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주사 와상, 해상왕 장보고 형상?
선조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비밀에 대해 언젠가는
후손들이 해독할 수 있도록 단서를 남겨놓았다./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에서 그 내막이나 존재
자체를 불문에 붙여야 했지만, 이러한 빗장을 영원히
걸어두기를 원했던 건 아닌 것 같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로 쉬이 풀어내기 어려운
온갖 의문투성이가 많다. 넓게는 은하계에 또 다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 케 하는 비행접시나 그 옛날 기술로는
도저히 지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에서부터,
좁게는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신비스런
유적에 이르기까지.
■ 운주사는 불교 유적 아닌 해상왕 장보고 추모지
그중에서도 경북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이나 황룡사지
9층 목탑,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경남
밀양의 표충사비, 독특한 모습을 띤 전북 진안의 '마이산 석탑군',
전남 화순의 운주사에 있는 '천불천탑'과 '와불' 등에 서려있는
비밀은 최첨단 문명을 자랑하는 지금까지도 수수께기로 남아 있다.
특히 천불천탑이 영롱한 빛을 뿜고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생노병사가 없는 지상낙원인 미륵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 운주사 천불천탑과 와불에 얽힌 비밀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신비스러움이 더한다. 누가 천불천탑을 세웠을까. 엄청나게 큰
저 돌부처는 왜 하필이면 누워있을까.
그 비밀, 즉 우리나라 최고의 불가사의로 손꼽혀 온 운주사
천불천탑과 와불의 비밀을 밝히는 책이 지난 11월초에 나왔다.
'한국의 불가사의'라는 덧글이 붙은, 작가 최홍이 지은 <천년의
비밀 운주사>(바보새)가 그것. 지난해 4월, 미스터리 논픽션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을 펴낸 작가 최홍은 이 책에서
"운주사는 해상왕 장보고의 추모 유적지였다"고 잘라 말한다.
■ 운주사도 ‘구름 머무는 절’ 아닌 ‘배가 운항하는 절’
"조선조 후기 공식 기록에 運舟寺(운주사)가 등장한다고 해서
이때부터 運舟寺(운주사)라고 불렸다고도 보기 어렵다. 이것은
<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에 관한 첫 기록이 등장한다고 해서
운주사 유적들이 그때 만들어졌다고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라리 내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運舟寺(운주사)를 조선조
후기에 문헌에 기록했다는 게 맞는 추측일 것이다."
-144쪽, '운주사라는 이름' 몇 토막
운주사의 이름은 세 가지다. 구름이 머무는 절이라는 뜻을 가진
雲住寺(운주사), 배가 운항하는 절이라는 뜻의 運舟寺, 구름을
기둥 삼은 절이라는 뜻의 雲柱寺가 그것이다. 하지만 처음
이름은 雲住寺로 알려져 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사료에서도 그렇게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1984년 전남대
박물관 조사 때에도 '雲住寺'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최홍은 이 신비에 쌓인 유적지의 이름을 運舟寺
(운주사)라고 우긴다. "산이라고 하지만 겨우 해발 200m 안팎의
언덕이라고 할만한 수준이어서 흔히 비산비야(非山非野) 지대라고
불리는 데다가, 절도 이러한 산들의 바깥쪽 평지에 위치해 있"어서,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름이 머물만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홍이 이 유적지의 이름을 運舟寺(운주사)라고 우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1737년에 씌어진 <일봉암기>와 1907년의 <개천사
중수상량문>, 1923년의 <능주읍지>에 '運舟'(운주)라는 낱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運舟'라는 낱말 속에 운주사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그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
글쓴이는 "어떤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그동안 굳어져 있는 타성이나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며, "이 후미진 계곡의 사찰이 왜
運舟寺(운주사)로 불려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보다 깊숙하게
파고들어야 그 어떤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쥘 수 있다고 귀띔한다.
■ 운주사 천불천탑은 배 상징하는 거대한 도형
"이 분포도를 앞에 놓고 먼저 계곡 평지에 있는 탑들을 모두
선으로 이어보았다. 붉은 색으로 이어보는 게 인지하는 데는
보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다 잇고 잠시 살펴보자
곧 어떤 도형이 떠올랐다.
