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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60.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15) 중국서 드린 주일예배가 사역의 단초
1992년, 35세의 나는 청년사업가로 자신만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막 개방을 시작한 중국과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윤택했고, 신앙적으로도 안수집사 임명을 받아 열심히 교회에 봉사하고 있는 때였다.
빨리 안수집사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출석하던 교회에서 ‘예수초청잔치’를 열었는데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인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에 한번 ‘올인’해 보기로 작정했다. 당시 수천 명을 전도했다는 주안장로교회 안광자 권사(당시는 집사)의 간증을 듣고 크게 자극을 받은 것이다.
업무는 접어두고 회사가 있는 서울 장안동 일대를 누비며 전도를 시작했다. 이렇게 내가 만난 사람이 석 달이 좀 넘는 동안 2300여명이었다. 교회에 와서 등록한 사람도 267명이나 되었다. 주변에서 나를 ‘전도왕’으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 과정도 좀 특이하다. 단기하사로 군복무를 했던 나는 교회완 전혀 상관없었고 또 신앙을 가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제대를 1년여 남기고 대대장이 바뀌었는데 신임 대대장(서상건 중령)과 사모님이 독실한 신앙을 가지신 분이었다. 부대 안에 교회가 없자 사비로 교회당을 지은 뒤 나를 부르셨다.
“서 하사! 부대에 신우회가 없는데 자네가 회장을 좀 맡아주겠나? 자네 이름과 내 이름이 비슷하니 뭔가 통할 것 같아서라네.”
‘서베드로’란 이름으로 바꾸기 전 내 이름은 ‘서상호’였다. 군대는 명령이기에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내가 하루 아침에 신우회장이 됐다. 그리고 사병들을 주일마다 교회로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자연스레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제대 후 모태신앙인인 아내와 결혼을 했고 28세에 서리집사가 되고, 청년부 회장을 했으니 하나님의 섭리가 놀랍기만 하다.
이처럼 사업과 신앙 모두 혈기왕성하던 92년 8월, 내 인생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중국에서 조선족 동포들이 많이 사는 지린성(吉林省) 성장이 한국의 기독 중소기업인들을 초청했다. 사업 관계를 원활히 하고 중국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져 달라는 의도 같았다. 나도 이 참관단에 끼게 됐다.
우리는 일정 중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자 우리를 한족 삼자교회인 창춘(長春)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이었다.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우리가 중공(中共)으로 불리던 동토의 땅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춘교회엔 3500여명의 성도들이 모였다. 예배를 모두 중국어로 진행해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 중국 땅에 복음이 전파돼 13억 인구 모두 예수를 알게 되길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함께 예배 드렸던 한 중년 부인이 내 옷자락을 슬쩍 잡으며 특유의 북한 사투리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선생님, 조선 사람이 한족 예배만 참석하고 조선족 예배에는 참석 안 하십네까?”
깜짝 놀랐다. 난생 처음 온 중국 땅에서 조선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 한족 예배에 조선족이 참석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과의 만남이 내가 현재까지 19년간 중국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되는 첫 단추였음을, 이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 중국서 드린 주일예배가 사역의 단초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2) 가난한 조선족교회의 현실에 눈물만…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3) 모피외투 팔아 조선족교회 도우려다…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4) 경제난 속 돈 버는 것보다 전도에 열심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5) 타 종교인·무속인에게도 과감히 전도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6) 전도 체계적으로 배우려 신학대 입학
*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7) 사업·전도 사이 고민 중 딸과 중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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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베드로 원장 약력=1958년 서울 출생. 아가페사랑회 회장. 열방영어대학원대학교 학장. 베이징 사랑의 쉼터 원장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2) 가난한 조선족교회의 현실에 눈물만…
창춘교회에서 만난 조선족 여인은 내게 조선족 예배 장소를 알려주었고 우리는 일정을 조정해 조선족 예배장소를 찾아갔다.
창춘교회완 비교도 안 될 작은 공간에 60여명의 조선족 성도들이 모여 있었다. 십자가는 있었지만 한족교회 옆 작은 공간을 빌려 꾸민 것 같았다. 너무나 대비되는 열악한 환경에 마음이 아팠다. 당시 중국에서는 삼자교회 외에 이처럼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생적 교회나 가정교회가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
목회자도 없이 평신도가 인도한 이날 예배는 내게 또 다른 감동과 은혜를 갖게 했다. 예배 시작부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우리 일행은 특송을 부르며 함께 은혜를 나누었다.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자매인 중국의 조선족들. 그들은 일제의 압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넜고, 또 조국을 위해 싸웠던 독립군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간 서로 교류를 끊고 살다 이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신기했다.
예배를 마친 후 동포들과 손을 잡은 뒤 서로 놓을 줄 몰랐다. 한 핏줄임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좋고 그저 기뻤다. 그런데 헤어지기 직전 한 조선족 여성도가 내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또 던졌다.
“선생님. 잘사는 남조선서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예배당 하나 지어 주시라요.”
무어라 대답은 할 수 없었지만 이 음성은 내 폐부 깊은 곳을 찔렀다. 한국에 돌아와 40일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중국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만 감으면 조선족교회 성도들과 예배 드렸던 장면이 떠오르면서 그 여성도의 음성이 내 귓가를 울렸다.
“선생님. 잘사는 남조선서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예배당 하나 지어 주시라요.”
이 음성이 연속 3일간 새벽기도 때마다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내게 조선족교회 건축의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덜컥했다. 조심스레 교회건축 비용을 알아보니 한국 돈으로 5000만원 정도가 든다고 했다. 1992년 당시로는 큰 액수였다. 나는 계속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교회당을 지어 달라는 조선족 여인의 음성이 계속 들립니다. 5000만원을 교회건축비로 보내 그들이 쾌적한 시설을 갖춘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맘껏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때를 맞춰 후배가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며 찾아왔다. 당시 국내는 노조가 생겨나 회사마다 노사분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의류유통 전문가인 후배는 국내 유명 모피회사가 외국에서 자재를 들여와 최신 유행 모피코트 2000벌을 제작했는데 노사분규 때문에 급전이 필요해 당시 100만원 이상 하는 모피코트를 한 벌에 25만원씩 급매한다는 것이었다. 단 모두 다 사야 하는데 5억원이었다.
