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블루모스크로 갔으나 관람객이 너무 많아 마지막 날 관람키로 하고 성 소피아 성당으로 이동했다
성 소피아 성당은하느님의 지혜(Divine Wisdom)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지혜(知慧)라는 뜻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中 하나인 성 소피아 성당은높이가 56m 동서의 폭은31m 남북의 폭은33m로 거대한 돔 지붕을
받쳐주는 기둥이 없는 건축기술이 특징이다
천장에서부터 반구 형태의 지붕이 서로를 떠받치는 15층 높이의 거대한 둥근 돔(Dome)으로
그 둘레에 40개의 창문과 아름다운 모자이크(Mosaic)성화들이 장식되어있다
비잔틴 건축으로 가장 완벽하게 조화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는 이 건축양식은 현재의 건축 기술로도
흉내 낼 수 없다고 한다.
성 소피아(St Sophia)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가 건축하였으나 404년에 불에 타 파괴되었다
그 후 415년 시어도시어스(Theodosius)황제 때 다시 재건되었다
그러나 532년에 일어난 민란사건으로 소실되었다
이 민란을 진압한 후 유수티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537년에 재건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유수티아누스(Justinian)황제 때 건축된 것이다(538년 奉獻)
이 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을 로마보다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황제의 의지와 트랄레스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밀레도스의 수학자 이스도루스의 완벽한 설계로 이루어졌다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多産의 女 神)을 헐어 성 소피아성당. 성 요한 성당 건축재로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동방교회의 본산이었던 성 소피아성당은현재의 내부는 비잔틴시대의 양식과 이슬람모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건재한 성당건물 자체만으로도 박물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다음 대포의 문이란 뜻의 술탄을 거쳐 톱카프 궁전을 견학 현존하는 오스만 제국의 거대한 궁전으로 15-19세기 말까지
제국의 황제들이 살았던 곳이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보스포루스 해협(海峽)에 위치하고 있다.
순례의 강행과 시차 관계로 피로가 겹쳐 몹시 지쳤다
순례 후 호텔에 투숙했으나 소주 파티로 이어졌다
O 9월10일 (금) 이스탄불 공항으로 출발 카이세리로 향 했다
카이세리 공항에서 버스로 카파도키아로(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 이란 뜻)이동
카파도키아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1~13世紀까지 계속되었다
로마 박해와 7세기 아랍의 침입, 8세기 전후 동로마 내부 갈등으로 성화의 지지자들이 우상 숭배자로 몰려 박해를 받자
이곳으로 도피해 지하 동굴교회를 만들고 성화를 그렸다 한다.
처음 그려진 성화(聖畵)(1~2세기)는 거의 다 훼손(毁損)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7~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사도행전 2,9절: 1베드로 1,1절 신약에 두 번 나온다.
AD30년 5월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한곳이다
온 천지가 검은 회색 빛 암석(巖石)바위로 희귀(稀貴)한 형태의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그 바위에 동굴을 뚫어 성당을 짓고
수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카파도키아에서 같은 시기에 3명의 교부가 혜성(彗星)처럼 탄생했다
카이세리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 니싸의 그레고리우스 이다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 이었다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되어있다
교회 천정과 벽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공생활과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동굴 성당은 바실리아 성당 (작은 聖堂) 엘말러킬리세 (사과 성당), 크즐라르 마나스트러(修道院)엘 나자르
성당이 있다
괴뢰메는 그리스중부의 수도원 집성촌 메테오라, 아토스와 더불어 가장 인상 깊은 수도원이며 1923년 터키와 그리스가
맺은 조약에 따라 정교회 수도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이주했다
카파도키아에서 테린쿠유로 가는 도중 성모마리아 동굴 교회에서 미사 후 긴 다리를 건너 유명하다는 동굴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다음은 데린쿠유(Derinkuyu) 로 이동,지하 도시를 순례했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세계 문화유산이다
해발1300m 의 고원지대로서 약3000만 년 전 화산폭발로 용암(鎔巖)이 굳어져 생긴 곳에 굴을 파서 지하도시를 만들었다
깊이는 120m 지하 8층 규모로 거대한 도시를 이루었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이 필요한 만큼 옆으로 또는 지하로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게 되었다
땅속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그 통로는 공기정화 기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수용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약 2-3만 명이었으며 카파도키아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지하도시에는 교회 학교 식당 침실 부엌 창고 와인 식용유 저장고 등 공동체 생활에 불편함 없이 다양한 시설을 갖춘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각층은 독립적으로 구별되며 터널을 통해 다른 지하도시 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외부의 침입을 막는 역할도 했다.
