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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지 윗필드의 생애
(George Whitefield,1714-1770)
옥외 설교의 대가인 죠지 윗필드는 위대한 개인 전도자로서 최고봉에 이르고 있다.
옥외에 운집한 대 군중들에게 설교한 이들 중 휫필드 보다 더 능력있는 음성을 선물 받았던 설교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는 스코트랜드에 있는 캠버링에서 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그의 설교의 결과로 만명이나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 사실을 고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몸과 폐가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또 모든 교회의 문들이 닫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옥외에서 일할 수 있도록 초자연적인 능력을 입혀 주셨던 것 같다.
벤자민 프랭크린은 휫필드의 음성을 얼마나 멀리서 까지 들을 수 있을까 알아 보려고 시험해 보았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일마일 이상까지 그의 설교를 똑똑히 들었다고 했다.
휫필드의 조부는 영국 국교회의 목회자였는데, 그의 부친은 주막집 주인이었고 포도주를 파는 상인이었다.
죠지는 1714년에 출생했다.
그는 일곱 남매(아들 여섯, 딸 하나) 중 가장 어렸다.
그의 부친은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모친은 무디의 모친처럼 가족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빈곤과 싸우느라 고생을 하게 되었다.
죠지는 4세 때 홍역을 앓았는데 모르고 버려두어서 생기가 넘치던 검푸른 한쪽 눈이 약간 사팔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의 모습의 매력에 흠이 가게 하지는 않았다.
그의 초기 생애는 거짓말, 사기, 악한 말, 좀도둑질, 또 다른 청소년 범죄 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 어거스틴을 많이 닮았다.
그는 때때로 예배처에 뛰어 들어가 목사님의 이름을 외치고는 급히 달려 나가곤 했다.
그 교회의 한 교우가 한 때 그에게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목사가 되겠다고 대답하면서 그러나 나는 그 늙은이 콜(Cole)이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강단에서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나이 많은 목사 콜은 후에 능력이 넘치는 설교자 휫필드와 자기가 분명하게 관계된 일화나 사건을 듣게 될 때 마다 기뻐하게 되었다.
휫필드는 난폭했고 무절제한 아이였다.
그의 모친은 그가 사업의 한 부분을 맡지 못하도록 노력했으나 때로는 술을 팔고 돈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 지었던 죄들을 말하는 데는 끝이 없다”고 했다.
그는 선한 생각과 양심의 가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그의 모친으로부터 훔친 돈을 다 쓰지 않고 그 중의 얼마를 가난한 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훔친 책들 중에는 신앙의 책들도 있었고, 애정의 책들도 있었는데 그는 후에 4배로 배상해 주었던 것이다.
그의 성질은 또 꿋꿋하였다. 한번은 그를 놀려서 화가 나게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는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시편 118편을 펴고 눈물로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
그는 성경에는 익숙했으나 거룩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앞으로 사역자가 된다는 생각에 기뻐했으며, 그는 자주 설교자들의 기도를 흉내냈고, 당시 흔하던 억양도 흉내냈었다.
그로세스터에 있는 성 메리데 크맆트 교회에서 휫필드는 헌아 되었고, 10세 때는 개구쟁이 었으며, 그가 21세때 집사로서 처음 설교했다.
그가 10세 때 그의 모친은 재혼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성 메리데 크맆트의 보통학교에 다닐 때 휫필드의 기억력과 웅변력은 그가 즐겨했던 연극 분야에서 아마추어로는 뛰어 났었다.
15세 때 보통학교를 중단하고 그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벨 주막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저녁에 그는 종종 성경을 읽었고, 몇 개의 설교도 작성하였다.
드디어 죠지의 다른 형제들이 그 주막을 책임지게 되었고, 그는 형수와 뜻이 맞지 않아 브리스톨에 있는 다른 형제에게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큰 갈망을 느꼈다.
