교회 역사의 요람, 1권 p. 325, 단순한 말로 인용함).
2. Arian 사상의 골자
Arian 논쟁은 거의 1세기간 계속되었고 초대 교회의 정력을 부당하게 소모하게 하여 기독교의 전체를 갈라놓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곧 이 Arian 견해는 아들을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본질 혹은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다르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그는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스스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더 나아가서 저들의 좋아하는 상투어는 “그(아들)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그는 유한한 존재요 무한하지 않고 영원부터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보다 먼저 낳았다 혹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주가 창조되었고 통치된다는 것 모든 피조물보다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존재인고로 경배를 받아야 하고 사람의 구속주로서 경배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점에서 저들은 그를 사랑한다.
3. 근본적인 차이가 나게 된다
반대편의 Athanasian파는 아들에 관한 여하한 종류의 근본적 종속 혹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억설(가설)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들은 역사적인 그리스도께 절대적 신성을 주장했다. Athanasian은 하나님을 불변이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지 않거나 하나 되지 않은 때가 결코 없었다. 저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은 영원한 구별이다. 왜냐하면 아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저들은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본성 혹은 존재양태)에 있어서 동일하다고 집요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아들은 본질적인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창조는 아들의 역사로 인식하고 그러나 아버지의(신성) 권위 밑에 있었기 때문에 창조한 것이 아니다.
4. 동일한 본질; 다른 개성
역사적으로 Athanasius(死 373) Alexandria의 감독은 아버지와 동등한 본질과 꼭 같은 아들의 개성을 강조했다. Athanasius에서는 아들은 아버지의 단지 하나의 속성이 아니요,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 이상이요 확실히 인격적 존재라고 했다. 그러므로 Athanasiuis는 두개의 교의와 교리적 의미를 매우 분명히 제시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의 동일성, 인격의 차이의 의미를 매우 분명히 제시했다.
5. 반 Arian주의의 완화
Nicene 총회에서 반 Arian파 혹은 Eusebia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을 부인하도록 준비되지 않았다. 저들은 Athanasius와 꼭 같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반 Arian파는 아들이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견해를 거부하고 그리고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도 부인했다. 동시에 저들은 전반적인 Arian의 견해 즉 아들은 피조물-다른 만물이 창조되거나 낳았다는 의미와 같이 창조되거나 낳았다는 의미-이라는 견해를 거부했다. 반 Arian주의는 아들은 만물 전에 계셨고 그러나 영원히 선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저들에게는 그리스도는 만세전부터 하나님 중의 하나님이었으나 모든 영원부터 계시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들은 Athanasian의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주장을 부인했고 본질에 있어서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논쟁은 낱말이나 정의 이상을 의미했다. Nicene 회의의 주 목적은 이 Arian 논쟁을 해결하는 것이었고 Arian의 해석을 공적으로 정치하고 Athanasian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6. 시작이 있었다면 끝이 있을 것이다
Auguetus H. Strong에 의하면 Arius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절대적으로 시작이 없는 유일한 신성한 존재이다. 아들과 성령은 세상이 있기 전에 무에서 창조를 받았으며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창조와 재창조를 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다음 계열에 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는 신령한 능력을 부여받았으므로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는 존재이다”(조직신학, 1907 1권 pp. 328, 329).
하나의 창조 받은 하나님(시작이 있는 한 하나님)은 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다. 그리고 한때 없었던 본질을 가진 하나의 하나님-그러므로 아버지의 본질과 다른-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요 사실은 유한한 피조물이다. Arius는 아들은 영원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동등하게 영원하거나 동일한 본질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하나님 다음의 존재, 맏아들, 가장 사랑하는 아들-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존재로서 존재하게 되었다(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유한이었다.
7. 다른 종류(양식)의 아들: ‘피조된’ 성령
Arianism은 이리하여 아들은 ‘동일한 본질’은 아니나 신의 본질과 피조물의 본질 사이의 중간본질이다(Charles Hodge 저, “조직신학, 1권 p. 456).
그러므로 아들은 다만 신분이나 존재 양태뿐만 아니라 본질에 있어도 아버지에게 종속(복종)이다. 그는 존재의 다른 양식에 속한다(상동). 이것이 그 모든 것의 주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아리안 주의는 아들은 아버지보다 하급이지만 그러나 모든 다른 보수의 근원이요 창조하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Arians파에 의하면 성령은 그 아들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창조물중의 첫째요 최고의 존재로서 성령을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상동). 이것 역시 그 논점 중에 중대한 점이다.
그것은 우리 앞에 주요한 차이점이요 곤란한 점을 낳는다. 그런데 우리 선조시대의 대부분의 소위 Arian의 견해를 주장한 자들은 반 Arian 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차이점은 깊고 진지했다.