테린큐유를 순례한 후 콘야로 이동 호텔에 투숙했다
O 9월11일 (토)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파묵 칼레. 리오디게이아 巡禮
콘야 성 바오로 성당에서 아침 미사 후 페르게에서 험준한(안티타우루스)산맥을 넘어 인구 2만5천의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유적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를 창시한 셀레우코스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로 명명했다고 한다.
BC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곳에 로마군을 주둔시키고 로마인 거주지로 삼았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흩어진 돌무덤과 잡초만 무성했다
사도바오로는 1차 전도여행때(45-49년경) 페르게에서 험준한 안티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이코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에서 전도했다(사도 13,13-52)
도심에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바오로 대성당의 초석이 남아있었다
큰 성당을 짓기 전에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그 작은 성당 바닥에서 이곳 주교 옵티모스(Optimos 357-384년경 재직)의
이름을 새긴 모자이크 두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성당은 본디 유다 교 회당이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터키에서 유다 교회당 터에 성당을 세운 사례는 여기뿐이라고 한다.
사도 바오로가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거처 간 중요한 자리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라오디게이아로 이동했다
1) 라오디케이아 Laodikeia (현재 이름 Laodikeia 7대 교회중 하나)(묵시3,14-22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
이곳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라오디케이아는 나지막한 언덕위에 이었는데 섭씨50도의 더위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히에라폴리스의 뜨거운 온천물이 9Km 떨어진 라오디케이아 까지 흐르면서 물이 식어 미지근하게 되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크스 2세(BC 261-252년 재위)가 이 지역의 전략적 요소 때문에 도시를 창건하고 왕비의 이름을 따
라오디케이아 라고 명명했다
사도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 중 히에라폴리스와 라오디케이아 교회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710년과 1899년두 번에 걸친 대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유적 끝 부분에 7대 교회 중하나인 라오디케이아 교회터에 아직도 그 당시 돌에 새겨진 십자가가 남아 있었다.
아직 유적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바로 건너편에 하얗게 보이는 목화의성 파묵칼레로 이동
파묵칼레(목화의 성 이란 뜻이다)
히에라폴리스 유적지를 지나 아름다운 파묵칼레 온천에 들어섰다
다량의 탄산칼슘을 함유한 온천수가 만들어내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목화의 성이었다.
우리는 모두 따뜻하게 흐르는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참새처럼 나란히 앉아 재잘거리며 즐거워했다
천연으로 이루어진 하얀 석회암은 마치 빙하의 언덕처럼 보였다
다양하게 형성된 큰 웅덩이마다 가득 채워진 새파란 온천수를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그 신비에 찬 아름다움에 탄성에 탄성을 거듭했다
하느님의 걸 작품 파묵칼레(목화 성)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온천수에 피로를 씻어내고 벌판에 세워진 호텔로 이동하였다
단잠으로 또 다른 새 날의 아침을 꿈꾸면서~~~
O 9월12일 (일) 에페소로 移動
2) 피라델피아 Philadelphia(현재이름 Alasehir 7대 교회 중 하나 )사도요한 교회
(묵시3,7-13“너는 힘이 약한데도 내말을 굳게 지켜내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요한묵시록 일곱 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지 않았다
필라델피아는 BC159-138년페르가몬 임금 아탈로스 2세인 필라델피아누스에 의해 도시가 세워졌기에 필라델피아누스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 베르가모, 라오디케이아,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있어 교통의 요충지로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 업이
중요 산업이다.
사도요한 교회는 600년에 세워졌으나 대지진으로 무너져 현재는 세 개의 기둥만 남았다
3) 사르디스 Sardis(현재이름 사르트 Sart 7대 교회 중 하나)
(묵시3,1-6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깨어 있어라 회개하여라.
사르디스는 BC 600-546년까지 Lydia 왕국의 수도였다
성읍은 해발 450m 트몰루스 산의 돌출부 고지위와 고지아래 계곡 두 곳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 아주 부강한 도시였고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방심에 허를 찔려 BC 546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과 218년 안티오크스 3세의 침략을 받고 함락됐다
고대 리디아의 수도로서 巨大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었다.