두 달 후에 그는 집에 돌아왔고 위와 같은 확신들과 갈망은 그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모친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마루 위에 침대도 놓아 주었으며 어떤 일도 그에게 맡기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그의 누님에게 말하기를 “누님,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나를 위해 마련하고 계신 것 같아요”라고 했다.
그의 모친은 그가 어떤 큰 인물이 될 것을 예감했던 것 같았다.
얼마간 있다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일할 기회가 열리게 되었다.
그는 옥스퍼드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학교엘 갔고, 죄된 동료 때문에 그는 무신론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래 가지 않았고, 그는 17세 되는 생일을 맞아 성찬예식에 참여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관한 꿈과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인상은 그를 온전히 사로잡은 것 같았다.
한 형도 또한 휫필드에게 그가 성도에서 죄인으로, 죄인에서 성도로 바뀐 급격한 변화를 노골적으로 말했다.
1732년, 휫필드가 18세 때 그는 옥스퍼드에 갔다. 옥스퍼드에서 그가 오랫동안 소원했던 “감리회”의 일원이 되었는데 그 때 회원은 15명이었다.
챨스 웨슬리가 그에게 빌려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이란 책은 휫필드로 하여금 외적 일이나 형태나 의식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참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이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읽게 되었을 때 밝은 빛이 즉시 그의 영혼에 비치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새 피조물”이 되어야만 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휫필드는 웨슬리가 구원받기 오래 전에 거듭나게 되었고, 그의 동료들이 신생의 밝은 빛으로 나오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회심에 관하여 아는 사람들에게 썼는데 그들은 휫필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결회” 혹은 “감리회”의 다른 이들과 큰 핍박을 나누어 받게 되었다.
그가 옥스퍼드에서 경험했던 수치와 핍박은 그의 남은 생애에 있게 되었던 더 큰 핍박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웨슬리가 중생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까닭에 휫필드도 그의 눈을 그리스도에게서 돌려 구원을 위해 외적 행위를 다시 한 번 찾기 시작했다.
휫필드는 그의 영혼을 채우고 있었던 교만과 죄 된 생각으로 부터의 구출을 위해 낮과 밤을 기도와 금식으로 보냈고 많은 시험과 유혹을 통과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런 것들에서 승리하도록 나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때 까지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믿음으로 승리를 얻기 전에 그는 심한 금식과 거칠은 음식을 먹으며 남루하게 옷을 입는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구원을 찾았다.
그는 매우 추운 날 밤에 나무 아래서 기도했으며 한 동안 설탕 없는 쓴 차와 거친 빵으로 살았다.
드디어 그는 몸이 쇠약해져서 좀처럼 윗 층엘 올라갈 수가 없었다.
웨슬리는 그를 조금 도울 수 있었으나 7주 동안 자기 생각으로 찾은 후에 다시 한 번 그의 눈을 그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되었으며 평화와 즐거움이 그의 영혼에 넘치게 되었다.
그는 “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이 내 영혼을 채웠네, 죄짐이 떠나갔을 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내주하심을 느낄 수 있었고, 내 허전한 영혼에 믿음의 전적 확신이 있게 되었네” 라고 했다.
그 후에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관한 보다 명백한 견해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며, 곧 그의 동료들을 중생의 경험으로 인도했는데, 그 일은 그로세스터와 옥스퍼드에서 있었다.
이제 그는 기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시작했으며 아픈 자를 방문하고 주를 위하여 다른 봉사를 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목사 안수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의 큰 겸손은 안수를 받지 않는 편으로 기울어졌으며 인내로 융통성 있게 자신의모든 문제를 대했고, 그의 확신은 바위 같이 강했다.
그는 결국 목사 안수식에 참여하기로 설득되었다.
그가 전에 꿈을 꾸었던 대로 감독은 그를 부르게 되었고, 그를 친절히 맞아 들였으며, 그에게 금으로 된 선물을 주면서 말하기를 그가 전에는 22세 이하의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안수를 주지 않기로 마음에 작정을 했으나 휫필드가 원하면 언제든지 안수를 주겠다고 했다.