Ⅲ. Stephenson의 책은 Arian 논쟁을 일으키다
1854년에 출판물 형태로서 우리 계열에서 아리안 주의의 최초의 제창자로서 James M. Stephenson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뛰어나거나 대표적인 특성 때문이 아니다.(Stephenson은 일요일 재림교 목사였는데 짧은 기간 동안 우리 교회에 속했다가 ‘속죄’라는 책을 출판하여 문제 일으키고 율법 무용, 자유주의 부르짖고 신실한 부인 버리고 젊은 부인 데리고 안식일 포기하고 일요일 재림교로 갔다가 출교 당하고 가난한 집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다) 교회에 항구적인 공헌이나 어떤 구조상의 공을 한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 중에 잠간 있으면서 불행한 특성의 문을 열었다.-그리고 비참한 결과의 문을 열었다. 1854년에 불안정한 아리안 주의의 인쇄된 개요의 재료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실제로 1844년에 우리 교회가 시작된 후 만 10년 후였다. 그러나 그것은 1863년에 대총회가 조직되기 9년 전이었다. 다른 면에서 시간에 대해 좀더 주목해 보자. 1854년은 1848년의 안식일 회의가 있은 지 6년 후였다. 이 때(안식일 회)에는 주로 성소, 안식일, 사람의 본성, 재림이 가까움 등을 취급했고 그리스도의 본성이나 개성 그리고 신성의 다른 인격은 취급지 않았다. 1854년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닫힌 문’ 각이라고 말하듯이 과도기 중간이었다. 많은 점들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었다. 우리는 아직 교회명이나 조직도 채택하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Stephenson’s의 책은 교파적인 선포나 위촉이 아니었다(공약, 위엄, 언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1854년의 Stephenson의 개인적인 견해였다. 이것은 그의 제시에 부당한 중요성을 가하지 않을 만큼 이해할 필요가 있다. Stephenson이 어떻게 어디에서 Arian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는 우리는 모른다. 그는 1848년에 같은 명칭 ‘The Atorkoment’라는 책을 쓴(출판한) Joseph H. Waggoner에 의하여 Wisconsin에서 회심한 자였다. 그 책은 결정적인 Arian적인 의견이다. Stephenson이 Waggoner에게서 그 사상을 받았는지 그 정반대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Stephenson은 곧 기록될 Henry Grew를 강하게 의지했다. 1853년에 Rochester에서 Review직원에 가담한 Uriah Smith가 1854년에 Stephenson의 책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 길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다음 10년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1860년대에 나타나지 않고 1850년대에 나타났을 것이다)
Ⅳ. Stephenson은 ‘피조된’ 그리스도에 대해서 논쟁하다
1. 그리스도가 동등하게 영원하고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함
딤전 6: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를 주석하는 중에 Stephenson은 Arian의 입장을 취했다.-“오직 아버지만이 스스로 계시다. 스스로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아들에게 스스로 생명을 소유할 권한을 주셨다. 그분은 그가 오실 때 그의 것을 저들에게 주신다”(that he should give it to them that are his at his coming)(J. M. Stephenson, 저 The Atonement, p. 50(요 5:26, 27)을 그의 성육신인 생명과 연결시킨다.)
Stephenson은 부가해서 말하기를 선재가 단순히 생각해서 그의 영원한 아들됨을 증명하지는 못한다.(p. 127) 그렇지만 그는 “그는 다른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시다”(pp. 122, 123). 그가 솔직히 고백하기를 이것은 ‘Arian의 가설’이라고 했다(p. 127). 정확하게 그가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 그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과 천사들 위에 참으로 높임을 받는다. 그는 확실히 온 우주에서 오직 아버지 외에는 가장 위엄 있고 높으신 존재요 신령하시고 불멸이시다”라고 했다. 그러나 Stephenson은 그 때 그리스도가 자존하시고 영원하신가 혹은 그의 최고의 본성과 성품에 있어서 그는 시작이 있고 결과적으로 시작한 날이 있는가 라는 문제를 제기했다(pp. 127, 128). 그의 답변에서 그는 담대히 문자대로 주장했다.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같이 꼭 같이 늙었다(오래 되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낱말의 모순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꼭 같이 젊다는 것이나 아들이 아버지와 꼭 같이 늙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연하다”(상동, 28).
2. 그리스도의 존재의 영원성을 부인함
Stephenson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시에 존재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했다(p. 128). “아버지는 아들보다 먼저 존재함이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그는 “영원하신 아들이라는 사상은 자체 모순이다”라고 부언했다(p. 129). 다시 “그는 반드시 시작을 가졌다. 한 근원을 가졌다”(시작이 있다. 근원이 있다) pp. 130, 131고 했다.
Stephenson은 아버지만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불멸이시다. 그만이 자존하시고 결과적으로 아무리 높거나 낮거나 간에 다른 모든 존재는 생명과 존재를 위하여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고 주장했다(p. 131). 그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파생된 생명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창조물 중에 맏아들이라고(골 1:15) 선포된 고로, 그는 솔직한 말로 주석 한다. “피조물은 피조를 의미한다. 그런즉 모든 피조물 중에 맏아들인고로 그는 피조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의 생명과 불멸성은 천사들이나 구속받은 사람들과 꼭 같이 아버지의 뜻에 달려 있지 않으면 안된다”(상동 p. 133). 그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의 생명은 받은 것이므로 그의 생명은 단지 파생적인 생명이다. 물론 그것은 직통 Arian주의이다.
