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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트남 참전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군부독재시절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한 말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명언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가 변형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통용되던 것을 빗댄 것이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당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받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월남)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번 돈(전쟁특수 포함 약 10억 달러)이었다. JP가 말한 ‘빵’은 국민의 핏값이었다.
베트남전, 뭘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은 32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000여명, 정확한 집계조차 힘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뭘 위해 국민의 피를 이국땅에 뿌렸을까? JP는 “월남이 사실상 공산군에 포위된 상태였다”며 “자유 우방들은 월남을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참전 이유를 설명했다.
▲ 1966년 10월13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7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전 유세에서 “만약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 내 추측으로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베트남의 공산화돼 중국 하에 놓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군이 대신 간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돼 중국 영향력에 놓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1954년부터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지 않다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북베트남(월맹)에는 공산당, 남베트남에는 친미정권(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친불(한국으로 보면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주인만 바꿨을 뿐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미국의 개입은 명분이 부족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갈등이 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며 “베트남이 통일된 지 4년도 되지 않아 양국이 충돌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 오판이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개입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JP는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자신이 64년 9월 미 상원의원들에게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국 매독스 호를 선제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됐다는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 1966년 8월18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미 의회에서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의 미국 공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참전 반년 전인 64년 5월 미국 존슨행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고, 통킹만 사건 초기에도 곳곳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렇게 참전한 미국은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미군들조차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북베트남인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다. 베트콩에 우호적인 남베트남 민중은 포섭해야 할지 배척해야 할지도 기준이 없었다.
미국은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대만, 필리핀 등 6개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용병 수당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에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전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시아 군인의 비용을 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결국 한국군의 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싸우다 나가서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인데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면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황인종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어야 한다”고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 필립 하비브의 말을 옮겼다.
▲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헬리콥터가 지원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사진집
6개국 중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 팔아 얻어낸 빵은 충분했나?
한국군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은 명분만 얻은 게 아니다. 1970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월남 참전국 미국 지원내역에 대한 ‘사이밍턴 청문회’에 따르면 1인당 군 유지비용은 미군이 1만3000달러, 한국은 5000달러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1인당 80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한국군 32만명을 파병했으니 미국은 약 25억6000만 달러를 아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한국군 파병이 늘어날수록 실제 비용도 적게 들고 미 참전군 숫자를 줄일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군 수당은 심지어 자기 나라를 지키는 월남군보다도 낮았다. 1967년 합동연감에 따르면 이병 수당을 보면 미군은 235달러, 월남군 55달러였지만 한국군은 51달러였다. 장교들 수당도 낮은 수준이었다. 미군은 569달러, 필리핀 475달러, 태국 406달러였지만 한국군은 190달러였다. 미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3600만달러였다. 군 병력 10%를 채워주고 미국 전비의 0.1%를 얻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JP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피로 얻어낸 빵은 어디로 갔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기준으로 하사 이하 사병들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인 경우 34만원(1320달러)이 지급됐는데 당시 직장인 1년 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임은 사실이지만 돈을 번 과정이 정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 참고)
군인뿐 아니라 기업 소속 기술자·근로자로 간 사람들도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71년 2월에는 ‘한진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 대한항공 빌딩에 몰려가 매표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농성자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한진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윤충로, ‘베트남 전쟁시기 월남 재벌의 형성과 파월 기술자의 저항’ 참고)
전쟁으로 번 돈은 노동자들에게 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과 박정희 정권의 밀월관계를 살펴보자. 백악관 출입기자 출신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조중훈이었다. 그는 박정희 비자금의 운반책이었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를 정치자금 3억~4억엔으로 매수하는데 조중훈이 핵심 역할을 했다.
1973년 11월에는 JP가 박정희 친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었다. 문명자에 따르면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半)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었고,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1주일 후인 1973년 8월15일 청와대로 불려간 조중훈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사건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명자에 따르면 조중훈은 다음 날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 돈 1억 엔을 건넸고, 그리고 8월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후 한진은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 조중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진은 790만 달러 규모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체결하는 등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한진은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그렇게 얻은 빵은 떳떳한가?
JP는 증언록에서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라며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방어조차 힘들었던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과연 자랑스러웠던 일일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등의 구호를 내걸며 월남 참전군을 ‘평화의 십자군’으로 포장했다. 전시 인권유린의 위험성은 지워졌다.
▲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군이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최용호 전쟁평화연구소장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한국군 재판기록에 65년~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치상 523건 등이 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돼 있다. 당시 베트남에선 한국군에 대해 ‘잘 싸우지만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JP 말대로 “역사의 드문 경험”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기억은 잊은 채, 오로지 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만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전 전사자는 총 110만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150만명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당한 전쟁이었다.
▲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숨어있던 베트콩을 생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랐나?
한국이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을 지원했다면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했을까? 당시 한국군이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한미군이 있어서다. 베트남 파병은 60년대 미국에서 제기됐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지연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은 전투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 한국의 추가 파병을 막는 형식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도발건수는 67년에 급증했다. 비무장지대 주요 사건이 65년 42건, 66년 37건이었지만 67년 423건으로 약 10배가 늘었다. 1968년은 안보위기의 해로 불린다.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부대는 청와대를 습격하려했고,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한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의 전략은 유효했다. 실제로 1968년 여름에 예정됐던 5차 파병은 1968년 안보위기로 무산됐다.
같은 시기 국내 독재체제는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3연임할 수 있는 개헌을 69년에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징병제가 강화됐고, 주민등록제 제도화도 이 시기에 완료됐다. 적어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했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생명보다 돈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던 64년으로 돌아가 보자. JP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피해 2차 외유(6월18일~12월31일)를 떠난 상황이었다. ‘4·19혁명 계승·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정권의 실체적 성격을 드러낸 상태였다. JP가 “2차 외유 중 파병을 계획”한 이유는 악화된 여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자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은 잦아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권력은 공고해졌지만 그들이 내건 베트남전의 애초 목표는 얼마나 달성됐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공산화와 중국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목표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실패했다. 1968년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감축을 보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자는 목표 역시 실패했다.
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을 판단하는 잣대는 경제적 득실로 굳어졌다.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경제적 이득만이 강조됐다. 이제 한국에서는 전쟁은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보다 ‘돈 벌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실추, 수십만 명이 국가 폭력에 쉽게 동원되는 현상,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젠간 제기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잊혔다. JP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다. JP에게 듣는 베트남전은 반쪽의 기억에 불과하다.
2. 5.16 구테타
. JP, 군부 중심이자 5·16 설계자?
쿠데타 세력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 중 하나는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은폐하는 일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미국은 박정희 좌익전력에 대해 의심했고, 북한은 좌익세력의 쿠데타를 환영했다. 5·16의 성공을 위해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덮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안정을 위해 ‘반공’은 지속적으로 악용됐다.
증언록 시작을 알리는 3월2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의 제목은 <5·16 반공 국시, 내가 넣었다>이다. JP가 고민 끝에 만든 ‘5·16 혁명공약’ 제1항 반공국시가 박정희를 위한 공약이었다는 뜻이다. JP는 박정희에 대해서도 미화하지만 본인에게 이익이 될 만한 수준까지만 했다. 증언록 9회에서 “JP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고 했다.
JP는 5·16과 관련한 기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뒤집었다. 1963년 8월 쿠데타 세력이 발행한 책 ‘한국군사혁명사’에는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이 1960년 11월9일 신당동 박정희 소장 집에 모여 “정군과 구국을 위한 혁명을 확인하고 거사를 위한 동지의 조직에 전력하기로 서로를 격려했다”고 나온다.
JP는 이에 대해 “엉터리(지어낸 이야기)”라며 당시 박정희 소장 집 회동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국군사혁명사’는 JP가 해외에 있을 때 작성됐는데,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5·16을 주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넣었다는 것이다. JP에 따르면 5·16의 중심은 박정희가 아니라 JP 본인이다.
▲ 1962년 11월 한일 국교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귀국 인사차 박정희 의장을 예방했다.
@연합뉴스
JP가 박정희를 허수아비처럼 묘사한 부분은 더 있다. 소이부답 1회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내가 장도영 체포”>에 따르면 “박정희가 18년간 집권했지만 대통령을 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은 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라고 했다. 이런 박정희를 대신해 장도영을 체포하는 등 군사정권을 이끈 장본인은 JP다.
