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文書) 관련자(關聯者) 임종수(林宗秀)[1841(헌종 7년)-1893(고종 30년)]는 유곡출신(幽谷出身)으로 본관(本貫)은 평택(平澤)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조선후기에 합본(合本)이 이루어질 때에 개관(改貫)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출신은 분명치 않으나 1887년(광서(光緖) 13년, 고종 24년), 1890년(광서(光緖) 16년, 고종 27년)의 문경현(聞慶縣) 호서남면(戶西南面) 대사동(大寺洞) 준호구(準戶口)에 의하면 그의 부(父) 임순백(林順伯)(1819∼?)은 역부(驛夫)로서 가선대부전행첨지중추부사겸오위장(嘉善大夫前行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이며, 본관(本貫)은 평택(平澤)으로 되어 있다. 또 조(祖) 완철(完哲), 증조(曾祖) 상보(相寶)는 모두 증직(贈職)을 띠고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볼 때 임종수(林宗秀) 역시 역(驛) 출신(出身)으로 구한말(舊韓末)의 변동기에 관료에 입신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입사 계기는 분명치 않으나 1879년(고종 16년)에 절위장군용양위부호군겸오위장(折衛將軍龍양衛副護軍兼五衛將)에 임명되었고, 1884년(고종 21년)에 장사랑(將仕郞)으로 충훈부(忠勳府)의 도사(都事)에 차정(差定)되었다. 1888년(고종 25년)에 통훈대부행사헌부감찰(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 1890년(고종 27년)에 통훈대부겸유곡찰방(通訓大夫兼幽谷察訪)이 되었고, 이어서 같은해 4월에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에 임명되었다. | |
이처럼 聞慶은 길 때문에 縣監과 鄕校 訓導 외에 幽谷驛 察訪과 鳥嶺山城 別將등 國家職 官吏 2명이 더 常住했던 것이다. 記錄에 의하면 壬辰倭亂 때의 名將 郭再祐가 幽谷찰방을 歷任했고, 옛 幽谷驛 자리에는 暗行御史 朴文秀의 善政碑가 지금도 남아 있다. 특히 幽谷驛을 中心으로 商人이나 선비 등 길손들의 宿食을 위한 院도 많이 設置돼 있었다. 院은 朝鮮 初`中期 商業과 民間 交通 發達에 中樞的 役割을 했던 場所다. 朝鮮 中宗 때 編纂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聞慶地域에는 새재원(鳥嶺院), 要光院, 觀音院, 串岬院, 회연원, 개경원, 佛井院, 普通院, 桐華院, 犬灘院, 花峯院 등 무려 11개의 院이 있었다. 수많은 길손들이 幽谷驛과 聞慶새재를 통해 嶺南과 漢陽을 오가며 많은 離別과 만남의 情을 나눴다. 聞慶이 全國 最古의 길 中心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幽谷驛道의 歷史
幽谷驛은 高麗時代 開京을 中心으로 한 驛道體系에서도 으뜸역이되었고, 朝鮮時代 漢陽을 中心으로 各地로 뻗은 9大 幹線 가운데 釜山 東萊(嶺南大路)와 統營으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갈라졌다.
烽燧制가 擺撥制로 바뀐 壬辰倭亂 뒤에는 파발참(擺撥站)이 設置돼 이곳에서 中圖讖, 右圖讖, 左圖讖의 세 갈래로 나가게 되는 要衝地中의 要衝地였다. 문광공 洪貴達(1438~1504)은 幽谷驛을 嶺南의 咽喉라 表現했다. 그는 "모든 飮食物이 넘어가는 목구멍에 病이 나면 飮食을 通過시킬 수 없고, 飮食이 通過하지 못하면 목숨을 扶持할 수 없는 것처럼 幽谷驛은 그와 같은 役割을 하는 곳"이라고 說明했다. 그러나 幽谷驛道가 언제 設置되었는지에 대해서는 記錄上 不分明하다. 1425년 編纂된 慶尙道地理誌에는 幽谷道가 보이지 않다가 1454년 編纂된 世宗實錄地理志에는 幽谷道가 記錄돼 있어, 이 사이에 幽谷道가 設置된 것으로 推定하고 있을 뿐이다.
