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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光散人사랑방 스크랩 6세기 백제와 왜의 연합체(임나일본부)가 한국 남부 지역 경영론의 허구성
글돋선생 추천 0 조회 17 07.01.15 01: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6세기 초 백제에 의한 소위 한국 남부 지역 경영론의

허구성(임나 지명 허구성 시리즈2 탄)

 

庭光散人 金文培 글

 

첫째 남가라의 멸망 원인으로 <흠명기>2년 (541년)4월조의[남가라는 너무 작고 협소하므로....]는 결코 김해의 금관가야의 실상이라 볼 수 없으므로, 남가라는 당시 韓地의 금관가야가 아니다

 

둘째, 남가라의 멸망 연대에 대해서는 <계체기>21년 (527년)6월 조에 이미 한 번 나타나고, 같은 23년(539년)조에 오오미-노-케나노오미(近江毛野臣)로 하여금 安羅(안라)에 사신으로 보내, 신라에게 권하여 다시 남가라와 탁기탄을 세웠다고 나온다. 또 흠명천황 2년(541년) 4월에 이른바 [임나 부흥회의] 기사가 있으므로, 이로 미루어 보건대 남가라.탁기탄, 탁순의 멸망은 실상 계체천황 21년(527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이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되면 남가라의 멸망과 한반도에서의 금관가야 멸망 연대(532년)가 맞지 않게 된다는 이유 때문에<계체기>21년(527년) 기사를 부정하고 있다. 그 부정의 이유가 객관적 근거에 의한 타당한 주장이 아니었음은 블로그 시리즈1에서 논한 바 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왕의 이름을 [佐利遲(좌리지)]로 기록,당시 韓地(한국땅)의 신라 왕은 법흥왕이었다,결코 한지에서의 사건기록 아니다

 

셋째, 계체 23년(529년) 4월에, 임나 왕이 [지금 신라가 원래에 준 봉토의 경계를 벗어나서, 자주 국경을 넘어와 침범하니 천황께 이를 아뢰어 臣(신)의 나라를 구조하여 주시오] 함에 따라 임나에 파견되어 있던 케나노오미(毛野臣)로 하여금 이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백제.신라. 두 나라 왕을 불렀다고 했는데, <일본서기>에는 신라 왕의 이름을 [佐利遲(좌리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529년 당시 韓地(한국땅)의 신라  왕은 법흥왕이었다. [佐利遲(좌리지)]는 아예 신라 왕계에는 없는 이름이므로, 이 연대에 케나노오미와 백제.신라.임나에 얽힌 이야기는 결코 한지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 즉 큐슈 땅에서 벌어진 일을 적어 놓았다고 봄이 오히려 타당하다.

 

넷째, 이와 연관하여, <흠명기>5년(544년, 신라 진흥왕5년) 3월조에 久禮山戌 및 구례산(久禮山)의 지명이 보이고, 그 지명의 위치가 同 5년11월조에 암시되어 있다. 즉 [신라안라양국의 양국  접경에 큰 강이 있어 요해의 땅이라 한다. 나(백제 성명왕-인용자)는 여기에 의거하여 6성을 쌓으려 한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청하여 성마다 5백 명씩과 아울러 우리 병사로써 채워 신라가 경작하지 못하게하여 핍박하면, 구례산의 5성은 스스로 병기를 내던지고 항복하게 될 것이니, 탁순의 나라도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태식의 막연한 지명추정의 잘못에 대한

 

결코 안라(安羅)는 한반도 아라가야(함안)이 아니라는 증거 필요

 