장도영 14대 육군참모총장은 1960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문의 명의자로 군정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이다.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장도영을 5·16 간판으로 내세웠는데 그는 같은해 7월 ‘반혁명혐의’로 체포돼 숙청됐다. 결과적으로 장도영은 이용당한 셈인데, JP는 “장도영이 혁명을 파괴할 것 같아” 체포했다고 포장했다.
5·16은 정군운동의 연장선인가?
‘한국군사혁명사’에 따르면 박정희 소장은 4·19 이전에도 쿠데타를 기획했고, 사실 한국군은 이미 1950년대 즉 이승만 정권 때부터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부상해있었다. 5·16 거사주체들은 부패한 군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군 운동(군 개혁)에 나섰지만 무능한 장면정부에 의해 좌절되자 불가피하게 ‘혁명’을 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과 5·16쿠데타’에 따르면 거사주체장교 중 일부가 정군운동으로 예편된 송요찬 11대 육군참모총장에게 이승만 사임직후(1960년 5월) 찾아가 군을 움직여 정권을 장악해달라고 했으나 송요찬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바로 다음날 송요찬에게 사임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했다.
비슷한 일은 최영희 12대 육군참모총장에게도 있었다. 조갑제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1960년 6월경 JP가 최영희를 찾아 “나라가 혼란하고 좌익이 발호하고 있는데 군이 가만있을 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거절당했다. JP와 15명의 장교는 최영희의 용퇴를 요구했다가(16인의 하극상 사건) 군법회의에 넘겨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1960년 11월 이미 장도영에게 거사 계획을 말했다(장도영은 이를 부인). 군을 정화하겠다고 나선 정군파들은 왜 정군운동의 대상자들에게 쿠데타를 도와달라고 했을까? 육군참모총장을 내세운 것에 대해 홍석률 교수는 “(한국)내부적으로 장도영 총장을 내세우면 쿠데타가 소수 장교집단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전군의 지지를 받고 확실한 반공 쿠데타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갑제의 위 저서에 따르면 실제 거사 때 동원된 핵심병력은 김포 해병여단, 6군단 포병대, 공수단이었는데 이 중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과 공수단장 박치옥은 육사 5기생으로 박정희보다는 장도영과 더 친밀한 관계였고, 장도영이 쿠데타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여기에 참여했다고 했다. 육참총장을 끌어들이는 것은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시선도 중요했다. 친미주의자였던 장도영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와 친했다. 쿠데타 직후 미8군이 반발하자 JP는 자신이 미군을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16 참가자로 최고회의 정보분과 위원이었던 방원철은 저서 ‘김종필 정체’에서 미군을 설득한 것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미 정보기관과 접촉해 성사시킨 사람은 전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였다는 설이 당시엔 기정사실처럼 돌아다녔다.
어찌됐건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에게 보내는 서한은 장도영 이름으로 전달됐고, 미군은 일단 쿠데타를 인정하기로 했다. JP는 쿠데타 보름만인 1960년 7월 초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어 체포했다고 밝혔다. 쿠데타 주도세력에게 장도영은 미군 방탄용에 불과했고, 장도영은 순진했다.
5·16은 혁명인가?
홍석률 교수는 “확실한 것은 군 쿠데타 모의는 정군운동이 완전히 좌절된 시점이 아니라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병행해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5·16의 성공원인은 크게 2가지다. 박태균(서울대 교수), 김일영(성대 교수) 등은 주로 당시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 등 한국 정치지도자의 소극적 대응을 원인으로 꼽고, 홍석률 교수는 한미관계에서 원인을 찾는다.
JP는 증언록 곳곳에서 부패한 군 수뇌부와 이를 개혁하지 못하는 장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한다. 정군운동과 무관하게 군 내부에서 부패한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원철의 저서 ‘김종필 정체’에 나온 김형욱(이후 중앙정보부장, 육사 8기)과 JP의 대화를 보면 5·16이 사적이익을 위한 쿠데타였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JP는 “4·19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거사 명분이 사라졌다”며 “한발 빨리 거사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형욱은 “자네 그게 무슨 망발인가”라고 힐책하자 JP는 “그게 무슨 소린가, 망발이라니”라고 답했다. 전쟁이 끝나고 장교들의 승진이 밀려있던 답답한 상황을 뒤집을 쿠데타가 시민혁명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몸을 숨겼고,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했다. 쿠데타 세력이 작성한 ‘5·16 혁명실기’에 따르면 장면 정부는 4·19 1주기 시위진압을 위한 군사계획인 ‘비둘기 작전’을 구체화했고, 쿠데타세력은 이를 이용해 쿠데타를 성공했다. 장면정부는 민주적인 개혁을 하다 붕괴된 것이 아니라 민주적 요구를 배반하고 군대를 정치에 이용하다 당한 것이다. 쿠데타세력은 장면정부의 무능을 이용했을 뿐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군사혁명사’에 미군이 정군운동을 반대한 사실에 대해 비판하기는커녕 제대로 서술하지도 않았다. 또한 쿠데타 이후 정군운동 정신을 이어 군 개혁을 단행하거나 정군을 반대했던 미군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작전통제권을 회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 유지를 위해 반공을 내걸었고, 미국 요구에 맞춰 한일회담을 밀어붙이고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5·16이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21세기 위정자들조차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 질문에 JP는 이렇게 답했다.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증언록은 모두 5·16을 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증언록 7회에는 역술인 백운학과 대화를 길게 실으며 그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박정희가) 20년은 간다”고 한 사실이 나온다. 5·16은 혁명이고, 장기집권은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주려던 의도였을까.
3. 한일 협정/독도 폭파 발언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제2의 이완용”이라고도 불린다. JP는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한일 청구권 협상을 진행하면서 매국노, 제2의 이완용 같이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며 “세상을 바꿔 가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가혹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쿨’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할 말을 해나가는 게 더 효과적이다.
JP는 왜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받게 된 걸까? 지난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 때문이다. 1961년부터 한일회담을 주도한 JP가 굴욕적인 회담으로 돈 몇 푼에 식민지 피해를 ‘퉁’쳤다는 지적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가 열리지만 한일협정은 위안부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일협정이란 1965년 6월22일 체결(12월18일 성립·발효)된 한국과 일본 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부속 협정 4가지(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를 가리킨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를 10년에 걸쳐 받았고, 식민지배의 피해를 받은 개인은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렵게 됐다.
박정희의 친일경력이 여전히 논란이 되는 가운데 “매국행위”라고 비판받는 한일회담에 대해 JP가 어떻게 해명했는지 관심을 끈다. ‘소이부답’에서 한일회담 내용은 24회(4월27일자)부터 시작된다. 24회에서 지난 2005년 도쿄에서 했던 연설 전문을 중앙일보 세 면(8~10면)씩이나 할애해 실은 것을 보면 JP가 이 연설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3일 도쿄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 다시보기
JP의 연설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금년(2005년)은 1905년 일본이 한국과 보호조약을 맺은 지 100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60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보호조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은 을사조약에 대해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체결했다’고 했다. 일본의 관점이 녹아있는 ‘보호조약’이란 표현이 여과 없이 등장했다. 실제 을사조약은 한반도 식민화를 위한 예비수단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강제조약이었다. 체결당시 정식 명칭도 ‘한일협상조약’이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연설 중에 한일교류의 중요성과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번갈아 등장했다. “최근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비롯된 양국 갈등에도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성장한 양국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한일교류의 시작인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자화자찬은 연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JP의 연설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지적을 인용해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했다. 요지는 2005년 일본인들은 일·러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데 일본이 당시 전쟁 승리에 취해 교만해져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내용이다. 또한 JP는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한일관계를 합리적으로 보는 정치인으로 보인다.
JP가 연설을 통해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일관계는 시혜니 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고, 결국 양국의 상호 이익으로 돌아오고 있다.” JP처럼 일제를 비판했던 정치인이 한일 협력을 강조한 것을 보면 JP를 ‘제2의 이완용’이라고 하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JP의 도쿄 연설을 증언록에 비중 있게 실은 이유라고 해석할 수 있다.
JP는 과연 누굴 대표했나?
한일협정 결과 한국이 받은 3억달러(무상)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전쟁배상)청구권’으로 해석하고 JP도 증언록에서 ‘청구권’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자금’으로 부르고 있다.