후배는 이 옷을 사서 백화점 몇 곳과 특판 계약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순간 이 일이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아닌가 여겨졌다. 물건을 보니 신상품으로 아주 좋았고 판매루트도 마련돼 있기에 후배와 나는 2억5000만원씩 마련하기로 했다. 이 경우 내가 얻게 되는 수익은 단기간에 1억2000만원이었다. 이 중 5000만원을 중국에 보내면 조선족교회를 건축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난 그 큰 돈을 일주일 만에 급히 마련한 뒤 모피코트를 사서 보관창고로 가져왔다. 행거에 걸린 2000벌의 모피코트가 모두 중국의 영혼들로 보였다.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며 뿌듯했다. 그러나 이 일이 예상대로 잘 됐다면 나와 중국과의 관계는 교회건축만으로 끝났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3) 모피외투 팔아 조선족교회 도우려다…
내가 만든 2억5000만원은 급히 차용한 돈이었다. 그러나 곧 3억7000만원이 들어와 빚을 갚고, 교회 건축비 5000만원을 중국에 보내고도 7000만원이 남았다. 나는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함께 투자한 후배가 하얗게 질려 나를 찾아왔다.
“선배님도 만난 적 있는 L씨가 우리가 산 모피외투를 탐내며 1억원을 보탠 6억원에 되팔라고 해서 팔았답니다. 그 돈으로 다른 곳 외투를 또 싸게 사려고 했지요. 그런데 내가 받은 6억원짜리 당좌수표가 부도가 났다고 하네요.”
전문 사기꾼에게 당한 것이다. L은 유흥가를 돌며 돈을 흥청망청 쓴다고 했다. 화가 치밀어 울화병이 생길 정도였다. 빚 독촉에 결국 내 소유 아파트를 팔아 갚고 반지하 단칸 월세방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L을 향한 분노가 솟았다. 칼과 가스총을 구입했다. L을 만나면 가스총으로 실신시킨 뒤 여차하면 살인까지 할 심산이었다. 나는 핏발이 선 눈으로 L을 찾아 두 달을 헤맸지만 항상 한 발씩 늦었다.
절망과 고통을 견디다 못한 나는 어느 날, 남한산성에 올라가 소주에 수면제 40알을 삼켰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아무리 전도왕이었고,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고, 조선족 교회를 지으려고 했어도 내 신앙은 뿌리를 정상적으로 내리지 못한 엉터리였다.
자살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사흘 만에 눈을 뜬 나는 월세방 우리 집에 누워 있었다. 왜 죽지도 않느냐고 몸부림치다 막 한글을 배운 딸아이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하나님, 우리 아빠가 많이 힘드신가봅니다. 우리 집이 많이 가난해졌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빠를 도와주세요. 예전처럼 저와 잘 놀아주고 돈도 잘 벌게 해주세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그 일기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음성 같았다. 비로소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렸다. 곧장 감람산기도원에 올라가 영성훈련에 참석했고 이곳에서 나는 내 신앙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
강사인 기도원 원장이 내 가슴을 찌르는 설교를 했다. “여러분 마음속에 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 있다면 오늘 그를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용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마태복음 18장, 탕감의 비유를 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사기꾼 L을 저주하고 미워한 것을 회개하게 되었다. 이렇게 7시간 동안 뒹굴며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내가 이토록 많은 죄를 지었는지, 영상처럼 흐르는 모든 것을 토해 놓고 회개했다. 휴지 한 통을 다 쓰고 나니 L을 향한 분노가 사라지고 오히려 그를 위한 기도가 나왔다.
기도원 문을 나설 때 산천초목들이 모두 나를 향해 박수를 쳐주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마음이 날아갈 것 같고 깃털처럼 가벼운지 몰랐다. 미움과 증오는 악한 영이 점령하고 있는 부분이기에 그것이 빠져나가자 난 새 사람이 된 듯 달라진 것이다. 비록 돈을 잃었지만 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더 높은 차원의 영적 세계를 얻게 된 것이다. 수업료 치고는 참 비쌌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신앙은 이 고난을 통해 한층 더 두터워져 교회 봉사와 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믿음을 회복한 나는 조선족 교회를 짓지 못한 것에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국제대학생선교회(CCC)가 주최하는 새생명전도훈련 8주 과정에 등록했다. 더 열심히 영혼 구원을 하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4) 경제난 속 돈 버는 것보다 전도에 열심
나는 일단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다. 사기를 당해 집까지 잃었지만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전도에 다시 열정을 쏟았다. 그러자 빠르게 성과가 나타났다. 전도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CCC 새생명전도 8주 훈련과정을 나는 세 번이나 받았다. ‘사영리’를 매개로 복음을 전하는 이 과정은 가장 기본적인 전도방법이었다. 본부에서는 내게 간사라는 직책을 주었다. 이제는 내가 전도하는 차원을 넘어 전도자를 훈련시키는 위치까지 된 것이다.
그러나 한번 내려앉아 버린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돈 버는 것보다 전도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그 무렵 추석이 다가왔다. 친척들에게 피해를 준 데다 월세 보증금 1000만원도 형제들이 모아 준 터라 가족모임에 도저히 갈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아내와 자녀 둘을 데리고 경기도 남양주 수동기도원을 찾았다. 명절이어서인지 기도원에 온 성도는 30여명에 불과했다.
강사 목사님이 “여기 온 여러분은 지금 두 종류인데, 한쪽은 믿음이 너무 좋아 명절 때도 은혜 받으러 오신 분이고, 또 한쪽은 오죽하면 명절에도 이곳을 찾은 분들이겠느냐”고 하시는데 참으로 공감이 되었다. 그런데 설교 중에 “지금 기도원 본당 건축을 하고 있는데 재정 부족으로 너무 힘들다”고 하셨다.