3. 남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Stephenson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 근원, 성육신에 대하여 취한 입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당할 것이다(p. 187). 그것은 많은 안식일 지키는 재림신도들은 Arian 파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와 절대적으로 동등한 존재요 최고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라는 사상의 글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다. Stephenson은 자기주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좀 알려진 Henry Grew의 그리스도의 아들 됨에 관한 소책자에서 확신을 가지고 인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위엄과 영광의 적당한 칭호로 영광을 받을지라도 그는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최고의 칭호 다음으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구별된다(하나님의 아들의 본질과 특성에 관한 신령한 증언의 검토, p. 47).
4. 그리스도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거부(부인)함
Stephenson은 그의 논쟁을 지지하기 위하여 Grew에게서 좀더 인용하기를 Grew의 자칭 성서적인 견해와 삼위일체론과 서로 대결시키고 불멸설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권세는 파생된 혹은 받은 권세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는 자존 자가 아니라고 부인했다(상동, pp. 188, 189). 그는 그리스도는 父의 아들로서만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p. 189). 그는 그리스도는 본질에 있어서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임을 부인함으로 결말지었다.
골 2:9에 관해서 말하면서-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그것은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는 말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를 지우려고 애썼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를 제2차적인 지위로 떨어뜨렸다(p. 190). Stephenson은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먼저 나신자(골 1:15)이며-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계명에 의한 것(요 10:!8)이라고 그의 논쟁을 반복함으로 결론을 지었다. 이상은 Stephenson의 대담한 1854년의 견해였다. 그것은 불행한 진술이었다.
Ⅴ. Henry Grew는 Stephenson의 불안전한 안내자
1. Grew의 신빙성
시험한 안내자로서의-그리스도에 관서 Arian파의 입장을 공공연하게 취한 아들에 관한 Grew의 논문에 무거운 신뢰를 Stephenson이 둔 것은-Stephenson은 권위로서 Grew의 논설의 두 page나 인용한 것을 보면-과연 성서학자로서 Grew의 신빙성에 과한 문제가 제기된다.
Henry Grew(1781-1862)는 영국에서 회중교인 양친하게 출생하여 침례 교인이 되어 Connecticut Hartford의 제일 침례교회 목사로서 4년간(1807-11) 봉직했다. 그는 매우 적극적인 신념의 사람으로서 그의 초기 목회기간 중에 호전적인 논쟁가였다. 그는 약 17개의 소책자 설교, 연설(강연), 논문 등의 저자였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본성- 그리고 안식일 반대, 죽은 자의 잠, 악인의 멸망들을 취급했다. 이것들은 모두 이상한 잡동사니로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Grew의 71page 소책자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과 특성은 4판-1824, 1841, 1850, 1855 되었고 그것은 Grew의 호전적, 축소된 파생된 그리스도에 대한 Arian의 견해를 피력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1825년에 Elias Lee에게 예리한 공격을 당했고 Grew는 1825년에 답변했는데 1826년에 제 2판이 나왔다. 그는 또한 1826년과 1829년에 Masonism(비밀공제조합)을 공격했다. 그는 또한 Phelps의 안식일의 영원성에 대하여 공격했고-이것이 4판 되었다. 1838, 1844, 1850년에-
Grew는 1826년에 Philadelphia주 Bank Street교회에 관한 확대 비평을 썼다. (그 교회의 처리와 훈련에 대한 비평- 그 교회의 Rhee에 의해 출판된 Review에 나온 것인데-Grew에 의해 보조 답변함-그것이 그의 기질이었다. 그러므로 1824-1830년는 Grew의 비평적 문예 활동의 전성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이 동안에 Grew는 두개의 도움이 되는 12 page 소책자를 냈다.-하나는 The intermediate State(중간상태) 또 하나는 ‘미래의 징벌은 고난 중에 영원한 생명이 아니요 멸망이다. Edward C. Starr, 저 한 침례교인 생애?(Rochestor Am, Baptist Hist, Socy, 1964). Grew가 이리하여 조건적 불멸설을 강조하여 George Storrs와 Charles Fitch를 설복시켰지만-그리고 이리하여 재림 신도인 우리 교회 초기 조건적 불멸설의 견해를 확고히 했지만 그는 역시 호전적 Arian주의자였다.
2. 진리가 오류와 섞임
Grew는 논쟁적 성격이었다. Grew의 출판물 Reasous(이성)로 인하여 그의 교인 중 다수가 탈퇴했다. 이 논쟁은 그로 은퇴하게 했고-실제로 그의 출교(추방)-그의 Hartford 침례교 목사직에서 1811년에 추방당함. 역사가 J. Hamrmond Jrumeull은 그 Grew에 대하여 기록하게 했다. “열렬하고 헌신적이나 괴상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공중 예배에서 찬양할 권리가 없다고 했다. 그는 한 때 Village Street에 있는 한 집 밖에서 대머리로 서서 어떤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고로 그 집안에 있기를 거절했다. 그날의 심한 장면 후 그는 1811년에 그 교회에서 추방되었다. 여러 양심적인 완고한 언행과 유별난 것 때문에(Hartford 마을의 기념 역사, p. 401).
3. 논쟁은 이탈하게 만듬
Hartford의 제일 침례교회 목사들의 연속적인 출판된 묘사 중 Grew에 관하여 이런 구절이 있다.
