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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바벨론,신바벨론,바벨탑
(Barulwvn,Babylon) 「하나님의 문」
메소보다미아(현재의 이라크)의 고대 도성이다. 그 폐허는 유브라데의 한 지류에 있으며, 바그다드의 서남, 그러니까 오늘날의 힐라(Hilla) 부근에 있다. 발굴은 일찍부터 행해져 왔지만 지역이 광대하기 때문에 아직 부분적으로 밖에 진행되고 있지않다. 또 지하의 수맥(水脈)이 높아 깊이 파내려갈 수 없기 때문에 발굴은 신(新)바벨론과그 후의 비교적 새 시대의 성읍에 집중되어 왔다.
(1) 역사:
BC 3000년대와 그 이전의 층에는 미치지 못하므로 성읍으로서의 바벨론의 기원에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최고(最古)의 문헌적 자료는 악갓 시대의 것인데(BC 2500 경),샤르칼리 샤리(Sharkali-sharri) 왕의 연표(年表)에 기록되어 있다. 즉, 왕은 카딩기르(키, KA. DINGIRki)에서 여신 아누니툼(Anu\nitum)과 신 아바(Aba)의두 신전의 건립을 축하했다고 했다. 이 이름은 성읍의 슈메르 이름 카딩기락(Ka-dingirak), 또는 악갓 이름 바브일림(Bab-ilim)의 어느 것에서 유래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양자 공히 `하나님의 문'을 의미한다.
Bab-ilim이라는 이름의 최초 용례(用例)는 우르(Ur) 제 3왕조 시대의 본문에 있다(BC 2200-2100 경).그 당시 바벨론은 아직 한 도의 도성에 불과했다. 이어 이신 라르사(Isin-Larsa)시대에 성읍은 아모리인의 왕조에 의한 소독립국의 도성으로 되었다. 그 왕조의 가장 저명한왕 함무라비(Hammurabi)때에 바벨론은 남메소보다미아의 거의 전토에 지배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 왕조는 BC 1600년보다 약간 후에 힛타이트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다음의 캇시트(Cassite) 시대와 중기 바벨론 시대에 바벨론은 남 메소보다미아의 도성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했다. 도성은 앗수르의 지배자 투쿨티 니누르타 Ⅰ세(Tukulti-Ninurta Ⅰ, BC 1235-1198)에게 점령되어 일부는 파괴 되었지만세력을 회복하여 이 불행에서 벗어났다.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Ⅲ세와 사르곤 Ⅱ세가남메소보다미아를 정복했을 때 바벨론은 저항의 중심지로 되었기 때문에 산헤립은 BC 689년 드디어 도성을 멸망시켜 버렸다. 그러나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은 도성을 재건하여 그 후계자 아슈르바니발의 형제 샤마슈슘우킨(Shamash-shum-ukin)은 바벨론의섭정으로 되었다. 이 섭정은 왕에 반역했기 때문에 바벨론은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BC 608년 바벨론의 반항에 의해 마침내 앗수르 제국이 멸망 당한 후부터는 이 도성은 신바벨론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빛나는 시대를 맞았다. 나보폴랏사르(Nabopolassar)와 느부갓네살 Ⅱ세는 공공 건축과 요새 구축의 대사업을 추진했다.
신바벨론 제국이 바사에 투항했을때 바벨론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고레스 왕에게 성문을 열어 주었다(BC 539). 바벨론은그 후 바사 왕들의 밑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했다.바사 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쓰러졌을 때에도 바벨론은 저항하지 않고 대왕을 받아들였다. 바벨론은 당연히 알렉산더의 신제국 수도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셀레우코스Ⅰ세 니카토르(Seleucus Ⅰ Nicator)가 티글리스 강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셀류키아(Seleucia)를 건설한 다음부터는 이 도성은 바벨론의 존재를 위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서서히 바벨론의 주민은 셀류키아로 이주하고 바벨론은 황폐하기에 이르렀다. 신약성경 시대에 이 고대 도시는 겨우 천문학자와 수학자의 단체가 살고 있었는데 불과하였다.
(2) 건조물:
신바벨론 제국의 바벨론은 유브라데 강을 사이에 두고 그 양 안에 대략 구형을이루고 동북 서남으로 뻗어나갔다. 강 동쪽 지역은 시의 옛 부분을 포함하고 있고, 왕궁과주요 신전이 있었다. 서쪽 지역은 보다 후대의 것인데 `새 도성'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이구형을 이중의 벽이 둘러싸고 있다. 내벽(內壁)은 임구르 엔릴(Imgur-Enlil)이라 불리웠는데, 폭은 약 7m,외벽네멧티엔릴(Nemetti-Enlil)의 폭은 약 4m였다.벽위에는18m-20m 간격으로 탑이 서 있었다. 시내에 들어갈 때에는 해자의 다리를 건너 이중 성벽의 문을 지나게 되어 있다.