예배 후 기도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기도원 건축에 네가 먼저 헌신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나는 하나님께 “사기 당하고 빚밖에 없는 제가 무슨 헌신을 합니까”라고 항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주머니에 있는 130만원이 생각났다. 기도원 올 때 거래처 사장이 명절이나 보내라고 물건값을 미리 준 것이었다. 내 전 재산이었지만 봉투에 “하루속히 기도원이 건축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록한 뒤 헌금했다. 누가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행동이라 했겠지만 나는 내가 기도 중 들은 것이 성령의 음성이라 확신했기에 행동으로 옮겼다.
연휴 3일을 기도원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에겐 참으로 미안했다. 그런데 갑자기 국민은행 천호동 지점에서 전화가 왔다. 4870만원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사기 당할 때 50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가 포함돼 있어 지급정지를 시켜 놓았었다. 하지만 은행 규정상 한 번 결제해서 다른 사람이 소액권으로 바꾸어 가면 찾을 수 없다고 해 포기한 상태였다. 본점에서도 절대 찾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사용된 액수를 제외한 돈을 주겠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내가 드린 건축헌금의 40배에 가까운 돈이었다.
“여보, 우리가 사기꾼을 용서하고 마지막 돈까지 건축헌금으로 드린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물을 주신 것 같아.”
우리 부부는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했다.
CCC 훈련 2단계에 거지순례 전도가 있다. 1박2일 동안 연고가 전혀 없는 불특정 지역으로 가서 전도의 담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빈손으로 다니면서 식사를 구걸해야 하기에 거지전도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도하다 굶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한번은 강화도로 훈련을 갔다. 30여명의 훈련생과 7명의 간사들이 함께 갔는데 간사인 내게 5명의 훈련생을 배정해 주었다. 빈손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는데 중간에 절이 나타났다. 누구도 그곳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간사인 나는 시범을 보이겠다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5) 타 종교인·무속인에게도 과감히 전도
전도팀을 대표해 절에 들어간 나는 주지를 만났다.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며 내 소개를 했다. 이곳에서는 복음을 직설적으로 전하면 안 된다. 타 종교인에겐 기독교가 도대체 어떤 종교이기에 이렇게 젊은이들이 뭉쳐 다니며 전도하는지 놀라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나눈 뒤 전도지인 ‘사영리’도 잠깐 소개하고 절을 나왔다.
절이라 금방 쫓겨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도대원들이 내가 오랫동안 대화하자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대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영생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일이니 또 얼마나 귀한 일인가요. 그러니 주뼛거리거나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고 자신하게 전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 있는 날선 검이기에 힘 있게 공격해야만 상대가 굴복하게 된다. 그리고 결과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 팀 중에 강화도에 사는 집사님이 계셨는데 절에서 전도하는 내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선지 이 지역 무당 한 사람을 꼭 전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호기심도 나고 대원들 앞이라 일단 승낙을 했는데 사실 좀 떨렸다.
다음날 무당집으로 찾아가니 장구와 꽹과리 소리에 맞춰 큰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칫 무례한 행동이 될 수 있었다.
나는 팀원들에게 강하게 통성기도부터 하자고 했다. 영적전투에 앞서 전열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먼저 사람을 불러 “난 토속종교에 관심이 있는데 무당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한참이 지난 후 무당이 나왔다. 안채로 안내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는데 답변을 아주 잘해 주었다.
한참 후 교회 이야기를 주제로 이끌어 냈는데 막상 무당 자신도 고교 때 다닌 적이 있다고 했다. 순간 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외우고 있는 사영리를 힘 있게 전했다. 내가 성령의 강한 인도를 받고 있어서인지 순간 흠칫 당황하던 무당은 손을 벌벌 떨면서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그에게 마음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면서 그것만이 진정한 진리라고 담대히 전했다. 세상의 유일신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 분이 창조주요,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고 설명했다.
이미 굿판은 깨져 버렸다. 젊은 부부가 아기가 없어 이곳을 찾아왔다는데 나는 일단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굿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 아기를 주실 것이라고 전도했다. 이 사건을 통해 그 어떤 영도 성령 앞에 벌벌 떨며 꼼짝 못 한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렵던 사업도 어느 정도 안정됐다. 그런데 나는 전도가 너무 재미있었다. 어느 날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고 나라에 봉사하며 이제 노년을 맞은 분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진정 소중한 사역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그래서 출석하던 교회에 노인선교회를 창립해 총무를 맡았다. 그리고 동네 복지관을 찾아가 매주 화요일 지역 노인들을 초청해 찬양하고 예배를 드린 뒤 식사를 나누며 전도했다. 강사는 인근 목사님들을 차례로 초청했다. 반응이 좋아 참여 노인수가 점점 늘었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6) 전도 체계적으로 배우려 신학대 입학
사업과 전도를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는 내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중국에 교회를 짓기로 서원했다가 사기를 당해 뜻을 못 이룬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교회를 지어 달라던 조선족 여인의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북한 선교 비전이 느껴졌다. 그러나 북한과 접촉할 수 있는 창구는 전혀 없었다. 대신 조선족들은 북한에 드나들 수 있으니 그들과 연결고리를 계속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기선교 차 중국을 자주 찾았고 현지 선교사들과도 교제했다.
전도를 좀더 체계적으로 잘 하려면 신학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칼빈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사업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어서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전도자로 철저히 훈련시키길 원하신다는 것을 확인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 후배 전도사가 토요일 저녁 나를 느닷없이 찾아왔다.
“형님, 전도하러 갑시다. 내가 특수 전도장소로 모실게요.”
전도에 열정이 넘치던 때라 전도란 말만 들으면 꼼짝을 못했다. 두말 않고 후배 차에 올랐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청량리 뒷골목이었다. 속칭 588로 불리는 유명한 사창가였다. 나 역시 이곳엔 처음 와 보았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배와 나는 차 안에서 통성기도를 한 뒤 아가씨들이 있는 쇼윈도 밀집 지역으로 갔다. 붉은 등 아래 앉아 있는 아가씨들은 한결같이 날씬하고 예뻤다. 저들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다 이런 생활까지 하는지 참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후배는 미리 준비해온 빵과 함께 신앙 예화가 실린 전도신문을 아가씨들에게 건네면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전도에 자신 있다고 했던 나였지만 이곳에선 입도 못 떼고 후배만 졸졸 따라다녔다.
