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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가 또 늦어졌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논의한 내용을 별로 벗어나지 못했고, 좀 더 면밀하게 읽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문제제기, 수정, 보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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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극화
우리 시대, 부르주아 시대는 계급 대립을 단순화시켰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사회 전체가 두 개의 커다란 적대적 진영으로, 서로 직접 대립하는 두 개의 커다란 계급들로 더욱더 분열되고 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선언401)
[경철초고]에서부터 맑스가 명시하는 현대사회의 기본구조. 그 사이에 노동운동의 성장, 새로운 시장의 개척(약탈적 착취구조 구축), 생산성 증대 등을 통해 일정하게 완화되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은(대체로 87년~97년) 중산층이 제법 두터워지는 듯했으나, IMF사태 이후 다시 양극화의 폭이 넓어지고 있는 실정.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양극화 문제가 은폐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분리하여 통치하는 자본의 기본전략에 의해 계층분화가 이루어짐으로써, 양극화를 잊어버리고 살기 쉽다. 양극화는 불변의 법칙이라기보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경향으로서, 저항요인들에 의해 저지되기도 하고 저항이 없으면 무자비하게 관철되기도 한다. 특정 시기에 완화된다고 해서 맑스의 테제가 낡은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 경향을 자본의 기본속성으로 간주하고 근본적인 대응책을 만들려 노력하는 것이 현명하다.
2. 국가와 자본
부르주아지는 대공업과 세계 시장의 형성 이후에는 마침내 현대 대의제 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였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처리하는 하나의 위원회일 뿐이다.(선언402)
대의제 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치권력은 아직 미미하기 그지없다. 한국의 자본권력은 정치적 지배권을 배타적으로 장악해 왔다. 이제 자본권력은 국가권력을 압도하는 듯하다. 그래서 형식적 민주주의=부르주아 독재라는 말은 단순한 선전구호 같지 않다. 물론 국가가 자본에 우선하는 듯한 순간들도 있었다. 예컨대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여 특정 거대기업들을 공중분해하거나 특혜를 몰아줄 수 있었던 특수한 시점. 이는 예외 현상일 뿐이다. 물론 국가는 자본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별 자본의 이익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공익성의 외양을 취할 수도 있다. 또 착취의 지속성을 위해 자본의 일시적 이익을 포기하도록 조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동력을 보호하고 재생산하는 다양한 조치들, 예컨대 복지정책 등을 펼칠 수 있다. 이때 노동력 확보 차원에서 유용하지 않은 교육들, 대중들이 지배관계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교육들은 가급적이면 위축시키고자 할 터인데, 이는 오늘날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함께 고려한다면, '위원회'라는 말이 허황된 과장은 아니라 할 수 있다.
3. 공황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이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들을 부득이 파괴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옛 시장을 더욱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따라서 무엇을 통해서? 더 전면적이고 더 강력한 공황들을 준비하고, 그 공황들을 예방할 수단을 감소시킴으로써.(선언406)
그 동안 자본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황을 넘어 성장해 왔다. 생산력의 파괴나 옛 시장의 더욱 철저한 착취에는 한계가 있으며, 새로운 시장 획득 역시 무한할 수는 없다. 그보다 자본은 끊임없는 생산성의 증대와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위기를 넘겨 왔다. 이로써 소련 및 동구 현실사회주의체제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입증했다. 물론 위기를 넘기면 다시 그러한 조치들을 철회하는 투쟁을 벌여왔고 이로써 다시 위기를 키우고 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성급한 확언과는 달리 자본주의의 지속가능성은 어떤 신의 섭리도 형이상학적 원리도 아니다. 자본주의 자체의 동력에 의한 붕괴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도 어떤 체제를 지향할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로 남아 있다. 맑스 엥겔스의 예견에 담긴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 곧 공황으로 치닫는 속성을 저지하는 다양한 조치들을 놓고 다툴 수도 있고, 아예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패권적 독점적 경쟁과 지배의 욕망구조를 제어하는 일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단결
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지 수적으로만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커다란 대중으로 집결되며, 그 세력이 증대하고, 자신의 힘을 점점 더 자각하게 된다. 기계가 점점 더 노동의 차이를 소멸시키며, 임금을 거의 모든 것에서 동일하게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이해관계, 생활 처지는 더욱더 균등하게 된다.(선언408)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들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대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서로 다른 지방의 노동자들 상호간의 연계를 맺어 주는 교통수단의 증대에 의해 촉진된다. 그런데, 이러한 연계만 맺어지면 어디서나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는 허다한 지방적 투쟁들은 하나의 전국적 투쟁,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지방 도로를 갖고 있던 중세의 시민들이 수세기를 필요로 했던 단결을, 철도를 갖고 있는 현대 프롤레타리아들은 몇 년도 안 되어 달성한다.(선언409)