느부갓네살 Ⅱ세는 이들 성벽 외에 도성 남쪽과 동쪽에 다시 이중의 벽을 쌓아 방비를 견고히 하였다. 이 새 이벽의 외중 벽은 폭이 약 8m,내벽도그만하였다.다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 성벽의 북쪽과 동쪽에 인공호수나 해자의 지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성읍 북쪽에서 이 느부갓네살 방벽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안쪽에 바로 유브라데의 제방 위에 하궁(夏宮, Summer Palace)이라 불리우는 궁전이 있었다.
이 궁전을 덮은 사구(砂丘)를 오늘날도 역시 `바빌'(Babil)이라고 부르며, 성읍명을 보존하고있다. 더 나아가면 제 2의 큰 궁전과 그와 비슷한 건물(`兵營'이라고 불리운)이 길 좌우에있었다. 이들 건물의 가로쪽 벽은 채색(彩色) 에나멜 칠을 한 기와인데, 사자의 열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유명한 이슈타르 문(the Ishtar Gate)에 이른다. 그 아치형 입구는 폭이 5m, 높이는 약 9m인데,양쪽에는각각사각탑(四角塔)이 서 있었다. 탑과 문의 표면은 자색을 띤 남색 타일인데, 일렌의 황소와 용의 채색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문을 들어가문 안쪽 홀을 지나면 외벽, 즉 네멧티 엔릴(Nem etti-Enlil)을 통과한 것이 된다.거기서 다시 제 2의 큰 문에 들어가 내벽, 즉 임구르 엔릴을 지난다. 이 문도 청파리색(靑坡璃色) 타일로 단장되어 있었는데, 한층 높고 컸다. 그 배후에 약 30m의 안쪽 문홀이 있고, 그 곳을 나가면 시내를 남쪽으로 곧바로 내려가는 주요 도로 아이부르 샤부(Aibur-Shabu)가 통해 있었다.
이 지점에서는 왼쪽에 여신 닌마크(Ninmakh)의 신전이 보였다. 그와 같은 주요한 신전만도 시내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또 바로 오른쪽에는 바벨론의 여러 궁전 중 최대의 것이 있었다. 이 궁전은 세 개의 주요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부분은 방형의 광장을 중심으로 많은 방이 늘어 서 있었다. 도로에 면한 부분에는왕의 공적 알현실(謁見室)이 있었으며, 거기에 옥좌가 있었다.
제 2의 부분은 왕의 거주용으로, 제 3의 부분은 하렘으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시내 중심부보다 조금 남쪽에는 마르두크(Marduk)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가 서 있었다. 이 신전의 주요한 문은 동쪽에 있었다. 그곳을 들어가면 많은 방으로 둘러싸인 방형의 광장이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신전의 주건물이 여럿이 늘어서 있었으며, 높은 금단(金壇)에 대리석의 마르두크상(像)을 안치한 장방형의 건물도 거기 있었다.
건물의 장식은 호화의 극을 이루고 지붕의 대들보는 금은으로 씌우고 벽도 금으로 덮여 있었다. 신전 북쪽에 있는 탑 에테메난키(Etemenanki)는 웅장했으며, 이것이 바벨탑의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창 11:1-9). 그밖에 시내의 교량이나 늘어선 많은 집도 발굴되고 있다.
(3) 성경에서의 바벨론:
바벨론은 부요하고 호화스러운 도성이었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는데,이것은 고고학적 발견으로부터도 증명된다. 더구나 이 평판은 단순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아니고, 도덕적인 판단이 더해져 있었으며, 특히 계시록의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가증한 것들의 어미"(17:5)에 표시된 것처럼 `바벨론'은 종교적, 도덕적 악과 오만한 대적과의 상징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인의 종교적 확신과 바벨론의 지배자들의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취급 등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유대교에서의 이평가는 초대 기독교에도 계승되어 바벨론은 온갖 독신(瀆神)과 우상 예배가 행해진 악마의영역으로서 상징적으로 받아졌다(계 17:15-18). 초대 교회에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자의 원형(原型)으로서, 당시의 로마의 도성, 또는 제국(帝國)을 의미함과 동시에(벧전 5:13) 종말에 가서는 멸망될 악마의 지배와 권세를 의미했다(계 17:5).
출처 : 성경사전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