“1807년에 R. I. Prondence의 Henry Grew경이 Hartford Biptist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Mr. Grew의 목회는 처음에는 매우 수용적이며 유용했다. Mr. Grewis도 그러나 그 교회와 의견과 관습이 달라서 공동회의 충고에도 그의 관계가 해결할 수 없어서 4, 5년 목회후에 그만두다 Robert Jurnbull, 제일 침례교회의 기록부, Hortford, Conn, Hartford, 교회출판, 1857, p. 25 Centennial Memorial of the Firet Baptist Churah, 1890, pp. 192-194)
4. 결국은 정직당하고 사퇴함
그 다음 이성에서 Hertford에 있는 침례교회로부터 상당수의 신자들이 탈퇴에 대한 이유(1824)라는 책에서 Grew는 1811년에 그가 탈퇴하게 된 교회 회중들과의 그의 논쟁에 대하여 말한다.-그의 이야기에 의하여 그러나 그 교회 서기의 증언에 의하면(1811. 9. 20) “당신을 난포한 긴자로 생각하여 우리는 당신과 친교를 끊는다.”(p. 15). 그리고 그 회의(12명 신자로 구성된)의 행동은 그것을 선언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그가 설교하는 것이나 행정 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고 그가 그의 형제들과 불화하기를 계속하는 동안 어떤 교회가 그를 말씀을 설교하고 복음의 의식을 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p. 11).
Grew는 출교와 같은 행동에 관하여 두번 언급했다(pp. 15, 17). 그는 저들이 그를 “교회의 평화와 조화를 해치는 사람이요 복음을 설교할 권리도 없고 주의 집의 의식을 집행할 권리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고 했다(부언)(p. 17). Harford 침례교회에서 이 긴장한 상태와 위기는 Ariam 그리스도 사상을 강조하는 성경해석자라는 사실을 Grew의 신빙성과 견실성을 평가함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5. 같은 시대에 널리 퍼진 Arian’s와의 투쟁
1844년 이후 약 10년간 ‘예수의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본성에 관한 우리 선조들이 탐구하기 시작할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그 당시의 많은 선동적인 유세가 있었다. 이것은 침례교, 장로교와 그타 다른 교파에도 포함된다. 이 견해가 잠깐 통과한 Abraham의 신앙, 하나님의 교회(첫째날 재림교)에도 역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과 재림 연합-밀러운동 이후에 생긴 다른 분파의 특성이 되었다. 재림 기독교 단체의 Miles Grant와 John A. Cargyle도 역시 그렇게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우리 교회 선구자를 어떤 이들의 초기의 투쟁적인 견해는 이해할 만하여 아마 그런 배경의 빛 중에서 볼때 불가피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성미급한 Grew는 우리 중에 1854년에 Stephenson에 의하여 인쇄 형태는 Arianism이 주입된 데 대한 분명한 원인이 된다.
Ⅵ. Uriah Smith- 편집자, 성경 교사, GC 서기(대총회 서기)
1. 50년간(반세기)의 편집자인 Uriah Smith
우리 교회의 유명한 편집국장 저자, 교사인 Uriah Smith는(1832-1903) William Miller가 그의 시대적인 성공적 생애를 시작하고 있을 때 Granite State에서 출생했다. Uriah는 1844년 실망시에 12세 소년이었다. 그 이후 8년 후에 1852년에 안식일 지키는 재림신도가 되었다. 그 이듬해 그가 겨우 19세에 “때와 예언의 경고의 음성”이라는 제목의 3500단어의 시를 썼다(지었다). 이것은 Review지에 연속으로 출판되었다(연재로). Smith는 우리 교회의 시련 많은 출판소와 관련을 맺으려고 매력적인 교수 직책을 거절하고 1855년(23세)에 R & H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는 1874년(32세)에 안수 받았다.
그의 Review 편집사무는 1903년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1869년 J. N. Andrews가 편집자로 봉사한 해인 1869년을 제외하고 그러나 1870년에 Smith는 Review 직원에 재 연합하여 James White을 보좌했다. 1897-1901년까지 A. T. Jones가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잠시 그 일(편집)을 쉬었다. Smith의 이름은 편집자 명단에 두번째 나타난다. 그는 1895년에 Syria에서 중병을 앓았다. 그러나 그는 교파의 기록에 1853년 3월에 시작하여 Review지의 편집자의 자격으로 48년간 봉사했다. 그는 뛰어나게 유능했다.
2. 강인한 성격, 적극적 사상
Michigam 대회가 1861년에 대회로 조직되었을 때 Smith는 첫 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대총회가 1863년에 조직됐을 때 John Byington이 첫 대총회장이 되고 Smith는 역시 첫 서기로서 선임되었다. 잠시 그는 대총회 재무로도 봉사했다(1876-77). 그는 또한 Battle Creek College에서 첫 성경교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첫번째’의 기록을 가졌고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Smith는 강한 신념의 사람이었고 때로는 James White과 그 후에는 E. J. Waggonor와 A. T. Jones와 1888년에 의견을 달리했다. 한 때 Ellen White와의 관계가 역시 긴장을 초래하여 그의 ‘증언들’과 ‘계시들’ 사이의 분간을 하려고 기도했고- 그리고 한 때 그에 대한 White부인의 권면 중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1881년에 그는 James White의 장례식 설교를 했다. 그리고 1891년에 Smith는 예언의 신에 대한 그의 그릇된 태도를 고백했고 화해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과 속죄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실질적으로 변경하지 않았다.
