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독일은 낮이 길다. 9시가 되도 훤하니 말이다. 빌레펠트는 독일 북서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속한 도시다. 예전부터 이곳은 신학과 음악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래서 한국인 유학생들도 많았던 곳이다. 이곳 교인들 이야기로는 90년대만 해도 신학생들로만 축구팀 두팀을 만들 정도였으며 옆 도시에 있는 한인교회들과 체육대회도 자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교회는 교인들만의 장소는 아니었다. 더 과거로 돌아가 광부와 간호사들이 파독되던 시절은 더하겠지만 말이다. 그 당시 한국인들이 모여서 체육대회와 같은 행사를 하면 독일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점심을 먹은 후 모든 아낙들이 풀밭이나 숲 속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아서 고사리와 같은 나물을 뜯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독일인들은 고개를 흔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사리나 참나물에 담긴 맛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에게서 누린네가 난다고 한다. 실제로 지하철 안이나 버스 안에 있으면 쾌쾌한 냄새를 참을 수가 없다. 아마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한다. 한 끼 전이 아니라 하루 전에 김치를 먹어도 레슨을 받을 때면 독일인 교수들은 유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며 레슨을 연기한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는 우리 냄새가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 교회는 젊은 유학생들 아지트였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비디오 테잎에 담아오면 교회에 모여 밤새도록 함께 보며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이 때는 교회도 정말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텔레비전 하나에 수십 명이 모여서 하나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마음이 맞으면 새벽녘에 몇 시간이고 차를 달려 북해나 대서양 항구 도시로 달렸단다. 그리고 바다 고기를 사서 미리 준비한 초장과 야채들을 펴놓고 정말이지 목구멍까지 회를 먹고 왔단다. 이국에서 외로움을 이렇게 달래며 서로 의지가 되는 것도 또 하나의 행복일 것이다. 이때도 서양인들이 도저히 이해 못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바로 매운탕이다. 회도 그렇지만 머리와 뼈만 남은 생선을 냄비에 넣고 끓이는 모습을 보면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것이 우리들 맛이고 정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나 한인교회 나름대로 고충과 상처도 있다. 그렇게 재미있게 한 식구처럼 지내던 성도들, 학생들이 막상 독일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그 때부터는 교회를 안 나오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외면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 낯선 독일 땅에 와서 이사부터 학교 수업까지 그리고 생활 모든 것을 도와주고 나눠 주다보면 정이 들 때도 있 것만 학위를 마치거나 좋은 자리에 취직이 되고 독일 생활이 적응이 되면 오히려 남이 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남아 있는 교인들은 점점 배타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성도들끼리 문제도 아니다. 유럽에 있는 교회들 중에는 유학을 온 목회자들이 담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보니 조금 열심을 내다가 공부가 끝이 나면 떠나는 것이다. 의지하던 목자를 보내야 하는 성도의 심정은 아마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점 목회자에게도 마음 문을 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 다른 경우도 있다. 정말 목회를 하러 온 경우다. 그러나 이들은 비자문제가 해결이 안된다. 궁여지책으로 성도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목회자를 고용하는 계약형태가 되어 비자를 발급을 받는다. 그야말로 성도들이 갑이고 목회자는 을이 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해마다 목회자는 이 계약을 갱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만약 비자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장 내일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유럽 특히 독일교회 또 다른 특징은 대부분 두 부류 성도들로 나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6,70년 대 파독되었던 분들이다. 이분들은 예전 신앙을 갖고 계시다. 두 번째는 유학을 나온 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목회자들보다 더 나은 학위와 학식을 갖고 있다. 이들과 함께 목회하는 것은 쉬워보이질 않았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면 이들이 대학교수가 되고 대기업 간부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설교 한편을 준비해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때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빌레펠트 교회는 스무명 조금 넘는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였다. 전임자는 여자 전도사로써 공부를 병행하는 목회자였다. 그녀는 수업 때문에 독일 다른 도시에서 생활을 하며 주일에만 기차로 교회에 와서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주일 예배 한 시간 외에 모든 교회 일은 남겨진 성도들 몫이었다. 그렇다보니 성도들은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서운함이 있었다. 예전과 같이 삶을 나눌 목회자에 갈망했었다. 그리고 그곳에 김범식 목사님이 작년에 부임한 것이다.
