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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영柳達永의 '슬픔에 관하여'
▶일 시 : 2007년 8월 18일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인원 : 16명
▶사 회 : 김영만
▶정 리 : 이경은
《본문》
슬픔에 관하여
사람의 인생은 기쁨과 슬픔을 경위(經緯 -날과 씨)로 하여 짜가는 한 조각의 비단일 것 같다. 기쁨만으로 인생을 보내는 사람도 없고, 슬픔만으로 평생을 지내는 사람도 없다. 기쁘기만 한 듯이 보이는 사람의 흉중에도 슬픔이 깃들이며, 슬프게만 보이는 사람의 눈에도 기쁜 웃음이 빛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쁘다 해서 그것에만 도취될 것도 아니며, 슬프다 해서 절망만 일삼을 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앞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있다. 고흐가 그린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農家族>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얇게 무늬지고, 넓은 들에는 추수할 곡식이 그득한데, 젊은 아내는 바구니를 든 채 나귀를 타고, 남편인 농부는 포크를 메고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생활하는 사람의 세계를 그린 그림 가운데 이보다 더 평화로운 정경을 그린 것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넓은 들 한가운데 마주서서, 은은한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농부 내외의 경건한 모습을 우리는 밀레의 <만종>에서 보거니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그 다음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밀레와 고호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 평화 지향의 사상은 마치 한 샘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구별할 수가 없다.
그 무서운 가난과 고뇌 속에서 어쩌면 이렇게도 모든 사람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는 평화경이 창조될 수 있었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나 <봄의 소나타>를 들을 때도 나는 이러한 신비를 느낀다. 둘 다 베토벤의 귀머거리가 된 이후의 작품인 것이다. 슬픔은 아니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 영혼을 정화하고 높고 맑은 세계를 창조하는 힘이 아닐까? 예수 자신의 한없는 비애의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인류의 가슴을 덮은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자도 석가도 다 그런 분들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지난봄에 국민 학교 1학년이 되어있어야 할 나이다.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그때 이 아이는 '신장종양'이라고 하는 매우 드문 아동병에 걸렸다. 그러나 곧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자라왔다. 그런데 오늘, 그 병이 재발한 것을 비로소 알았고, 오늘의 의학으로는 치료 방법이 없다는 참으로 무서운 선고를 받은 것이다.
아이의 손목을 하나씩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 우리 내외는, 천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은,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 사람의 물결들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티끌만한 근심도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자기의 마지막 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을 맹목으로 만들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빠, 구두.”
그는 구두 가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구두가 신고 싶었나 보다. 우리 내외는 그가 가리킨 가게로 들어가,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어린 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우리는 그의 기쁜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주보고 웃어 주었다. 오늘이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옮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6·25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의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어버이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아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 2년 전 어느 날이었다. 수술 경과가 좋아서 아이가 밖으로 놀러나갈 때, 나는 그의 손목을 쥐고,
“넌 커서 의사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사가 너의 병을 고쳐준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의 나쁜 병을 고쳐줄 수 있게 말이다.”
하고 말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 후부터는 누구에게든지 의사가 되겠다고 말해왔었다.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 없이 총명해 보이는 내 아들의 잠든 얼굴을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기쁨만도 슬픔만도 아니라는, 그리고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사회 : 안녕하십니까? ≪계간수필≫ 제 50호, 2007년 겨울 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 작품은 유달영의 <슬픔에 관하여>입니다. 오늘 합평회의 지정토론자로는 홍혜랑, 염정임, 구양근 선생님 세 분을 모셨습니다. 먼저 작가의 연보에 대하여 홍혜랑 선생께서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지요.
홍혜랑 : 수필가이자 농촌운동가이신 성천星泉 유달영 선생은 1911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고담리에서 한학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서울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을 마친 후,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칩니다. ’35년 최용신이 26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소설가 심훈이 쓴 <상록수>가 주인공들의 연애담으로 꾸며졌다는 일각의 비판이 일자, 선생은 평전인 <농촌계몽의 선구 최용신의 소전>을 펴냅니다.