“아저씨, 또 왔어요? 수고 많으시네요.”
후배는 이미 이곳에서 자주 전도를 한 듯 인사를 나누는 아가씨들도 많았다. 이런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후배가 참 대단해 보였다. 청량리를 다 도는 데 정확히 1시간20분이 걸렸다.
집에 돌아와 하나님이 그곳을 알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가난한 자, 낮은 자, 천한 자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힘들고 고통 받는 이웃에게 복음이 더 퍼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 같았다.
매주 토요일, 후배와 청량리를 찾아 전도했다. 간식을 나눠주며 전도했는데 전도지를 받은 아가씨들이 열심히 읽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후배가 이젠 나보고 혼자 해보라고 권했다.
CCC 전도훈련 간사로, 늦은 신학공부로, 노인선교로, 사업으로 정신없이 바쁜데 어떻게 이 사역을 혼자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나는 토요일에 계란 7판(210개)을 삶아 2개씩 봉투에 담아 나누며 전도했다. 때론 아내가 싼 김밥을 돌리기도 했다.
어느 날 그곳 생활 20년이 됐다는 아주머니(포주)를 만나 전도했다. 학창시절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다고 해 그 자리에서 사영리를 전했다. 한 달 후 그분의 간증을 들었다.
“사영리를 듣고 교회 다니던 생각이 나면서 마음이 불안해졌어요. 그래서 기도원에 갔는데 그곳에서 큰 은혜를 받았지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이 있다. 그곳에는 아가씨들이 도망갈까 감시하는 남자들, ‘기도’라는 청년들이 주변에서 항상 서성거렸는데 한번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때 훈련받은 강심장 전도 덕분에 이어지는 중국 사역도 담대히 펼칠 수 있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7) 사업·전도 사이 고민 중 딸과 중국행
2001년 새해가 되면서 진로 문제로 경기도의 한 기도원을 찾았다. 사업을 하면서 전도와 사역을 하는 것과 아예 전도에 올인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았다. 수년간 중국을 오가며 사업과 선교를 해왔지만 이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일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운 날씨였다. 기도 7일째 되는 날, “딸 선화를 중국에 보내라”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내 문제 때문에 갔는데 어떻게 13살, 중학교 1학년인 딸을 중국으로 보내라고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흘 동안 연속적으로 같은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 제가 중국 갈 때 딸이 자신도 가겠다고 하면 여기에 순종하겠습니다. 제게 응답 주셨다면 딸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주세요.”
딸은 엄마와 단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아내도 딸과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 진로응답 대신 딸의 진로만 확인한 나는 아주 허탈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딸이 “앞으로 중국이 인구 때문에 세계에서 최고로 발전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고 했다. 나는 기회가 이때인가 싶었다.
“아빠가 곧 중국에 가는데 선화도 같이 갈까?”
딸은 처음엔 안 간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꿔 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구경만 시키겠다며 출국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현지 교회 집사님이 마침 중고등부 수련회가 열리는데 선화에게 참석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쉽게 가겠다고 대답해 내가 놀랄 정도였다. 딸을 수련회에 보낸 나는 안심하고 여러 가지 일을 보고 예배도 드리며 바쁜 선교 일정을 보냈다.
1주일 만에 수련회를 마친 딸을 만났다. 활짝 웃으며 “아빠, 나 중국에 있으면 안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동행한 집사님은 선화가 자기소개 시간에 “앞으로 중국말을 배워 아빠의 전도 사역을 돕겠다”고 야무지게 말했다고 전했다. 내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나는 딸이 중국에 같이 가는 것만으로 주님이 들려주신 음성이 확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딸이 먼저 중국에 남아 공부까지 하겠다니….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아빠, 내가 여기서 중국말 잘 배울게요. 엄마에게는 아빠가 잘 말해주세요.”
일단 한국에 갔다가 다시 오자고 해도 막무가내여서 혼자 비행기를 탔다. 아내는 “당신이 정말 아버지 맞느냐. 어떻게 13살짜리를 떨어뜨리고 올 수 있느냐”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할 말이 없었고 큰 싸움이 날 것 같아 자리를 피했다.
며칠 후 화가 단단히 난 아내는 내게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중국으로 딸을 데리러 갔다. 그러나 며칠 후 돌아온 아내는 놀랍게 혼자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또 울기 시작했다.
“그런 나쁜 것이 내 딸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조그만 것이 어디서 그런 성질이 있는지, 내가 다시 가자고 아무리 소리치고 협박해도 꼼짝도 안하는 거예요. 오히려 왜 내 앞길을 막느냐고 하면서 설득하는데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딸을 중국에 심어놓은 뒤 그것을 계기로 내가 중국에서 조선족 전도 사역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배경을 만드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내 중국 선교의 시작은 딸이 중국에 가는 것으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원에서 딸을 먼저 보내라는 응답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역사하심이 놀랍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8) 여객항공기편으로 車 미션을 옮기다
딸 선화가 베이징에 있으니 아내와 자주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갈 때마다 우린 조선족들을 만나 틈틈이 전도했다. 사역의 기틀이 마련되는 듯했다.
그 무렵이었다. 단기팀과 중국을 가기 전 날, 베이징의 한 집사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자동차 부품을 좀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자동차 부품이 없어 운행을 못하는 승합차가 있다는 것이었다. 간단한 부품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승낙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택배 기사로부터 부품을 받고 나니 입이 벌어졌다. 3단 이민가방 속에 든 부품은 미션이었다. 90㎏ 무게의 쇳덩어리였다. 자동차 엔진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비싼 택배비까지 지불하고 받았는데 항공사에서 도저히 짐으로 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설사 실어준다고 한들 한정된 20㎏ 이상 무게에 대한 추가 요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베이징에 있는 집사의 믿음이 좋은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이를 승낙한 나 자신도 한심해 보였다. 내 짐도 만만치 않아 짐은 100㎏ 정도 오버될 것이 분명했다. 정상대로 하면 50만원의 추가 비용을 물어야 하는데 이는 당시 두 사람의 비행기삯이었다. 또 여기서 통과한들 베이징 공항에서 통과될지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안절부절 못하는 중에 믿음이 생겼다. 이것도 선교이기에 담대히 기도하며 부딪쳐 보자고 생각했다. 먼저 단기팀을 모이게 한 뒤 손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짐과 함께 미션이 든 가방을 저울에 올려놓았다. 무려 127㎏이었다.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했다. 그런데 직원이 127㎏을 27㎏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 직원이 봐준 것인지 착각한 것인지 지금도 나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추가 요금 없이 무사히 통과됐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엔 베이징 공항을 통과할 걱정에 기내식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기도에 매달렸다. 예상대로 검색대에서 걸렸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중국어를 모른다면서 계속 손을 내저었고 답답해하던 세관 직원은 화가 난 표정으로 그냥 가라고 손짓을 했다.