3. 신성과 속죄에 관한 견해를 선포함
유창하고 강력한 저자로서 비범한 문체를 가진 Smith의 저작은 논리적인 면에서 그 시대의 특성에 잘 맞았다. 그는 말로 하는 것보다 그의 Pen에 더 유능(능력)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다니엘과 계시록에 관한 사상은 그의 가장 특출한 저작이었다. 계시록에 대한 사상(Thoughtson Revelation)은 1865년에 책의 형태로 출판되었고 1867년에 실제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1872년에 출판된 다니엘에 대한 사상이 보다 5년 전이었다. 그의 ‘성소와 그 정결’(1877)은 상당히 변덕스런 특성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겠다. 이것들도 역시 취급해야 한다. 그는 ‘예언상 미국’(나중에 mawel of Nation으로 개역함) ‘현대 강신술’(1896) ‘Here and Hereaften’'(1897)과 ‘예수를 바라봄’(1898) 나중의 저서는 1888년 Mineapolis이후 10년 후에 나타난 것이며 시대의 끝이 나타났고 우리가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견해들의 이즈러짐을 표시(나타난다)한다.
Minneapolis회기에 Smith는 대총회 서기 직에서 물러났고 동시에 G. I. Butler 장로도 O. A. Olsen에 의하여 대치되었다.(대총회장) Minneapolis 대총회 회기와 예비적 성경 연구회 중간에 이상은 Smith의 비범한 생애와 가치 있는 공헌에 관한 새의 눈으로 본 견해(피상적 견해)이다. 그는 반세기 동안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불사한 뛰어난 인격자였다. 그는 비범한 재능을 소유했다.
Ⅶ. Arian의 견해가 1865년에 공공연히 출판됨
1. ‘완전한 영원성’은 결코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적이 없다고 주장함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Uriah Smith의 ‘계시록에 관한 사상’은 ‘다니엘에 관한 사상’(1872) 보다 몇년전에 간행되었는데 1881년에 두권을 합해서 출판했다. 그것은 예언의 신서적 이외에는 우리 교회 출판소에서 배포된 것 중에서 그 당시 유일한 서적이다.-100년(1세기) 이상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저하게 계속되고 분포되었다. 그 책 속에 나타난 것은 우리 교회를 탐구하는 기사들에 관해서 결과적으로 특별한 흥미와 관심이 있다. Smith의 Arian의 견해가 여러 곳에 나타났다. 계 1:4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한번 나왔다. 아래와 같이 말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분으로부터 과거와 미래 완전한 영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 곧 아버지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우리가 믿기는 이 말은 결코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다른 분에 관해서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부터 구별해서 말한 것이다(Uriah Smith, 계시록에 관한 사상, 1865, p. 14). 이 구별은 물론 영원한 존재에 관한 논리에 근거했다.
2. 그리스도는 ‘피조된 존재’라고 주장함
그 다음에 계 3:14dml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주석을 하는 중에 Smith는 1865년판에서 직통 Arian의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가 아는 한도에서는 이것은 두 번째였다. -첫번째로는 1854년에 Stephenson이요-비록 개인적인 견해이기는 하나 우리의 서적에 그렇게 담대한 말이 나타난 것은 두번째였다.
“시작하신 분이 아니요 창조의 시작이요, 어떤 다른 존재도 있기 훨씬 전에 그의 존재가 생긴 첫번째 피조된 분이요, 자존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다음이다”(상동 p. 59).
그 의미는 오해할 수 없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첫번째 피조된 존재요 어느 다른 피조된 존재 이전에 되었다고 명백히 피력했다. Smith는 그 후에 그 입장을 명백히 취소하고 그리스도는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그의 아들은 시작이었고 그의 생명은 파생된 생명이라고 주장했다. Smith는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았던 때가 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물론 그것은 수식된 반-Arian 견해이다.
1854년의 Stephanson의 책은 영향이 적었으나 이 1865년의 Smith의 책도 오늘날까지도 자주 우리를 대항해서 사용되어 왔다. 특별히 ‘피조된 존재’라는 말을 인용하여 대적한다.
Ⅷ. 1872년 ‘원칙들’은 ‘속죄’를 십자가와 분리함
1. 1872 선언 교 없는 선언
외적으로 첫번째 포괄적인 S. D. A기본원칙들의 선언은 항상 1872년에 나타난 것으로 친다. 그것은 14 page로된 ‘S. D. A의 기본 원칙들의 선포’라고 하는 소책자 형태에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선언이었다(어느 정도). 익명으로 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실제로 Smith가 작성했다. 그 선언문 중에 그 외 서론적인 구절이 있다.
‘우리 믿음의 이 개요를 공중에게 제시함에 있어서 우리는 성경 이외에 어떠한 신앙의 조항, 신조나 훈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기 바란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백성과 함께 어떤 권위를 가지고 제시하거나 신앙의 체계로서 그들의 동의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들이 취한 만장일치로 된 것, 되어온 것을 간단히 말하는 것이다(A Declaration of Fundamental Prinples, 1872, p. 3).
특별히 주목할 것은 저자 자신의 말대로 어떤 권위를 가진 것도 아니요 신조의 일치를 얻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그가 말한 것 보다는 거의 적은 수의 일치를 얻은 것이다.
