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국7웅 (秦나라 제외 : 너무 유명하므로..)
한(韓)
지금의 산동성 남쪽 지역에서 하남성 중부 지역까지 걸쳐 있던 나라.
시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한씨가 진(晉)나라의 유력한 세족이며, 그 가문의 역사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한무자(韓武子)의 3대손인 한궐(韓厥)과 그의 아들 한기(韓起)는진(晉)나라의 6경이었다. 기원전 453년 한건(한강자韓康子)은 조적, 위사와 함께 당시 진(晉)나라의 최고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 소유자인 지백(知伯)을 죽이고 지씨 일족을 멸문시킨 후 영토를 나눠 가졌다.
기원전 403년에 주위열왕(周威烈王)으로부터 제후의 지위를 받아 독립국이 되었다. 최초의 도읍은 평양(平陽)이었으나 뒤에 의양으로 옮겼고, 기원전 375년에는 정국(鄭國)을 멸하고 신정으로 천도했다.
기원전 355년 소후(昭候)는 신불해(申不害)를 재상으로 임명하여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책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기원전 325년에는 한선혜왕(韓宣惠王)이 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이후 진나라와 초나라의 압박을 심하게 받았고, 마침내 기원전 230년진나라에게 멸암을 당했다. 그 땅은 진나라의 영천군이 되었다.
조(趙)
조씨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유력한 귀족 가문의 하나였다. 그 조상 조부(造父)는 진나라 왕실출신이다. 그는 주목왕(周穆王)으로부터 조(趙)땅을 하사 받아 독립했고, 훗날 7세손 조숙대(趙淑帶)는 진(晉)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 조씨는 한씨, 위씨와 함께 진(晉)나라를 3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조간자(趙簡子)와 조양자(趙襄子)때 세력을 크게 키웠고, 기원전 403년 마침내 주위열왕으로부터 제후의 지위를 얻었다.
조무령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다른 전국시대 열강과 더불어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기마 전술로 무장하여 누번, 임호 등 북방의 부족을 정복했다.
그러나 조혜문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진나라의 침공이 이전보다 더 격심해져 이를 견디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도읍을 진양(晉陽)에서 한단으로 옮겼다.
그러나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단이 함락당했고 조왕 천(遷)은 포로가 되었다. 대군으로 도망친 잔여 세력이 폐위되었던 공자 가(嘉)를 왕으로 옹립하고 대나라를 세웠으나 6년 뒤에 멸망했다.
위(魏)
양(梁)이라고도 한다. 주나라 왕실과 동족인 필공고(畢公高)가 그 조상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자손 필만(畢萬)은 진(晉)나라 헌공의 명으로 위(魏)에 봉해져 대부의 작위를 받았고 위강(魏絳)은 경에 임명되어 진(晉)나라 6경의 한 사람으로서 정권을 쥐었다.
기원전 453년 환자(桓子)가 유력한 세족인 한씨, 조씨와 더불어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3등분하여 삼진의 하나가 되었다. 기원전 403년에 주위열왕의 명으로 독립된 제후국이 된 후 안읍에 도읍을 정하고 지금의 산서성, 호북성, 산동성에 일대에 걸친 대국을 건설했다.
문후(文候)는 이회, 위성자, 적황 등을 재상으로 삼아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관개사업을 크게 벌여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등 부국강병에 힘썼다. 또한 명장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진나라 하서 지방을 빼앗고 중산을 멸망 시켰으며, 초나라를 공격하는 등 전국시대 초기에는 최강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점차 진나라에 눌려 기원전 361년 대량으로 천도하고 기원전 329년에는 상군의 15개 현을 진나라에 헌납하고 화의를 청해야 할 만큼 국력이 약해졌다. 한때 신릉군의 활약으로 열세를 만회하기도 했으나 결국 기원전 225년 진나라의 공격에 항복하고 말았다.
초(楚)
전국시대 여러 제후국 가운데 영토가 가장 넓고 인구가 많았던 남방의 대국.