금액이 적다는 비판도 있다. 1960년대 당시 야당에서는 25억~30억달러를 주장했다. 일본에게 4년 지배당한 필리핀은 1955년에 무상지원 5억5000만달러로 합의했고, 역시 4년간 지배당한 인도네시아와 미얀마는 각각 2억2308만 달러, 2억 달러로 합의했다. 한국은 일본에게 약 36년간 지배당했다.
하지만 JP는 증언록에서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며 “패전국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고 말했다. 전범국의 재정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JP는 피해자이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한국의 관점이 아닌 범죄자이자 상대국인 일본의 관점에 서 있었다.
노다니엘(일본학 박사, 월간중앙 객원편집위원)은 저서 ‘독도밀약’에서 다소 충격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외교상대를 ‘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간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독도밀약’에 따르면 오노 반보쿠(자민당 부총재)가 JP(당시 36세)를 처음 만난 곳은 목욕탕이었다. JP는 오노가 초면임에도 “오, 선생님 물건 크네요”라고 했다. 노다니엘은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자민당 부총재를 만나서 하는 대화가 아니라 순진한 청년이 목욕탕에서 동네 선배를 만나서 하는 투의 말”이라고 평했다. 오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부자관계”라고 하며 “아들의 경사를 보러왔다”고 했던 인물이다.
한일회담은 최선이었나?
JP는 증언록에서 상당 부분을 한일회담 당시 자신의 당당했던 태도를 회상하는 데 할애했다. JP는 1962년 11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회담 중 오히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벌써 세 시간 정도 얘기를 하고 있는데 커피 한잔조차 내줄 생각이 없는 거요.” 오히라는 그때서야 커피를 내왔고 JP 앞에서 끙끙대기도 했다.
JP는 오히라에게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풀었고, 그러자 오히라는 이에 감탄해 속내를 털어놨다고 했다. 이어 협상이 진행됐고 JP는 “협상을 네 시간 가까이 진행하면서 3000만 달러에서 시작된 ‘청구권’ 협상 금액이 6억달러+α까지 올라갔다”고 밝혔다. 증언록만 놓고 보면 JP라는 인물은 박정희가 요구했던 8억달러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파해 낸 훌륭한 외교관이다.
▲ 1962년 10월 오히라 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에는 JP의 증언록과 배치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무엘 버거 전 주한미국대사의 미 국무성 전문보고에는 “박정희는 배상요구보다는 원조를 포함한 ‘일괄 처리’에 관심이 있었으며 증거 자료가 없는 일부 청구권의 포기를 먼저 일본 측에 제안했다”고 돼 있다.
이 말을 풀이하면 한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증거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전쟁배상)청구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청구권, 경제협력 등을 묶어서 한 번에 처리하고 돈을 받는 데 초점을 뒀다는 뜻이다. 위 문서에서 버거는 “일본은 이 자금을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적절히 부를 수 있지만 한국은 그것을 청구권에 대한 배상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했다.
협상타결 금액도 미국이 관심을 가진 흔적이 보인다. 1962년 9월26일자 주한미국대사관 비망록에 따르면 한 주한 미대사관 직원은 개인적인 견해로 무상공여 금액은 3억~4억달러 사이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관점을 비춘 적이 있고, 이 범위는 합리적 관점에서 더욱 좁혀질 수 있는데 아마 그 범위는 3억~3억5000만 달러 사이라고 시사했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7월13일 주일 미대사관에 발송한 미 국무성 전문은 “합리적인 협상을 통해 타결을 이루도록 한일 양측에 주재하는 대사관 인력과 영향력을 사용하라”며 “한국정부 최고위층을 접촉해 청구권 문제를 청구권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의 패키지로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청구권 지불, 무상공여, 장기저리차관을 포함한 합리적인 수준의 타결방안을 생각해보도록 설득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JP는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셈이다. 그리고 협상 과정을 자신의 업적으로 미화했다.
JP가 얻은 것은 정치자금
한일협상은 애초 미국의 요구로 시작됐다. 1953년 7월16일 미국무성 정보보고서(No.6287)에 따르면 한일협상은 연합국 총사령관의 주선으로 시작됐다. 또한 한국이 확고한 협상자세를 갖는 이유는 미국에 군사, 경제원조를 받기 때문이고, 일본이 한일협상 타결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는 미국이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 케네디 정부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한일협상 타결을 적극 요구했고,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아가며 쿠데타 세력이 얻은 것은 정치자금이다. 1966년 3월18일자 미국 CIA 보고서 ‘한일관계의 미래’에는 “일본 기업들이 61년~65년까지 당시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6개 기업이 총 6600만달러 지원)”고 돼 있다. 한국이 일본에게 받은 금액 무상 3억달러의 약 5분의 1을 한일회담이 진행되던 중에 5·16 쿠데타 세력이 이미 뒷돈으로 받은 것이다.
또한 이 보고서는 “공화당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는데 정부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 회사가 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고 밝혔다. JP가 증언록에서 이런 기록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은 채 독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남겼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엉뚱한 기록물?
JP와 오히라는 양국 정상에게 회담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합의안을 종이에 작성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이 문서는 2005년 외교부가 공개했다. JP는 이 문서에 대해 “엉뚱한 기록물이 내가 쓴 메모인 것처럼 둔갑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외교부 공개 문서는 메모가 일본어와 영어로 써 있는데 JP는 한글과 한자로 썼다는 것이다.
JP는 “내가 작성한 메모가 장관을 통해 외무부에 전달되거나 보관하는 과정에서 분실됐을 것”이라 추측했다. 메모의 진위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메모 내용은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 수출입은행에서 1억불+α”로 변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한일회담이 대단히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비밀은 불리한 정보는 숨기고 유리한 것만 밝힐 수 있다.
진짜 숨기고 싶은 사실, 독도 폭파론과 독도 밀약설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함께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사안은 ‘독도 폭파론’과 ‘독도 밀약설’이다. 중앙일보 증언록 5월4일자, 5월11일자 등 반복해서 이 신문과 JP는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함께 독도문제에 왜곡이 있다고 주장했다. JP는 한일 양국이 독도문제에 대해 ‘미해결의 해결(해결하지 않은 채 두는 것으로 해결하자)’로 마무리 짓고, 그 과정에서 JP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독도가 방해가 되면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것에 대해 부인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한 뒤 오히라가 뜬금없이 독도 얘기를 꺼냈는데 JP는 “회담 의제가 아니”라며 말을 잘랐다. JP는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일본)에게는 줄 수 없다”고 한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독도밀약문서에 대해 JP는 밀약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JP가 이번에 한마디 말로 부인한 사실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구체적으로 보자. 2007년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11일 당시 일본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 독도. 사진=외교부
1962년 10월29일자 미 외교문서에는 러스크 국무장관이 “독도가 어떤 섬인가”라고 묻자 JP가 “갈매기가 똥이나 싸는 장소”라며 “나는 일본에 독도를 폭파하자고 제안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도 1962년 9월3일 ‘독도 폭파론’을 제기했다. 이날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 예비절충 4차 회의에서 이세키 유지로 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라며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사실 역시 미 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2004년 연합뉴스가 보도한 미국 국무부 (기밀)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박정희도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irritating problems)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노다니엘 박사는 2007년 1월30일 JP의 셋째 형인 김종락(5·16 민간인 신분 가담)을 만나 밀약문서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김종락은 “내가 태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노다니엘에 따르면, 왜 문서를 태웠냐는 물음에 김종락이 “역사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려웠다”고 답했다. 불태운 시점은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신군부가 주도권을 잡아가던 때다. JP가 왜 지금에서야 김종락의 증언을 뒤집었을까? 김종락은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났다.
JP가 이 모든 것을 한마디의 말로 부인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독도문제에 대한 ‘미해결의 해결’ 상태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유지됐다. 2005년 3월21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일본 정부가 매년 3월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구상서를 한국 정부에 보냈다고 밝혔다.
정 의원에 따르면 구상서 내용은 이렇다. “주대한민국 일본국 대사관은 대한민국 외교부에 대해, 다케시마가 역사적, 법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임을 밝힌다. 대한민국이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적인 영유를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문서대장에 기록·보관하고 반론하는 외교문서를 매년 발송한다.
소위 ‘청구권’ 회담을 주도한 JP는 민족반역자로 비판받았다. 시인 김지하는 ‘시체여’에서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본에의 노예화를 추진하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인 1964년 6·3사태는 일본정치가가 아닌 JP의 인형이 태워졌다.