김태식(홍익대교수)에 의하면, 여기 나오는 [新羅安羅, 兩國之境,有大江水. 要害地地也....] 운운한 그 큰강을 한반도 낙동강이라 보고, [久禮山][久禮牟羅城] [久禮五城]은 낙동강 서남안의 함안(기존 설로는 安羅)과 창원(卓淳(탁순),김태식비정) 사이에 있었다고 막연히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연대인 흠명 5년은 544년으로 신라 진흥왕5년에 해당하고, 바로 이 해는 신라는 [十停(십정)]을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함안에 설치한 召參停(소삼정)이었음은 이미 아는 바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15년 (514년, 법흥왕 원년) 정월조에 신라가 阿尸村(함안)에 小京(소경)을 설치했다는 기사와 同書<지리지> 함안군조에 법흥왕이 많은 군사로 阿尸良國(일명 아라가야)을 멸하고 그 땅으로 군을 삼았는데, 경덕왕이 (함안으로)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라는 것, 領縣(령현)이 둘로서 그 하나인 玄武현은 본래 소삼현(召參縣)이라 한 것, 그리고 同書<雜志>9 武官條에 진흥왕 5년(544년)에 십정을 설치할 때 이곳 함안에 소삼정이 설치되었던 것을 무슨 근거로 모조리 부정할 수 있는가. 결국 안라는 한반도의 아라가야, 즉 함안 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 속의 안라는 어디였던 것일까? 그것은 일본큐슈 내에 있었으며, 위 <흠명기>의 내용대로 시라기(신라)와 아라(안라)양국의 경계에 큰 강이 있었다고 한 그 큰강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筑後川(축후천) 동쪽에 안라가 위치 하였고, 신라는 그 강의 서쪽인 사가현(佐賀縣)이었음은 나중에 뒤에서 자세히 볼 것이다.

 

久禮山(구례산)은 한국어 발음, [구례뫼]로 그 위치는 큐슈 [구루메 市]이다

 

또한 구례산(久禮山)은 한국어 발음으로 [구례뫼]로서, 그 위치는 지금의 [久留米(구루메)]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 [구루메]의 뜻은 고대 한국어 [구룸뫼]로서 雲山(운산) 혹은 雲峙(구름고개), 즉 현행어 구름 고개 또는 구름재에 대한 훈차표기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큐슈 내에서의 시라기(신라)는 축후천의 서쪽이며 시라기바라(白木原)를 그 東邊(동쪽 변)으로 한 사가현 일대에 비정되고, 安羅(안라)는 그 강의 동편 아나카와(穴川)에 비정한다. 

 

이 구루메를 끼고 흐르는 크고 긴 축후천(筑後川)은 아리아케-우미(有明海)까지 이어진다.

<계체기>24년(530년)9월조에 시라기(신라).구다라(백제). 양 군사가 케나노오미를 붙잡으려고 한 달 동안 체류하면서 쌓았다는 구례모라성 (久禮牟羅城)에 관한 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城跡(성의흔적)이 구루메의 동북방 축후천 옆에 현재에도 남아 있으며, [高良山 神籠石(고량산 신롱석)]이라 불린다. 이런 까닭으로 <흠명기>의 위 [ 久禮山戌(구례산술)] [ 久禮山五城]은 바로 구루메를 중심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한가지 첨언해 둔다면, 한반도 안에서 신라와 아라의 위치와는 반대로, 큐슈 내에서의 시라기(신라)는 축후천의 서쪽이며 시라기바라(白木原)를 그 東邊(동쪽 변)으로 한 사가현 일대에 비정되고, 安羅(안라)는 그 강의 동편 아나카와(穴川)에 비정된다. 

 

흠명13년조 기사,한반도 백제가 소멸된 뒤에도 나타나는 백제는  큐슈 분국 백제이다.

 

 다섯째, <삼국사기>에 기재된 10정 설치 연대인 진흥왕 5년(544년)에 옛 아라가야 땅인 함안에 소삼정을 둔 훨씬 뒤인 흠명 13년 (522년) 5월 조, 동14년(553년) 8월조에도 안라가 여전히 일본과 교섭관계를 유지하며 건재했다는 것은<<일본서기>>의 이 안라가 큐슈내의 하나의 소국이었다는 반증의 일단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군데군데 分註로서 인용된 <백제본기>는, 韓地에선 이미 그 본국 백제가 소멸된 뒤에도 아직 큐슈 내에 건재했던 분국 백제(구다라)의 역사까지 포함된 기록물의 반영일 가능성을 일단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밖에 또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큐슈 내의 분국 백제에 관해서는 따로 기록해 두었던 것을 나중<일본서기> 편찬시에 여러사료들과 함께 수록할 때는 구분 없이 연대순으로 뒤섞어 기재한 까닭에, 백제라고 하면 그냥 한꺼번에 한반도 백제에 덮씌워져 혼동이 빚어졌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추정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사실로 확인되는 증거들이 <일본서기> 전반의 분석을 통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시라기(신라).구다라(백제).고마(고려).아라(안라) 등은 물론이고, 이밖에 탁기탄.탁순,다라. 반파.기문 등, 임나관련 제국들이 모두 큐슈 내에 있었던 국명이라고 보는 것이 <일본서기>의 문맥을 이해하는 데 합리적이다. 이 점 역시 뒤에서 상세히 고찰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흠명기>의 곳곳에 (이를테면 4년(543년)11월조,5년(544년)10월조 등)보이는 [在任那之下韓 百濟郡令城主, 宜府日本府] [在下南之 我郡令城主...] [於南韓,置郡令城主...]와 같은 표현들을 두고 이것이 당시 한반도 남부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판단치 말아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의 하나로서 신라가 진흥왕 5년(544년)에 한반도 아라가야(함안) 땅에 소삼정을 설치한 같은 연대에, 백제가 진공해 와서 [百濟置郡令城主]했다는 해석은 단지 추정에 의한 가공의 스토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김태식은 <흠명기>의 바로이 표현을 두고 [가야 서남부의 일부 지역에 백제 지배하의 정치적.군사적 거점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매우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리고 있으나, <일본서기>에 대한 그의 이해가 처음부터 그릇된 방향이었으므로 그의 확신 또한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임나 연방은 북부 큐슈에,백제 분국은 쿠마모토현 다마나 일대에 위치