석조불감을 중심으로 가운데 부분은 움푹 들어가 있고, 양쪽
가장자리로 가면서 상승하고 있는 선." 사람들은 간혹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실수를 할 때가 더러 있다. 이는 어떤
사물을 살필 때 멀리서도 바라보고 가까이서도 바라보아야 그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숲속에 들어가 있으면
나무만 보일 뿐 그 나무들이 빼곡히 모여 엄청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최홍은 雲住寺(운주사)의 또다른 이름인 運舟寺(운주사)에 대해
스스로 "바닷가도 아니고 후미진 계곡에 줄지어 서 있는 탑들이
과연 배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이어 그는
운주사 경내에서 구한 화보 속에서 천불천탑 분포도를 한눈에
살핀다. 그리고 계곡 평지에 있는 탑들을 모두 붉은 선으로 이어본다.
그때 작가의 눈앞에 그어진 붉은 선들이 거대한 배의 모습으로
다가선다. 놀랄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왼쪽 편의 탑들을 다시
평지의 탑으로 이어본다. 그러자 눈앞에 배의 깃대 혹은 돛대
같은 모습이 그려진다. 또한 와불로 올라가는 길목에 세워진
2개의 탑은 주 돛대와 보조 돛대이며, 요사채와 대웅전 사이의
실패탑은 돛대의 돛줄(아디줄)로 떠오른다.
■ 누가 와상의 정수리를 깼을까?
"와상의 남자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거대한 배 형상의
석조물로 생전의 업적을 나타낼만한 인물, 그러면서도 평민이
아니고 군주 급에 해당하는 인물, 더구나 그에 관한 설화들이
도선국사와 관련되었던 인물...... 그는 신라 말기의 해상왕
장보고가 아니었을까."
운주사 와상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리고 남자 와상의 머리
윗부분은 왜 잘려나갔을까? 불상의 육계나 남자의 상투는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가장 중요시하게 여겼지 아니한가. 근데,
왜 하필이면 그 중요한 부분만 잘렸을까.
최홍은 혹자들이 말하는 '조선시대 유생들이 잘라냈다"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어 그는 이 모습은 목이 잘렸던
장보고의 비극을 나타내려 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왜? 만약
조선시대 유생들이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와불을 훼손하려 했다면
몸 전체까지 몽땅 깨뜨렸을 가능성이 더 컸다는 것.
작가는 '암반이 부족하여 머리 부분만 따로 만든 것이다'라는
혹자의 또 다른 말에 대해서도 "이 거대한 와상을 만들면서 그처럼
어설프게 만들 선조들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만약 와불의
완벽한 모습을 새길 암반이 모자랐다면 이처럼 궁여지책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조금 적게 만들 수도 있었지 않겠는가 하고.
■ 죽은 장보고가 미륵으로 부활?
"도선국사, 혹은 후세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장보고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어디엔가 번듯한 무덤이나 어떤 기념물, 또는 제단을
만들어 놓지 않았겠는가. 장보고는 그만한 재력도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 데다, 확실한 추종세력까지 있었던 것이다...
다만 도선의 행적이 원래 인간 세상에 자취를 남기기 싫어하는
데다, 장보고라는 인물이 신라의 입장(고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차피 정통성을 띤 정부이기 때문이다)에서 보면 대역죄인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 내력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무성한 설화로만
전해지게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천년의 비밀 운주사>는 운주사가 불교 신앙의 유적인 '천불천탑의
성지'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낳은 불세출의 해상 영웅 장보고를
추모하기 위한 유적지라는 것을 새롭게 밝힌다. 이어 운주사는
장보고와 함께 개혁의지를 가졌던 도선이 15세 때 장보고의
죽음을 보고 이를 기리고 미륵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세웠다고 매듭짓는다.
<사)장보고연구회> 이경구 이사장은 '추천의 글'에서 "전남
화순에 위치한 운주사의 탑과 석상들은 그 규모와 다양함에서
단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불가사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최홍은 운주사 주변의 설화와 지명, 석조물들의 배치, 문양 등을
분석하여 전혀 새로운 이론을 이끌어 냈다, 매우 충격적이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