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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산성의 나라인 우리나라의 수많은 산성 중에서도 남한산성은 여러 면에서 돋보이는 산성이다.
남문에서 동문으로 산성을 관통하는 도로에는 차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성내에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며 학교, 파출소, 농협 등 사람 사는 동네에 필요한 시설들도 있어서, 여타 험한 산속에 인적없는 산성들과 대비된다.
수도 한양에서 한강을 건너 한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광주부의 읍치(邑治)를 이곳에 두어 평소에도 사람들이 상주하는 산성을 두어 유사시에 대비한 것이다'
비상시 왕의 피난에 대비한 행궁과 군영을 성내에 두고 성내의 많은 사찰에 승군을 상주시켜 산성을 관리케 하는 등, 같은 목적으로 나중에 건설된 북한산성과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조선 후기, 성내에는 600여 호가 살았고, 1907년의 조사에는 호구 446호, 1,840명이었다고 하니 산 위의 작은 산성도시가 있었던 셈이다.
판서와 동급인 정2품 유수(도지사격인 관찰사는 한 등급 아래인 종2품)가 다스리는 광주부의 관아가 성내에 있어서 행정의 중심이었다
1917년 광주군청이 지금 광주시청이 있는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급속도로 쇠퇴하였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수도권의 명소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게 인정되어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서남북 4개의 문관 많은 암문으로 이어진 원성의 길이만도 8km에 가까우며, 외성인 봉암성, 한봉성을 포함한 전체 성벽 길이는 12.36km이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1636년 연말을 앞두고 조선을 기습 공격한 청나라군에 쫓긴 인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이 이듬해 1월 말경까지 48일을 산성 내에 고립된 채 외로운 싸움을 하여야 했다.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 식량을 비롯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가운데도, 의리와 대의명분을 앞세운 척화파와 현실적인 국가의 보존을 위한 주화파가 첨예하게 맞섰던 현장이다
남문(至和門)
산성의 서남쪽에 있는 정문 격으로 사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도 남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성남 쪽에서 산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며 지금은 근처에 터널을 뚫어 차들이 성내로 바로 진입하게 되어있다.
지화문(至和門) 편액이 걸린 남문의 안쪽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 성벽에 오르니 몇 년 새 새로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위례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뒤로 왼쪽에 청계산이 있고 오른쪽 조금 낮게 봉긋봉긋 솟은 구룡산, 대모산이 나란하다. 그 뒤로 멀리 관악산이 들어온다.
북쪽으론 한강 건너 아차산이 있고 그 뒤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희미하다.
수어장대
산성 내의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군사적 지휘, 관측 등의 용도로 세워진 건물이다. 성내의 동, 서, 남, 북 4곳에 있던 장대중 서장대로 유일하게 남아있다.
청량당
수어장대 옆에 남한산성 축성 시 축성책임자로 최선을 다하다가 모함으로 억울하게 처형된 이회 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려 세운 사당이다.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듣고 한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린 부인과 소실을 함께 모셨으며, 수어장대 앞에는 이회 장군의 결백을 증명했다는 전설의 매바위도 있다.
남한산성도(南漢山城圖) 영남대박물관이 소장한 남한산성도. 병자호란 이후인 17세기 후반에 그려진 작품으로, 성곽과 성문, 옹성, 중요 건축물 및 도로망을 간략하면서도 상세히 그렸다.
한강 앞에 우뚝 선 바벨탑(?)과 그 뒤로 남산의 타워가 희미하다.
서문(右翼門)
산성 북동쪽 모서리에 있으며 4개의 성문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 서문이다,
이쪽은 병자호란 때 송파나루에 진을 친 청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며.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청진에 항복하러 갈 때도 서문을 통해 갔다.
산성 내 피란 48일 만에 인조는 세자와 함께 곤룡포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입고, 산성을 내려가 청진에 항복하러 갔다.
삼전도 남녘에 마련된 항복식장(?)은 구층의 단을 만들고 누런 비단 차일 친 높은 단 위에 앉은 청황제 홍타이치(태종)에게, 인조와 세자, 대신들은 단 아래 꿇어 세 번 절하고 이마를 땅에 아홉 번 두드렸다.