공항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란 신앙고백이 절로 나왔다. 긴장을 해서인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션을 공급받은 승합차는 조선족을 위해 베이징 시내를 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간증이다.
이 무렵 딸은 중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지냈는데 오히려 아내가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아내가 딸 때문에 거처를 중국으로 옮겼고 내가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됐다. 많은 분들이 선교나 전도를 목적으로 본인이 먼저 현지에 가고 가족이 따라오는데 내 경우는 정반대였다.
이때 다니던 칼빈신학대학교와 50년 역사의 중국 화북전력대학교의 자매결연을 주선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학생 수 2만5000명의 대학이 신학교와 손잡은 것은 큰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한류 바람이 불어 한국어를 배우려는 중국 학생이 많았다.
현지에서 결연식을 가진 뒤 3명의 한국 교수가 이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를 가르치게 됐다. 당시 총장님은 지금은 소천한 김의환 박사님이셨는데 이후 내가 중국에 온 뒤에도 격려와 지원을 많이 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매결연을 계기로 ‘엄청난 사건’을 만드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선교에만 전념해야 했다. 그것은 자매결연 후 만리장성 구경을 갔다가 내가 갑자기 심장 이상으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9) 협심증 위기 통해 선교 새 각오 다져
2003년 만리장성에서 갑자기 쓰러진 나는 서울 아산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뒤 바로 입원했다. 의사는 협심증으로 쓰러진 것이라며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곧장 수술에 들어갔다.
“서 선생. 중국에서 죽지 않고 살아 온 것만으로 감사하세요. 조금만 처치가 늦었으면 결과에 대해 누구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 인생을 두 번 사시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내 삶은 이제 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도 협심증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빨리 가지 못해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중국에서 쓰러졌는데 생명을 건진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절히 느꼈다. 막힌 곳을 뚫어주는 스탠스 수술을 두 곳이나 받고 나니 죽음을 향해 걸어가다 중간에서 되돌아온 것 같았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너 이래도 미적거릴 것이냐?”고 나무라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이 들면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떠올랐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에 순종해 수술 후 23일 만에 한국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아내와 딸이 들어와 있었으니 나와 아들만 들어가면 됐다. 나 스스로를 다짐하는 의미로 구호 하나를 만들었다. 그것은 “오직 예수, 오직 순교”였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으니 순교할 각오로 사역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각오였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의 궁극적인 비전은 북한선교이다. 그런데 그 중간과정으로 조선족을 선교하게 하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선족들은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 수 있고 친인척 또한 그 땅에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족은 우리의 말과 글을 잃지 않았고 부지런함과 근면함으로 옌볜을 중심으로 조선족자치주를 형성, 전통문화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도시화가 이뤄지면서 많은 조선족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 또는 중국의 또 다른 대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심장수술 후 중국 땅을 밟은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40일 기도였다.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찾고 마음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기도 29일째 되던 날 마음속에 주님이 분명한 응답을 주셨다.
“네가 지난 8년간 중국을 오가며 조선족 선교를 한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란다. 또 한국에서 전도자로 훈련받고 노인선교와 청량리전도, 신학공부 등 한 것 모두가 이때를 위함이란다. 이제 너는 네 동포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을 나누어라.”
‘감사합니다. 주님. 한국에서 철저히 훈련받게 하시더니 결국 이곳으로 완전히 불러 주셨군요. 사명에 합당한 사역을 이루고 열매를 맺게 해 주세요. 중국의 영혼들을 품고 사랑하길 원합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베이징에는 무작정 일자리를 찾아온 조선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회사주재원이나 사업자, 유학생들이 많이 사는 한인타운 왕징(望京)이란 곳에 모여 있었다. 조선족 여자들은 가정부나 식당종업원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남자는 주로 잡역부로 일당을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먼저 베이징에 와 있던 아내는 그 사이 집을 구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하숙)를 시작했다. 당시 한국에서 중국 붐이 일면서 유학생들이 많아졌던 것이다. 아내가 아침저녁 식사를 해주고 빨래까지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내 어깨가 좀 가벼워지는 듯했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0) 쪽방 사는 조선족여인 위해 쉼터 마련
한인들이 많이 사는 왕징 지역 공원에 20여명의 조선족 아줌마들이 모여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구직정보를 나누며 무작정 기다린다고 했다. 잘 살아 보겠다고 옌지 등 고향을 등지고 이곳까지 왔는데 직업을 못 구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었다.
어디서 사는지 궁금해 물어 보았더니 아파트 지하 쪽방에서 지낸다고 했다. 구경을 해보고 싶어 따라갔다. 칸막이로 나눈 1.5평 남짓의 쪽방 수십개가 아파트 지하에 미로처럼 연결돼 있었다. 이곳은 한 개인이 아파트 지하 한 층을 통째로 임대해 이를 쪽방으로 만든 뒤 월세를 받는 곳이었다. 냄새가 빠지지 않아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수입이 없으니 몇 명씩 같이 지내기도 한다고 했다.