호북성을 중심으로 활약한 나라로 주왕조 시대부터 세력을 크게 떨쳤다. 시조는 5제 중의 하나인 전욱의 자손 계련(季連)이며 웅역(熊繹)때에 주나라의 성왕으로부터 제후로 봉해졌다.
원래 초나라는 남방의 만이(蠻夷)로 불리며 멸시를 받았으나 기원전 704년 제후 웅통(熊通)은 스스로 초무왕(楚武王)이라 칭했고, 아들 문왕 때 수도를 영으로 천도한 뒤 세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초장왕은 기원전 597년 필에서 진(晉)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초나라와 진(晉)나라는 남북으로 대립한 채 약 1세기에 걸쳐 싸움을 계속했다. 그 틈을 타 양자강 하류에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일어났고 한때 초소왕(楚昭王)은 오나라를 피해 도읍을 약으로 천도하기도 헸다.
오와 월이 약해지자 초나라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양자강 중, 하류를 모두 지배했다. 특히 초위왕(楚威王)은 기원전 334년 월나라를 멸하고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그 세력을 중원으로 뻗쳤다.
그러나 점차 진나라의 압박을 받아 기원전 278년에는 수도 영이 함락되어 진(陳)으로 천도했고, 기원전 241년 수도를 수춘으로 다시 옮겼다. 그러나 기원전 223년 결국 진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연(燕)
춘추시대에는 약소한 제후국에 불과했으나 전국시대에는 크게 세력을 떨쳤다.
주무왕이 동생 소공석(召公奭)을 계의 제후로 봉하면서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전성기는 연소왕(燕昭王) 때로 중원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악의(樂毅) 등 명장, 명신을등용하여 국력이 한때 제나라를 제압할 정도였다. 악의는 조, 초, 한, 위, 연 등 5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함락시키고 그 재물을 연나라로 가져왔다. 그 후 5년 동안 연소왕은 70여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군현으로 편제했으나 아들 연혜왕(燕惠王)은 제나라의 반격을 받고 퇴각했다.
연왕 희 때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보고자 태자 단이 자객으로 형가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오히려 태자 단은 기원전 226년 수세에 물린 연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연왕 희는 태자 단을 죽여 진시황에게 보내며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기원전 222년에는 연왕 희도 진나라에 체포되면서 멸망했다.
영토는 지금의 하북성 북부 지방으로 동으로 조선(朝 鮮)과 요동, 서로는 조나라, 남으로는 제나라가 있었고, 북으로는 임호, 누번과 맞닿아 있었다.
제(薺)
진나라에 독자적으로 맞섰던 동방의 패자로 태공망 여상이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워 영구(營丘)에 책봉된 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산과 바다의 물산이 풍부했고 수도인 임치는 상업도시로 크게 번창했다. 제환공(齊桓公) 때 이르러 유명한 재상 관중의 도움과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춘추 5패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춘추 후기에 진(陳)에서 망명해온 대부 전씨(田氏)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는 제나라의 실권을 잡았고 기원전 391년 전상의 증손인 전화(田和)가 정권을 찬탈하여 주나라 왕으로부터 제후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의 제나라를 강씨(姜氏)가 세운 본래의 제나라와 구별하여 전제(田齊)라고 한다.
전제에 들어서는 제위왕(齊威王)과 제선왕(齊宣王)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타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학자들은 직문(稷門)에서 토론을 벌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직하지학(稷下之學)'이다.
기원전 288년 제혼왕 때에는 진나라 소양왕과 함께 칭제하기로 합의하고 각각 서제(西帝), 동제(東帝)라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기원전 221년 마침내 항복했다.
춘추전국시대(BC 5세기∼BC 3세기) 중국의 패권을 놓고 대립한 7대 강국을 말한다. 동방의 제(齊), 남방의 초(楚), 서방의 진(秦), 북방의 연(燕), 그리고 중앙의 위(魏)·한(韓)·조(趙)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는 독립된 소도시 국가가 100여 개나 산재하고 있었으나 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대한 영역국가가 형성되었다.