경사가 급하고 북동향 응달이라 눈, 얼음으로 덮인 미끄러운 길을 항복하러 가는 인조 일행의 모습이 처연하게 그려진다.
<산성일기>에는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를 입으시고 서문으로 따라 나가실 때, 성에 가득 찬 사람들이 통곡해 보내니 성안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다.
남한산성 일주는 성벽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돌 수 있으며, 중간중간에 많은 성문, 암문 등이 있어 안과, 밖을 들락거리며 돌 수도 있다.
북문 전승문(戰勝門)
성곽 북쪽에 있어 이문을 나가 계곡을 따라가면 하남시 춘궁동으로 이어지며, 이 일대는 옛 광주의 읍치(邑治)여서 지금도 고읍 또는 고골이라 불린다. 조선시대에 한강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문루에는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는 편액이 붙어있지만, 이곳은 병자호란 당시 참패의 경험이 있는 문이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북문을 나가 몇 번 기습 공격을 감행해 소규모 전투를 치렀다.
피란 15일째인 1936년 12월 28일(음력) 당시 영의정이자 체찰사인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군과 맞붙었으나, 적의 계략에 넘어가 전멸하고 말았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인데, 김류는 패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300명이 죽었음에도 40명이 죽었다고 실상을 숨겨 고하였다. 이 장면은 영화 <남한산성>에도 잘 표현되어 보는 사람을 분노케 한다.
전승문이라는 명칭은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문을 개축하고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패전의 경험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남한산성 속 48일간의 병자호란
청군의 진격은 바람같이 빨랐다.
1636년 12월 2일(음력) 심양을 출발하여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쳐들어 왔다.
선봉인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대는 의주 부윤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남쪽으로 내달았다.
청군은 이미 9년 전 정묘호란 때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피신하는 걸 경험했다. 그때의 학습효과가 선봉대를 질풍처럼 한양으로 달리게 한 것이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지 5일 만에 한양에 도착했다. 청군을 막는 조선의 군대도 없었고 북쪽의 강들도 얼어서 그들이 진격을 지연시키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12일에야 청이 쳐들어왔다는 장계를 처음 접했고, 13일 오후 늦게 청군이 평양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져 큰 혼란에 빠졌다.
14일에는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급보에 부랴부랴 강화의 수비를 명하고,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강화로 보냈다.
인조도 그날 밤 강화도로 출발했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도착 양천으로 건너는 한강을 차단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인조는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숭례문에서 의논 끝에, 최명길이 청진에 가 술과 고기를 먹이며 출병 이유 등을 물으며 시간을 끄는 사이에, 왕은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군사적으로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다음날 15일 새벽 강화로 가기 위해 산성을 나섰지만, 얼어서 미끄러운 길에 말에서 내려 걷던 인조가 여러 번 넘어지자 강화행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들어온 남한산성에는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들어온 군사 13,000명과 문무백관과 그들의 노복 등을 합쳐 모두 14,000명 정도였다.
당시 산성에는 그 인원이 약 30일 정도의 식량이 있었고, 식량보다도 더 큰 문제는 한겨울 엄동설한을 추위를 막을 준비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청군은 산성을 포위했고 고립된 인조는 비밀리에 전국에 근왕병을 불렀다.
왕명을 받은 각도의 군대가 출병했지만, 훈련도 부족했고 통합 지휘체계도 없이 진군하다, 요지를 지키며 대비하고 있던 청군들에게 각개 격파당해 고립된 남한산성을 구원하지 못했다.
남한산성의 한겨울 모진 추위에 산속 고립은 인조가 산성의 서문을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1월 30일까지 이어졌다. 산성에 들어온 지 48일 만이었다.
만약 인조가 강화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전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강화는 해로를 통해 삼남의 지원을 풍부하게 받을 수 있고(평소에도 삼남의 조운선들은 강화도를 지나 한강 하구를 통해 한양으로 들어갔었다), 남녘의 수군을 불러서 강화도를 방어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5일 만에 바람같이 달려온 청군의 전술은 완전한 성공이었다.