1942년 대개의 잡지들이 친일과 어용의 길로 변절한 가운데에서도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외롭게 투쟁하던 ≪성서조선≫誌 권두언에 김교신의 <조와弔蛙>와 같은 글을 싣는 등의 활동으로, 당시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던 함석헌, 김교신 등 13명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룹니다.
’46년에 서울대 농대 교수(원예학)가 되고, ’51년 대구로 피난 중 <새 역사를 위하여-덴마크의 협동과 교육사업>을 저술하여, 어떻게 하면 한국을 덴마크 같은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그는 호수돈 여고에서 교편을 잡는 것으로 교육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여 수원 농대에서 30년간 강단에 섭니다. 특히 그의 ‘무감독 시험’은 유명하여, 혹 한 사람이라도 커닝이 나오면 사표를 낸다고 항상 들고 다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57년 ≪사상계≫에 <인생노트> 연재로 수필문학의 붐을 일으킵니다. 그의 수필집으로는 <페닉스의 연가>, <흙과 사랑>, <황무지 공원에서> 등이 있습니다. 선생의 수필은 소재가 다양하고, 읽히기 쉬우면서도 철학적 주제가 들어 있으며, 성실하고 진지하면서도 결코 엄숙하지 않아서 항상 웃음과 유머를 풍기는 그의 인품을 대하는 듯 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성천의 나이 80세가 되던 '91년에 재단법인 성천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오늘까지도 ‘성천아카데미’에서 동서인문 고전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강의실 안에는 ‘사람은 만남으로 자란다’라는 액자가 걸려있는데, 이는 선생의 평소의 철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양정고보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담임이었던 김교신과의 만남인데, 스스로 자신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모두 김교신과의 만남의 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은 평생 동안 붓글씨를 써서 선전에 입상할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그 중 ‘好學爲公’과 ‘公先後私’의 눈에 띄는데,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은 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함이고, 공과 사를 구별하여 개인보다 국가사회의 일을 먼저 한다는 뜻이지만, 이는 때때로 가정과 가족들에게 엄청난 희생과 고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생의 장남 유인걸씨는 로맨티스트였던 아버지는 어머니 이창수 여사의 헌신적인 내조와 이해로 그만큼의 세상일을 할 수 있었고, 성천 선생은 아내의 이런 마음에 평생 감사하여 10년 넘게 아내의 병간호를 손수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자녀들의 재능을 찾아 교육시키는 대신, 평생 수원 농대에 교편을 잡고 있는 인연으로 자녀들을 모두 수원농대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특히 오늘 합평회 작품과도 관련된 이야기인데, 재건국민운동 본부장 시절, 신장종양을 앓던 그의 아들이 위급을 다투는 순간에도 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저녁때에 퇴근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튿날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은 그제야 선생의 얼굴이 그토록 어두운 이유를 알았다고 합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유학 집안에서 최초로 신식 교육을 받게 된 선생은 최초의 기독교 개종자였으며, 오늘의 작품 속에 나타난 슬픔을 초극하는 영혼의 힘은 바로 기독교의 순명정신에 힘입은 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서로는 20여권의 책이 있으며, 노래 작사(학교 교가 등)도 다수 하셨으며 ‘대산농촌문화상’ 등 여러 상을 수상 하셨습니다. 2004년 10월 27일 향년 94세로 자택에서 별세하여, 대전 국립묘지에 묻히셨습니다.