2. 십자가와 분리된 속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십자가 제목 Ⅱ에서 Smith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 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하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고 우리 잃어버린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Abraham의 씨의 형상을 입으시고 사람들 중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중에 사셨고 우리의 모본으로 사셨고 우리의 희생으로 죽으셨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고 하늘에 있는 성소에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려고 승천하셨고, 거기서 자기 자신의 피로서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신다. 이 속죄는 희생제물이 되심에 불과했던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미치는 것으로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봉사를 예표하고 상징한 레위의 제사직분의 모본에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사업의 바로 마지막 부분이다(레 16:, 히 8:4, 5, 9:6, 7 기타를 보라. 상동 pp. 2, 3).
여기에서 이 강조적인 공식적 형태로 -권위는 아니지만 - 된 선포에서 속죄는 십자가의 행위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1877년의 성소와 그 정결이란 말에 나타난 Smith의 보충된 말이 있는 책이 출판되기 5년 전에 간행되었다. 이 사상에서 Smith는 그가 죽는 날까지 겉으로는 결코 실질적으로 변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물어볼 것 없이 항상 신실한 크리스챤이었고 자기 죄의 용서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을 신뢰했다.
Ⅸ. Smith의 견해가 ‘성소’라는 책에 계시됨
1. 십자가와 속죄의 관계
그 다음 1877년에 그의 ‘계시록에 대한 사상’이 나타난지 10년 후에 다른 책에서 Smith는 ‘성소와 그 정결’과 그의 진리의 큰 성소에 대한 견해를 주석했다. ‘마지막 시대’에 사는 이 현 세대에 남겨진 그의 이해와 더불어-(p. ⅵ) 그는 여기에서 그가 보는대로 ‘전도의 참 견해’를 제시하려고 애썼다. 그는 이것을 28장에서 ‘속죄’에 관해서 명백히 피력했다. 여기에 대략적인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Smith는 다른 모든 사람은 하나로 말하는데- 속죄- 그는 4 분리된 기간을 구별했다. 그는 저들이 말하는 것과 한가지라고 한다.
“우리가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성소의 정결, 성도들의 조사심판, 죄를 도말하고 지우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의 끝마침(완성)은 모두 하나요 같은 일이다. 우리가 지금 부언하는 말은 이것도 역시 속죄이다”(p. 275). 그 다음에 종교계에서 속죄에 대한 공통적인 아래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국한하는 것처럼-Smith는 이 확언을 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속죄했다는 표현이 자주 표현되는데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속죄는 같은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사상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 가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것은 두가지 극단과 근복적으로 오류로 인도한다”(상동)
2.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함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 속죄의 균분법(같다고 하기)을 거절함은 아래 같이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속죄는 같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곤란한 일을 면케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십자가 위에서 그의 피를 흘리실 때 속죄를 이루시지 않았다. 이 사실을 마음에 영원히 명심하도록 하라(상동, p. 276, 이 말은 D & R에는 없다. 그러나 ‘성소’에 오랜 후에 인쇄되었다).
이 말은 더 이상 강조적 혹은 결정적일 수 없다. 그는 속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그 말한 후 Smith는 이 말을 확대하여 좀더 설명했다. 제물은 속죄가 아니다. 속죄일이 될 때까지는 그 제물은 제사장의 봉사도 아니다. 그리고 그 사업은 성소의 지성소에서 시작된다. 예표적 속죄에서 죄가 실제로 제거되는 것은 이 섭리를 위한 제물이 준비됐을 때도 아니요 성소의 첫 칸에서 제사장의 봉사로 된 것도 아니요 지성소에서의 제사장의 봉사로 말미암아서만 완성된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봉사의 끝마치는 사업이요, 성소의 정결이요,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1844년까지는 이것은 시작되지 않았다(상동, pp. 277, 278). 그러므로 그가 강조한 것은 십자가에서도 그가 승천하여 하늘 제사장의 첫 국면에 들어간 때도 아니요 오직 1844년 이후에 속죄는 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갈바리에서 ‘제사장이 아니었고 단지 제물이었다고 주장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제사직분과의 관계에 대하여 Smith는 명백히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실 때 그는 어떤 자격으로서 행동했는가? 우리의 제사장으로서가 아니요 오직 제물로서이다. 왜냐하면 옛날의 희생이 죄인에 ㅡ이하여 죽임을 당한 것처럼, 그는 악인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는 나무 위에서 우리의 죄를 그의 몸에 짊어지신 희생과 제물로서였다. 여기에서 그가 가지고 봉사할 피가 준비되었다(상동, p, 278). Smith는 그 다음에 그가 생각한 대로 이 일반적 혼돈에 관하여 이 강력한 말을 첨가했다. 이것은 그가 행하실 제사장의 업무를 위한 준비 행위였다. 속죄는 끝에 있다. 그 제물을 속죄와 꼭 같은 것으로 만드는 자들은 1800년 이상 간격이 떨어진 사건들을 함께 혼합시켰다(상동).
