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嘉王)은 황제의 큰아들이었다. 광종에게 병이
있었으니, 즉위해야 할 사람은 가왕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종척대신(宗戚大臣)인 조여우(趙汝愚)가 가왕을 태자로 삼아 후사를 세우는 것은 당연한 직분이었지, 굳이 특별한
공훈이라고까지 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때 명령을 받아 일을 했던 한탁주(韓侂胄)이겠는가. 큰 공훈으로 따져 그에 맞게
대우한다면 조여우는 첫째가는 훈신이고, 한탁주는 당시 셋째나 넷째에 해당했다. 가왕이 그때 27세였으니 기밀한 일의 전말을 모두 목격했을
텐데도, 조여우에 대해서는 몇 달도 지나지 않아 관직을 빼앗고 쫓아내 마치 원수를 제거하듯 죄를 끝까지 추궁했고, 한탁주에 대해서는 총애와
권우(眷優)가 넘쳐 신하 중 가장 높은 지위를 주었으니, 이를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와 원한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숙맥(菽麥)을 분별하지 못하는 듯했으니, 이런 자가 대보(大寶
천자)의 주인으로
30년 있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가 큰 화를 모면하고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하늘이 아직 이 학문을 없애지 않으려는 뜻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