암문(暗門)
대부분 산성에는 여러 곳에 암문을 둔다. 성곽에 문루를 세우지 않고 뚫어 놓은 문으로 적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후미진 에 만들어진다. 주로 전시에 적이 모르도록 비밀스럽게 사람이나 물자가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한산성에는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 1개,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의 바깥쪽 물론 전시에는 외부를 돌 등으로 막아 놓았다가 필요시에만 열어서 사용했으리라.
동장대 가는 오르막길. 동장대가 있던 곳은 북쪽 성벽과 동쪽 성벽이 직각으로 만나는 모서리 부근으로 본성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이다. 이 부근에는 외성인 봉암성으로 드나들 수 있는 암문이 있다.
가파른 계단길은 눈이 쌓여 제법 미끄러웠다.
봉암성 암문 외성인 봉암성으로 통하는 출입문이라 규모가 큰 암문이다.
봉암성과 한봉성
봉암성은 원성의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둘러쌓은 외성이다. 벌봉 일대는 남한산성보다 높아서 병자호란 때 청군이 이곳에서 산성 내 동태를 살폈다. 이런 약점을 보강하기 위하여 1686년에 처음 쌓았고 길이는 2,120m이다.
봉암성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한봉에 이르기까지 쌓은 성벽이 한봉성이다. 원성의 방어를 더 강화하기 위한 성벽이다.
1,093m의 한봉성은 폐곡선을 이루지 않은 일직선의 성벽으로 별도의 성내 공간은 없다.
여장 성벽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인 여장은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이다.
남한산성의 여장은 벽돌로 쌓았다(한양도성의 여장은 화강암으로 쌓았다). 여장을 새로 쌓으면서 옛 여장을 일부 보존하여 남겨 놓았다.
동장대에서 동문에 이르는 동쪽 성벽은 수리 중이다, 여장을 보수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내 사찰들
남한산성는 1624년 새로 축성할 때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했다 돌아온 인조는 후금의 발호 등 증대되는 북방의 변화에 대응키 위해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전국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벽암 각성선사를 승군대장인 팔도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전국에서 모인 승군들을 통솔하여 산성 축성을 전담케 했다.
산성 내 동, 서, 남, 북 네 봉우리에 장대를 설치하고 그 장대의 좌우에 각각 2곳씩의 사찰을 두었으며, 개원사를 본영으로 삼아 승군들을 지휘 통솔했다.
2년 만에 축성을 끝내고도 9곳의 사찰에 승군을 상주시켜서 산성을 관리케 하는 승번(僧
동문(左翼門)
현재는 남문과 함께 산성 안을 통과하는 도로가 나 있어서 차들이 쉴새 없이 드나든다. 예전에도 남문과 함께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었다고 한다.
동문운 산성 안의 계곡물이 빠져나가는 가장 낮은 곳에 있어서 방어에 취약한 지점이라 지면보다 높은 곳에 설치했다.
인근에 우마차가 통과할 수 있는 규모가 큰 암문과 계곡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문이 있다.
수구문(水口門)
남한산성은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안은 분지의 형태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아 성내의 물은 모두 동쪽으로 빠져나간다.
물이 성벽을 통과하는 동문 가까이에 수구문을 설치하여 물이 빠져나가도록 했다. 지금은 도로를 내면서 성벽이 끊어진 곳으로 계곡이 통과한다.
오늘 산행은 동문에서 종료. 남문에서 출발해서 수어장대와 서문, 북문, 동장대지, 장경사를 거쳐 동문까지 약 6km를 걸었다. 3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산성 일주를 위해서는 동문에서 남문까지 1.7km를 더 가야 하지만 동문으로 마중 온 도깨비의 호의를 받아들여서~~ ㅎㅎ
동문에서 남문 가는 길, 이쪽 구간의 남쪽 성벽에는 3개의 옹성과 남장대 터가 있다.
연무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처음에는 연무당으로 불리다, 숙종이 '연병관'이란 편액을 내렸다. 정조 때는 수어영으로 개칭했고, 현재는 연무관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 내에 군영인 수어청(守禦廳)을 두어 산성 방어와 유사시에 대비케 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곳이라 성내에 삼학사의 위패를 봉안한 현절사를 두는 등 남한산성은 반청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임오년은 1762년인가 1822년인가?