맑스 엥겔스의 예견은 현실에 부합되는 면도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면도 있다. 선언 당시에 비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나 세력은 분명히 성장했다. 그러나 차별화, 매수, 권력화 등의 현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집결, 단결은 예상처럼 진행되지 않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갈등을 적절히 조장하는 것은 통제의 기본방식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 파고들어 그들의 힘을 자각할 수 없도록 하고 자본주의의 영구지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도 지배의 기본기다. 발달한 과학기술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우선은 부르주아지가 구사하는 지배도구의 기능을 지닌다. 예컨대 고도로 발전한 인공지능이나 줄기세포 따위는 현재의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자본권력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인터넷을 떠도는 정보의 압도적인 부분은 자본증식에 기여하며, 해방적으로 활용되는 부분은 그에 비하면 국소적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부분의 의의는 간과할 수 없고 그것을 키우는 것도 운동의 과제다.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상황에서는 과학기술조차 투쟁의 현장이다.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공업과 과학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단결로 귀결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기 자신의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 따라서 또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 전체를 철폐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력들을 장악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지켜야 할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선언411)
객관적 계급조건상 명백히 프롤레타리아인 경우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지금까지의 전유 양식 전체를 철폐할 필요를 절감하기보다 지키고 싶어 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소시민층 역시 분해되어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하기까지는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빈곤화에 근거하는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아직 불투명하다. 빈곤화 테제에 만 운동의 미래를 걸어서는 안 될 것 같다.그러나 자본주의의 본질적 양극화경향을 감안하면, 절대다수의 (상대적) 빈곤은 여전히 운동의 발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이데올로그
결국 계급투쟁이 결전에 가까워지는 시기에는 지배계급 내부, 낡은 사회 전체 내부에서의 해체 과정이 너무나 격렬하고 너무나 날카로운 성격을 띠게 됨에 따라, 지배계급의 한 작은 부분이 지배계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는 혁명적 계급, 즉 그 손안에 미래를 움켜쥔 계급과 한편이 된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 귀족의 일부가 부르주아지에게로 넘어갔던 것처럼, 현재 부르주아지의 일부, 그리고 특히 역사 운동 전체의 이론적 이해에 도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중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선언410)
아직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로 넘어가는 현상보다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현상이 압도적이다. ‘역사 운동 전체의 이론적 이해에 도달한’다는 것의 기준을 정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오늘의 지식사회 풍토, 연구비에 목을 매는 오늘의 전문 연구자들과 취업준비에 영혼을 바치는 대학생들을 생각하면 한쪽에서 아무리 헬조선을 외치며 목숨을 걸어도 계급투쟁이 결전에 가까워질 때는 요원한 듯하다. 그 결전이 일회적이지 않고 수없이 여러 양태로 반복되리라고 예상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6.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외부
지금까지의 모든 운동들은 소수의 운동들이었거나 혹은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자립적 운동이다.(선언411)
레닌이 조합주의 경제주의에 맞서 사회주의 이념을 외부에서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고 전위당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20세기초 러시아 상황을 반영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을 ‘압도적 다수의 자립적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맑스 엥겔스의 입장은 19세기 중엽 고양된 혁명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런데 맑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자립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대체로 고수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외부’를 운동의 원리로 고착시킬 이유는 없다. 출신성분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면, 내부/외부의 구분에 매달릴 일도 아닐 것이다. 맑스 엥겔스를 굳이 프롤레타리아트 외부로 분류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7. 사적 소유의 폐지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선언413) 공산주의는 사회적 생산물들을 전유할 힘을 그 누구로부터도 빼앗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다만 이러한 전유에 의하여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힘을 빼앗을 따름이다.(선언415-416)