幽谷驛道의 옛 자취는 사라졌지만 옛 地名들만큼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5개 마을이 그 안에 있다. 官衙골(줄여서 이 마을에서는 지금 ‘앗골’이라 한다)을 中心으로 東西南北에 마을이 있다. 북쪽 馬本, 서쪽 한절골(큰 절이 있었다 하여 한절골이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을 한적골이라 한다), 동쪽 새마, 남쪽 酒幕거리가 그것이다. 한절골은 아골마을의 남쪽에 있으며 驛路를 基準으로 左右로 酒幕거리와 市場(2`7일장)이 繁盛했으나, 지금은 食堂과 슈퍼 등이 자리하고 있다. 朝鮮時代 末期까지 남아있었다고 하는 驛館과 아사(衙舍), 청고(廳庫)는 位置마저 確認하기 어렵게 됐다. 幽谷은 워낙 골짜기라 盜賊이 많았으나 盜賊이 일단 마을로 들어오면 밖으로 脫出하지 못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幽谷洞에서 聞慶새재로 가는 고개에는 개서낭당(狗城隍堂) 傳說이 전해진다.
이 마을 사람이 이웃 잔칫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길을 잃어 이 고개에서 失身한 것을 개가 깨워 집까지 가는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 뒤 개가 죽자 主人이 개의 恩惠에 報答하기 위해 개무덤을 만들어 줬고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이 義理의 개를 서낭신으로 모시고 서낭당을 세웠다. 이 서낭신은 지난 1986년 불에 타고 現在는 서낭神威만 세워져 있다. 聞慶새재로 가는 고갯마루에는 幽谷驛道史蹟碑가 1999년 1월 建立돼 歷史의 現場을 在照明하고 있다.
◆現在의 幽谷驛道
앞서 幽谷驛을 萬戶地址로 表現한 바 있다. 지금도 그런 自負心이 대단한 마을이다. 노영구(78) 老人會長은 "이 마을에 最近까지 大成洞事務所도 있었고, 學校와 農協과 새마을금고는 아직도 남아있다"며 "이 마을이 聞慶市 全體 農村마을중에 지금도 第一 큰 동네로 350号 1千餘 名이 살고 있다"고 說明했다. 지난 2002년 幽谷洞을 가로질러 中部內陸高速道路가 開通됐고 聞慶 上`下行線 休憩所가 이곳 幽谷洞에 자리 잡고 있다. 時代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幽谷驛道의 터는 嶺南사람들이 서울을 갔다오다 쉬는 쉼터 役割을 代身해주고 있는 듯했다.
마을마다 당집을 짓고, 각기 마을의 安寧과 平安을 祈願했다고 하는데, 1970년 한날한시에 이 당집들은 함께 불에 살라졌다. 住民들에 따르면 누군가의 放火로 推定한다고 했다. 지금은 馬本과 한적골에 그 痕跡을 復元해 놓았으나, 時代가 변해 驛의 役割이 쇠퇴하였듯이 당집의 役割도 쇠퇴했고 幽谷마을도 가라앉았다. 現在의 市廳 所在地인 店村마을을 中心으로 重要한 東西南北 철길과 陸路가 交差하면서, 어느덧 幽谷마을은 한 선의 國道만 通過하는 마을이 되었고, 한낱 農村마을이 되었다. 대신 店村은 마을이 面이 되고, 面이 邑이 되고, 邑이 市가 되었다. 다 길이 만든 마을의 浮沈歷史다. 萬戶指趾가 어느덧 典型的인 農村마을이 된 것이다. 이젠 그 한 가닥 3號線 國道마저 마을을 돌아나가 이 길조차 幽谷洞을 外面하는 길이 되었다. 店村에서 3号線 國道를 따라 幽谷마을에 이르는 길은 그 名稱부터 幽谷을 中心으로 編制되어 있다. 孔平마을이 먼저 나오는데, 그 마을의 이름은 구역(舊驛)에서 轉移된 이름이다. 幽谷에 驛이 생기기 전 이곳 記錄은 없으나 驛이 있었다는 證票다. 구역-구녕-꿩 하다가 漢子로 표기한다는 것이 孔平이 되었다. 正體도 없는 엉뚱한 이름이 되었다.
