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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는 고난을 먹고 자랍니다
설교자 : 장찬영 목사
본문말씀 : 사도행전 14:19~28
1.
자, 지난 수요일부터 온 세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순절의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순절기는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을 소망을 갖으면서, 부활절 전까지의 7번의 주일을 뺀, 40일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갖게 되는 경건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사순절기의 시작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하여, 지난 수요예배 때 우리는 이마에 상징적으로 재의 십자가를 새기면서 우리의 존재를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순절이 끝나면 부활절을 맞이하게 되고, 이후 오십 일째 되는 주일이 교회의 탄생을 의미하는 [성령강림절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순절은 절기로 볼 때도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사순절 동안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금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구제’를 통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회복하는 본질적인 영성을 추구해 왔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에서도 [말씀묵상(Q.T) 세미나]가 다음 주인 2월20(토)-21일(일) 동안 열리고, [6차 전교인특별새벽기도회]가 3월14(월)일부터 부활주일(27일)까지 두 주 동안 진행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지나면서 그 주, 4월1일(금)과 2일(토)에 [중보기도세미나]가 있습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을 기다리면서 영적 근육이 다시 모아지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아틀란타에 있는 아이에게 뜬금없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Hello, dad, what are you doing for lent? So I can pray for you”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Son, I already sent rent, check that”
그랬더니 아무 연락이 없는 겁니다. 제가 나름 유머를 썼는데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빨리 회개를 하고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sorry... you not laughing. You not confused 'lent' and 'rent'... this is my joke haha”
그리고 빨리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Yesterday we had an Ash Wednesday worship~ For lent I will focus more on Him and pray for you always”
그러자 그분께 연락이 왔습니다.
“Me too. I am doing morning prayer every day except Sunday”
...그래서 다시 제가
“Wow... Good. God is pleasing with you”
그러자 또 그분이
“Yea its very hard but I want to do it”
그래서 제가
“Yea I know.. What if you want I can wake you up every early morning~”
그러자
“Haha it's okay dad”
얼마나 감사해요.. 기특하지 않아요, 물론 저는 다음 날 저는 다시 문자를 받았습니다.
“Hey dad can you send ‘rent’ not ‘lent’? please~”
자,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 된 자가 고침받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믿음의 세계에 대해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선교의 사역에는 이런 초자연적인 역사만 일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몰려와서 군중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쳤다)
복음에는 영광도 있지만, 고난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복음은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복음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심겨진 ‘하나님 나라’는 그런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고난도 있음을, 즉, 하나님 나라는 ‘고난’이라고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겪는 생각지 못한 고난을 보게 됩니다.
2.
먼저, 우리는 성경전체를 통해서, 바울에게는 두 가지의 큰 아픔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첫째, ‘육체적 고난’입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육체의 고난과 어려움을 받습니다.
고후11:23-27“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또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는데, 바로 ‘질병으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9절a“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사도바울이 갖았던 육체의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도 하고 혹은 ‘간질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것을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2) 둘째로, 그는 육체적 고난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에게는 이보다 더 큰 ‘영적 부담’(Spiritual burden)이 있었습니다.
고후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이런 ‘육체의 고난’보다 더 큰 아픔이 있었는데... 그것은 ‘날마다 눌리는 것’, 즉 심각한 영적 부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의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는 이론적으로는 평안하여야 하지만, 그 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이어서 육체의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아프면 옆에서 간호하는 엄마가 같이 아픕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이 아픔이 전달되기도 합니다. 몸에만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영적인 아픔을 감지하고, 자신에게 원하지 않는 영적 부담이 주어지면 사람은 번 아웃을 경험하면서 영혼에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인 시카고의 [윌로크릭 커뮤니티 쳐치]의 담임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목사가 제 작년에 쓴 첵 가운데 하나가 ‘Simplify: Ten Practices to Unclutter Your Soul’라는 책인데, 그대로 번역하면, ‘당신의 영혼을 정돈하기 위한 열 가지 실습’입니다. 한국어로는 [심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 있습니다(책 그림).
하이벨스 목사는 일상의 삶에서 정돈되지 않은 체, 우리 영혼에 부담을 주는 열 가지 단어가 있음을 제시하며, 우리의 삶이 simplify 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그 열 가지 단어는 ‘탈진’ ‘무리한 일정’ ‘압박’ ‘불안’ ‘상처’ ‘근심’ ‘고립’ ‘표류’ ‘꼼짝 못함’ ‘무의미’를 얘기하며, 이것이 ‘단순한 삶의 훈련’을 통과하여 회복되었을 때, 이 단어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단어들인 ‘충전’ ‘정리된 삶’ ‘올바른 관리’ ‘성취’ ‘치유’ ‘평화’ ‘연결’ ‘정착’ ‘전진’ ‘만족’으로 바뀝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사람은 육으로만 지어진 존재가 아닌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적 부담’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1:8-9“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살 소망이 끊어지고, 어디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요? ‘마음’에, ‘심령에’ 입니다....
3.
그런데 그는 어떻게 이 모든 고난을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아니 어떻게 그가 이런 고난의 광야를 참고 버틸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어떻게 제자들에게 고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비밀이 22절에 있습니다.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것은 두 가지 원리를 보여 줍니다.