사적 소유의 폐지는 특별히 보수적인 사람들만 아니라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두렵게 하는 이념이다. 그것이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 즉 생산물의 전유에 의해 ‘타인의 노동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힘’, 빈익빈부익부, 유전무죄 무전유죄, 부와 가난의 대물림, 자유로운 거래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강제노동, 잉여가치 착취 등을 초래하는 자본의 힘을 폐지하자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자본 없이, 잉여가치 착취 없이도 생산-분배-유통-소비가 활기차게 이루어지는 사회질서가 어떻게 지속될 수 있을지, 그 원동력은 무엇일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류사적 경험에 근거해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마르쿠제가 제시하는 에로스도 그 한 가지 동력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욕망구조를 근거로 새로운 질서의 불가능성을 예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8. 국가와 폭력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다. 그들에게 없는 것을 그들로부터 빼앗을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우선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해야만 하며, 국민적 계급으로 올라서야 하며, 스스로를 국민으로서 정립해야만 하기 때문에 비록 부르주아지가 생각하는 의미에서는 아닐지라도 아직은 그 자체 국민적이다. (선언418)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무의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도 자본이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라기보다 계급투쟁, 모순, 갈등 속에서 자본주의가 지배구조를 이루는 사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지배력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항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지배구조의 성격은 크건작건 변할 수밖에 없으며, 국가의 성격도 그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 단위의 억압과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 특히 식민지 위치의 국가는 저항의 단위로서 무의미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으로의 형성, 부르주아지 지배의 전복,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선언413)
발전과정 속에서 계급적 차이들이 소멸되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며,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정치권력이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폭력적으로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대립의 존립 조건들과 계급 일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가 나타난다.(선언420-421)
정치권력의 장악과 유지가 절대화되고, ‘계급 일반의 폐기’와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의 형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소멸할 경우, 주요 의사결정권한과 책임이 당간부와 관료들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엘리트에게 집중되고 대중들이 점차 정치권력으로부터 멀어질 경우, 대중들이 그 체제를 자신의 체제로서 받아들이고 지키고자 할 이유도 별로 없을 것이다. 혁명은 단순히 권력쟁취가 아니라, 그러한 사태를 초래하지 않기 위해 대중들이 권력구조의 변화과정에 참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합하고 적극 참여하여 이루는 권력구조의 변화 없이는 지배 자체가 폐기될 수 없고, 지배관계의 양상이 새로워질 뿐이다.
폭력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을 유발하는 핵심어다. 정치권력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폭력’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폭력의 의미를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폭력은 군사력, 경찰력, 시위대의 물리력을 포함해, 법적 제도적 폭력, 자발적 동의를 활용하는 폭력, 욕망을 규정하는 폭력 등등의 차원에서 다각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기득권을 털끝만큼만 건드려도 기득권세력의 결사항전을 예상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배 자체의 폐기는 실로 전방위적 폭력 없이는 공허한 희망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폭력을 언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9. 국제주의
한 개인에 의한 다른 개인의 착취가 폐기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한 국민에 의한 다른 국민의 착취도 폐기될 것이다. 한 국민 내에서 계급들의 대립이 없어짐과 아울러 국민들 상호간의 적대적 자세도 없어질 것이다.(선언418)
강대국 내부의 계급대립이 소멸하면 타민족에 대한 착취관계도 사라질 것인지, 국제주의의 효능은 어디까지인지 미지수다. 이미 1차대전 시기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쇼비니즘 문제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의 분쟁은 사안이 그리 단순치 않음을 보여준다. 소련은 쿠바 등을 상대로 국제분업을 요구했고, 중국과 소련은 핵전쟁을 불사할 태세로 격렬히 싸웠으며, 베트남과 중국도 아름답지 못한 전쟁을 치렀다. 베트남이나 북한 등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군사지원 역시 국제역학관계 속의 국가이기주의를 초월했다고 할 수 없으며, 국제주의는 국가이기주의의 형식을 통해 관철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의 경우처럼 국제주의를 떠나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도 있다.