이 마을에는 林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바로 幽谷驛 察訪을 지낸 林宗洙(1841∼1893) 先生의 後孫 林氏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데서 由來한 마을이다. 지금도 그 後孫들은 林宗洙 察訪의 敎旨, 幽谷驛 關聯 文書들을 保存하고 있어 當時의 幽谷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이 文書는 驛 文化의 새로운 復元을 할 수 있는 史料的 價値를 認定받아 1998年 4月 13日 道 有形文化財 第304号로 指定됐으며 敎旨, 준호구, 점지, 시권 등의 古文書類와 삼등마안, 幽谷驛道중기책 등 各種 文書가 남아 있다. 驛이 있던 곳은 軍事的으로도 要衝地였던가? 幽谷洞 隣近에는 聞慶을 지키는 軍部隊가 자리하고 있다. 幽谷을 둘러싸고 있는 산등성이가 이곳에서 보인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그 옛날 有名하던 聞慶시멘트 工場이 있던 新機工團 길이 나온다. 新機라는 이름도 아마 幽谷의 신기(新基), 幽谷의 새터가 아니었을까? 지금도 新機에는 시멘트 工場 터가 크게 남아 있고, 그 옛날 뒤집어썼던 흰 石灰가루가 쇤 머리처럼 남아있다. 住民들은 사라진 幽谷驛道의 옛모습을 굉장히 아쉬워했다.
多幸히도 聞慶市는 交通과 길의 고장 聞慶을 在照明하기 위해 이곳 幽谷驛舍 復元事業에 着手해 다소 慰安이 되고 있다. 수많은 驛이 있었지만 1896년 驛制度가 이 땅에서 사라진 100여 년 동안 驛이 復元된 적은 없다. 聞慶이 全國 最初로 驛 文化 復元作業에 着手해 正體性을 살려나가고 있는 것은 意味 있는 일이다. 幽谷驛道에 대한 찰방 및 驛文化 復元을 위한 妥當性 調査 用役作業이 올 12월 말에 完了될 豫定이다.
◆幽谷驛道의 옛 英華를 말해주는 碑石거리
幽谷驛道에는 많은 碑石들이 옛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店村北初等學校 앞에 있는 이들 碑石은 官職에 따라 觀察使, 察榜, 驛吏 세 種類로 나누어진다. 觀察使의 碑는 7기로 大體로 134㎝ 以上으로 碑身이 높고, 察訪의 碑는 6기로 大體로 90㎝이며, 驛吏들의 碑는 2기로 79㎝이다. 官職 高下에 따라 碑의 높이가 差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觀察使의 碑는 大部分 不忘碑로 驛卒이나 驛民의 苦役을 덜어 주어 이를 잊지 않고자 하는 內容이다. 察訪碑는 大部分 善政碑로 되어 있다. 內容은 大體로 本驛의 이민(吏民)을 弊端 없이 잘 다스렸다는 多少 抽象的인 것이다. 觀察使碑는 不忘의 具體的인 內容을 明示하였지만 察訪碑는 그렇지 못하다. 住民들의 證言에 의하면 朴文秀 碑는 酒幕거리 남쪽(幽谷洞 189-55)에 있었던 것으로 推定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