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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천주교 친일인사 7인에 관한 기록 | ||||||||||||||||||||||||||||||||||||||||||||
-노기남 대주교, 김명제 신부, 김윤근 신부, 신인식 신부, 오기선 신부, 장면, 남상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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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월 22일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연(長淵)이고, 세례명은 바오로다. 1917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 1930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사제서품을 받고 곧 바로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보좌신부에 임명되어 부속 계성보통학교의 운영을 맡았다. 1937년 8월 15일 종현천주교청년회에서 주최한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에 참석하여 고문신부로서 시국강연을 했다.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할 때 이사를 맡고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할 때도 이사장을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1941년 5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을 맡았으며, 이사장으로 있던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총회를 열어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같은 해 8월 7일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장면(張勉)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했다. 1942년 1월 천주교경성교구장(주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3월부터 평양과 춘천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경성교구연맹 이사장으로서 기관지인 <경향잡지>(1941년 2월호)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 기원 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애국식(연맹 常會)을 거행하는 한편, 미사 중 시국강론을 하고, 미사 후에는 단체로 신궁·신사에 참배하도록 지시했다. 같은 해 3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주최한 지도자 간담회에 참석했고, 4월 논산지원병훈련소를 방문했다. 이 무렵 경성교구연맹 이사회에서 군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이를 위하여 매월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1942년 3월 <경향잡지>를 통해 ‘대동아전쟁 기구(祈求)’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조과(早課)나 만과(晩課) 끝에 기도하도록 통지했다. 1942년 5월 경성교구연맹 총회를 열고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위해 진충보국에 적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는 요지의 선언서를 발표하고 “일본어 상용·국체명징·내선일체(內鮮一體)·국민개로(國民皆勞) 및 저축관념 배양, 신자 청년층에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지원병에 나가도록 노력할 것, 황군필승의 기원을 한층 철저히 힘써 할 것” 등을 결의했다. 같은 해 7월 ‘국민총력-사변 5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비록 제국의 불패태세가 확립되었을지라도 이로 만족하여 방심하지 말고 오로지 성전 목적 달성에 정신과 힘을 통째로 바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당국에서 지도하는 바에 무언 복종할 것이요, 복종할지라도 마지못하여 하거나 겉으로 하는 체만 하거나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여 나갈지니, 특히 이 점에 있어서 모든 교우들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여 적극적인 전쟁협력을 독려했다. 1942년 9월부터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천주교경성교구 교황대리주교에 임명되었다. 1943년 11월 6일 임시특별지원병(학병) 시행을 계기로 적극적인 내선일체·대정익찬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기독교·천주교·불교·천도교 등 종교단체가 연합하여 조직한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천주교 측 위원으로 참여했다. 1944년 12월 정무총감을 총재로, 학무국장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창설할 때 천주교를 대표해 이사로 참여했다. 해방 후, 1945년 8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서울대교구장을 맡았고, 1962년 3월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설립했고, 12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946년 10월부터 1963년 5월까지 경향신문사 회장을 겸했다. 1984년 6월 25일 사망했다.
김명제 金命濟│桑村命濟, 1873~1960
간도에 파송되어 1년간 선교하고 1909년 6월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의 문산본당에 부임하여 배명학교를 설립했다. 1916년 6월 황해도 장연군 장연본당으로 전임했고, 경애보통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1928년 1월 황해도 감목대리구(Vicariatus Foraneus) 초대 감목대리로 임명, 1936년 5월 사리원본당으로 전임하면서 본당신부이자 황해도 감목대리로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 1940년 11월 개편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이사를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애국식(연맹 상회-常會)을 거행하며,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가지며,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했다.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1941년 5월 총회를 열어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사회를 열어 군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이를 위하여 매월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1941년 12월 사리원경찰서에 보름간 구금된 일이 있었다. 1942년 1월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면서 감목대리구가 폐지되자 대리직에서 자동 해임, 전주교구로 이적 후 1945년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전라북도 전주 전동본당, 익산군 화산본당, 석동본당 등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경상남도 거창본당 사목, 1957년 부산교구 이적, 진주 장재리본당에서 사목했고 1960년 11월 22일 사망했다.