 

결국 필자의 일관된 주장처럼 이 모든 것이 큐슈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임나 연방은 북부 큐슈에 있었고 한반도 백제의 分國이었던 구다라는 有明海(큐슈 쿠마모토현지역 바다) 연안의 다마나(玉名/에다후나야마고분이 있다./전북익산 입점리고분 금동제신발 유물과 동일한 것 발견) 일대를 중심으로 한 큐슈의 중앙부에 위치하였다고 인식돼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위 <흠명기>에 [임나의 下韓 에 있는 백제의 郡令城主]와 같은 표현도 정당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여섯째, 여기서 특별히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 흠명 14년(553년) 8월조의 다음과 같은 기사다.

 

"금년에 홀연히 들은 바로는, 신라와 柏國(고마/고구려)이 공모하여 [백제와 임나는 자주 일본에 드나든다. 생각건대 이는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고 하는 것일 게다. 사실이라면, 머지않아서 나라가 망할 것이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安羅(안라)를 쳐서 일본의 길을 끊어야 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계락이 이와 같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백제가 일본 천황에게 사신을 보내 表를 올린 내용이다. 즉 신라와 고마(고구려)이 공모하는 것을 엿듣고 이를 아뢴 내용인데 [백제와 임나가 일본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일본의 군사를 청하여 우리(신라와 고마(고구려))를 치려고 하는 의도일 것이므로 일본의 군사가 치러 오기 전에 도리어 우리가 먼저 安羅를 빼앗아 일본과의 길을 끊어햐 한다.]고 밀모했다는 것이다.

 

일본 사가들의 기존 해석으로는 여기 나오는 국명들을 모두 한반도의 신라.백제.고구려, 백제,임나(가야연맹).안라(아라.지금의 함안)에 비정해 놓고 전부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예가 앞서 지적한 대로 국명을 한반도땅의 그것과 명백히 구분하지 않고 뒤섞어 놓음으로써 전도된 문맥이 되어 버린 대표적인 경우이다.

 

<<일본서기>>의 안라는 결코 함안에 비정될 수 없고,모두 한반도의 땅에서 이루진 사건이 아님

 

흠명14년(553년)이라면 한반도에서 아라는 신라에 병합되어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곳에 신라가 소경을 설치(514년)한 지도 무려 39년이 지난 때이다. 기성 사학계가 법흥왕 원년(514년 지증마립간15년조의 동일한 기록마저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同書 武官조에는 또 함안에 소삼정이 설치된 연대(544년,진흥왕 5년)가 명시되어 있어, 이로부터도 9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러므로<<일본서기>>의 안라는 결코 함안에 비정될 수 없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임나를 가야연맹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다. 이 무렵(흠명14년,553년)의 일이라면, 이미 532년에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김해)와는 무관한 사건일 터이다. 그렇다면 당시로선 아직 건재한 대가야(고령:562년 신라에 합병)를 중심으로 한 세력을 임나로 볼 수밖에 없겠는데, 신라와 고구려가 아라에 비정된 그 안라(기존 설로는 함안)를 친다고 해서 과연 내륙 깊숙한 곳의 고령가야나 전라도 땅의 백제가 일본과 내통하는 그 바닷길을 차단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이것은 상식 밖의 설명이다.