'崇禎紀元後三壬午四月日改摸書 숭정기원후삼임오사월일개모서' "숭정제 이후 세 번째 임오년 사월에 새로 찾아 썼다"는 뜻이다.
연무관은 처음엔 연무당으로 불리다가 숙종이 연병관(演兵館)이란 편액을 내렸다는데, 그 건 어디 가고 연무관으로 고쳐 달았을까?
그럼 숭정기원후 세 번째 임오년은 언제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의종(毅宗 재위 1628~1644))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7년 뒤인 1644년 자금성 뒤 경산에 올라 목을 매 자살했고, 명나라는 망했다.
명나라가 망했으니 숭정 연호도 숭정17년(1644년)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이 땅의 먹물들은 공식문서에는 청나라 연호를 쓰면서도 사적인 기록에는 '숭정기원후'라 쓰면서 명나라 연호를 계속 썼다(잘났어! 증말~~ ).
그런데 숭정(崇禎)이나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연호의 사용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나 명문화된 것이 없어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다.
임오년은 숭정제 재위 중인 1642년(숭정 15년, 인조 20년)과 숭정제 사후인 1702(숙종 28년), 1762년(영조 38년), 1822년(순조 22년)이다.
내 생각으로는 의종 재위중인 1628~1644년은 '숭정'을, 의종 사후부터 '숭정기원후'라고 해석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해석하면 숭정기원후 세 번째 임오년은 1822년이 된다.
하지만 다른 주장들도 있어서, 숭정 재임부터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헤아리면 의종 재위 중의 임오년(1642년)을 포함하면 1762년이 된다.
실록을 조회해 보니 정조는 재위 3년인 1779년 8월에 남한산성에 행차해서 많은 행사와 정무를 거행하였는데, 이때 기록에 연병관이란 이름이 4번 일관되게 나온다.
고종 4년인 1867년 왕이 남한산성에 행차했는데 이때는 연무관으로 나온다. 이를 종합해보면 1822년이 맞을 것 같은데, 1762년이라는주장들도 많아서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걸 택하던 이미 명나라 망한 지 100년이 넘어서도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사대주의에 빠져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고, 망한 명나라의 정통성을 조선이 이었다는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빠진, 극한 사대주의자들은 정신병자들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요즘도 도심에서 태극기와 함께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광기(狂氣)가 저 시기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뒤풀이는 성내 두붓집에서.....
마중온 도깨비와 Jade님이 합세해서 신나는 수다를~~
'바쁜 백수' Jade님이 뒤풀이를 쏘셨다~~ ㅎㅎ
어디에서 집자 했을까? 남한산성 답사를 위해서 본 두 책의 표제에 '산성' 두 자가 같은 글자이다.
두 책 모두 어디에서 집자했는지는 언급이 없다.
<산성일기>
한글 필사본(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았다는)인 이 책은 정확한 창작연대와 작자는 알 수 없다.
인조 말년(1649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효종 때나 현종, 숙종 때라는 설도 있다고).
당시 산성 안의 세세한 묘사 등 내용으로 봐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 안에서 수난을 당했던 사람은 분명한 것 같다.
한글로 쓰였지만 문체는 한문 투며 전란 당시 관리들의 이름과 직책이 정확하고, 청과 주고받은 국서를 그대로 수록했다는 점등은 그가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문장력도 뛰어나 학문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상헌 등 척화파 대신들을 존경한다는 것들을 볼 때 작자를 어느 정도는 유추해 볼 수 있다.
'남한산성 48일'의 일들과 군사들의 진퇴 상황 등을 날짜별로 소상하게 기록하고, 청과 오고 간 문서들도 그대로 수록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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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고... 추버라... 마고... 새해 들어서 개과천선했나? 너무 착한 학생 같아.
올해... 주욱 이렇게 가는거야~~~
개과천선... 이라뇨? 원래 그렇지 않았나요?? ㅋ
역시나 아이젠이 필요했겠네요
추운데 수고하셨습니다
역시나 막걸리는 지평이 고급바람불면서 조금씩 시장을 확장했죠?...*^^*
좋은 자료 고맙습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