10. 공산주의자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의 사회 정치 상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 모든 운동들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이 더 발전한 형태를 띠고 있든 덜 발전한 형태를 띠고 있든 소유문제를 운동의 기본 문제로 내세운다.(선언433)
‘소유문제를 운동의 기본 문제로 내세운다’는 것은 경제주의를 고무하는 것인가? 경제주의는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경제조건의 개선에 매몰되는 경우에 한정해서 적용해야 할 것이다. 경제조건을 개선하려는 운동이 현존 사회 정치 상태에 반대하는 혁명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있고,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 운동의 과제일 것이다. 오늘의 노동운동이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을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의 사회 정치 상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는 기준에 비추어 운동의 방향을 규정해갈 수는 있을 것이다.
11. 생산력 증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들의 양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선언420)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효과로서 생산력의 신속한 양적 증대를 제시하고 있는데, 19세기의 궁핍상황에서는 불가피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어디까지 성장해야 낙수효과를 맛보게 될지 묻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현재 인류가 이룩한 생산력은 전지구를 낙원으로 만들 수 있으나 야만적 생산관계, 지배관계로 인해 절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다는 신좌파적 통설을 받아들인다면(이때의 낙원이 어느 수준인지 누가 계산해 주면 감사), 생산력 증대와는 다른 비전이 공산주의에 필요할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은 나름 매력 있어 보인다. 물론 그 자유의 구체적 내용이 늘 문제일 것이다.
12. 불가피한 방책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들에 대한 전제적 침해를 통해서만,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불충분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운동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며 생산양식 전체의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 채택이] 불가피한 방책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책들은 각 나라에 따라서 다양한 것이 될 것이다.(선언420)
선언이 제시하는 방책들 가운데 일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부분적으로 현실화되어 있기도 하고, 여전히 추진할 만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의 처방은 참조사항이며, ‘이러한 방책들은 각 나라에 따라서 다양한 것이 될 것’이라는 최종 방책을 출발점으로 삼아 오늘 우리 사회에 적합한 길을 주체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13. 적대적 대립에 대한 의식
공산주의당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에 관하여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한 의식을 노동자들에게서 만들어내는 일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바, 이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가 그들의 지배와 함께 도입할 것이 틀림없는 사회적, 정치적 조건들을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그만큼 많은 수의 무기들로 즉시 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에서 반동적 계급들을 전복한 후에 곧바로 부르주아지 자체에 대항하는 투쟁을 개시하기 위해서이다.(선언432)
맑스주의에 대한 비난들 가운데에는, 사랑이 아니라 증오심을 부추기고, 조화와 타협 대신 모순과 투쟁을 강조한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이 비난에는 현실에 없는 모순을 맑스주의가 만들어낸다는 식의 속임수도 따른다. 맑스주의는 현존하는 모순들, 특히 소유관계에 기초한 노동과 자본의 대립관계를 은폐하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현실적 모순들을 넘어서는 전략을 만들고자 한다. 문제들은 은폐하기보다 제대로 인식해야 극복의 가능성이 열릴 것 아닌가.
14. 공공연하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도를 감추는 일을 부끄러워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질서의 무력적 전복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선언433)
지배계급들에게 오늘날 공산주의는 공포의 대상인가? 아닌 듯하다. 대다수의 피지배자들조차 진지한 고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공공연히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밝히는 것이 운동에 도움이 될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자신의 생각과 의도가 얼마나 피지배자들의 인간다운 삶에 유익하고 필요한지를 지난한 노력들을 통해 실증하지 못하는 일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맑스 엥겔스의 이론과 씨름하는 것도 빼먹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