JP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차 외유’를 떠났다. 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1964년)6월18일 아내와 함께 출국해 6개월 동안 세상을 구름처럼 돌아다녔다”고 표현했다. 정치적 책임을 무겁게 느끼며 쫓겨나듯 떠난 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간 힘든 일을 하나 끝내고 휴가를 떠나는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JP는 ‘2차 외유’ 중 베트남전에 한국 장병을 보낼 계략을 꾸민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s://www.mediatoday.co.kr)
4. 공화당 창당과 4대 의혹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허업’은 서비스업과 같이 생산하는 게 없는, 즉 ‘실업(實業)’이 아닌 직업을 말한다. 지난 2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부인 故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정치는 허업”이라며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면 교도소밖에 갈 데가 없다”고 말했다.
‘허업’이라던 정치를 통해 JP가 만진 ‘떡고물’은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떡고물’은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중정)장 등을 했던 JP의 라이벌 이후락이 박정희 암살 이후 194억원을 부정축재한 것으로 밝혀지자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해 유명해진 표현이다. 당시 JP의 ‘떡고물’은 이후락의 그것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1980년 6월1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신군부가 몰수한 JP의 부정축재 금액은 213억4648만원으로 ‘일요신문’을 발간한 61억원 규모의 현대경제일보사, 28억원에 이르는 12만평의 제주 감귤농장, 79억원에 상당하는 640만평 서산 소재 삼화축산, 300돈의 순금제 칼, 50돈의 순금제 황소, 각종 고서화와 골동품 1억3000만원 등이다.
1974년 JP가 부정축재자라는 사회적 여론이 일어나자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장학회’를 설립해 감귤농장과 서산목장 등을 기증해 관리했다. 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제주도 황무지를 개척해 감귤나무를 심고 거기서 재원을 얻어 한국에서 영국의 ‘이튼스쿨’같은 학교를 만들려했다고 밝혔다. 사학과 재단은 70년대부터 최적의 재테크 수단 중 하나였다.
신군부에 의해 213억원을 뺏기고 잠시 쫓겨났던 JP는 노태우 정권 이후 3김정치(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한축을 담당하며 정치인생을 이어갔다. 김영삼 정부 초기인 1993년 함승희 검사 등 수사팀은 안영모 전 동화은행장이 이원조 전 의원, 이현우 전 청와대경호실장에 뇌물을 건낸 혐의를 포착하며 JP의 계좌도 발견했다.
함승희 전 검사는 1995년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전 의원은 수백억원을 은닉했고, JP의 계좌에도 100억원대가 발견됐다”며 “당시 수사과정에서 검찰지휘부로부터 사건을 축소하라는 회유와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DJP(김대중+김종필)연합으로 JP가 실세가 되자 1999년 함승희는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더이상 그 문제에 관해 언급하기 싫다”고 밝혔다. 권력은 허물을 덮는 능력이다.
권력자가 법의 칼날을 피하거나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는 편의주의식 사고방식은 이제 국민에게 익숙하다. 이는 군사독재의 유산이다. 5·16쿠데타 이전 자유당, 민주당 간부들은 정치자금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며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하려 했다. 신익희 민주당 전 최고위원이나 조병옥 전 내무장관이 개인적으로 가난했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구악’을 뺨친 ‘신악’
‘신악(5·16쿠데타세력)’이 독재와 부정선거로 물러났던 ‘구악(이승만 정권)’을 ‘뺨친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은 4대의혹사건 이후였다. 5·16 쿠데타세력이 공권력을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한 정황이 뚜렷하지만 JP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겼고, 중앙일보는 증언록을 작성하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4대의혹사건이란 증권파동, 워커힐 호텔, 새나라자동차, 빠징꼬 등 네 가지 문제에 JP가 수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거액의 돈을 챙겼고 이를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 자금으로 썼다는 의혹이다. 이 사건들은 모두 쿠데타 직후인 1961년 가을부터 벌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JP는 이 사건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1963년 2월25일 해외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4대의혹사건이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에서 문제가 되자 당시 중정부장이자 육군 대령이었던 JP는 준장으로 승진하면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중정부장에서 물러났다. 그때가1963년 1월5일이다. JP는 당시 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도 맡고 있었는데 따가운 시선이 지속되자 당직도 사퇴한 뒤 ‘외유’를 떠난 것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JP는 증언록(34회)에서 “이들 의혹은 비밀 창당 작업을 둘러싸고 번지는 루머들 때문에 실체 이상으로 증폭됐다”며 “겉은 권력비리 사건처럼 포장됐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반(反)JP 권력투쟁이었다”고 밝혔다. 승진과 외유로 훈훈하게 마무리된 사건에서도 JP는 자신을 비판한 이들만 탓하는 모습이다.
JP는 증언록에서 빠찡코 사건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고,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기획했지만 정치자금과는 무관하며 국가 발전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단 잡아떼기 “빠찡꼬는 민주당 정권 때”
빠찡꼬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60년 8월 장면 정부 때였다. 당시 500대가 들어왔지만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여론이 일자 금지됐다. 쿠데타 세력은 1961년 ‘유기장법’을 제정했다. 빠찡코 사건이란 중정이 일본에서 빠찡코 2527대를 들여왔는데 일본 시세보다 고가로 들여와 이를 허가해주며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아 4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챙겼다는 혐의다.
한국정치문제연구소가 펴낸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은 “실제로 강성원, 정지원, 이영근 등이 수입업무를 주관했는데 이 세 사람은 JP의 특명으로 민주공화당 사전조직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빠찡꼬 사건으로 얻은 자금은 그대로 공화당 사전조직(재건동지회) 자금으로 전용됐으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처벌받은 이가 없는 사건이라 그랬을까, JP는 증언록에서 “빠찡꼬는 5·16이전 민주당 정권에서 발생한 일로 처음부터 나나 중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헛소문”이라고 선을 그었다. JP는 4대의혹사건을 해명하며 “욕 좀 먹으면 어떠냐”며 “내 살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했다. 죽기를 각오한 병사만큼이나 욕먹기를 각오한 정치인은 섬뜩하다.
새나라자동차, 투자자가 도망갔다?
4대의혹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은 새나라자동차 사건이다. 1961년 12월부터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차렸다. JP는 “일제 자동차 부품을 수입해 조립·시판하기로 했다”며 “우선 완제품 250대를 면세로 도입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일본 닛산 자동차 수입을 2000대까지 늘려 국내에 있던 ‘시발택시’까지 밀려나 국내자동차 산업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1대당 수입가격이 13만원이었던 자동차를 25만원씩 시중에 판매해 중정은 약 2억5000만원의 부당이득을 얻었다.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 자본금 1억원 중 3000만원은 재일교포 사업가 박노정, 나머지는 JP의 형 김종락이 상무로 있는 한일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충당했다.
▲ 1962년 8월 부평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사진=국가기록원
JP는 증언록에서 “63년 5월 회사가 망했다”며 “돈을 대던 사람(박노정)이 미국으로 도망간 판에 어떻게 수십억원을 빼돌릴 수 있겠는가”라며 횡령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에 따르면 최초 이익금 1200만원의 분배를 두고 JP가 이익을 독점해 박노정이 불만을 품고 진정서를 각계에 보냈다. 그러자 JP는 박노정의 체포를 지시했다.
박노정은 이를 눈치 채고 파자마 바람으로 숙소 반도호텔에서 나와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새나라자동차 건으로 JP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고, 투자금을 떼인 박노정 사건이 화제가 돼 일본에서도 JP의 악명이 드높아졌다. 이 사건은 중정 제2국장 석정선이 책임지고 1963년 구속됐다. 석정선은 워커힐호텔 건설에도 깊이 개입했다.
워커힐호텔 “자부심을 느낀다”
부정한 돈은 또 다른 부정의 씨앗이 된다. 태평양점령군 총사령부 교육국 과장 출신의 언론인 D.W.콘데는 저서 ‘남한-그 불행한 역사’에서 워커힐호텔 건설자금이 그동안 중정이 압수한 ‘북한 스파이들의 자금’과 중정이 받은 뇌물, 밀수로 생긴 자금, 한국군의 부정이용 등에서 나왔다고 단정하고 있다. 워커힐사건은 건설 자재를 면세로 들여온 횡령의혹사건이다.