4. 속죄는 제사장직에 ‘최후 행위’이다
이 논쟁을 그는 아래 같은 말로서 보강하려고 했다. ‘이 큰 성소문제는 속죄의 출처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제물을 속죄와 혼돈 하는 오류에서 우리를 보호한다. 그리고 속죄를 그리스도의 봉사의 끝에 두신 대신 시잭에 둔다(상동, p. 279). 그러므로 Smith는 속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완전히 분리한다. 그는 이렇게 반복한다. “속죄 혹은 우리를 대항해서 더 이상 기억될 수 없도록 죄를 제거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주님이 행하시는 제사장 봉사의 마지막 행위이다”(상동, pp. 279, 280).
이상이 속죄에 대한 Smith의 명백한 견해였다. 이것은 1877년에 선포한 그의 견해였다. 의미론이 포함된 이 견해는 종교계에 많은 오해와 공격을 일으켰다.
Ⅹ. 1878년 성서 연구회(강습회, 하고히, 강령) 성령을 비인격화하다
1. Pacific Coatr에서 출판된 견해들
1년 후에 The Bible Institute(1878)는(태평양 연안에 있 S.D.A 출판소에서 출판된) 1877년 봄에 Oakland에서 개최된 ‘Bible Institute’에서 Smith가 개최한 강연들의 연속적 재료들이 실려 있다. ‘성소’라는 장에서 그의 종전에 정성들여 만든 해석을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발견한다.
“우리는 속죄를 하늘 위의 성소에서 우리 주님의 끝마치는 봉사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인다”(The Biblical Institute, 1878, p. 81).
2. 성령은 단지 감화력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성령은 단지 흘러나오는 감화력이라는 말을 발견한다. 이것은 문답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성령은 무엇인가?
답- 이 문제에 답하려는 어떤 노력도 감히 거룩한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통된 무엇이다.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의 신, 그것은 ‘부어준다’, ‘흘러나간다’= Shed afroad ‘내려왔다’ 등등의 말이 적용되는(표현) 어떤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숨으로 내쉬어 주셨다(요 20:22). 그것은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 행위자였다(창 1:2).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나타나는 방법과 다양성을 열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용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저들의 권세의 대표, 매개로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감화력이라고 표현함이 최선일 것이다(상동, 184). 하선을 그은 것에 나타나들이 비인격적 대명사가 한 문장에 성령에 대해서 그것이라고 6번 기록하고 그것을 단지 신비한 감화력이라고 했다. 이것은 신성의 삼위일체의 교리를 거부하려는 의도였다. 이상은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보는 Smith의 견해였다. 확실히 그런 견해를 변경한다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걸릴 것이다.
XII. 예수를 쳐다봄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견해(1898)
1. 말씀은 시작이 있다
Smith가 신성에 관한 반-Arian적인 견해를 주장한 완강함이 그의 최후 저작- 288page로 된 1898년에 Uriah Smith라는 개인적인 판정을 가진 ‘예수를 바라봄’이라는 책에 반복해서 나타난다. Smith는 그리스도는 창조된 존재라는 1865년의 논쟁적인 견해에서 후퇴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명백한 말로 그리스도는 단지 나타났다. 즉 그는 분명히 시작이 있다는 주장을 고집했다. Smith는 그의 주님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영원한 존재로서나 선재하신 분으로 찬양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만이 시작이 없다. 가장 먼 시대에 시작이 있을 수 있는 때에- 너무 멀어서 유한한 인간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영원이라고 할 만한 때에- 말씀이 나타났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라(요 1:1). 이 피조되지 않은 말씀은 때가 차매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신 분이다. 그의 싲가은 우주 안에 어떤 다른 존재의 시작과 같지 않다Uriah Smith, Looking Unto Jesus, 1898, p. 10).
2. ‘아들’은 단순히 ‘나타났다’고 주장함
‘신비한 표현’- 그의 독생자 아버지의 유일한 분 아버지에게서 나왔다.-에 관하여 Smith는 다음같이 표현했다.
“이와 같이 어떤 신령한 충동 혹은 작용에 의하여 창조가 아니라 나타난다는 것은 전지하신 분만 알 수 있고 전능하신 분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것은(상동)
3. 성령은 신령한 영감이라고 부름
그 다음 성령에 관하여 Smith는 진술하기를 - 그 다음에 성신(잘못된 번역에 의하여 ‘성령’), 하나님의 신, 그리스도의 신, 이들(아버지와 아들)의 권세의 매개체와 영감(신령한), 두분을 모두 대표하는 자는 역시 존재하고 있다(상동)(영감 Afflatus는 신령한 충동으로 정의된다). Smith는 성령이 존재하게 된 때는 암시하지 않는다.
4. 신성의 발전(Enolution)은 아들로서 그쳤다
그리스도와 아버지와의 동등에 관해서 말한 후에(p. 11) 그리고 ‘근본적 높임’에 대해서 말한 후에- Smith는 선포하기를 “그리스도는 사람의 구속을 이행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동등의 지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paul은 그가 그런 지위를 가지신 것을 명백히 확증한 바와 같이 이해했음에 틀림없다(상동, p. 12). 그가 한때 주장했던 그 입장을 말하면서- 창조사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단순히 시작되지 않았다는 주장-Smith는 이제 이것은 그리스도를 ‘피조된 존재의 지위’로 환원시킨다고 말한다. 그는 그 때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그 장면(창조)에서 활동적인 행위자가 되기까지는 어떤 창조사업도 성취되지 못했다”(상동).