 

 세 번째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이 연대를 전후하여 고구려와 신라가 공모하여 백제와 가야를 침공하려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흠명기>의 이 기사는 일본 내의 사건임을 반증한다고 보는 所以이다. <삼국사기>를 일람하면, 도리어 백제가 신라의 구원을 요청하여 고구려를 격퇴하거나 백제의 왕녀를 신라의 진흥왕에게 시집보낸 혼인정책을 펴거나, 또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공방전을 틈타서 전격적으로 양군을 기습하여 영토확장을 꾀하는 사건들을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주요 기사들만 간추려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중략) 지명관계상 주요기사들 중략함.

 

<흠명기>14년(544년)의 연대를 전후하여 韓地에서 일어났던 주요사건들을<삼국사기>에서 가려내어 비교한 셈이였다. 비교한 결과는 신라와 고구려가 공모하여 백제 및 임나를 공격하려고 했다는 <일본서기>의 가시를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더구나 흠명 12년(551년)에 백제의 성명왕이 친히 자국의 군사 외에도 신라 및 임나 2국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쳐 漢城을 되찾고, 또 진군하여 평양을 쳐서 모두 6군의 땅을 회복했다는 <일본서기>의 기사는 두 가지 면에서 명백한 杜撰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 하나는, 한지에서 진흥왕 12년(551년)에 신라 장군 거칠부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공취한 기록을 멋대로 각색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해(551년)에 백제.신라.임나가 연합하여, 고려(기존 설로는 한지의 고구려)를 쳐 한성을 탈환하고 또 평양까지 공격하여6군의 땅을 회복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5월엔 신라와 고려가 공모하여 백제 및 임나를 치려고 할 뿐 아니라 먼저 안라를 빼앗아 일본로를 차단하려 한다고 하여, 이처럼 앞뒤의 기사가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은 가히 이율배반적인 문맥이다.

 

 <삼국사기>의 어느 구석에도 이런 줄거리에 부합되는 사건은 없으므로 이것은 한지의 사정을 기록했던 것이라 볼 수 없다. 따라서 <흠명기>에 신라(시라기)와 柏國(고마)가 공모하여, 일본의 군사가 치러 오기 전에 먼저 안라를 빼앗아 일본과의 길을 끊어야 한다고 밀모했던 그 배경은 큐슈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의 의문점 해소는 아래와 같다.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앞서 전제한 것처럼, 안라는 당시 한반도의 함안 땅이 아니라 큐슈의 축후천 동쪽 (아나카와(穴川)에 비정)에 있었고, 일본의 기나이 조정에서 구원군이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슬러오기 전에 안라를 선점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될 때 모든 의문이 해소되는 것이다

 

일곱째, 케나노오미가 熊川(一書에 임나의 구사모라(久禮牟羅))에서 신라.백제 두 나라 왕을 불렀으나 왕이 직접 오지 않고 사신을 보내므로 노하여 꾸짖은 일, 그로 인해 신라가 伊叱夫 禮智干지 로 하여금 군사 3천을 이끌고 천황의 칙언을 듣고자 출동하자, 이에 놀란 케나노오미가 웅천으로부터 임나의 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나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라군은 물러나 多多羅의 들판에 이르러 석달을 기다렸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다다라(多多羅 )를 지금 부산의 다대포에 비정하는 기존설을 인정하자면,케나노오미가 있던 김해(금관가야)를 거쳐 가야 하는데, 신라 군사 3천이 금관가야의 영역을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는 셈이 된다. 이것은 명백히 김태식(金泰植/홍대교수)의 다음과 같은 근거 없는 추정에 쐐기를 박기에 충분한 반론이다.

 

 [탁기탄이 신라에게 병합되고 안라에 백제군이 진주해 들어왔으니, 이제 가야 남부 지역에서 독립세력은 낙동강 하구 부근의 남가라와 탁순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자체 내의 결집을 통해서 힘으로 자기 보존을 유지하기는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 지역이 對倭(대 왜국) 교역상의 요충지라는 점을 빌미로 하여 백제. 신라의 세력균형에 따르는 타협을 이끌어내서, 그 위에 자기 지배체제를 보존시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 안라 진주(이는 계체기)25년(531년)12월조의 細註에 인용된 <백제본기> 소재의 [太歲 辛亥(531년)3월,  군대가 나아가 안라에 이르러 걸모성을 영위했다]라는 기사를 근거로 한 531년의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필자)는 결과적으로 신라의 의구심을 유발시켜 남가라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고 보인다(김태식의 책 p.220)

 