워커힐 사건은 비밀투성이다. ‘워커힐 30년사’에 의하면 사업 기공식은 1962년 1월5일에 거행됐는데 일반에게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기공 전부터 강제노역은 진행 중이었다. 4대의혹사건 관련 국회 내무위원회가 중정을 감사한 결과 1961년 9월부터 연인원 2만4000여명이 무상으로 노역에 동원돼 공사가 진행됐다.
JP는 “비용과 공기(工期)를 줄이기 위해 육군과 죄수를 동원하고 군의 트럭도 지원받았다”며 “이 과정에서 적절한 행정절차를 밟지 못한 부분은 있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작은 흠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는 것보다 신뢰감을 준다. 또한 행정절차‘쯤’은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불감증은 박정희 정권이 남긴 악습 중 하나다.
JP는 “총 공사비 220만 달러를 투입해 10개월 만인 12월에 완공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워커힐 30년사’에 따르면 총 공사비는 6억4000만원인데 그 중 외화가 약 220만 달러였다. 손정목 전 서울시사편찬위원장은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서 “6억4000만원이면 당시 환율에 따라 493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며 “이 금액으로 엄청난 시설을 할 수 있을까”라며 공사비 축소 의혹을 제기했다.
▲ 워커힐호텔 하비니쇼. 사진=손정목 전 서울시사편찬위원장
워커힐호텔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였던 당시 ‘엄청난 시설’이었다. 설계에 참여한 강명구 회고에 따르면 호텔 모든 건물 안의 어느 곳에서나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차산 기슭 19만 평 터에 26개 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부지 중 약 10만평은 JP가 대한전선 창업주 설경동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그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고, 나머지 땅도 토착민 14명에게 시가의 5분의 1쯤 되는 가격으로 사들였다.
JP는 “워커힐호텔은 내가 직접 지휘한 국가적 작품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중정부장 JP(육사 8기), 중정 제2국장 석정선(육사 8기), 제2국 1과장 임병주(육군 중령)가 워커힐 공사를 주도했고 임병주는 건설사무소장을 맡았다. 건설 자재 중 나이트클럽 회전무대, 전기장치 심지어 시멘트까지 모두 일본제품이었는데 중정에서 무관세로 들여와 15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다고 알려졌다.
JP는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월턴 워커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워커힐호텔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증언록을 할애했다. JP에 따르면 미군이 일본으로 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워커힐호텔을 짓고, 건물 이름은 역대 유엔군 사령관 이름으로 붙였다.
1962년 AP통신이 이곳을 “매춘굴·카지노·주사위판·룰렛장·슬럿 머신 그리고 미인 호스티스를 완비한 시설”이라고 하는 등 일본과 미국에서 이 비밀사업을 감지하고 비판하자 중정이 독단적으로 사업을 끌고 갈 수 없게 됐다. 부랴부랴 ‘국제관광공사법’을 제정해 ‘국제관광공사’를 만든 사실 등에 대해 JP는 말하지 않았다.
증권파동, 중앙정보부의 ‘먹튀’와 민주공화당 창당
1962년 5월 한동안 치솟던 증권이 한순간에 폭락해 5242명의 투자자가 176억6000여만원의 손실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 중에는 30대 젊은 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수많은 가정들이 파산하거나 이혼을 했다. 증권파동은 중앙정보부로부터 시작됐다.
1961년 가을, JP는 공화당 창당자금 마련을 두고 고민 중이었다. JP는 같은해 9월말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를 핵심으로 하는 ‘8·15계획서’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했다. 1962년 1월 충무로1가 카네기홀 2층에 아지트를 만들고 젊은 대학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해 중앙과 지방의 정당사무국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재건동지회 조직부장은 강성원 소령으로 그는 중정요원이었다. 강성원은 증권투기의 귀재로 소문난 윤응상을 접촉했다. 윤응상은 당시 김성곤(남로당 재정위원 출신, 훗날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운영하던 연합신문, 동양통신의 전무였는데 그는 ‘7억환(1원=10환)만 투자하면 3개월 만에 100억환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중정은 5억환을 윤응상에게 전달했다.
윤응상은 이 돈으로 통일·일홍·동명 세 증권사를 설립하게 해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의 70%까지 사들여 주가를 올렸고, 중정요원인 강성원은 농협이 보유하던 한국전력 주식 12만8000주를 ‘지정된 증권회사’에 팔라고 요구한 뒤 5% 싸게 사 주가가 4200% 오르자 되팔았다.
뒤늦게 투자한 이들에게 손해를 떠넘기는 주가조작사건의 원조였던 이 사건은 12명이 구속됐지만 윤응상, 강성원만 법정에 섰고, 1963년 육군보통군법회의는 전원 무죄판결을 내렸다. 증권파동으로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과 망가진 경제가 회복되는데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 공규영 ‘김종필 허망론 그리고 그 종말’, 방원철 ‘김종필 정체’, 이동형 ‘김대중vs김영삼’ 참고)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피해자는 5000명이 넘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JP는 군정이 끝난 지 약 3년 후에 “나 혼자 한 것은 아니며 시작은 같이 해놓고 문제가 어렵게 되자 모두들 발뺌했다”며 억울해했다. 조갑제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JP는 “새 정당을 조직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며 “정당을 만드는 데 국고금을 쓸 수는 없지 않느냐? 그래서 증권시장에서 조달하여 쓴 것인데 재미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만행’은 업적으로 둔갑했다. JP는 증언록에서 “증권시장에 관여한 건 사실인데 경제개발을 위해 자본시장을 활성화해 보자는 게 관여한 이유”라며 “나는 몰랐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1963년 사건송치서에 따르면 4대 의혹 사건을 수사한 김재춘의 중정이 JP가 증권 파동을 주도한 사실을 밝혀냈지만, JP를 외국에 보낸 뒤 은밀히 기소 중지 처분을 했다.
사건 당시 쿠데타 정부는 지하경제를 키우는 데도 한몫했다. 1961년 제정된 금융실명 거래에 관한 법률은 경제단체와 쿠데타 주체들이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축적의 필요라는 명분하에 엄청난 규모의 가명 금융거래를 허용했고, 이에 대한 추적을 제한(영장없이는 원칙적 불가)해 이중의 보호막을 쳐줬다.
기존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들고는 쿠데타 세력은 중정에서 자금, ‘재건동지회’에서 인력을 동원해 1963년 2월26일 공화당을 창당했다. 공화당은 이전 정당과 달리 꽤 발전된 형태의 조직이었다. 그 뒤에는 대한민국 첫 간첩조작사건 피해자인 황태성이 있었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s://www.mediatoday.co.kr)
5. 황태성 간첩조작 사건
박정희는 1963년 12월1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군인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정을 시작한 시점이다. 동시에 ‘빨갱이’라고 공격받던 박정희가 좌익혐의를 벗으며 정권 비판자들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한, 소위 ‘공수교대’가 이뤄진 시점이다. 박정희의 변신은 취임 3일전인 63년 12월14일 간첩죄 혐의로 황태성을 죽이며 확실해졌다.
황태성은 북한 무역성 부상(차관급) 출신으로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JP)의 장인인 박상희(남로당원)의 친구이며 박상희와 그의 부인 조귀분을 소개해 준 사람이다. JP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 따르면 박정희는 어려서 황태성에게 ‘형님, 형님’하며 친하게 지냈다. 익히 알던 사람들이 남쪽에서 쿠데타에 성공했기 때문에 황태성은 밀사를 자처하게 됐다.
JP는 증언록에서 황태성을 “밀사가 아닌 간첩”이라고 했고, “박정희와 자신은 황태성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미디어오늘은 황태성 사건을 분석한 책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의 저자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만나 황태성 사건에 대해 들었다. 그는 3년 간 자료를 수집해 책을 썼다.
▲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저자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김학민 제공
쿠데타 100일 쯤 뒤인 1961년 8월31일 황태성(당시 56세)은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도착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와 JP를 만나러 고향사람 김민하(당시 중앙대 강사), 자신의 조카딸과 조카사위 임미정과 권상능을 만났다. 휴전선을 넘은 지 한 달 반이 지난 61년 10월15일 오전 당시 중앙정보부(중정)장 JP는 장모 조귀분의 전화를 받고 황태성의 소식을 듣게 됐다.
JP는 황태성을 만났나?