휫필드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했고, 하나님의 추수 밭에서 놀라운 역사를 할 수 있도록 성령과 능력의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은 그가 안수를 받는 순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36년 6월 20일 그가 21세 때 그로세스터의 훌륭한 감독 벤손 박사에게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이 취급하시는 역사”란 책 4장에서 휫필드는 그가 어떤 경험을 그 순간에 했던가를 쓰고 있다.
“안수 결정이 있기 3일전에 감독이 마을에 왔다. 다음 날 나는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두 질문에 답을 했다.
‘그대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 직분과 임무를 맡기로 했다고 믿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율법의 말씀에 따라 소명을 받았는가?’
다음 날 아침 나는 감독을 기다렸다. 큰 사랑으로 그는 나를 받아드렸고, 내게 말하기를 내가 와서 기쁘다고 했다. 내가 준비했던 것에 그는 만족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나는 내 자신이 그대를 위해서 두 교구를 생각했었는데 옥스퍼드 쪽을 택했으니 기쁘다. 나는 그대를 신임하니 많은 선한 일을 하라’고 했다. 이와 같이 나는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어쩔 줄을 몰랐으며 무척 기뻤고 하나님은 모든 경우를 통하여 내 앞에서 매우 분명하게 사역의 길을 인도하셨다.
주일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디모데에게 쓴 사도 바울의 서간을 읽으며 특별히 아무도 내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내용으로 더욱 기도했다.
내가 강단으로 올라갈 때 나는 주님 앞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서 있었던 사무엘 생각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감독이 내 머리에 손을 얹을 때 나의 마음은 녹았고, 나는 나의 모든 신혼신을 하나님의 성소의 봉사에 드리게 되었다.
나는 감독의 명령대로 복음을 읽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주의 거룩하고 복된 만찬에 참예함으로 고백에 대한 인을 치게 되었다.”
휫필드가 목사로 안수 받은 다음 주일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설교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그가 안수 받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의 불은 그의 입술에 참으로 역사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첫 설교가 그의 옛 고향인 그로세스터 교회의 많은 청중에게 전달되었고 그의 설교로 15명이 미치게 되었다는 불평이 감독에게 전해졌다.
그 선한 감독은 그 미친 일이 다음 주일까지 잊혀지지 않기를 소망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안수 받은 후 휫필드는 대학에서의 과정을 마치기 위해 기쁨으로 옥스퍼드에 돌아왔다.
거기 있는 동안 휫필드는 런던의 한 한적한 곳에 있는 형제회의 제단에서 두 달 동안 설교하도록 초청되었다.
그는 그 초청을 받아들였고 처음에는 그의 젊음이 조소를 받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몰려들게 되었다.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방이 기도하려는 학생들로 자주 가득 차게 되었다.
그는 성령의 강권하시는 능력과 열정과 열심의 충만으로 대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몇 번의 능력 있는 설교를 한 다음 그는 미국으로 떠났다.
잉글랜드를 떠나기 직전 브리스톨에서 행한 설교들은 전 도시를 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가 미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두 번째 방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가는 휫필드를 만나려고 몰려 들게 되었다.
비록 그가 22세였지만 브리스톨은 완전히 그의 매력으로 사로 잡히게 되었다.
퀘이커 교도들이나 영국 국교회의 비주류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교회를 떠나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교회의 구석구석이 사람으로 가득 찼고, 반이나 되돌아가게 되었다.
위로 부터의 능력을 힘입어 설교한 “중생”은 모든 형편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이 보였다.
그가 그 도시를 떠나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심하게 울었고, 그것은 그가 그러세스터를 떠날 때 그 도시의 사람들이 울었던 것과 같았다.