 김태식의 이런한 추정과는 달리 529년에 벌써 신라 군사들이 구사모라(창원)로부터 금관가야를 거리낌없이 가로질러 다다라(다대포)까지 넘나들고 있었다는 셈이 되는데 이 점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또 529년이라면 이 연대에 고구려왕 興安(안장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에 침입하여 북변의 혈성을 함락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백제는 좌평 燕謨(연모)로 하여금 步騎(보기)3만을 거느리고 五谷原(황해도 서흥?)에 크게 전쟁을 하였으나 참패하고 전사자가 2천여명이나 되었다. (위의 인용한 (삼국사기)<백제본기>성왕 7년(529년) 10월조 및<고구려 본기> 안장왕 11년(529년)10월조 참조) 실제 이 무렵 백제는 북진하지 못했던 시기이므로, 일방적으로 고구려군에 의해 백제의 북변을 유린당하였던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식은 531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이미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부터 강을 건너 하동으로 상륙하여 진주(菁州)의 남강(菁川)으 南岸(남안)을 거쳐 함안까지 진공해 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하였으나, 이것이야말로 단 한 줄의 문헌적 근거나 기록이 없는 소설적 상상이며,나쁜 의미에서 역사의 조작과 날조이다.

 

 앞에서도 미리 지적한 바 있듯이, 신라가 阿尸村(아시촌) 혹은 아시량국 -云 아라가야(함안)에 소경을 설치했다는 <신라본기>의 지증마립간15년(514년) 정월조의 기사가 보인 뒤로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한 법흥왕 19년(532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함안에 소삼정을 설치한 진흥왕 5년(544년)과 지금의 진주에 청주서(菁州誓)가 설치된 진흥왕 23년 (562년)까지 진주 지역에는 <삼국사기><백제본기>난 <신라본기>에서 백제가 침공해 온 전투의 흔적은 한 구절도 없다.

 

 도리어 일찍부터 신라가 백제와의 남쪽 변경인 이곳 서부 경남을 경략해 온 기사들은 흔하게 눈에 띈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6년(201년) 2월조에,[가야국이 화친할 것을 요청하였다.(가야국請和)라고 하여, 그 무렵 강성해져 가는 신라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가야국이 화친정책을 시작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신라본기, 나해이사금 조에 나오는 [加耶]와 [加羅]는 다른 지명이다 

 

 

同王 14년(209년) 7월,[포상팔국이 加羅를 침략하려 도모하므로, 가라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왕은 태자 우노와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이를 구원케 하니 그들은 출격하여 팔국의 장군들을 쳐 죽이고 그들에게 사로잡혔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 보냈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6월 2월 조의 [加耶]와 14년 7월조에 나오는 [加羅]의 국명 표기상의 차이점이다. 기성 사학계는 지금까지 이 같은 표기상으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동일 국명의 異表記(다른표기)라고 보아 둘다 김해 금관가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같은 왕으 재위기간 중에 등장하는 기사에서 가야와 가라를 구분조차 못하고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 멍청하게도 동일 국명을 혼동해서 이처럼 달리 표기했다고 믿어 버리는 기성 사학계의 발상을 순진하다고나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나 해야 할지 참으로 딱하다 

 

<삼국사기>권48 <열전>8 물계자전에 의하면,<신라본기>奈解이사금 14년 7월조의 이 [가라]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함안의 [아라가야]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원문은 이러하다.

 

 "물계자는 나해니사금 때의 사람이다......이 때에 포상의 팔국이 함께 모의하고 阿羅國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마침내 팔국의 군사를 패배시켰는데, 이 전역에서 몰계자는 큰 공이 있었다."

 

이병도도 안라를 한반도 아라라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가라]를 [아라] 임을 혼돈하고 ..

 

 기록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기성 사학계가 [가야]와 [가라]를 같은 국명인 금관가야라고 우기는지 모를 일이다. 이병도는 <삼국사기>역주에서,[물계자는 아라(지금의 함안)라고 씌어 있으니,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갑자기 판단키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나, 아마도 여기 이 [가라]가 [아라]임을 믿지 못하고 혼란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일본서기>의 安羅를 한반도 阿羅(아라)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릇된 고정관념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주의 깊게 분석해 보면, 나해니사금 6년에 가야(금관가야)와 신라에 의탁하게 되는 계기를 보여 준 사건이 바로 浦上八國(포상팔국)의 阿羅(아라) 침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라가 포상팔국을 격파하고 [아라]를 구원한 뒤, 동왕 17년(212년) 3월조에 [가야에서 왕자를 보내어 인질로 삼게 되었다(加耶送王子爲質)]라고 하여, 이때 금관가야는 신라의 힘에 傾倒(경도)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나중 <삼국사기>를 통해 본 신라의 영토확장에 관한 자세한 고찰에서 후술키로 하겠다.