JP는 증언록에서 “박정희와 나는 황태성을 만날 까닭이 없고,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황태성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당시 중정 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김형욱(제4대 중정부장)은 JP 대신 박문병이 황태성을 대신 만났다고 했고, 당시 대화록도 있다”며 “JP도 그동안 김형욱의 발표를 따랐다”고 말했다. 박문병은 중정에 파견된 치안국 경감이다.
하지만 JP는 증언록에서 “황태성이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박 경감을 위장시켜 황태성을 신문해보기로 했지만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던 황태성이 대뜸 ‘가짜는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고 말을 바꿨다. 황태성이 중정에 잡힌 게 61년 10월20일인데 JP의 얼굴을 몰랐다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
김 이사장은 “8월31일에 내려왔으면 쿠데타 두 달 반이 지난 시점인데 JP 얼굴을 모를 수 없고, 모르고 내려왔더라도 이쪽 신문만 봐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황태성을 신문한 대화록은 있는데 박문병이 신문하지 못했다면 JP가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JP는 박정희와 황태성이 만난 사실도 부인했다.
박정희도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을까?
김학민 이사장은 미국 정보기관 G2 비밀정보원 출신 CIA요원 래리 베이커에게 진상을 묻는 문명자(워싱턴 특파원, 백악관 출입기자)의 기록을 소개했다. 여기서 베이커는 “황태성이 온 다음 두 달 간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다”며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게 너무 많아 한국에 남아있는 것을 원치 않아 추방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역대 모든 정권이 피라미 간첩 하나만 잡아도 언론에 대서특필하는데 황태성은 거물간첩이라면서 언론에 공개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왜 자신과 박정희가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다고 주장할까? 1963년 10월10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윤보선이 황태성이 공화당을 조직했고 자금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쿠데타 세력은 황태성과 선을 그어야 했다.
또한 JP는 1961년 9월 서해 군사분계선 부근 용매도에 강성국, 김석순 등 남한 대표를 보내 남북대화를 시도했던 사실도 몰랐다고 선을 그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남에서 먼저 제의해서 올라갔는데 준비가 부족해 대화 진전이 되지 않았고, 황태성의 남한 방문은 답방 성격이 크다”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이 남북대화를 위해 밀사를 보냈고 답방 형식으로 황태성이 내려왔다면 그에게 간첩 혐의를 씌울 명분이 사라진다. 따라서 JP가 용매도 회담부터 “몰랐다”고 끊어내야 했다는 게 김 이사장의 분석이다. JP는 증언록에서 용매도 회담에 대해 “육군첩보부대(HID) 자체 대북공작”이라며 “중정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이사장은 “박정희나 수뇌부의 재가 없이 대북접촉을 한다는 건 당시 분위기로서 말이 안 된다”며 “서해안 휴전선에서 미군이 촘촘하게 감시하고 있을 때인데 HID가 몰래했다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증언록 뿐 아니라 그동안 황태성과 관련된 기록 중에서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더 있다.
김성곤은 왜 황태성을 못 만났을까?
황태성은 서울에 내려와 가장 먼저 김성곤(남로당 재정위원, 훗날 공화당 재정위원장, 쌍용그룹 창업주)을 만나러 갔다. JP는 증언록에서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낸 김성곤은 황태성과 친한 사이였지만 김성곤이 일본 출장 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고 했고,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와 김형욱의 ‘김형욱 회고록’에도 김성곤이 IPI(국제언론인협회) 회의 참석차 외국에 나가있어 황태성을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김 이사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70년대 초까지 국민의 99%는 여권조차 없었고, 공항에는 출입기자들이 있어 해외 나가는 사람들을 신문 출입국동정란에 실었다”며 “61년 5월30일~6월3일 해외에 나갔다 왔고, (황태성은 8월31일 내려와 10월20일 중정에 연행) 같은해 10월24일 출국한 기록이 있을 뿐 황태성이 내려왔을 때 김성곤은 국내에 있었다”고 말했다.
문명자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성곤은 61년 5월 IPI 총회를 마치고 워싱턴으로 가 5·16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 김성곤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김 이사장은 “미국이 쿠데타를 지지한다는 것을 안 이상, 김성곤은 당연히 황태성을 피했을 것”이라고 봤다.
▲ 1930년 조선공산당 활동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 황태성.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황태성 소문 바로잡기
황태성은 중정에 잡힌 지 2년이 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963년 말 대선 직전에 알려졌다. 북한 밀사였기 때문에 비밀에 둘러싸였고 정치 지도자들은 제 입맛대로 각색해 소문만 무성했다. 김 이사장은 몇 가지 잘못 알려진 황태성 이야기를 바로잡았다.
조갑제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는 황태성이 김천 어모면에 살았고, 부유한 집안이라 아들과 딸 모두 대구로 유학을 보냈으며 황태성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했다고 돼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황태성은 김천 어모면에 산 적이 없고, 딸은 아예 없으며 아들 둘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과 일본에서 유학했다”며 “황태성은 계성학교가 아닌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올라와 경성제일고보를 다녔다”고 바로잡았다. 황태성 학교에 대해서는 JP도 증언록에서 경성제일고보를 다녔다고 했다.
영남일보 연재물 ‘대구경북 근현대 인물사’에는 황태성이 박정희의 결혼식 주례를 봤다고 돼 있다. 박정희는 1936년 김호남과 결혼했고, 1950년 육영수와 재혼했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황태성은 1936년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있었고, 1950년에는 월북해 주례를 설 수 없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로 떠날 때 황태성이 조언을 했고, 박정희가 휴가 나올 때마다 황태성을 찾아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이는 독립운동가 황태성의 영향을 받은 박정희가 일본군으로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지난 10월 새누리당 논평에서 박정희를 비밀독립군이라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박정희가 혈서를 써서 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한 건 1939년인데 황태성은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어 조언을 구할 처지가 아니었다”며 “공산주의 활동으로 투옥됐고, 나와서도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는 독립운동가에게 일제 괴뢰국 장교가 찾아와 조언을 구할 리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태성은 간첩인가?
JP는 “황태성은 간첩죄로 처형됐다”며 간첩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황태성을 간첩으로 규정하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다. 황태성은 61년 10월20일에 연행됐고 재판은 12월1일 시작됐다. 12월27일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당시 재판은 단심제였다. 김 이사장은 “그때 죽였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는데 형 집행은 늘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국가재건최고회의)은 1962년 1월 단심제를 3심제로 바꾸는 결정을 했다. 제도를 정비해 같은 해 6월부터 3심제가 시행됐다. 김 이사장은 “소급적용 대상도 아닌데 6개월을 내버려둔 황태성에 대한 2심을 시작했다”며 “밀사니까 북한과 접촉하는 통로로 이용했을 수도 있고, 내부에서 죽일지 말지 논의할 시간을 버는 효과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한겨레는 황태성 재판기록을 다루며 황태성이 1963년 법정에서 “소위 적국간에도 (밀사를) 사형치 않는 것이 국제법상 관례인지라 하물며 괴집(괴뢰집단)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극형 선고 필요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며 “원심 판결 후 전향하는 탄원서를 제출했으므로 대한민국 품 안에 돌아오는 피고인에 대해 극형을 처함은 부당하다”고 한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전향서는 황태성의 법률대리인 홍승만이 작성한 것이다. 김 이사장은 “황태성이 전향했으면 왜 사형을 당하느냐”며 “황태성은 밀사로 내려왔고 끝까지 전향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황태성이 군사기밀 등을 탐지해 북에 알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황태성은 1심과 2심 모두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당시 법률대리인 홍승만도 눈여겨볼 인물이다. 홍승만은 항소심을 앞두고 선임된 변호사로 박정희의 법률대리인이기도 했고, 박정희 측근 김성곤, 백남억과 함께 좌익 활동도 했던 인물이다. 훗날 공화당 국회의원이 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글 ‘황태성 사건과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에서 “단심으로 사형판결 받은 황태성 사건을 3심제로 돌린 것이나,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한 것이나, 홍승만 변호사가 변론을 맡아 파기환송을 이끌어내는 등 맹활약을 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황태성을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해 황태성 재판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고등법원으로 내려온 사건은 다시 사형, 두 번째 대법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KBS는 김일성이 준 돈으로 만든 언론”
황태성은 2년간(1961~1963년) 뭘 했을까? 세간의 루머와 당시 야당의 주장은 황태성이 20만 달러를 공작금으로 가져와 공화당 창당 작업으로 사용했고, 일부는 KBS 현대화 자금으로 썼다는 내용이었다. 김 이사장은 “JP의 증언으로 이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황태성 재판 기록에 따르면 황태성은 20만 달러가 아닌 2669달러만 가지고 남으로 내려왔다. 김 이사장은 “20만달러는 황태성 이후 내려온 간첩 이만희의 공작금으로 추정된다”며 “황태성은 김성곤 등 남쪽에 남로당 출신 지인들이 많으니 돈을 많이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간첩들에게 압수한 20만 달러를 당시 오재경 공보부 장관에게 넘겨 KBS 개국을 지시했다”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여기에 황태성의 돈도 포함돼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화당 자금은 한일회담과 4대의혹 사건으로 마련한 돈이 비중 있게 쓰였다.
