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뤼순감옥에서 144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당시, 하얼빈 총 인구는 59,674명,
중국인은 5,352명,
한국인은 268명,
일본인은 627명,
러시아인이 5만 명이 넘게 살았다.
당시 하얼빈은 동청 철도의 관리중심일 뿐 만아니라,
러시아가 중국 동북지역에 침략세력을 넓히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1909년 6월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통감을 사임하고 일본 추밀원의 의장이 되었다.
사형집행 5분전에 찍은 사진
우측의 붉은 건물이 뤼순 감옥
이토와 코코체프의 회담은 대한제국과 만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필요에 의하여
급박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회담을 통해 네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첫재, 러시아 제국을 강제하여 일본제국이 추진한 한일 합병 정책을 인증시킨다.
둘째, 러일 비밀 조약을 수정하여 일본과 러시아가 중국 동북 지역의 이익과 권리를 다시 분할한다.
셋째, 미국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세력을 넓히지 못하게 견제한다.
넷째, 청나라에 대한 방침을 조정한다.
안중근의사는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함게 이토 처결에 대한 결의를 하고
유동하, 조도선의 도움을 받아 1909년 10월 26일 대한의군 참모장으로서 역사적인 저격을 하였다.
오전 9시 30분쯤 3발의 총탄으로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러시아 헌병에게 순순히 붙잡힌 안중근의사는 하얼빈역 헌병분소에서 조사를 받았고
그 날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에 넘겨져 본격적인 심문을 받았다.
11월 1일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9명의 한인들은 하얼빈을 출발하여 11월 3일 뤼순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144일 동안 취조와 고문을 당하며 6번의 재판을 받았으며 상고를 포기하고
자기의 거사의 왜곡되지 않도록 진의를 알리기 위해 자서전<안응칠 역사>을 썼으며 동양평화론의 서론을 작성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는 휘호를 쓰고
오전 9시를 약간 지난 시간에 뤼순감옥 교수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떠났으나 떠났지 않았고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의 가슴에서 별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에서 찬연히 빛나며 우리를 통일의 길로,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감옥으로 가는 길
안중근의사가 사용한 감옥방
뤼순감옥 안내표지판
안중근 의사가 사용했던 감옥방 입구
사용했던 방


뤼순 재판소 안내 표지판과 뤼순재판소의 불법 재판을 알리는 포스터


안중근의사를 재판한 법정에 대한 안내문/감옥에서 쓴 휘호들


안중근의사를 재판한 3인의 법정/안중근의사가 감옥에서 쓴 휘호들

재판소에 만들어진 안중근 의사 기념실


안중근 의사가 감옥에서 쓴 휘호 "경천" /뤼순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안중근 의사 경력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