중국 첫 사역을 조선족 아주머니들을 돕는 일부터 하기로 했다. 이들이 공원에 모여 있을 것이 아니라 쉼터를 만들면 추위와 더위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장소를 물색했다. 아내가 틈틈이 모아놓은 2만 위안(당시 약 300만원)을 보증금으로 300㎡ 공간을 월세로 얻고 ‘사랑의 쉼터’란 간판을 달았다. 간단한 시설을 꾸민 뒤 일단 이곳으로 와 지내라고 했다.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여간 좋아하지 않았다. 잠자리가 마땅치 않은 분들은 이곳에서 잘 수 있도록 허락했고 식사도 해먹을 수 있도록 쌀과 반찬도 마련했다. 초조하게 일자리를 찾고 있던 이들은 나를 무척 고맙게 생각했다. 더구나 아무런 조건 없이 돕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은 일제의 압제를 피해 만주로 간 독립투사이거나 한국이 너무 가난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개척자들이십니다. 이제 한국은 잘 살게 되어 여러분을 좀 돕자는 것이니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이분들에게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 물었더니 한식 조리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왕징의 한국 음식점에 취직하려 해도 한식을 만들 줄 몰라 퇴짜를 맞았던 것이다. 나는 베이징의 한인교회에 연락해 협조를 요청했고 요리를 잘하는 여성도들이 재료를 가지고 와서 정기적으로 ‘한식요리강습’을 열어주었다.
이 무렵 모르는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옌지에 사는데 집 주방 가스가 폭발해 어린 손녀가 6도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치료할 길이 없어 베이징으로 무작정 데리고 왔고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된 것이다.
단숨에 달려가 사고를 당한 채려나(당시 13세) 양을 보니 정말 끔찍했다. 손은 다 오그라들었고 얼굴은 형체가 일그러져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부둥켜안고 기도부터 했다. 다행히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나는 큰 화상을 입고도 미국에서 공부하며 활발히 선교활동 하는 이지선 자매 이야기를 해 주면서 용기를 주고 격려했다. 알고 보니 폭발 당시 려나의 어머니는 사망했는데 려나가 충격을 받을까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국내 기업과 지인들에게 려나가 한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려나는 한 기업의 도움으로 한국에 나갈 수 있었다. 이후 이지선 자매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다.
내가 조선족을 돕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는 모습에 많은 조선족들이 감동한 것 같았다. 이때부터 그들은 내게 마음 문을 활짝 열었다. 대화를 해보니 조선족 동포들이 같은 핏줄인 우리 남한사람들에게 맺힌 것이 많았다. 못산다고 무시당했고 한국행을 미끼로 사기를 당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1) 조선족교회 찾아가 전도운동 이끌어
조선족 지원사업을 하다 보니 조선족 청년들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도 일자리를 찾아 베이징에 왔는데 전문 지식이 없다 보니 임금이 싼 노동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직장생활에 필요한 컴퓨터와 영어를 무료로 가르쳐주는 사역을 또 시작했다. 컴퓨터강습반과 영어강습반을 개강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나중에 LBI영어대학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다.
베이징에서는 어느 누구도 개인 전도 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전도가 금지돼 있기도 했지만 전도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나는 쉼터에서 조선족을 대상으로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선족교회를 하나 선택해 전도모범을 보여 성장시킨다면 이들에게 ‘전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베이징에 30∼40명의 성도가 모이는 한 조선족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전도세미나를 자청, 두 번 강의를 했다. 성도들에게 전도에 앞장서 이 교회를 3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만들자고 했더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특별새벽기도를 열자고 해 기도하면서 총동원전도 책임을 맡았다. 주제를 ‘오라! 우리가 북경을 변화시키자’로 잡았고 CCC 간사로 일하면서 배운 전도내용을 그대로 적용시켰다. 3개월 후를 총동원 주일로 잡은 뒤 300명이 될 것으로 믿고 1000㎡(300평)의 교회당도 미리 마련하도록 해 입당예배까지 드렸다. 성전 마련을 위해 헌금도 많이 하고 딸이 애지중지하던 피아노도 기증했다. 그리고 21일 릴레이 금식기도와 5주 금요기도회, 전도 대상자를 위한 매일기도 등을 실시했다.
드디어 목표로 했던 11월 8일, 총동원주일. 300명엔 못 미쳤지만 28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가장 놀란 것은 기존 성도들이었다. 힘 모아 기도하니 3개월 사이 교회당이 새로 생기고 성도가 10배로 늘어나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열심을 내어 전도합시다. 선교합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읍시다.”
이때 약간 나태해지려는 선교사명을 일깨우는 사건이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쉼터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에 복음을 전했다. 그날따라 내 컨디션이 안 좋아 영혼에 대한 간절함 없이 건성으로 전도했던 것 같다.
다음날 쉼터 책임자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한 아주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는 그 분은 바로 어제 전도했던 분이었다. 가슴이 덜컥했다. 그분이 어제 복음을 받아들이셨는지 모르지만 더 열심히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의사는 이미 생리학적으로는 생명이 끝났고 호흡기에만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이 있는 옌지에 연락하니 기차로 24시간이 걸려 이틀 후 도착한다고 했다. 병원비와 장례비용이 한화로 100만원 정도 필요했는데 북경한인교회의 한 장로님이 도움을 주셨다. 다행히 남편이 임종예배 때 도착해 모든 장례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돈 벌러 간 아내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모습에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던 남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우리 인생, 하나님이 주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2) ‘정규 신학교 설립’ 기도 응답을 받다
베이징 사랑의 쉼터를 섬기면서 조선족교회를 주일마다 순회했다. 예배 후 담임교역자와 교제하며 느낀 것은 신학적 지식이 부족해 목회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이었다.
내가 주로 찾아간 두 곳의 조선족 담임목사들도 정규 신학 과정에서 배운 분들이 아니라 통신과정이나 몇 목사에게 커리큘럼도 없이 배운 게 전부였다. 그러니 목회 계획도 없었고 성도들 양육은 물론 교회절기 행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이곳에 정규 과정의 개혁주의신학교가 필요하다고 느낀 뒤 기도에 들어갔다. 심장 수술 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불쑥 이곳에 왔던 터라 신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다.