민주공화당, 공산당과 닮았다
김학민 이사장은 “61년 중정에서 황태성을 연행할 때 중정요원들이 큰절 올리고 모셔갔다”며 “김민하, 권상능, 황유경(황태성 손녀)도 모두 황태성을 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황태성이 공화당 조직에 도움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큰절까지 하고 모셔간 밀사 황태성을 2년 간 살려둔 이유로 볼만한 정황이다.
김 이사장은 “공화당은 당시 획기적인 정당으로 크게 두 가지가 공산당 조직을 벤치마킹한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첫째는 사무국 중심의 정당이라는 점이다. 김 이사장에 따르면 이전 자유당과 민주당과 다르게 사무국이 있고, 사무원 공채를 시작했다. 공화당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는 중앙당과 지방조직을 만들기 위해 교수, 언론인, 금융인 등을 포섭했다.
김 이사장은 “공산당은 사무국 서기장 중심으로 일상적인 사무를 가지고 전국 조직이 가지는데 이전 정당은 의원들만 회의 때 모이는 정도였다”며 “지금 정당에 있는 사무총장이 서기장 비슷한 것이고 사무총장의 힘이 세다”고 말했다.
래리 베이커도 당시 “박정희 정권에는 각 행정기구에 군사위원들이 배치돼 있는데 평소에는 상급자의 지휘를 받지만 위급한 상황에는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를 하는 이중계통”이라며 “이중계통은 중정에도 있는데 이는 공산당의 정치위원 제도와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두 번째는 당원교육을 하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지금 정당들도 당원교육 잘 못하지 않느냐”며 “당원교육하고 정기적으로 재교육하는 것은 공산당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화당은 최초로 연수원을 만들어 민정당까지 이어진다”며 “당시 남로당 출신이 많아 황태성이 모든 것을 지도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북한노동당 조직이나 운영방식을 참고했다고 볼 수는 있다”고 말했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
김 이사장은 “황태성에 대해 박정희와 박정희 주변사람들의 생각이 달랐다”며 “JP 역시 황태성 월북 이후에야 박정희의 친척이 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죽이네 마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에 따르면 1963년 12월 초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사형집행 승인서류를 내밀었다. 박정희가 “아까운 사람인데 꼭 사형시켜야 하나”라고 두 번이나 되물었지만 김형욱은 “미국과 야당에 몰리지 않으려면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1963년 12월14일 오전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황태성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순진했다. 5·16 세력이 함경도와 경상도 출신, 육사 5기와 8기 간 갈등으로 권력이 불안했고 미국의 의심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북은 섣불리 밀사를 보내 남쪽을 파악하려 했다.
밀사를 죽이는 것은 전쟁선포와 다름없다. 남북관계는 ‘냉전’이 유지돼 살벌해졌고, 휴전선에서 우발적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1968년 1월21일엔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 부대 김신조 일당이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로 내려오기도 했다. 황태성의 죽음은 남북관계 악화와 박정희 정권 이후 본격화할 간첩조작 사건의 서막이었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s://www.mediatoday.co.kr)
6. 영원한 2인자
‘고다마 불충사건’
고다마 요시오(1911~1984)라는 일본인이 있다. 미국 CIA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석방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다. 폭력조직에서 활동하며 ‘우익의 거괴’, ‘정재계의 흑막’ 등의 별칭으로 불린 극우인사다. 하루는 고다마가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내가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석정선, 김용태, 김종락 세 분을 만났죠. 그분들 말씀이 이 나라에는 JP가 있으니 박정희 대통령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한국과 뭘 하려고하면 실권자인 JP와 손잡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하더라고요.”
고다마는 김형욱에게 그 세 명이 자신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전했다. “사실 혁명(5·16)을 주도한 것도, 그 후 모든 정책 결정도 JP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박정희는 상징적 존재일 뿐이라는 거죠. 쉽게 말하면 허수아비라는 겁니다.” JP가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자신이 박정희를 설득하며 혁명을 이끌어 갔다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황당한 사실은 일제 식민지배가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시점에 여전히 국내 실력자들이 고다마와 같은 일본 실력자에게 한국 차기 대통령에 대해 상의했다는 것이다.
고다마는 박정희와 만주시절 친분을 쌓았고, 우익 폭력단체 ‘동성회’를 조직한 재일교포 정건영,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를 외손자로 두고 있는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특별고문을 역임한 세지마 류조(일본군 장교, 이토추 상사 회장) 등과 막후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끈 인물 중 하나다.
1971년 2월 고다마는 한일친선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2등급 수교훈장인 광화장을 한국 정부로부터 받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집권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 인사들은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JP는 정건영을 통해 고다마와 친분을 쌓았다. 김형욱, 박종규, 김용태, 석정선 등 실세들도 고다마를 자주 만났다.
석정선(JP 육사동기), 김용태, 김종락(JP의 셋째형)은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JP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를 통해 JP 주변인들이 JP 대통령 만들기와 관련해 고다마의 협조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다마와 JP계 3인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를 박정희에게 보고했고 3인은 중정에 연행됐다. 이를 ‘고다마 불충사건’이라고 한다. (김형욱 회고록, 김종필과 이후락의 떡고물 참고)
2인자는 1인자를 꿈꾼다
JP는 증언록에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하거나 무력화하고 싶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며 “조금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고,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고 ‘2인자 철학’에 대해 말했다. 고다마 불충사건은 1인자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다 걸린 일이다.
1인자는 영구집권을 꿈꿨다. 3선 개헌 얘기는 1967년 6월 7대 국회의원 선거 전부터 나왔다. 당시 야당은 “공화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면 3선을 위한 개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화당은 7대 총선에서 개헌 선인 의석 3분의 2를 넘기자 1969년 1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 논의를 본격적으로 꺼냈다.
JP는 69년 2월 “이 나라의 민주 정치와 박 대통령을 위해 3선 개헌을 반대한다”고 말했다고 증언록에서 주장했다. 박정희는 이미 두 번(1963년, 1967년 대선)이나 대통령을 했고, 1967년 대선은 부정선거 논란에도 휩싸였다. 이런 상황에서 초법적 국가기구인 중정의 창립자이자 쿠데타 정부 2인자 JP의 입에서 나온 “민주 정치”라는 단어는 사뭇 어색하다.
▲ 김종필 국무총리(1971~1975)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오른쪽) 사진=국가기록원
JP가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1인자의 장기 집권은 2인자로서 애가 타는 일이다.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에 따르면 박정희의 후계자 문제는 심각한 정치쟁점이었다. 1967년 선거 후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인사들 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책에 따르면 1968년 5월 공화당은 ‘당내 사조직을 만들어 해당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김용태, 최영두, 송상남을 전격 제명했다. ‘박정희 3선 개헌을 저지하고 당의장 JP를 1971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다 들킨 것’이 실제 원인이었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JP를 따로 불러 3선 개헌 동참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JP의 손을 꼭 잡았고,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이렇게 말했다. “이봐. 같이 죽자고 혁명 해놓고, 혼자 살려고 그래? 60년대엔 빈곤을 겨우 퇴치했는데, 70년대엔 중화학 공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할 것 아니야. 이 길을 같이 가자.”
JP는 경제발전을 위해 1인자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현대 정치사와 김종필’ 저자 이달순은 JP가 개헌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를 “만일 JP가 동지들과 끝까지 (3선개헌을) 막았더라면 숙청을 당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JP의 2인자 철학에 따르면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다.