김범식 목사님은 내가 신학과 새내기 시절 신학대학 부회장이셨다. 184cm에 100kg이나 되는 거구다. 학창시절 채플 시간에 찬양을 부르는 모습은 정말로 은혜였다. 실제로 빌라펠트 시립 합창단에서 활동하는 정 집사님은 시립 합창단에서 투잡(Two-job)을 권할 정도였다. 괜찮던 춘천에서의 부목생활을 정리하고 독일로 오게 된 것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원래 형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남에 있는 어학원에서 영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별 문제가 없어보이던 미국 비자가 발급이 되지 않는 것이다. 형은 이것을 하나님이 막으셨다고 고백한다. 그 때 독일에 있는 영묵이 형에게 전화가 왔다. 프랑크푸르트 교회에서 자리가 있는데 올 생각이 있냐는 것이다. 교인은 하나도 없었다. 교인도 없고 생활비도 없고 언어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나 형은 무작정 가족들을 대리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사모님은 젖먹이 다솜이를 엎고 형은 짐을 들고 영준이를 앞세우고 아무리 둘러봐도 그러나 형네 가족을 맞아주는 이들이 없었다. 마침 마중 나오기로 한 영묵이 형도 늦는 터라 형이 느꼈을 외로움과 당혹스러움이 더 컸을 것이다.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민박집 방 한 칸을 빌렸다. 주인네 부엌에 신세를 지면서 몇 달을 지냈다. 그래도 형 가슴 속에는 하나님이 유럽으로 인도했다는 소명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로 절박했고 그만큼 간절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교회에서 부목사 청빙이 들어와 힘겨운 프랑크푸르트 생활을 정리하고 비엔나로 갔다. 이곳에서 형과 형수님은 독일어를 익힐 수 있었고 영준이도 현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영준이는 오스트리아 친구들과 제법 잘 어울렸고 축구나 클라리넷도 다른 친구들 못지 않게 잘 했다고 한다. 생활이 안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생활은 편하지만 사역에 대한 목마름이 가시질 않았다. 그 때 빌레펠트 교회에서 청빙이 왔고 형은 막 정착이 되던 비엔나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금 개척자의 심정으로 빌레펠트에 온 것이다. 다시금 생활비 걱정, 집세 걱정 등이 시작된 것이다. 빌레펠트 교회에서는 다달이 생활비를 주긴 하지만 정작 4인 가족이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은 목회자 몫이었다. 한국에서 후원을 요청해야 하지만 독일은 선진국이 아닌가? 그곳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는 공부를 겸하는 부르조아라는 인식이 교회마다 퍼져 있어서 그마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형은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내신 뜻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예전 서로 삶을 나누던 신앙공동체를 부활하고 싶어 했다. 현실의 어려움을 보고 두드려보며 왔다면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어쩌면 자신의 형편을 돌보지 않고 무조건 사역을 위해 전진하는 모습이 참 목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우직한 형의 뒷모습이 내게는 더 커보였다.
형을 위해서 꽈리 고추와 청양 고추를 준비했다. 그리고 형수님이 미리 말씀하신 감기약과 해열제, 동해가 고향인 형수님을 위해서 나물과 미역, 멸치 또 된장 고추장을 풀었다.
청양고추와 멸치를 볶으며 형수님은 마냥 웃음이다. 그 옆에서 참견을 하는 형의 모습도 한국에서 보던 그 모습이다.
옛날 벧엘의집에서 아저씨들과 함께 살 때 일이다. 한참 더운 어느 날, 함께 모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물놀이 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저씨들은 이구동성으로 휴가를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가서 수영도 하고 물고기도 잡고 누구는 낚시를 잘 한다는 둥, 전에 식당을 하던 아저씨는 그러면 매운탕은 내가 끓인다는 둥, 그렇게 한참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쓸데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숙자들이 어딜 가겠냐는 암묵적인 표시다 그냥 헛심 캔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내가 이야기 했다.
“우리도 휴가 갑시다. 아니 우리 수련회 갑시다.”
다들 놀랐다. 그리고 믿지 않았다. 아니 노숙자들 삼사십명이 어디로 수련회를 간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를 받아줄 장소가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누구는 물고기 잡고 누구는 수용복을 준비하고 누구는 매운탕을 책임지고 아니 아예 식사를 책임지라고 이야기했다. 모두들 쾌재를 불렀다. 다들 그냥 갈 수 없으니 회비를 걷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장 내일부터 용역이라도 나가야겠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목회하는 선배들에게 전화하면 얼마든지 환영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노숙자들이 그것도 별 비용없이 교회를 사용한다고 하니 선배 목사님들은 난색을 표했다. 입장이 난처했다. 아저씨들은 저리도 좋아하지만 뱉어 논 말이 있어서 어찌 그 말을 주어 담을 수 있겠는가?
그 때 강원도 정선 임계 백봉령 아래 동산교회에서 목회하던 범식이 형이 유일하게 승낙을 했다. 승낙은 했으나 교회가 작아 그 인원이 다 잘 수 없으니 텐트를 가지고 오고 당시 여자 실무자들 세명은 사택에서 자라는 것이다. 부엌도 사택 부엌을 내주었다. 신혼집에 염치 불구하고 우리는 봉고차 네 대를 나누어 타고 쳐들어갔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웃고 울고 계곡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다 매운탕을 끌이고 누구는 더덕을 캐오고 누구는 뱀을 잡아다 장난을 치고 그야말로 기가 막힌 노숙인 수련회였다. 밤이 무르익자 70이 넘은 방씨 어른은 북에서 배운 노래를 불렀다. 고향 가족들이 그리울 때 부르던 노래였다. 그 옆에서 아직 17이던 준희 녀석은 할아버지를 안아주고 알콜 중독이던 노씨 아저씨는 지난 날을 반성하는 글을 써서 앞으로는 술을 끊고 새사람이 되겠다며 눈물을 보였다. 정말 잘 먹고 잘 논 수련회였다. 지금까지 목회하며 치룬 수련회 중 그 때만큼 감동이 있던 수련회도 없을 것이다.
노숙인들에게 장소를 그것도 사택까지 내어주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다 감내했던 것이 형이다.
“이게 내 집이냐? 아버지 집이지.”
그저 이 한마디였다.
형은 지금도 그 마음으로 목회를 하고 있을 것이다. 멸치 볶음도 집회 때 가져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부터는 집회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