사회 :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어서 염정임 선생께서 작품을 중심으로 본 그의 문학세계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염정임 : 이 작품은 1960년도의 작품으로 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알고 쓴 슬픈 글이지만, 절제 있고 담담하게 글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초반부에는 달관한 듯한 마음으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겪어야 하는 기쁨과 슬픔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는 밀레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을 보면서 저자의 평화에 대한 갈구를 독자들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베토벤의 고통과 예수님의 슬픔에 대한 언급을 할 때에 우리는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측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 문단에 와서야, “나의 막내아들은……” 하면서 이 글의 제재를 드러냅니다. 특히 이 문단에서는 자기가 죽을 거라는 것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마음과 그에게 죽음을 알릴 수 없어 같이 웃어야 하는 아버지의 안타까움이 대비되어 더 큰 슬픔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어린 것의 두 눈은 천하라도 얻은 듯 기쁨으로 빛났다……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는 구절은 이 수필 작품 중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악에서 잔잔하게 시작한 멜로디가 화음을 이루고 클라이맥스로 가듯이 이 문단에서 엄청난 비극을 서술합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이 밤을 나는 눈을 못 붙이고 죽음을 생각한다.”로 시작하는 데, 여기에서는 이 슬픔을 통하여 더욱 더 신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는 종교적인 신념이 나타나 있다고 보여 집니다. 어두운 이야기이지만 감상에 젖지 않고 담담하게 절제하면서 자신이 겪는 인생의 슬픔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이 씌여진 게 병원에서 선고를 받은 바로 그 날인데, 과연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래도 이때에는 아들의 병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졌기에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아들의 죽음에 대한 글이 <영결>이란 그의 다른 수필에서 나오는데, “지난 1월 10일 내 막내아들 인석을 저 세상으로 영원히 떠나보냈다.”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경고>라는 수필에서도 “초등학교의 운동장이나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갈 때에는 나의 창자는 그대로 에이는 것 같다. 참으로 그리워 견딜 수가 없다.”라고 슬픔을 토로합니다. 이미 육이오 때에 두 아이를 잃는 슬픔을 당한 그는 “인생에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 엄숙과 경건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엄숙과 경건이 없는 세상은 결코 인생의 보람이 있는 좋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선생은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함축’이라고 하시면서, “나는 글을 쓸 때에 솔직하고 쉽게 쓰고 노력해 왔다. 어떤 글들은 나의 내면세계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서 부끄럽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합평을 준비하면서 격동의 시대를 산 한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유달영 선생의 인격의 넓고 깊음에 감동받았고, 자상하고 섬세한 감성과 인정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가까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회 : 이 작품을 다른 작품과 비교해 주셔서 많이 느꼈고, 전반적인 문학 세계를 잘 알게 됐습니다. 그럼 다음은 구양근 선생께서 작품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구양근 : 너무 잔인한 말일지 모르나 수필감으로 참 좋습니다. 죽어가는 자식 앞에 두고 있는 아버지의 입장을 ‘수필감’으로 운운하는 것 자체가 불손하나, 실제 이런 소재야말로 독자의 흉금을 울릴 수 있는 충분한 요소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소재입니다. 여기서는 슬픔의 고귀성과 높은 차원으로서의 승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슬픔이야말로 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검은 하늘을 어떻게 개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든지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 또 “슬픔은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훌륭한 가치를 창조한다는 나의 신념을 지그시 다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작가는 슬픔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괴로움과 슬픔이 종교적 세계로 승화되어 나타나는 수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수필에서는 절묘한 대조법을 쓰고 있습니다. 첫째, 기쁨과 슬픔.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날이요, 우리에게는 질식할 듯한 암담한 날임을 누가 알랴.”입니다.
둘째, 가난과 고뇌 속에서도 사람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는 평화경이 창조될 수 있는 고흐의 <들에서 돌아오는 농가족>, 밀레의 <만종>을 예로 듭니다. 가난과 고뇌, 그리고 평화경의 대비입니다. 세 번째, 자신의 죽음을 모르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며 웃어주어야 하는 부모의 애절한 심정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극과 극을 대비시킴으로서 큰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유달영 선생은 그 자신 아주 폭 넓은 삶을 살았습니다. 원불교 교가를 책임자가 부탁하자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흔쾌히 응했습니다. 선생은 인생을 살 때 나쁜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을 드러내 주시는 편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고 서로 긍정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 성천의 인생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최대로 꽃 피우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바로 다른 생명들의 꽃을 피우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꽃 피우는 방법이라며, 언제나 자기보다 남을 앞세우는 생활, 남을 키우면 결국 고마워서 몇 배로 돌아온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천은 종교에도 초월했습니다. 그의 좌우명 好學․親交․爲公(배우자, 사귀자, 이바지하자) 이런 휘호를 좋아했는데, 이게 다 유교사상입니다. 그가 태어난 1911년 음력 4월은 불교탄신일입니다. 그러므로 ‘佛心’이란 휘호도 좋아하고, 십자가와 더불어 불상도 방에 많았다고 합니다. 터키여행에서 구한 이슬람 코란 구절이 새겨진 액자도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나라 사랑―성천 유달영의 생애>의 저자 김홍근이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굳이 내 종교를 말하자면, 나라 사랑이 내 종교라 할 수 있겠지.”라고 했습니다. 나라 사랑 앞에서는 종교고 뭐고 다 초월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마하트마 간디와 김교신이라고 그의 <인생노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 : 광범위하게 여러 가지로 참고 되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의견을 말씀해 주시지요.