 

아무튼 신라에 의해 정벌당한 포상팔국의 이름은 다 전하지 않지만, 물계자전에서 보이는 골포(지금의 창원). 柒浦(지금의 칠원).고사포(진해)의 3국과 또 (삼국유사) 권5 <同人傳>에 나타나는 保羅(미상).古自(고성)史勿(사천) 등의 나라들이다.

 

 이와 같은 추세로 신라가 그 강역을 벌써 3세기 무렵부터 서부 경남에까지 서서히 뻗쳐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눌지마립간 25년(441년) 2월에 [史勿縣(지금의 사천)에서 꼬리가 긴 흰 꿩을 바치므로 왕은 기특하게 여겨 그 현리에게 곡식을 하사하였다]라고 나온다.

 

사천에 있던 사물현은 포상팔국이 가라(아라)를 침공한 203년 뒤에 서부 경남에서는 제일 먼저 신라에 현으로 병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신라에 가까운 경남 중부의 포상팔국이나 다른 작은 부족국가들도 신라에 합병 또는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보는 게 순리일 것이다.

 

이리하여, 지증마립간 15년(514년, 법흥왕 원년) 정월에 [아시촌: 지금의 함안]에 소경을 설치하고 7월에 6부 및 남쪽 지방 사람들을 이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고 한 것은 신라가 강성해져 간 저간의 추세로 보건대 극히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함안으로 이주케 하여 人戶를 채운 그 남쪽 땅이 어디였다고는 명백히 밝히지 않았으나, 그 무렵 이미 신라에 병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위의 포상팔국 및 경남의 중서부 일대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덧붙여, [법흥왕 11년(524년) 9월에 왕은 남쪽 경계를 순행하여 경계를 개척하였는 데, 가야국 왕이 來會(와서 모였다) 하였다]라고 나온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532년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백제가 경남 일대를 넘보거나 쳐들어올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서부 경남인 진주 남강의 南岸으로 해서 함안까지 진공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삼국사기>를 통틀어 눈을 씻고 보아도 그런 구절은 한 구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기존 한.일 강단사학계의 임나위치(가야연맹과 동일)가 전남 지방에 해당된다는 결론은 명백한 허위

 

여덟째, <계체기> 7년 (513년) 6월조에, 백제는 오경박사 段楊爾(단양이)를 보내 [반파국이 신의 나라인 (백제 영토인) 기문 땅을 빼앗았다]고 한 대목과 同 11월에 [기문, 대사를 백제국에 주었다]고 한 그 기문,대사의 위치에 대해 기성 사학계가 각각 전북 남원의 기문천 유역과 섬진강 유역의 경남 하동에 비정한 이래로 별다른 이론을 보이는 이가 없어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일본의 <신찬성씨록>의 [길전연조]에서는 기문을 임나의 동북방이라 했는데,  이 말은 곧 기문이 전라도 남원 쪽이라면, 임나는 그 반대쪽인 남원의 서남방인 지금의 전남 지방이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일본 및 한국의 이른바 강단 사학계의 기존 설인 任那(임나) 즉 가야연맹이 전남 지방에 해당한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이 또한 역사의 실상과 어긋나는 명백한 허위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여러가지 오류와 모순들은 도대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일본서기> 임나 관련 고대 지명들에 대한 위치 비정의 철저한 엉터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한번 뒤틀린 판단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다음 논지 전개의 발단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이에서의 혼란은 끝없는 왜곡과 판단착오의 악순환을 가져와, 마침내 고대사의 인식체계 전반을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끌고가 거짓 위에 설정케 한 심각한 현상을 초래한 셈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강단 사학을 통해 배워 온 한일 고대 관계사는 이처럼 거의 다 사실이 아니다!

 

 이 충격과 깨달음으로부터 완전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하고 잘못된 과거의 고정관념의 틀을 과감히 깨야 할 절박한 시점에 와 있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사의 난문제 중 하나인 가야사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이 지역에 산재한 감추어진 유적. 유물을 발굴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실을 재구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역사를 실증적으로 조명하는 방법론의 전부는 아니다. 특히 가야사에 관한 문헌기록의 부족을 메운다는 명분 밑에 <일본서기>의 임나 관련 기사를 그대로 가야관련 기사로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 역시 그렇다.