그가 런던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설교를 거의 강요받게 되었는데, 큰 교회들도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
수천의 사람들이 자리가 없어서 돌아가게 되었다.
주일날에는 집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먼동이 트기 전부터 거리가 가득 메워졌다.
그가 미국에서 시작하려는 고아원을 위한 헌금은 어찌나 많이 쌓였던지 집사들이 운반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내 기성 교회들은 질투하여 휫필드를 반대했고, 교회의 문들은 그에게 닫혀지게 되었다.
1737년 성탄절경 사람들이 울며 환송하는 중에 미국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그는 영국 자선 학교에 5천불을 짧은 기간의 수고로 남겨 놓고 가게 되었다. 여행 중에 그 배를 타고 가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사역으로 축복을 받게 되었다.
휫필드가 미국 죠지아에 있는 그의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대중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좀처럼 갖기 어려웠는데 그 때 그 곳에서 가장 큰 회중은 약 2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되었고 수십 명이 그리스도께 인도 되었다.
1738년 그는 영국에 되돌아 와서 그가 없는 동안 “중생” 즉 “신생”에 관한 새 빛을 경험하게 된 웨슬리와 협력하여 일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휫필드와 웨슬리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고, 그들의 설교는 계속적으로 미지근하게 유행을 따랐던 교회들을 고발하는 너무나 분명한 내용이었으므로 이들 교회들은 그들을 막아 급히 문을 닫게 되었다.
휫필드가 한 교회에서 설교했는데 천명이나 안에 들어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옥외 집회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심지어 감리회 회원들도 당시 이와 같은 것을 미친 생각으로 여겼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그의 설교로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가 하는 말에 “아멘”이라고 대단히 크게 외치게 되었다.
그와 같은 것은 당시 새로운 일이었다.
많은 국교회에서 배척받은 휫필드는 1739년 킹스우드와 브리스톨에서 옥외 설교를 시작했다.
거칠은 광부들이 모여 그의 설교를 들었으며 청중은 점점 늘어 20,000명이나 되었다. 석탄에 물든 뺨들이 눈물로 얼룩졌으며, 수백의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휫필드는 이제 기도문과 설교 원고를 사용하는 대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즉각적으로 기도하고 설교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엄청나게 몰려 왔으므로 다른 교회들은 텅텅 비게 되었다.
브리스톨을 떠나게 될 때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감리회에 모였던지 사다리를 이용하여 이웃집 지붕을 타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브리스톨에서 휫필드가 시작한 이 위대한 일을 웨슬리가 계속했다.
런던에 있는 영국 국교회에서 설교 도중 내쫓김을 받았을 때 휫필드는 교회 밖에서 그의 설교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런던에 있는 가장 크고 난잡하기로 유명한 환락가인 무어필드에서 옥외 집회를 열게 되었다.
런던에 있는 난폭자들의 놀라움은 매우컸다.
키가 크고 늠름한 젊은 목사가 부드럽고 파란 눈에다 까운을 입고 벽을 등진채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들에게 설교했던 것이다.
같은 날 그는 캔닝톤 컴몬에서 보다 수준이 높은 20,000여명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 후 그는 양쪽에서 20,000내지 40,000여명의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무어필드의 집회에서 기록된 기도의 요청이 한꺼번에 1,000건 이상 있게 되었다. 굉장한 청중의 찬송 소리는 2마일 밖에 까지 들렸다고 한다.
캔닝톤 컴몬에서 사람들이 휫필드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의 우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휫필드의 설교는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같은 장면이 무어필드에서도 있었다.
학니 마쉬에 있는 경마장에서 그는 약 10,000명의 사람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는데 말들이 다 도착했는데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휫필드는 2차 미국 여행과 그 후 여행에서 매우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는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했고,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도록 했다.
휫필드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졌던 집회를 통해 모든 학생들이 그리스도께 회심이 되었다고 주장이 되기도 했다.