2세기 로마의 안토니우스 황제 때 완공, 거대한 규모와 이들의 장식, 웅장하고 화려한 예술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오니아식 기둥머리는 현존하는 장식기법 중 가장 아름답다
이곳은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로 금화가 만들어졌다
가장 큰 두 개의 돌기둥 뒤쪽으로 아치형 창문이 있는 작은 교회가 있다
이단의 방해도 없었고 박해도 비방도 받지 않았으며 풍요로운 물질문화에 빠져 신앙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 라는 책망을 받은 교회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깨어있어라 회개하라고 질책했다
4) 티아티라 Thyatira(현재 이름 아카사르 (Akhisar) 7대 교회중 하나) 묵시2,18-29 “이자벨이라는 여자는 예언자 로
자처하면서 내 종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 불륜을 저지르게 하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였다
”귀 있는 사람은 성량께서 여러 교회에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BC 3세기경 알렉산더의 장군인 셀레우코스(Seleukos)가 이곳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출생한 자신의 딸 이름을 따서
티아티라(티아의 동네)라 부르게 되었다
리디아 왕국 때부터 페르가몬, 비잔틴, 사르디스, 스미르나의 교차지이며 상업도시로서 당시 자색 옷감 무역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예로부터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든 고가의 비단과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사도바오로가 2차 전도여행中 마케도니아의 필립피(Philippi) 외곽에서 만난 옷감장수 리디아도 이곳 출신의 상인이었다.(사도16,11-15)
사도바오로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입교시킨 리디아가 이곳 출신이고 옛 조상의 왕국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물욕 때문에 전교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교우들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거부했던 바오로 一行이 리디아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폐허가 된 옛 교회 터의 흔적을 돌아보는 중 땅에 기어 다니는 거북이를 잡아들고 신기하게 여겼다
그리고 431년 6월22일 에페소 공의회가 이 교회에서 열렸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론 시간에 박준양 교수님의 강의를 듣던 곳이 바로 여기라니 그 감회가 새로워졌다
성모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ϛ(떼오토코스)호를 부여하는 문제를 놓고 네스토리우스는 반대하고 치릴로는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노플 主敎 네스토리우스는 위격 적 일치를 거부하는Χριστοτόκοϛ
(그리스도토코스)ㅡ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주장하는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치릴로는 位格的 一致 πρόσωπον(프로소폰)을 주장하며 신성과 인성을 불붙은 석탄에 비유, 불과 석탄이 오직 하나를 이루어 분리할 수 없다는 θεοτόκοϛ(떼오토코스)ㅡ하느님의 어머니를 주장하며 격렬한 논쟁으로 불붙었다
콘스탄티노플 부근 수도원장이며 네스토리우스 주의에 반대자인 에우티케스가 인성이 마치 바다로 떨어지는
하나의 꿀방울이 그 안에 녹아버리듯 위격 적 일치를 主張하는 치릴로를 옹호하고 나섰다
에페소 공의회의 결과는 θεοτόκοϛ-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가 받아드려짐으로써 확정됨
이 결과로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 고향으로 돌아가 금의환향 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상부 이집트로 추방당해 그곳에서
451년에 생을 마감한다.
순례 후 점심때가 되어 골목을 두 바퀴 돌며 헤매다가 식당을 찾았다.
점심 식단도 별로였는데 식당 주변을 배회하며 큰 소리로 전화하는 터키 남자의 음성 때문에 더욱 밥맛을 잃었다
안양 다니엘 형제님은 식당 상가에서 45유로에 산 빨간 가방이 여행도중 속을 썩여 후문에 의하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형에 처했다한다.
점심 식사를 하고 다음 행선지인 성모마리아집을 향하였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사도 요한은 성모님을 모시고 에페소로 피신하여 앞산 남서쪽
능선아래 집을 지어 성모님을 모셨다고 한다.
성모님 집 뜰에서 야외 미사를 드리는 분위기는 특별한 친근감을 느꼈다
이슬람순례 객들도 그들 나름대로 성모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여기를 찾는다 했으며 그래서인지 미사 드리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성모마라아의 집이 발견된 경위는 독일 태생 카타리나 수녀가 전신 마비로 12년 동안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