3선 개헌안은 결국 통과됐다. 1971년 3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됐고, JP는 새로 신설한 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같은 해 6월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임기가 시작되면서 박정희는 JP를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JP의 첫 번째 국무총리 임기는 1975년 12월까지 이어졌다.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
JP가 강조한 2인자 철학 첫 번째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다보지 말라”다. 유신정권시절 국무총리였던 JP가 2인자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얻게 된 교훈은 아닐까?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프레이저 위원회)가 미 의회에 보고했던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JP가 국무총리에서 경질되기 직전 상황이 나온다.
1973년 초 박정희는 슐 아이젠버그가 진행하는 상업 프로젝트의 편의를 봐주도록 정부에 지시했다. 박정희는 한국정부가 캐나다산 CANDU 핵 반응로(핵개발용)를 구매하도록 했고, 아이젠버그는 대리인 역할을 했다. 아이젠버그는 1960년대 초 미국이 경제개발 계획들이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경시했을 때 필요한 자금을 지급해 박정희에게 우호적인 인물이다.
프레이저 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아이젠버그는 핵 반응로 판매 수수료 등으로 200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 중 일부를 민충식과 JP가 뒷돈으로 받았다. 이 사실을 청와대에서 알게 돼 JP는 국무총리, 민충식은 한국전력 사장에서 해임됐다. 민충식은 친 JP 인물로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참여해 대통령 정무비서관을 역임했고 73년부터 한전 사장으로 일했다.
JP는 증언록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JP는 “정치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분할 통치)’ 통치술로 나를 힘들게 했다”고 덧붙였는데 이게 사퇴한 진짜 이유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분할통치’는 2인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실력자를 통해 견제하게 했던 박정희의 통치술을 가리킨다.
JP의 국무총리 사퇴의 이유에 대해 프레이저 보고서는 “박정희 돈에 손 댄 후 쫓겨났다”고 했다. 더 정확하게는 “편의를 봐주라”는 1인자의 지시를 온전히 따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1인자의 사망, 결정적 기회
JP는 증언록에서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가 죽자 JP는 공화당 총재가 됐다. JP는 공화당 요직을 개편해 ‘JP 체제’를 만들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10·26 후 전두환과 JP의 메신저 역할을 한 박재홍(박정희의 장조카) 전 민자당 의원도 전두환이 12·12사태 이전까지 JP를 대세 인물로 봤다고 전했다. 박 전 의원에 따르면 전두환이 JP에게 요구한 사항은 5·16세력만 끼고돌지 말라, 육사 8기생만 편애하지 말라(전두환은 육사 11기), JP 비서실 잡음을 정리해달라, JP가 일본 측인 건 알지만 앞으로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달라 등 네 가지였다.
18년을 집권한 독재자가 죽고 민주화 바람이 불며 재야인사들이 복권되자 프라하의 봄에 빗댄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퍼졌다. 재야인사 뿐 아니라 1인자의 그림자만 밟았던 JP에게도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권력은 온전히 JP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JP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이라고 당시 정국을 표현해야 했다.
1980년 1월17일 전두환은 언론사 간부들과 술자리에서 “JP는 안 되겠어”라고 했다. 봄은 꽃피지 못하고 다시 겨울로 되돌아갔다. 10.26 이후 만발했던 개헌논의가 얼어붙고 1980년 5월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신군부는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소장은 중정부장,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JP는 신군부에게 부정축재로 쌓은 216억4648만원을 몰수당했다. 1980년 6월 공화당 총재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리고 전두환 집권기 7년 동안 잊혀졌다. 1987년 구 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을 모아 만든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JP는 13대 대선에서 8%(4위)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당시 노태우 36.6%(당선), 김영삼(YS) 28%, 김대중(DJ) 27%를 각각 얻었다.
물 건너간 대통령 “내각제 하자”
JP는 원래 내각책임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0·26 직후인 1980년 1월 ‘주간한국’과 인터뷰에서 “정부조직은 대통령 중심제가 좋다”고 밝혔고, 같은 해 3월 기자간담회에서도 “대통령은 언제라도 총리를 경질할 수 있어야 하며, 이원집정부제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5·16쿠데타로 내각제(2공화국 장면내각)를 붕괴한 뒤 강력한 대통령의 2인자 특혜를 누려온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자연스런 발언이다.
하지만 13대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 당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JP는 1988년 1월 기자간담회에서 내각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JP를 중심으로 한 신민주공화당은 3당 합당(노태우+YS+JP) 결과 민주자유당으로 흡수됐다. 3당 합당 후 JP는 YS에게 내각제를 하자고 요구했다.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대통령의 권력을 이어받는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YS는 ‘자신이 민자당 총재-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명예총재-JP는 최고위원’을 각각 맡는 수직적 지도체제를 제안했다. 다음 대통령이 자신이라고 믿었던 YS는 내각제에 부정적이었다. JP는 계속 1인자의 그림자만 좇아야 했다.
JP가 말하지 않은 2인자 철학
JP는 YS를 지지했고, DJ와는 DJP연합까지 했지만 결국 내각제를 거절당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이나 유신을 밀어붙일 때 반대하는 JP에게 “임자 한번만 도와줘, 이번만 내가 하고 다음은 임자 차례”라고 하며 설득했을 때도, YS가 민자당 대선후보 시절 JP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나 다음은 당신’이라고 했을 때도, 3당이 합의한 ‘내각제 합의서’를 YS가 뒤엎었을 때도 JP는 절대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 김대중 대통령 취임 축하리셉션에서 김 대통령과 김종필 국무총리 지명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절대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 2인자의 덕목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을 대신할 JP계보를 만드는 것도 경계했다. 친 JP계로 불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DJ의 동교동계, YS의 상도동계에 버금가는 계보는 없었다. 절대권력에 대항하기 위한 DJ, YS의 계보가 곧 집권의 발판이 됐다는 점에서 JP 계보가 취약했던 것은 그를 영원히 2인자로 머물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2인자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YS정부 시절 JP는 ‘5·18특별법’을 반대했다. 이 법은 자신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재산을 빼앗고 정치권에서 쫓아낸 전두환·노태우를 처벌하는 법이었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JP가 총재로 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당론으로 탄핵을 찬성하면서도 JP 본인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JP는 증언록에서 2인자는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JP는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1990년 9월 성균관대에서 “민주화 전환기에 노 대통령을 선택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노 대통령 말고 누가 현 시국을 조화롭게 이끌 수 있겠는가”라고 찬양했다.
YS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직전인 1993년 1월 당무회의를 주재하며 “차기 대통령의 윤허를 받아 회의를 주재하게 됐다”며 다시 바뀐 1인자를 깍듯하게 모셨다. YS에게 레임덕이 찾아온 1997년 JP는 “이제 눈을 감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남았다”며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 1998년 김대중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왼쪽)와 김영삼 전 대통령 부부(오른쪽) 사진=국가기록원
97년 대선 역시 DJ에게 밀렸고, JP는 공동정부를 약속받으며 국무총리에 올랐지만 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제까지 얻어내진 못했다. JP는 증언록에서 DJ가 당시 외환위기 수습을 위해 내각제를 못할 것 같다고 말하자 자신은 “정상의 고뇌를 이해한다”며 내각제 포기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대의를 위해 권력을 포기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퇴장해야 할 때를 외면한 JP는 퇴출됐다. 자민련은 창당 첫 총선 1996년에 50석을 얻었지만 2000년 총선에서 17석으로 쇠락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정당지지율을 2.8% 밖에 얻지 못해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JP마저 낙선했다(지역구만 4석). 당시 13%의 지지를 얻은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린 참패였다.
JP는 이 상황을 증언록에 이렇게 표현했다. “세상에 타다 남은 나무토막처럼 추한 게 없다. 아낌없이 타야 한다. 활활 타서 하얀 재가 돼야 한다. 어떤 인생도 자기를 다 태울 자격이 있다. 정치적으로 나는 완전 연소됐고 재만 남았다.” 어렸을 때 ‘일야일권(一夜一卷) 독파주의(讀破主義)’라며 밤마다 책 한 권씩 읽은 사람답게 JP의 수사는 화려했다.
JP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며 “내일 또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약하며 서해의 붉은 낙조로 빨려 들어가는 햇덩어리가 되길 나는 욕망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JP눈 내년 총선에서 공주지역 출마예정인 정진석 전 새누리당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해당 지역 공주고(JP 19회 졸업생)에는 JP 흉상 건립이 추진 중이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s://www.media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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