7웅이란 이러한 강대국가를 일컫는 말로 각국은 더욱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려고 내정의 충실과 군비의 확장에 진력하였다. 이 중 진나라는 상앙(商 )의 변법(變法) 이후 국력이 신장하여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즉, 초나라는 진(秦)의 압박을 받아 BC 278년 수도 영이 함락되자 진(陳)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BC 241년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으나 BC 223년 결국 진에게 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제나라는 이웃나라인 연(燕)·위(魏)와 대립·교전하였으나 BC 3세기 말에 서쪽으로부터 진(秦)의 통일의 손길이 뻗쳐서 BC 221년 마침내 진에 항복하였다
1 위
'한, 위, 조' 삼 국 중 '위나라'에는 '위문후'라는 명군이 나타나 내정개혁과 인재발탁에 힘써 전국 시대 초기 패권을 차지했다. 하북성 중부에 위치했던 중산국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히고, 오자병법으로 유명한 '오기'를 등용하여 서쪽의 진나라를 제압했으며, 이극이라는 사람을 기용하여 농업생산을 장려 국가의 졍제력을 증대시키고, '서무표'라는 사람을 업의 태수로 삼아 미신을 타파하고 관개사업을 시행하여 산출된 농업샌상물은 위나라 국가의 부의 원천이 되었다.
특히나 '서문표'가 미신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귀신의 일로 사람의 일을 재단하는 자는 귀신으로 취급하겠다.' 라는 명언은 후의 중국 역대 군주들의 정치적인 규범이기도 했다.
즉 죽은 사람의 일로 산 사람의 일이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는 명제는 군주라 할지라도 종교의 명분을 정치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복잡한 중국역사의 전쟁에서 종교전쟁이 끼어들지 않은 것은 '서문표'의 명쾌한 정의에 의해서이다.
2 제
망각한 '위나라'의 패권을 무너뜨린 '제나라'의 군주는 '제위왕'과 그 아들 '선왕'이다. 병법가 손빈을 등용하여 당시 막강한 위나라의 군대를 계릉과 마릉에서 두 번에 걸쳐 궤멸시켜 위나라를 2류국으로 전락시키고 대신 패권국으로 올라섰으나 그 뒤를 이은 제민왕 때에 이르자 월왕 구천의 2세쯤으로 여겨지는 연소와에 의해 제나라는 거의 멸망직전에 몰렸다가 '연나라'의 내분으로 간신히 복국에 성공하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진시황'에 의해 마지막으로 병합된다.
3 진
남쪽의 '초나라'와 마찬가지로 춘추시대부터 서쪽의 오랑캐 정도로 여겨졌다가 춘추초기 '진 묵공' 이라는 걸출한 군주가 나타나 패자를 넘보는 위치까지 갔으나 '진 묵공'이 죽을 때 '진나라'의 대소 신료 177명을 순장시킴으로써 국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2류국으로 전락된다.
순장제도가 시행됨으로 해서 군주가 좋을 때 같이 죽어야 되니 능력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나라'에 벼슬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순장 제도를 폐지한 '진 헌공'의 뒤를 이어 기원전 361년 즉위한 '진 효공'은 '상앙'을 등용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효과적이라고 불리는 개혁 즉 변법을 단행하여 '진나라'를 일약 강국의 위치에 올려놓고, '진나라'는 그 변법으로 인하여 140년 후에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진나라'가 중원 진출의 계기가 된 사건은 '제나라'에 의한 '위나라' 군대의 궤멸이다. 당시 '위나라'의 주력은 산서성 남부의 서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진나라'는 위나라 때문에 감히 황하 서쪽의 위수의 지류 낙수를 넘어 올 수 없었다. '제나라'에 의해 '위나라'의 주력부대가 궤멸당하자 그 도성을 동쪽의 개봉으로 옮긴다. 그 기회를 틈타 '진나라'는 낙수를 건너 '위나라'의 황하 서쪽의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중원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것이다.