허세욱 : 저는 한 편에 대해 집중적으로 세 가지만 얘기하겠습니다. 우선, <슬픔에 관하여>는 문학성으로 볼 때 성공적입니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모두冒頭에 설명적인 것이 6줄 있는 것인데, 이것은 문학적인 수필로서는 감점이 됩니다. 제가 얘기하는 문학성은 첫째, 전체가 카타르시스를 중점으로 했는데, ‘슬픔은 바로 정화다’라는 주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기복을 시키면서 반복을 했어요. 그게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어요. 이런 카타르시스를 반복을 하면서도 형상화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형상화는 바로 ‘구두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형상화가 아주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더군요. 참척의 슬픔을 일반적인 사유에 기탁했다는 것이 첫 번째 문학성입니다.
두 번째는 이 분은 기독교인이면서도 본인이 광범한 사상을 유입해서 그런지 노장에다가 대입을 했더니 딱 맞아요. 노장에 보면 ‘得失이 無常하다’ 는게 나와요. 얻는 거, 잃는 거, 사는 것, 죽는 것, 기쁜 거, 슬픈 거, 이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거예요. 두 가지가 다 그 나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성천이 기독교인인데 이러한 노장의 미학을 수용한 것은 본인이 알 수도 있고 몰랐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딱 알맞은 것은 “窮則反이요, 終則始.”라는 겁니다. 종국에 가면 다시 되돌아 살아난다는 것, 끝나면 그게 바로 시작이라는 것. 이 슬픔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새로움을 얻는 것, 이런 노장의 미학에 대입하면 대단히 명쾌하게 맞는다는 사실입니다.
김시헌 : 이 글을 읽고 상당히 감동이 컸습니다. 오늘 제가 기운이 없지만 참석을 해서 여러분의 말씀을 많이 듣고 싶었는데, 그만한 소득이 있었습니다. 유달영 선생은 문학에 대한 작품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이 분은 문학 이전에 뭔가 어떤 문제를 두고 자기 나름으로 해결하고 극복하고 초월하는 정신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감없이 작품으로 표현을 했다. 이런 문학 이전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높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병권 : 저도 고인이 되신 이 분 연대의 다른 분들의 작품을 몇 번 합평을 했지만, 그 분들에 비해 상당히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주제가 되는 ‘슬픔’이 결국은 자기 정화를 도모하는데 역할을 했다는 얘기는, 문학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에서도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동 속에서 몇 번 읽었습니다.
고봉진 : 젊을 때 <인생노트>를 읽었습니다만, 이번에 다시 읽어가면서 처음에는 좀 지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불현듯 큰 충격으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 분이 범인이 아니다. 참 비범하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이 겪은 슬픔을 이러한 글로 발표한 것은 큰 감동을 느끼면서도, 문학 작품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수필이라는 생각은 안들었지만 감동은 받았습니다.
최병호 : 읽으면서 조금 걸리는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흐나 밀레의 가난과 고난 속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치지만, 이 작품은 슬픔이 주제인데 모두冒頭의 고흐나 밀레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동원된 소재인가 싶습니다. 고봉진 선생님이 지루하다고 하셨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오히려 베토벤의 실청失聽 이야기를 주요 소재로 클로즈업 시키고 바로 이야기로 들어갔으면 더 간결하고 좋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부분에서 ‘천붕’이니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슬픔’이라고 했는데, 그 질량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해설적 이야기가 장황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송규호 : 이 분의 글은 두 편 정도 밖에 못 봤습니다만, 이 작품은 가정사를 수필 형태로 쓴 것이라고 봅니다.
