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그리스 철학의 탄생을 알린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존재론적 명제다. 형이상학은 이 명제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가 아는 해석은 플라톤의 이데아 해석이다. 있는 것은 이데아요, 없는 것은 그림자다. 우리는 사는 세계는 환상이고 실재하는 세계는 따로 있다고. 매력적인 거짓말이다. 인류는 여전히 이 수준 낮은 거짓말에 갇혀 있다.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들으면 약이 오른다. 뻔한 거짓말인데 쉽게 격파하지 못한다. 파르메니데스가 틀린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목도하는 변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도 알면서 변화를 앞세우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딴지를 걸어본 것이다. 누군가가 이 명제를 깨주기 바랬을텐데 플라톤은 오히려 설득되어 거짓말에 살을 보탠다. 우리는 벌거숭이 플라톤을 벌거숭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이 타는가, 타는게 불인가? 바람이 부는가, 부는게 바람인가? 불이 탄다고 믿으면 실체론, 타는게 불이라고 믿으면 체용론이다. 대승불교는 체용일원론이다. 대승기신론은 체와 용을 일심으로 통합시킨다. 체용불이 화쟁일심론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용체론이다. 용이 실재고 체는 그림자다. 용이 이데아다. 타는게 진실이고 불은 인간의 관측 효과다. 불은 인간의 간섭에 의해 오염된 거짓이다.
우주는 용이다. 자연에 불은 실재하지 않는다. 타는 것을 인간이 불이라고 부를 뿐이다. 불의 원소는 없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금강경의 공 사상과 같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를 부정한다. 있는 것은 물질이고 없는 것은 변화다. 우리가 보는 변화는 환영이다. 물질은 탈레스의 원자론처럼 쪼개지지 않는 불변의 원소다. 틀렸다. 원자는 원래 없다.
자연에 구조가 있을 뿐이다. 존재가 만나서 구조로 엮이는게 아니라 구조가 존재다. 존재는 인간의 관측에 의해 오염된 그림자다. 없는 것은 있고 있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관측되는 것이며, 관측되는 것은 반응하는 것이며,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면 관측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있는데 볼 수도,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면 없는 것과 같다.
없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어기면 무로 간주된다. 석가는 일찌감치 갈파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것은 방정식이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는 것은 함수다. 자연의 어떤 객체는 존재가 아니라 무이며 실재는 방정식과 함수다. 방정식은 어떤 둘의 변화하는 관계를 규정하고 함수는 관계의 나란함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없다. 존재는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둘의 자체적인 관계이며 우리가 아는 물질은 어떤 둘의 나란함이다. 변화 둘이 나란할 때 외부의 작용에 반작용할 수 있게 된다. 혼자는 내부에 구조가 없어 방향전환을 못하므로 반작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자인 것은 관측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관측되었다면 반작용한 것이며 내부구조가 있다.
텅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게 아니라 혼자라서 반응하지 않으므로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진공은 없는게 아니라 반응하지 않는 영역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어떤 이유로 움직일 수 없으며 움직이는 것이 어떤 이유로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발생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질량보존의 법칙과 어긋난다.
있는 것을 멈춘 것으로 해석하면 틀렸다. 멈춘 것은 죽은 것이며 없는 것이다. 불이 타는게 아니라 타는게 불이다. 움직이는 것이 있는 것이다. 태초에 빅뱅에 의해 큰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멈춤은 관측자와 나란한 것이다. 움직이는 객체를 움직이는 관측자가 보면 멈춘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그림자다. 파르메니데스는 틀렸다. 플라톤도 틀렸다.
형이상학은 틀렸다. 존재론은 틀렸다. 실체론은 틀렸다. 체용론이 진실에 가깝지만 용체론이 옳다. 용은 실재요 체는 그림자다. 체는 인간의 관측이 만든 허상이다. 마명의 대승기신론이 좋은 화두를 던졌지만 금강경과 마찬가지로 얼버무리는 말이다. 원효의 기신론소가 좋은 해석이지만 한계가 명백하다. 석가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다른 것이다.
있는 것은 체, 일어나는 것은 용이다. 용은 체의 부속품이 아니다. 체가 용의 부속품이다. 방정식이 함수의 부속품이다. 방정식이 관계라면 함수는 갇힌 관계다. 방정식은 깨진 함수다. 썸을 타는 것이 관계라면 부부는 갇힌 관계다. 부부로 결박되면 차원이 상승한다. 점이 결박되면 선이고, 선이 결박되면 면이다. 선은 점이 아니며, 면은 선이 아니며, 부부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이다.
점의 집합과 선은 다르다. 점의 집합은 선이 아니라 다점이다. 선의 집합은 면이 아니라 다선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차원이 높다. 일회용 관계와 반복되는 관계는 다른 존재다.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면 일회용이다. 이쑤시개로 만들어진 제품은 일회용 이쑤시개인 전봇대와 다르다. 어떤 것이 갇혀서 반복되면 차원이 상승한다. 함수는 방정식보다 차원이 높다. 결박되면 차원이 상승한다.
결박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차와 운행중인 차는 다르다. 그냥 차는어떤 운전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다양한 관계가 성립하지만 운행중인 차는 도로교통법을 따라야 하므로 다양성을 잃는다. 방정식에서 함수로 올라가면 선택지를 잃는다. 2D보다 3D가 오히려 표현의 다양성이 떨어진다. 만화가 영화보다 자유롭다. 차원이 높을수록 제한이 걸린다. 개인보다 집단에 더 제한이 걸린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명제는 간단하고 강력하다. 변화를 부정한다. 인간의 관측은 그 자체로 변화다. 존재하는 것은 관측되고, 관측되는 것은 변화이며,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본다. 있는 것이 변하는게 아니라 변화가 나란하거나 어긋난다. 우주 안에 변화의 결맞음과 결어긋남 뿐이다. 결어긋남이 척력이라면 결맞음이 인력이다.
인류는 석가와 파르메니데스 이후 2500년간 토론해 왔지만 진척된게 없다. 플라톤은 이 명제를 엉뚱하게 해석해서 기독교 철학의 토대를 만들었고 동양은 선종불교에 막혀 선문답에 매몰되었다. 근래 양자역학에 의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양자역학은 강력하게 말한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은 오염된 것이다. 우주 안에 결맞음과 결어긋남이 있을 뿐이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