그 다음에 이 이상하고 놀라운 말을 한다. 첫 문장을 주목하라.
“아들과 함께, 신성으로서 발전(진화)은 그쳤다. 생명체나 무생물체나 그 밖의 모든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창조로 말미암아 생겼다. 아버지는 제일원인(선행적), 아들은 활동적 행위자로서 이들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케 되었다”(상동, p. 13). 이 최초의 발언으로 Smith가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여기에 하선한 것) 우리는 모른다.
5. 그리스도는 단지 한 ‘파생적’ 존재
그러나 Smith는 아직도 Christ를 ‘파생적’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창조 받지 않은 존재로서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하나님께서 파생된 분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독생자’로서의 위치를 취하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존재의 위치에서 그는 이같이 이 모든 것보다 먼저 계셨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는 시작자로서 창조를 시작하셨다(상동, p. 17).
이것은 물론 1865년의 그의 해석(견해)를 역전한 것이었고 확실히 발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Smith의 견해로는 그리스도는 아직도 파생되었다. 또한 이것은 그 당시 어떤 다른이들의 견해와 같은 유이다.
6. 희생, 십자가에서는 제사장이 아니다
십자가의 사건에 와서 Smith는 활기 있게 썼고 상당히 길게 썼다. 여기 그의 지도적인 말이 있다.
“베드로가 증거한 바와 같이 우리의 죄를 그의 몸에 짊어진 것은 그가 나무 위에 -십자가에- 계실 때였다. 그러나 그때 그는 희생 제물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지 전혀 다른 일인 제사장으로써가 아니었다”(상동, p. 28).
7. 죽음과 속죄는 같지 않다
그리고 특별히 28장(The Atonement)에서 Smith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희생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흘림과 속죄를 이루심을 같은 일이라는 사상은 얼마나 넓게 대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견해는 두가지 피할 수 없는 가장 파괴적인 오류로 인도한다(상동, p. 236). 그는 강조하여 반복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속죄는 같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난점을 해결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때 속죄를 이루지 않으셨다. 이 사실을 마음에 영원히 고정시키라. 이것은 세상의 소망인 속죄를 부인함이 아니요 다만 그것을 적당한 위치에 적용하는 것이다(상동, p. 237). 이것은 1877년-21년 이전에 한 그의 말이다.(실제로)
8. 봉사의 끝에 온다
이점을 강조하면서 Smith는 그의 말을 전개한다. “속죄사업은 그 해의 마지막 의식이다. 그리고 그때 성소 봉사가 완성된다. 희생제물과 제사장의 봉사는 속죄보다 선행한다. 희생제물은 속죄가 아니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봉사하는 동안은 제사장의 봉사도 속죄가 아니었다. 속죄일이 되기까지는 완전한 속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성소의 지성소에서 하는 매년 봉사는 그 부분에서 이루어졌다”(상동, p. 238)
9. 1844년 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Smith가 부언하기를;
“참으로 죄를 제거하는 예표적 속죄는 이 섭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준비될 때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성소의 첫 칸에서의 제사장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그러나 지성소에서의 제사장의 봉사로서만 성취된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끝마치는 사업이요 성소의 정결 우리가 본대로 1844년까지는 그 사업(속죄)이 시작되지 않았다”(상동).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Smith가 말하기를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셨을 때 그는 무슨 자격으로 그 일을 하셨는가. -우리의 제사장으로서가 아니요 다만 희생제물로서이다. 왜냐하면 그는 옛날의 희생이 죄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것처럼 악인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상동).
물론 이것은 Ellen White의 반복해서 말한 명백한 말씀,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시며 희생으로서 제물을 드리는 자와 제물로서 행하셨다는 말씀과 직접 대립되었다.
10. 죽음과 속죄는 1800년 간격이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다만 제사장 직분을 위한 준비였고, 속죄는 제사장으로서 그의 마지막 봉사다 라고 말한 후 Smith는 좀더 말한다.
“희생 제물을 속죄와 같은 것으로 만드는 자들은 1800년 이상 떨어져 있는 사건들을 함께 혼돈 한다.”(상동, p. 239).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그는 제사장으로서 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의 제사장 직은 그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희생을 드리는 것은 제사장이 하는 일이 아니다. 죄인이 했다”(상동).
11.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이와 같이 Smith는 요약한다.
“그 큰 성소 문제는 속죄의 출처가 되고 희생과 속죄를 혼돈할 오류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속죄를 그리스도의 봉사의 끝에 두는 대신 시작에 두는 오류에서 보호해 준다.”(상동, p. 240).
그리고 이 모든 광범한 취재 범위는 1894년에 Battle Creek(중앙) 교회에서 속죄의 행위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지 않았다는 신앙 고백을 취소한 후 4년까지도 간행되었다(추후에 제시하겠다). 속죄의 행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White부인의 강력한 논문들이 출판된 같은 출판소에서 이 책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흥미 있는 일이다. 공개토론의 사상이 아직도 이행되었다.
1898년의 Smith의 예수를 바라봄은 Arian의 견해와 십자가에서부터 속죄를 분리시키는 마지막 출판이었다. 그리고 좀 더 주목할 것은 A. T. Jones가 Review의 편집국장으로 재임한 기간 중에도 이것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Smith 개인적으로 판권을 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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