비록 '상앙'은 '혜문왕'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상앙'이 시작한 변법은 '혜문황' 자신과 후계자들에게 계속 시행되어 '진나라'의 국력은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어 전국시대 말에 가서는 나머지 6국의 국력을 전부 합친 것에 필적할 수 있었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효과적으로 시행한 결과 증대된 국력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고 볼 수 있다.
4. 초
춘추시대 전 기간을 통해 강국이었던 '초나라'는 춘추 말기 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은 '초 평왕'이 '진나라'에 데려온 며느리를 가로채는 과정에서 '오자서 부자'들과 갈등을 빚게 되어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은 '초평왕'에게 살해되고 '오자서'는 '초나라'를 탈출하여 '오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오나라'를 강대국의 위치에 올려놓은 '오자서'는 '오나라'의 군대를 이용하여 '초나라'를 거의 멸명직전에 몰아넣으나 일치단결한 '초나라'의 군신들과 '진나라'가 보낸 원군의 도움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전국시대로 넘어오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자 '진나라'의 재상이며 '연횡론자' 장의'의 유세술에 농락당해 주변 국가로부터 고립당한 결과 원래의 국가가 발흥했던 형주일대를 '진나라'에 빼앗긴 후 나라를 동쪽 진성으로 올ㅁ기고 이어서 계속 쫓겨 다니다가 안휘성 수춘에서 '진나라'의 장군 '완전'에 의해 멸망당한다.
광대한 영토에 비해 국가 조직은 상대적으로 느슨한 면이 있었다. 초사로 유명한 '굴원'은 전국시대 후반기 초나라의 정치인이자 시인이다. 후에 '진시황'이 망하자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였던 오군에서 일어난 기의군 대장 '향랑'이나 그 조카 서초패왕 '항우'등은 초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항량'은 망한 '초나라'의 왕족출신 '웅심'을 찾아 '기의군'의 왕으로 옹립한 것은 전국시대 내내 '진나라'에 핍박받아 원한에 사묻힌 '초나라'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이었다.
5. 조
전국시대 중엽 '조나라'에는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출한 왕이 태어나서 '위나라'가 쇠퇴한 틈을 타서 다시 독립한 중산국을 겸병하고, 다시 그 진출방향을 서북쪽으로 잡아 지금의 내몽고 지방과 영하성 일대의 땅과 주민들을 병합하고 일약 당시 초강대국 '진나라'와 세력을 다툴 수 있는 나라로 등장했다. '무령왕'은 중국 전쟁사에서 기병을 처음으로 전투에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 통상적으로 '무령왕'이 도입한 기병을 '호복기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령왕'이 후계자 싸움 중에 비명횡사하고 이어서 벌어진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함으로 인해서 더 이상 '진나라'의 통일의지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장평대전'에서 '조나라' 40만 대군이 '진나라'의 대군에 의해서 몰살당하자 '진나라'의 중국 통일은 단지 시간문제에 해당하게 된 것입니다.
6. 연
춘추시대나 전국시대 내내 약소국의 위치에 있다가 전국시대 말기 당시 강대국 제나라의 침략을 받아 제나라에 합병될 위기에 처했으나 주변 국가들이 제나라에 압력을 가해 간신히 제나라에 합병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어서 즉위한 '연 소왕'이 '제나라'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황금대를 지어 천하의 능력 있는 인재를 모으는 과정에서 당시 '위나라'로부터 사신의 신분으로 '연나라'를 방문했던 '악의'를 기용하여 '연나라'의 국정을 맡긴다.
7 한
전국시대 내내 가장 국력이 약한 국가였으며, '진나라'에 의해 가장 먼저 멸망당했다.
법가 '신불해'가 재상으로 있을 때 국력이 반짝 했을 뿐 중원의 정 가운데 위치해 있어 항상 주위의 강대국에 의해 시달림을 받다가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가장 먼저 망하는 나라가 '한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