기도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해 주셨다. 칼빈대를 졸업한 뒤 틈틈이 캐나다 크리스천칼리지 한국분교 학위 과정을 이수했던 나는 2005년 학위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캐나다로 가야 했다. 사실 경비 때문에 못갈 형편이었는데 누가 부담을 해주었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러 오신 J목사님과 방을 함께 쓰게 됐다. 내 마음은 온통 베이징 신학교 설립에 가 있어서 새벽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계속 기도했다.
“서 원장님, 무슨 기도를 그렇게 간절히 하십니까?”
“신학교 설립을 위해 기도합니다. 조선족들을 신앙으로 잘 이끌어줄 교역자가 꼭 필요합니다.”
내가 베이징에서 왔고, 자세한 사역 이야기를 들은 J목사님은 깜짝 놀라며 자신은 이미 중국 동북지역에 신학교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이징에도 학교를 하나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순간 기도응답이라는 생각이 들어 학교설립 계획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2개월 후 J목사님은 동역하시는 두 분 목사님과 함께 베이징을 방문했다. 사랑의 쉼터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집회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가실 때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2주 후 신학교 설립을 지원할 터이니 학생을 모집하라고 연락을 주셨다. 할렐루야!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계를 향해 나간다는 뜻으로 열방신학교라고 이름을 붙였다. 학교 설립의 응답을 캐나다에서 받은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가 이제는 한족을 위한 신학교 등 3곳으로 늘어나 운영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다.
정신없이 전도하며 조선족 사역을 하다보니 가정에는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아내가 하숙을 하며 그 수입으로 살았고 가장 역할을 전혀 못했다. 어느 날 딸 선화가 학교 졸업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학비가 없어 학교를 계속 보내지 못했던 것이 이유였다. 한어수평고시(HSK) 6급이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는데도 딸은 중국어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10급을 땄었다.
호텔리어가 꿈이었던 딸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러 한국으로 나가야 했다. 난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언제까지 물질로 이렇게 어려움을 주시려는지 한탄 섞인 기도를 했다. 딸이 떠난 지 20여일 후 하나님께서 창세기 22장의 말씀을 주셨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내용이 아닌가.
“딸을 학교 보내지 못한 그 정도 갖고 뭘 원통해서 그러느냐. 그러는 네가 무슨 선교를 한다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내게 질책하시는 듯한 말씀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오버랩되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히려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딸에 관한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딸은 한국에서 검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뒤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어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어느 날 딸이 흥분된 목소리로 전화했다.
“아빠, 나 프랑스 바텔호텔학교에 합격했어. 입학 전형에 통과됐어요.”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3) 재정난에 학교·쉼터 통합 운영키로
프랑스 바텔(vatel)호텔학교는 전 세계 많은 젊은이가 호텔리어의 꿈을 안고 모여드는 유명한 곳이다. 학비가 싼 편인데도 2년간 공부를 마치려면 8000만원이 필요했다. 내겐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이곳에 합격한 딸도 학비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선화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거야. 우리 함께 기도하자.”
마음이 편안하고 걱정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정말 천사를 보내 주셨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을 통해 딸의 학비를 해결 받게 된 것이다. 그분들의 요청이 있어 누군지 밝힐 순 없다. 마음을 비우고 이삭을 바치는 아비의 심정이 되었더니 딸이 원하는 공부의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나는 조선족 전도에 더 열심을 냈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주로 조선족이 사는 4구역 지하실을 헤매고 다니며 전도했다. 한 주에 평균 10명을 목표로 7년간 전도했으니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은 줄잡아 2300여명 정도가 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는 손님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새벽마다 기도했다. 그런데 올림픽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온통 공사 중인 데다가 집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물가도 뛰어 생활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환율도 1위안당 120원에서 200원이 훌쩍 넘으니 신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후원금 월 80만원은 학교가 내는 월세의 절반도 안 됐다. 학교와 쉼터를 운영하는 데 최소한 매달 300만원이 필요했다. 설상가상으로 6명의 하숙생 중 3명이 한국에 가는 바람에 집안 살림도 어렵게 됐다.
결국 학교와 쉼터를 합치기로 결정하고 이사했다. 책걸상과 비품을 그대로 두고 나올 수밖에 없어 너무 속상했다. 신경을 많이 썼는지 새벽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아들까지 폐수막염에 걸려 함께 입원했다. 나는 7층, 아들은 5층 병실에 있는데 두 곳을 오가는 아내의 마음은 정말 죽고 싶었다고 한다.
선교가 열정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돈을 벌어야 했다. 베이징에서 발간되는 한 잡지의 본부장으로 취직해 열심히 뛰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덕분에 신학교 및 쉼터 운영에 큰 도움이 됐다.
조선족 아주머니들과 청년들은 요리 강습과 영어, 컴퓨터 학습을 통해 지속적인 전도를 하고 있었지만 조선족 아저씨에 대한 전도가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아내가 돈벌러 간 사이 한적한 곳에서 장기와 마작을 하거나 술과 담배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노숙자 사역을 하는 목사님을 만나게 돼 이들을 위한 수련회를 마련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큰 별장을 빌려 3박4일간 진행키로 했는데 57명이 참석했다. 그저 놀러 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과 율동, 성극, 간증 등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였다.
도착하여 식사를 하는데 술을 달라고 했다. 술은 절대 안 된다고 하자 몇 명이 소동을 부렸다. 그리고 20여명이 떠났고 다음날 아침에는 6명만 남고 모두 가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쉬웠지만 6명을 대상으로 최선을 다했다. 3일 후에는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겠다고 했다. 60명을 대상으로 준비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 혜택은 6명이 누렸고 복음의 열매도 이들이 땄다.
결국 아무리 맛있는 반찬을 해 놓아도 그것을 집어먹지 않으면 맛을 알 수 없듯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스태프가 참가자보다 훨씬 많았던, 캠프가 끝날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4) 3년 만에 첫 신학교 졸업생 배출
베이징에서 조선족 신학교를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학생 중 반 정도가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배운 것을 적용하자 교회들이 점점 달라졌다.
학교 운영을 하다보면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차비가 없어 신학교에 못 오는 지방 학생들이 있었다. 12시간씩 기차를 타고 와야 했던 것이다. 한 교포 집사께 부탁해 장거리 학생 5명에게 1년간 차비를 장학금으로 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너무 말썽을 피우는 3명의 학생을 제적하려 하는데 “내가 포기하지 않은 학생을 네가 왜 포기하려고 하느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깜짝 놀라 끝까지 학생들을 사랑으로 품자 제적 위기를 잘 넘겼다.
