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까페에 들어와 이제까지 올린 글은 윤내현과 이덕일 등을 비판한 글이라 보면 될 것이다.
두 사람이 국사의 본 모습과 식민지사관 타파를 위해 애쓰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수준으로 강단사학과 싸우기에는 너무 미흡하다고 보기 때문에 보완 측면에서 글을 올린 것이지 그들을 깍아내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 의병들은 오해 없기 바란다.
제목과 같이 의병들은 <청사고>에 수록된 지리지와 청 시기 제도된 고지도들을 우리 동국의 기록이나 고지도보다 반드시 먼저 공부해야 한다.
왜일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청국인 스스로 기록한 후조선의 서북경계를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겨진 문헌의 내용에는 강역의 지리적 기준지가 없다. 하지만 <청사고/지리지>에는 변동이 없었던 지금의 북경이라는 기준지가 있으며 북경으로부터 동쪽으로 산해관.대릉하.요하.요택.심양.요양.봉황성.안동 등을 거쳐 압록강 의주에 이르는 2100 리 길에 대한 상세한 지리 기록이 있다.
물론 정약용의 <강역고/조선고>에는 북경으로부터 우리 의주까지 2100 리라는 글도 있으며 <승람> 등에도 지리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이것은 2100 리 거리에 대한 상세한 지리적 설명이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일 뿐이며 또한 동서남북도 구별하기 힘든 압록강 이내 국내 지리 기록으로만 채워져 있어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뛰어다니는 꼴이라 표현하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연행기록이라는 것도 압록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압록강만 옮겨놓으면 리 수에 대한 감각이나 청국 강역의 지리를 모르면 한심하게도 현대지도를 펴놓고 고구려.백제.신라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정약용의 <강역고/백산보>나 장지연의 <대한강역고/백두산정계비고>도 마찬가지다.
송.요시기의 고지도 <지리도>나 <금사/지리지>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동서 1000 리에 이른다는 장백산을 모르면 우리 동국의 백두산도 지금의 백두산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으며 서국아이들이 장백산이라 하여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성 기록만 천착하게 되면 신채호의 주장과 같이 청국이 멸망하는 1911년까지도 대한제국.후조선과의 국경선인 압록강은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였고 당시까지의 요하는 지금의 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동서 1000 리에 뻗어있다는 장백산도 지금의 서국 요녕성과 내몽고자치구 사이에 있는 노로아호산과 칠로도산임을 알 수 있으며 흑수백산의 그 흑수도 지금의 서요하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신채호는 아쉽게도 고대의 요수가 왜 란하인지 또 고대란 어느 시기를 말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왜일까?
1920 년대 후반부터 1930 년대 초반은 일본왜종들이 지명이동 작업을 한참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다. 즉 란하.대릉하.요하.압록강.대동강을 각각 동쪽으로 300 여리, 1000 여리, 2000 여리 씩 옮기는 작업중이였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신채호는 당시의 요하는 서국 지리지에 기록된 대요수.요하가 아닐 것이라 확신하고 고대의 요수는 역시 옮긴 당시의 란하라 했던 것이다.
어쨋든 우리 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면 닥치고 <청사고/지리지> 직예.봉천성 기록을 보라.
독석구구와 다륜직예구 또 승덕부와 영평부를 관통하여 갈석 남쪽 바다에 흘러드는 란하가 지금의 란하인지를.
동서 1000 리에 이른다는 장백산 중 한 지점인 고열눌와집에서 발원하여 약간 서북쪽으로 휘어 북쪽 몽고초원에서 흘러오는 짧은 물길과 합쳐서 이루어진 요하가 지금의 요하인지를.
청 시기의 란하는 북경 북쪽에 있는 지금의 독석 부근에서 발원하여 물음표 `?`와 같이 흐르지만 지금의 승덕을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륜약이구 남쪽 지역에서 거의 정남쪽으로 흘러 북경 동북쪽 약 400 리 지점에 있는 밀운.고북구 동쪽을 가깝게 스쳐 흘러내렸다는 것을 <청사고/지리지>를 공부해야만 알 수 있다.
또한 열하.평천.적봉.조양.건창 등의 현을 통령하는 승덕부와 노룡새와 산해관이 있는 영평부 위치도 현대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승덕과 노룡 등 지금의 란하 경유지나 그 하류 동쪽이 아니라 지금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300 리 지점에 있었다.
즉 윤내현이 정확하게 시기를 구분하여 지목했던 고조선.위만시기의 요수 곧 진시황 시기까지의 요수는 <한서/지리지> 요서군 비여현의 난수이며 <수경주>의 난수였으며 청 시기의 란하인데 이 청 시기의 란하가 지금의 밀운.고북구 동쪽을 가깝게 스쳐 지나갔으나 현대축척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왜일까?
서국아이들로서는 일본왜종이 기껏 뺏어놓은 대한제국.후조선의 땅을 토해 놓을 만한 지적 양심이 없기 때문에 지도에서 지운 것이다. 이 역시 일본왜종이 1934 년 만주국지도에서 이미 지웠던 것이다.
결국 청 시기의 란하는 지금의 란하가 아니였지만 동쪽으로 약 300 여리 옮겨졌기 때문에 신채호로서는 요수를 란하라 비정하였던 것이며 요동군도 산해관 부근에 있었을 것이라 정확하게 추정하였고 또한 패수도 요하 동쪽 강변에 있었던 해성현을 흐르는 헌우록으로 정확하게 비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덕택에 현재 역사관심가들은 골이 뽀개졌지만.
따라서 이덕일이 현대지도에 표시된 산해관만 보고 <태강지리지><진서/지리지><통전/변방문> 기록을 적용하여 한 시기 낙랑군이
지금의 산해관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깊이가 없는 너무 단순한 역사지리 지식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강단사학에 속하는 공석구가 교치로 정확하게 본 것이다. 물론 반도 평양에서 교치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서국 요녕성 건창 부근에서 교치된 것이지만.
<청사고/지리지>직예.봉천성 기록을 통달하게 되면 그 이전 명.원.금.요.당.수.위.연.한 시기의 지리지는 거져 읽을 수 있으며 <삼국사기>의 고구려.백제 사건 기록이 눈에 확 들어올 것이다.
힘들 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