합병 후인 1910년 12월 평안북도 용천 비현(枇峴)본당, 1913년 4월 황해도 해주본당, 1915년 6월 강원도 이천본당 주임신부를 맡았다. 그 후 종현본당 보좌신부로 전임했다가 1926년 3월 경성 약현본당 신부로 전임했다. 1936년 5월 영등포본당을 분리·독립시켰다. 1939년 5월에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조직될 때 이사를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를 맡았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애국식(연맹 상회-常會)을 거행하며,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가지며,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했다. 1941년 5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총회를 열어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사회를 열어 군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하여 이를 위하여 매월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심장병으로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 1942년 10월 성모병원 담당신부에 임명되었으나, 병세가 악화돼 1943년 10월 7일 사망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1932년 10월 조선쇼와5년국세조사기념장을, 1935년 10월에는 시정25주년기념표창을 받았다. 1936년 6월부터 1937년 4월까지 감곡면장으로 재직하면서 주임관 대우를 받았다. 1937년 5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충청북도 도회의원(음성)을 지냈다. 1937년 8월 충청북도 정보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충청북도 진천·광혜원·음성·원남·괴산·연풍 등지에서 강연했으며, 9월에는 충청북도 도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반에 참여하여 도내를 순회하며 강연했다. 1938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 충청북도연맹 참여(參與)를 맡고 1939년 6월 음성군 감곡면 면협의회원을 겸했다. 같은 해 천주교 순교자현양회 간사를 맡았다. 1940년 11월 열린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받고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충청북도 위원으로 참여했고, 9월 임전태세의 정비·강화를 목적으로 임전대책협력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해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음성)으로 참여했다. 1942년 9월부터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을 맡았다. 1943년 10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주최하는 징병제 관련 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장연·신천·제천 등지에서 강연했다. 1944년 2월 8일부터 3월 7일까지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보도특별정신대(報道特別挺身隊)에 참여하여 전라북도 옥구·김제·부안 등에서 순회강연을 했다. 1945년 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경기도 시흥·수원·평택·안성 등지에서 강연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각당통일기성회 총무부 부원을 맡았고, 11월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 중앙위원을 맡았다. 그해 12월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대회에 천주교 대표로 참여하여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여했고, 같은 해 4월 한독당·국민당·신한민족당 3당합동위원회 집행위원을 맡았다. 1947년 9월 국민의회 정무위원과 산업경제부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한국사료연구회(韓國史料硏究會) 회장과 남북통일촉성종교단체연합회 고문을 겸했다. 1949년 6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법제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해 8월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천주교 대표)을 맡았다.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천주교 교회사에 관심을 가져 1962년 11월부터 <경향잡지>에 「한국 천주교 요람지 주어사 발견」이라는 글을 연재했다. 1978년 7월 13일 사망했다.
신인식 申仁植│高山仁植, 1894~1968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를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를 맡았다. 경성교구연맹은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애국식(연맹 상회-常會)을 거행하며,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을 진행하며. 미사 후 단체로 신궁참배 또는 신사참배를 하도록 지시했다. 1941년 5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총회를 열어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무렵 경성교구연맹 이사회에서 군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했는데, 이를 위하여 매월 1인 1전씩 헌금을 하도록 했다. 경성교구연맹은 1942년 3월 경향잡지를 통해 ‘대동아전쟁기구(祈求)’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조과(早課)나 만과(晩課) 끝에 기도하도록 통지했다. 1943년 10월 전주와 광주에서 특별지원병(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강연을 했다. 1944년 11월 미아리본당(현 길음성당) 주임신부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1946년 4월 약현본당 주임신부에 임명되었다. 1955년 9월 대방동본당 주임신부로 옮겼으며, 1959년에는 서울대목구(1962년 서울대교구로 승격됨) 부주교를 겸했다. 1961년 1월 약현본당 주임신부를, 1963년 9월 명동본당 주임신부를, 1964년 8월 가르멜수도회 지도신부를 맡았다. 건강 악화로 1967년 10월부터 휴양하다가 1968년 8월 12일 사망했다.