허베이란 농촌지역에서 한족을 상대로 목회하면서 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 부부가 있었다. 예전에 남편이 폐결핵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완쾌되지 않아 여전히 힘들어했다. 때마침 한국에서 강사로 오신 임종진 교수의 도움으로 한 장로님이 치료비를 부담해 제대로 치료 받게 했다. 여기에다 사역하는 허베이교회의 총동원주일까지 열어 목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신학교는 만 3년 만에 8명이 축하를 받으며 졸업했다. 출석 및 성적 관리를 엄격하게 한 탓에 많은 학생이 중도탈락 했다. 이어 학생들의 요청으로 3년제 대학원과 4년제 대학으로 정규 커리큘럼을 짜 새롭게 출발했다. 한족을 위한 신학교도 새로 열었다.
한국에서 각 과목 전공자인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이 자비량으로 와서 일주일 정도 집중강의를 하고 돌아갔다. 사명감을 갖고 정기적으로 오는 분들께 진정 감사를 드린다. 나는 열방신학교 이사장으로서 조선족 교회로는 가장 큰 교회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여성 목회자인 김은혜 목사를 모셨다. 결국 조선족을 위한 학교이니 조선족이 키우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전도에 열심이라는 것을 안 한 목사님이 한국의 전도 전문가인 장일권 목사님을 강사로 오도록 추천해 주셨다. 나도 학생들과 똑같이 앉아서 전도 관련 강의를 4일간 꼬박 들었다. 내가 그동안 알았던 이론적인 차원을 넘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서 중국 전도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의가 끝난 뒤 장 목사님의 전도방법을 중국에 적용해 보고 싶다고 했고 ‘전도운동세계선교회(GMM)’의 베이징 지부장이 되었다. 교회와 가정을 세우는 GMM을 통해 전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뜨겁다.
기도 중이던 쉼터 월세는 Y목사님께서 매달 주시기로 해 응답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가족이 살 집이 문제였다. 더이상 하숙을 하지 않게 됨에 따라 집을 옮겨야 했는데 여력이 안 됐던 것이다. 일 년간의 잡지본부장 근무계약도 끝나 고민스러웠다.
어느 날 조선족 여대생을 우연히 만났다. 집은 헤이룽장성이고 영국에서 유학하고 있다는데 한국말을 잘 못했다. 쉼터로 한 번 오라고 했더니 어머니와 함께 왔다. 어머니는 사역을 소개하자 “우리 조선족을 위해 이렇게 수고해 주시니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내가 집을 옮겨야 되는 상황인 것을 안 그분은 자신이 베이징에 사놓은 집이 마침 비어 있으니 그냥 지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가보니 고급아파트였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워낙 간곡해 승락을 했다.
조선족을 위해 열심히 뛰었더니 하나님께서 조선족 부유층을 통해 섬김을 받게 해 주신 것이다. 나는 2년간 이곳에서 가족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막다른 골목이라고 여기면 언제나 또 다른 골목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서베드로 (15·끝) 조선족 선교 통한 북한 복음화 소망
지난해 12월 22일, 학기를 잘 마무리하고 홀가분하게 좀 쉬려는데 갑자기 또 쓰러졌다. 이번에도 심장 이상이었다. 종합 진찰을 받았는데 심장뿐 아니라 간, 위, 치아에도 이상이 왔고 오십견과 요도결석도 나타났다. 탈진이 가장 심각했다. 수년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사역한 데다 스트레스에 시달린 결과였다.
서운했다.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왜 이럴까 의문을 갖다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에서 해답을 얻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말씀이었다. 순간 하늘의 위로가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그래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격려해 주시는 것 같았다.
즉시 불평했던 것을 회개하자 감사가 넘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공기 좋은 선교사훈련원에 머무르며 치료와 휴양을 병행하자 몸이 빠르게 치유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비가 1300만원이나 나왔음에도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해결돼 감사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푹 쉬게 만드신 것이라 여겼다.
8년 동안 조선족 사역을 하면서 참 많은 분으로부터 후원과 지원을 받았다. 이 중에서도 내게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분은 조선족인 원 전도사님이다. 사례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한결같이 헌신해 주신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8년 전 조선족교회 집사였다가 권사가 됐고 다시 신학교를 졸업해 전도사가 되어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셨다.
요즘 사랑의 쉼터는 평일에는 신학교 역할을 하고 주일에는 조선족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담임목사로 열방신학교 1호 목사인 박동현 목사를 위촉했다. 교회 이름도 ‘은혜의 동산’이란 뜻의 성산교회로 지었다. 조선족들의 신앙이 점점 더 영글고 알차져서 자체 운영은 물론 해외선교까지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그동안 내가 가장 염려했던 아들과 딸의 진로도 책임져 주셨다. 바텔호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의 특급호텔에서 매니저로 근무하던 딸은 이제 호주에 있고 아들은 학비 걱정이 없는 독일에서 공부하며 일하고 있다. 우울증에 걸릴 뻔 했던 아내는 이번에 한국에서 나와 함께 쉬고 재충전하면서 여러모로 많이 회복되었다.
이제 다시 베이징 열방신학교의 2011년 강의가 본격화되어 나도 열심히 뛰고 있다. 아직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 많다. 그러나 사역은 채워져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질 것을 믿고 열심히 뛰는 것이라 믿는다. 이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의 사명자가 아닌가 싶다. 사역하며 일어났던 더 많은 이야기를 다 담지 못해 아쉽다. 다만 중국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더 열심히 사역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있는 많은 조선족과 한족, 북한동포를 위해 생각날 때마다 기도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나의 사역 신념은 하나님께 정직하고 사람에게 진실하며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 복음의 열정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사역에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 주시고 기도로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지면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아울러 내 사역의 좌우명인 사도행전 20장 24절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200만 조선족 선교를 바탕으로 북한 땅에 복음의 물결이 휘몰아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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