 

게다가 일본 사학계가 설정해 놓은, 논리에 근거하지 않은 私見(개인의견) 내지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 들여 땜질하는 방식의 구태의연한 학문태도에 의존하고 [임나사]를 [가야사]의 인식체계로 대체하는 한,  유적. 유물의 발굴 자체가 역사의 보편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유물의 비교우위론적 측명에서 논하더라도, 일본보다 훨씬 선전적이고 문명화했음을 증거하는 우수한 가야 출토 유물을 눈앞에 놓고서 당시에 후진적인 왜의 무력으로 한반도 남부를 제 집 안방처럼 넘다들며 정복한 것처럼 기술된 <일본서기> 기사의 신빙성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그러자면 당장 고대 가야 지역의 출토 유물보다 낙후된 왜의 武具類(무구류)를 증거물로 삼아 이를 설명해야 하는 자가당착에 스스로 빠지고 말 따름이다.

 

. 구체적인 예를 한두 가지 들자면, <흠명기>5년 (544년)11월조와 14년(553년) 8월조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그 좋은 예이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성마다 5백 명씩과 아울어 우리(백제) 병사로써 채워(신라인들의) 농사짓기 못하게 하여서 핍박하면, 구례산의 5성은 스스로 병기를 내던지고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탁순의 나라도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흠명기)

 

지금 임나의 일은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은혜로써 속히 그 대신할 사람을 보내시어 임나를 다스리십시오. 또 해외의 모든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합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천황이 보내주시어 강적을 방비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하늘의 은혜로써 많은 활과 말을 주십시오.(흠명기)

 

 

 요컨대 신라의 강성함에 대응키 위해 백제가 일본 천황에게 군사를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의 군사가 대거 한반도로 출동하여 성마다 병사로 채우면 싸우지 않아도 신라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항복할 것이라는 등, 또 임나의 위급함을 다스릴 수 있은 것은 일본 천황밖에 없으므로 속히 많은 활과 말을 보내 달라는 등 마치 한반도 남부의 옛 가야연맹체의 무구류가 극히 보잘것 없고 초라한 양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활과 마필을 일본에 요청하고 있는데, 그 의미가 결국 현해탄을 건너 마필을 운송해 달라는 것과 다름없다.

 

 

고고학적 출토 유물의 실상은 일본 보다 우위에 있는 가야제국,기사의 내용은 한반도 내용이 아님ㅡ일본 사학들의 그릇된 학문 답습, 반성해야...

 

 

그러나 고고학적 출토 유물의 실상을 놓고 볼 때는 옛 가야 제국의 영역에서 발굴된 각종 무구류의 우수함이 당시의 일본보다 훨씬 선진화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신라보다 앞서 있음은 그 동안의 유물 발굴 성과로도 부인할 수 없게 가시적으로 실증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도 기성사학계가 위 <흠명기> 기사 내용이 한반도 지역의 관계사를 서술한 것으로 인정하는 그 이론 자체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출토 유물을 대하는 과학적 탐구의 부족에도 문제가 있다. 한국의 배경 밑에서 해석을 시도하려고 들었던 과거의 일본 사학들의 그릇된 학문 풍토를 그대로 답습하는 연구 태도부터 반성해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김태식(홍익대 교수)은 후기 가야 남부제국의 소멸 과정을 논했지만 주로<일본서기> 임나 관련 기사를 바탕으로 출발, 소위 [임나흥망사]를 한반도 남부 지역의 [가야사]에 적용함으로써 사실과 그 해석에서 상치되는 오류가 필연적으로 발생하였다. 더욱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일본서기> 속의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부정하면서, 그 임나일본부를 활동 근거로 삼아 임나에서 활약한 것으로 기록된 왜 조정의 파견 사신 및 왜장들의 활약상은 인정하는 모순된 견해를 보이는 것도 아직까지 [임나사]와 [가야사]를 혼동한 연구자 스스로의 이론 정립이 미처 덜 된 상태의 반영으로 보인다. 따라서 논리에 근거하기보다 다분히 주관적인 추정과 편의주의적인 역사 해석에 대해 불신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한연 귀결이다.(끝) <임나신론의 저자 /글돋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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