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누룩과 방언의 미망에서 벗어나라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같은 골목에 살며 자라난 친구가 있다. 그와 나는 초등학교 시절 줄곧 함께 학교에 다녔다. 내가 읍내 중학교에 다닐 때 그는 K시에 있는 장로교 경서노회에서 운영하는 성경학교를 다녔다. 어느 해 겨울, 그는 교회 부흥회에서 방언을 받았다더니, 그 후 얼마 안 되어 신학교에 갈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그는 자기 집 논 한 마지기를 팔아 그 돈을 보따리에 싸들고 신학교에 입학하러 간다며 떠났다. 그런데 그만 가는 도중에 돈이 든 보따리를 잃어버리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결국 그 일로 하여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고, 대신 G시로 나가 회사에 취직하여 평생을 보냈다.
어린 시절 그와 나는 교회에도 함께 다녔다. 그는 도시로 나간 후에도 줄곧 장로교회에 적을 두었는데, 내 경우는 30년 정도 장로교 소속이었다가 그 뒤 몇 곳을 전전한 후에 2007년 무렵부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장로교회 사람들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는다는 칼빈주의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한 번은 고향 가는 길에 G시 어느 찻집에서 그를 만나 구령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았다는 말과 함께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면서 열여덟 살 무렵 방언을 했던 경험을 자신이 구원받은 증거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리고 그는 “자네가 다니는 교회는 어느 교단인가?” 하고 몇 번이나 되물었는데, 이는 아마도 내가 자기와는 다른 주장을 하니까 내가 속한 교단으로 나의 믿음을 나름대로 판단해 보려는 의도인 듯했다.
장로교 신자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교단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교단은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장자교단으로 자신들의 믿음이 가장 바른 믿음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들이 먼저 알 일은 성경에는 교단이라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머리는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교회 위에 교단이 있고 그 교단을 대표하는 총회장이 있는 경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위에 총회장이 군림하고 있는 형국이 된다. 이는 마치 자신들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로마카톨릭이 신부,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을 두고 있는 경우와 대동소이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니콜라파(계 2:6)로 소수의 계층이 다른 성도들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교단 총회장이나 교황을 만나려면 예수님께서도 그 밑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칼빈은 『이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딤후 1:9)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엡 1:4)라는 말씀을 읽을 때, 구원받은 사람들이 창세기 1장 1절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읽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일 경우,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선택되었던 사람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담 안으로 들어가고, 그 다음 다시 아담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은 개개인이 창세전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 2:2,3)고 분명히 못 박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개개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된 교회를 계획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칼빈의 5대 강령인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인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등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받은 양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상 구원의 길은 요원하다. 우리나라에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 말도 안 되는 비성경적인 교리에 너무 오래 세뇌되어 백약이 무효한 중증 환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내 친구가 자신의 구원받은 증거로 생각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서도 우리나라 교단 교회들은 성경지식이 너무 부족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방언은 결코 뜻 없는 소리가 아니다.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 2:7,8) 보는 것처럼 여기에서 방언을 한 사람은 주님의 제자인 갈릴리 사람들이었고, 방언을 들은 사람은 파대인, 메데인, 엘람인에다, 메소포타미아, 캅파도키아, 프루기아, 팜필리아, 이집트, 리비아, 로마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들은 방언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의 말, 곧 외국어였다.
나는 소년시절 부흥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직접 들어본 경험이 있다. 또 그 무렵 고향 교회 사람들 가운데도 방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은 저녁마다 교회에 모여 여름밤 무논의 개구리들처럼 와글와글 소위 방언 기도를 하곤 했다. 그 때마다 내가 들은 방언은 거의 100% 외국어가 아닌 소리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악령의 역사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인들은 이 방언에 대하여 상당히 관대한 생각들을 한다. 방언에 대해 명쾌한 성경적 지식이 없이 그저 막연히 성령의 역사이거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창기 은사주의의 방언 쓰나미가 한국교회를 마구 휩쓸어 버린 데 그 원인이 있다. 성경은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하되 특별히 예언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전 14:1) 권면한다. 그뿐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열망하고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전 14:39)에서 보다시피 예언에 대해서는 열망하라고 하면서 방언에 대해서는 “금하지 말라”고 한 바울의 고충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에 일부 유대인 회원들이 있어 유대인의 표적인 방언(막 16:17)을 교회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전면 금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바른 신앙을 위하여 이제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의 묵은 누룩과 은사주의 방언의 미망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한다.
<찬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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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목적과 은혜에 따라 하신 것이니, 이는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딤후 1:9,10)
1
태초에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주님은 몸 된 교회 미리 계획하셨네
때 되자 육신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네
2
죽음의 세력 마귀 영원히 멸망시켜
노예로 매인 자들 다 풀어 놓으려면
자신의 죽음 외엔 다른 길이 없었네
그 귀한 보배 피 흘려 우리 구원하셨네
3
사람의 걸레 같은 행위를 젖혀놓고
오로지 그 목적과 은혜에 따르신 주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셨네
영원한 생명과 불멸 우주에 밝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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