벤자민 프랭크린은 휫필드의 설교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존경 받던 요나단 에드워드도 그의 설교를 듣는 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 후 영국에 돌아 와서는 무어필드에 그를 위해 세워진 예배당에서 큰 청중들에게 설교했고, 영국 다른 곳에서도 많은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아마도 그에게 가장 컸던 집회는 스콧트랜드 그라스고우 근처에 있는 캠버스랑에서의 것이었다고 본다.
당시 모였던 청중은 30,000 에서 100,000 에 이르렀다고 집계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그가 설교하는 동안 한 시간 반이나 눈물로 목욕을 하게 되었으며 그의 설교로 10,000 명이 그리스도께 회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 영국은 그의 설교로 거룩한 열정에 빠졌던 것처럼 보였다.
비데포드의 영국 국교회의 목사는 한 주일 저녁 휫필드의 설교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경고했는데도 다음 날 아침 휫필드는 10,000명이나 되는 청중에게 설교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귀족들도 기쁘게 그의 발 앞에 앉아서 들었고, 수천의 사람들이 종종 비를 맞으면서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서 있었다.
휫필드는 몸이 대단히 허약했으므로 그의 음성이 미치는 놀라운 범위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풍부한 성량과 음성이 분명한 점에 있어서 어떤 옥외 전도자라도 휫필드를 결코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휫필드의 설교의 명백성은 거의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였다.
한 번은 선원들에게 설교한 적이 있는데 그는 바다에서 폭풍 때문에 파선하는 배를 묘사했다.
그는 막 침몰하려는 순간에 놓인 배에 대하여 말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다음은 어떤 일일까?” 한 적이 있다.
그 묘사가 어찌나 생생했던지 서원들이 펄쩍 뛰면서 “ 구명정, 구명정을 타라” 고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다른 때는 한 소경이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어떤 절벽의 가장자리를 향하여 걷다가 드디어 그 끝에 와서 서게 된 경우를 말한 적이 있다.
그 묘사 역시 어찌나 생생했던지 그의 설교를 듣던 체스터필드경은 펄쩍 뛰면서 소리 지르기를 “나의 하나님, 나는 죽습니다”라고 했다.
유명한 배우들이었던 게릭, 푸데, 쉐터, 등은 휫필드의 설교를 듣기 좋아했다.
게릭은 휫필드의 설교의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휫필드가 단지 메소포타미아란 말의 발음만 내도 사람을 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휫필드는 성경적으로 신학자가 아니었고, 책을 읽을 시간을 좀처럼 가지지를 못했다.
당시 그가 시간을 내어 읽었던 대부분의 책들은 흔했던 캘빈주의에 입각한 책들이었고, 그래서 그의 마음은 캘빈주의 신학적 견해와 일치했다.
그와 같은 입장이 웨슬리와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웨슬리는 캘빈주의의 숙명론적 가르침을 거절했다.
휫필드와 웨슬리의 우정은 계속되었으나 논쟁이 있기 전처럼 전적으로 일치하여 일하지는 못했다.
휫필드와 웨슬리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일꾼들이었고, 각자는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빛의 정도에 따라 설교했다.
휫필드는 아마도 웨슬리처럼 논리적인 마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때때로 두서없는 설교와 제목과 일치하지 못한 설교 대문에 비난을 받았다.
이 비난에 대한 그의 대답은 “만일 사람들이 잃어버린 양들처럼 배회한다면 그들을 따라 나도 계속 그러하리라”는 것이었다.
웨슬리처럼 휫필드는 열정적인 사역자였다.
그가 바쁠 때는 일주일에 15번 이하로 설교해 본적이 없었다.
그는 적어도 18,000번 설교를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매주 평균 10회식 34년간 한 셈이다.
그는 종종 하루에도 4,5번씩 설교했다.
그는 수년간 주께 돌아가기를 고대하다가 일곱 번째 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 죽기 전날까지 설교를 하고 1770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