오기선 吳基先│1907~1990
1938년 10월 ‘총후강화주간’ 행사의 하나로 성당에서 시국강연회를 주재했다.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를 맡았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낼 것, 미사 전후에 애국식을 거행할 것, 미사 중 시국에 대해 강론할 것, 미사 후 단체로 신궁이나 신사에 단체로 참배할 것 등을 지시했다. 1941년 5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총회를 열어 이른바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 확립’과 ‘신도(臣道) 실천’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이사회를 열어 군기(軍機)헌납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이를 위하여 매월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또 1942년 3월 경향잡지를 통해 ‘대동아전쟁기구(祈求)’라는 기도문을 만들어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조과(早課)나 만과(晩課) 끝에 기도하도록 통지했다. 1942년 2월 평안북도 신의주본당 주임, 부설 성심학교 교장을 겸했다. 1943년 5월 평안남도 안주본당 주임과 부설 성모학교 교장을 겸했다. 1944년 12월 충청남도 대흥동본당 주임신부를 맡아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7년 10월에는 충남애육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겸했다. 전쟁고아들을 돌본 공로로 1963년 8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5년 6월 서울 대방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했고, 1966년과 1967년 순교자현양사업회 회장을 겸했다. 1971년 6월 3일 은퇴, 1983년 4월 한국천주교200주년기념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1987년 3월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맡았다. 1990년 7월 30일 사망했다.
1920년 10월 메리놀외방전교회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해 1921년 9월 뉴욕 맨해튼대학(Manhattan College)에 들어가 1925년 6월 문과를 졸업했다. 1925년 8월 로마를 거쳐 귀국하여 12월 평양 메리놀센터(Maryknoll Center House)에서 어학교수로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929년 10월부터 천주교 평양교구 관리사무소에서 일했다. 1928년 평양천주교청년회장을 맡았다. 1931년 3월 경성으로 이사하여 그해 4월부터 동성상업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1936년 11월 교장을 맡았다. 1937년 4월 동성유치원 원장을 겸했고, 1939년 4월 종현성당 계성보통학교 교장도 겸했다.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천주교 측 대표)으로 참여했고, 9월 경성부 정회준비위원회(町會準備委員會) 역원전형준비위원(役員詮衡準備委員)을 맡았다. 같은 해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非常時國民生活改善委員會) 위원을 맡았고, 11월 비상시 생활개선 순회강연반 연사로 참여해 강원도 일대에서 강연했다.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창설할 때 간사를 맡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1939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參事)를 맡았고, 같은 해 9월 천주교청년회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40년 7월 동대문경찰서에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국방헌금을 냈다. 같은 해 11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확대 개편되어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 출범하자 이사 및 간사를 맡았다. 이 단체는 1941년 2월호 <경향잡지>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며, 애국주일에는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내고, 미사 전후에 애국식[연맹 상회(常會)]을 거행하며,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가지며,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에 참배하도록 각 교구에 지시했다. 1941년 8월 종교계의 총동원을 논의하는 종교계 시국간담회에 노기남(盧基南)과 함께 천주교 대표로 참석했다. 그해 9월 전시체제기 조선인들의 전쟁협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조직한 민간조직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하고 10월 평의원을 맡았다. 1943년 6월 동성상업학교 교유와 생도들로부터 모금한 항공기 구입비 130여 원을 동대문경찰서에 헌납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 중앙위원을 맡았다. 해방 후, 동성상업학교와 계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 최고정무위원과 미군정의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 의원을, 같은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맡았다. 1947년 8월 동성상업학교장을 사임했다. 1948년 5월 제헌의회 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했다. 1948년 8월 제3차 유엔총회(파리)에 파견하는 대한민국 수석대표에 임명되었고, 1949년 2월 주미대사에 임명되었다. 1950년 11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951년 10월 제6차 유엔총회 한국 수석대표를 맡았다. 1955년 9월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을 맡았다. 1956년 5월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부통령에 당선되어 1960년 4·19혁명으로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다. 1960년 7월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 용산갑구에 출마하여 당선했다. 1960년 8월부터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실각할 때까지 의원내각제 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다. 민주당 정권 말기인 1961년 4월 당총재로 선출되었으나 5·16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1962년 9월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0월 보석으로 출감했다. 1963년 2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65년 3월 천주교 혜화동교회 평의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6년 6월 4일 사망했다. *기사내용 출처/친일인명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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