1) 첫째는, 제자들에게 ‘믿음에 거하라’권면합니다. 한 마디로 ‘믿음으로 견뎌라’ 'remain' ‘남아 있어라’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을 가지고 견디고 그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지키라’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잠3:1)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4:23a)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고난이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고난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이기려 하지말고 믿음에 거하는 거예요.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보세요.. 제자인 가룟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을 하고 그분을 넘겨줍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은 ‘고난의 광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버려짐의 광야, 배신의 광야, 오해의 광야, 침뱉음과 조소의 광야, 모욕의 광야, 절망의 광야, 굴욕의 광야, 고독의 광야, 침묵의 광야, 고난의 광야, 두려움의 광야, 죽음의 광야, 무덤의 광야..... 예수님은 그날 밤, 겟세마네 광야 산에서 날 밤을 꼬박 세우며, 두려움과 공포 속에 떨며 기도하셨습니다...
막14;33-34“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상상이나 가세요? ..... 예수님이 다음 날 십자가에 달리자,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시 고난의 체험을 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시면 하나님께 버림받는 광야체험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심으로써 사망이 주는 절대적인 고독과 두려움을 무덤에 사흘동안 계심으로 고난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갖은 치욕과 굴욕, 부끄러움을 그냥 그대로 당하세요.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고난, 침뱉음과 모욕에 대해 한 번도 반항하시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다 받아들이세요. 다 받아들이시고. 끝까지 참고 견디심으로, 당신의 자리를 지키세요. 이같은 모습을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것을 가르켜 ‘견딤의 은혜’라고 합니다... 고난은 사실 승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견디면 지나갑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버티면 지나갑니다. 믿음에 거하면 지나갑니다.
2) 두 번째는, 바울은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정직하게 가르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환란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바로 바울이 양육과정에서 던지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22절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아니 십자가 없는 부활은 가짜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시119: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히5:7-9a“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일전에 뉴욕 ‘프라미스 교회’에 갔다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신 김남수목사님 가정에 일어난 일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교우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잘 자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아이가 갱단과DRUG를 하는 친구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힘든 사춘기를 지났다고 합니다. 그나마 힘들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 친구들과 떨어질 수 없었고, 어느날 기숙사에서 있는데, 한 친구가 헤로인을 주면서 자기에게 찾아온 사람에게 그냥 건네 주기만 하면 된다는 부탁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 잠복근무한 마약단속경찰관들에게 현장에서 잡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일은 생각보다 커져 마약 운반책의 주범으로 몰리게 되었고, 마약을 뿌리 뽑겠다는 경찰 측의 완강한 정책에 의해 변변한 재판도 받지 못한 체, 실형5년이라는 중형을 받게 되었고, 이후 상고를 했지만 형량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아들의 나이 21살이었습니다. 목사님도 너무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재판 과정에서 아들을 만났지만, 아이는 더 이상 목사님을 만나기를 거부했고, 이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사모님은 깊은 우을증에 빠지게 되었고, 가정은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가운데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본인이 아버지로서 아이를 이렇게 기른 것에 대해 그리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으로 교회에 사직서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당회는 이 사직서에 대해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다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목사님이 한 목회자이기 전에,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오랜 시간 방치하고 이런 문제에 이르게 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며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기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묻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우리의 책임 또한 크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목사님이 자녀를 돌볼 수 있도록 배려하지 않았으며, 또한 목사님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해 공동의 책임이 있기에, 목사님이 사퇴를 하실 경우, 우리 당회 또한 모두 사퇴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목사님의 사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후에 당회는 목사님에게 이번 일에 대한 간접적인 책임을 물어 다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동안 목사님이 자녀에 대해 시간과 관심을 갖지 못하였기에 앞으로 5년 동안 목사님은 매주일 예배가 끝나면 무조건 아들의 형무소가 있는 필라델피아로 가셔서 면회하고 만남을 갖고 오십시오.”
그 다음 주부터 목사님은 주일예배를 마치면 그날 저녁 뉴욕에서 형무소까지 다섯 시간 동안 운전을 하고 내려가서 다음 날 아침 아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1년이 지났지만, 아이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고, 면회 온 목사님을 쳐다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교회는 계속해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1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아들은 서서히 마음을 열고 대화를 시작했고 어느 날 목사님에게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했고, 그렇게 목사님과 아들의 관계는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화가 되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내려놓고, 자기를 보게 되고, 아버지를 용서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때 부터였습니다. 아이는 형무소에서 모범수로 인정이 되어 형량이 5년에서 3년으로 줄어들었고, 감옥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을 채운 뒤, 감옥에 나와 남은 대학생활을 마치고, 콜링을 받아 신학대학원에 들어갔고, 이후 Youth pastor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뉴욕의 그 많은 문제 아이들이 아들에게로 오기 시작했고, 이후 아들은 자기의 아픈 경험을 통해 [청소년마약재활원]을 설립하면서, 지금 청소년 전문사역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고난이라는 자양분을 먹습니다... 그렇게 자라납니다.
롬8:18“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I consider that our present sufferings are not worth comparing with the glory that will be revealed in us.
이제 마지막 24-28절은 1차 전도여행 때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보고입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비시디아 지방을 거쳐서, 밤빌리아 지방에 이르렀다. 그들은 버가에서 말씀을 전한 뒤에,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갔다. 이 안디옥은, 그들이 선교 활동을 하려고, 하나님의 은총에 몸을 내맡기고 나선 곳이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그 곳에 이르러서, 그들은 교회 회중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그들은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지냈다.”
“이제 그들은 그 일을 다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고난을 통과한 결과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일까요? 마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다 마친 후에 하는 보고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의 여정이 고난을 통과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찬양하십시다.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http://www.kumcdetroit.org/bbs/board.php?bo_table=readsermon&wr_id=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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