김진식 : 사상계의 <인생노트>에 실린 때보다 20~30년 후에 읽으니까 전혀 다릅니다. 연륜이란 이렇게 달리 느끼게 만드나봅니다. 하나의 명암을 대비시키면서도 굳이 분별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동양적인 사유가 들어 있습니다. 저도 아이가 많이 아파서 이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에 더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젊어서는 밀레니 고흐니, 베토벤이니 하는 현란한 어휘들이 매력이 있었는데, 최병호 선생님 말씀처럼 지금 읽으니까 좀 정리하여 자기 얘기를 더 하는 게 좋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해명 :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서를 드러내 글을 쓴다고 했을 때에 감정이나 애상, 어떤 슬픔에 대한 개요 같은 것이 나와야 되는데, 이 분은 상당히 냉정하게 글을 썼습니다. 이 분이 자기 감정조차도 객관화 시킬 정도로 중도를 지키고, 글의 표현에 대해서도 드러내지 않아 그 뒤에 더 큰 슬픔을 우리가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김소경 : 병원에서는 선고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마음으로서는 그래도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이 깨졌을 때에 당신이 감당해야 할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서 쓴 ‘기도문’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고 했는데, 솔직히 인간의 모든 고귀한 것이 슬픔 속에서만 탄생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유혜자 : 저는 이 분은 문학적이기보다는 사상가로서 실천하는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가끔 글을 쓴 것을 보면 문학적인 소질도 있으신 분이구나 하고 느꼈고, 아까 염 선생님께서 유달영 선생님이 막내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편을 쓰신 게 있다고 하셨는데, 이 <슬픔에 대하여>는 정리하는 의미로 쓰신 것 같습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정리,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하는……. 문학적인 면에도 많이 근접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그러면 마지막으로 김태길 교수님께서 총평을 해주시지요?
김태길 : 처음 글을 읽고 이 분이 이런 글도 썼던가 싶어요. 이분은 제가 접촉을 많이 했던 분입니다. 성격이 활달한 분인데 이 작품은 착 가라앉은 글입니다. 글 자체가 문학으로도 좋은 글이라고 봅니다.
나중에 저는 개인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 양반이 굉장한 애국자라 국민윤리에 관심을 가지셔서 ‘국민윤리학회’의 회장이 되셨어요. 제가 부회장을 맡으면서, 옆에서 뵐 기회가 많았지요. 당시 국민윤리라는 것이 다분히 군사정권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협조하는 부분이 조금 있어서 저와는 약간 의견을 달리하는 점도 있었습니다만,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시는 편이셨습니다.
성천은 착 가라앉은 글을 쓰는 분위기가 나타나지 않고, 아주 쾌활하고 낙관적이며 활달하고 늘 자신만만한 분으로 보였습니다. 유머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진짜 애국자이십니다. ‘무궁화 연구’를 했는데, 진딧물이 안 꼬이는 좋은 무궁화를 많이 개발했습니다. 이 분이 해 논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농촌 운동도 많이 했고, 뭐니 뭐니 해도 하나의 지사이고 근래에 없는 큰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분이 서예 글씨가 아주 좋아서 구십 노인이 된 다음에도 굉장히 힘이 있는 글을 썼어요. 인심이 좋아서 남에게 잘 써 주었습니다. 또 여의도에 살면서 강가에 새들이 날라 오면 새들과 친해서 ‘새 할아버지’로도 불리웠습니다.
허세욱 : 어찌 보면 만병통 같은 분이시죠. 이름대로 영원히 통달하는 분이네요.(일동 웃음)
사회 : 진지하게 여러 가지로 깊이 연구하시고 발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달영 선생님 수필이 사실은 교과서에서도 취급이 되고 해서, 학생들에게 많이 읽혀왔습니다. 특별히 아들을 잃고 쓴 수필이 여러 편 있습니다. 그런데 유달영 선생님의 <경고>라는 수필에서는 김태길 교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아주 유머러스한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아들은 지금 죽어 가는데 두 내외가 유머러스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이 서로 대비되어 그려졌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이 분의 작품 세계가 상당히 다양하고 깊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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