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장인이자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沈溫 1375∼1419)의 묘 전경이다.이 묘는 경기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된다.
수원의 주산 광교산(光敎山 582m)이다.광교산은 수원시민 뿐만 아니라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주민들이 즐겨찾는 명산이다.
광교산은 명산에 걸맞게 신비한 전설을 안고 있다. 백두산 산신령이 화산폭발 때 잠시 피신해 있던 산에서 광채가 나서 이름을
광교산이라고 했다고 우리 고유의 산신숭배사상은 전한다.왕건이 전라도 완산지역에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광교산에서 야영을 했다.어느날 밤 때 하늘에서 광채가 나오는 것을 보고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았다.
그래서 왕건은 '이 산을 광교산(光敎山)이라고 하라'고 명명했다고 전한다.
광교산은 한남정맥의 중간에 있는 산이지만, 능선이 잘 발달하고 있어 커다란 역량을 가진 산이다.
그 산의 용맥이 동남쪽으로 내닫다 봉우리를 형성한다.바로 응봉(237미터)이다.
그 응봉이 심온 묘의 주산이다.수원 영통구 이의동 산12-10 그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심온의 묘다.
광교산에서 원천호수로 내달리는 용맥은 목이 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모양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의 산세를 하고 있다.
심온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살던 인물이다.그의 삶은 중년까지 출세가도를 거침없이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버지 심덕부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심덕부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조민수 이무
왕안덕과 함께 그 회군에 동참한다.또 우왕과 최영 장군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공신 중 하나다.또 경복궁을 지을 때 손과 발이
부르틀 정도로 혼신의 힘을 쏟은 아버지 심덕부다.
심온은 11살 때 진사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한 천재였다.그는 딸을 세종에 시집을 보낸다.또 태종과는 동서간의 인연을 맺는다.
우의정을 지낸 명문가 교하 노씨의 노한(盧閈)도 동서간이다.노한의 아들 노물제와 강덕식이 세종과 함께 심온의 사위이다.
사위 세종의 아들 문종 수양대군 세조 안평대군 등과 강덕식의 아들 강희안 강희맹 노물제의 아들 노사신이 심온의 외손자이다.
조선왕릉은 비산비야(非山非野)에 있다.조선왕릉만이 자랑하는 사초지(沙草地)이다.
강(岡)으로도 불리우는 자연의 언덕이다.삼국시대 왕릉은 평지 들(野)에 있다.고려왕릉은 산(山)에 있다.
조선왕릉은 바로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非山非野) 자연의 언덕 강(岡)사초지에 있는 것이다.
심온의 묘 사초지는 가히 왕릉급이다.아주 실한 강(岡) 사초지다.
심온(1375~1418)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청송, 자는 중옥이다.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의 국구(왕비인 소헌왕후의 아버지)로 청천부원군에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안효(安孝)이다.
공은 12세에 국자감 진사시에 급제 후, 태종 11년(1411)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대사헌이 되어서는 관의 기강확립에 힘썼다.
이후 형조·호조·공조·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세종 원년(1418)에 영의정이 되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발생한
무술옥사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에서 화를 입었으나, 이후 무고로 판명되어 문종 1년(1451)에 복관되었다.
심온은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에서 파격적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나이 44세 때였다.
그러나 태종의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음에도
병권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철저히 배격했다. 자신의 처남인 민무구·민무질·민무홀·
민무회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 심온도 훗날 외척이 될 수 있으므로 미리 제거하려는 의중이 있었던 것 같다.
심온이 사은사로 명나라로 떠나고 한 달 뒤쯤 이른바 ‘강상인의 불경사건’이 일어났다.
태종은 자기를 제쳐놓고 세종에게 직보한 강상인에게 배후를 대라고 국문했다. 압슬형을 견디지 못한 강상인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왕의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하는데 두 곳에서 나온다고 말했는데, 이를 병조판서 박습과 영의정 심온이 동조하였다고
자백하였다. 박습과 심정은 곧바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했다. 심온도 귀국길에 압록강을 넘자 수원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한 후
태종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좌의정 박은의 음모가 있었다.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남길 말이 없냐고 묻자 “나의 자손은 대대로 반남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이는 후손들의 불문율이 되었다. 심온이 죽자 태종은 수원부에 명하여 장례를 후하게 지내주라 이르고 지관 이양을 파견하여
장지를 택하게 했다.
묘역은 장대석을 이용해 상하 2단으로 구분하였다.윗 쪽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공의 외손자인 안평대군 이용이 글씨를 쓴 묘표와
상석이 있다. 묘표의 비문은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이용(李瑢)이 썼다. 그리고 아래쪽에는 장명등이 있고, 그 좌우에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서 세우는 문인석 1쌍이 있다. 한편 묘역 입구의 비각에는 신도비가 안치되어 있다.
9대손 심하단(沈賀檀)이 찬(撰)하고 서명균(徐命均)이 글을 썼다. 또한 심과육(沈果錥)이 전액(篆額)을 써서 영조(英祖) 13년(1737)에 건립하였다.
묘가 있는 혈장에 오르면 땅이 밝고 단단하다. 땅이 밝다는 것은 기가 좋다는 뜻이다. 단단하다는 것은 기가 뭉쳐 있다는 뜻이다.
묘 뒤의 볼록하게 생긴 입수도두가 세 개로 되어 있다. 입수도두는 지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핸드폰에 비유하자면 배터리가 3개가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발복이 오랫동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혈장 아래 경사면을 하수사라고 하는데 그 곳에 돌이 박혀있다.
혈의 생기를 보호하는 것으로 이곳이 대혈임을 의미한다.
속리산에서 치고 올라온 한남정맥이 광교산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틀어 내닫고 있다.
그 기세를 받아 힘차게 내닫는 응봉의 맥세도 참으로 기가 세다.그리고 실하게 도톰하게 솟아오른 잉(孕)도 좋아보인다.
임수(臨水)의 드넓은 들녁이 있어야 할 자리에 광교신도시의 고층아파트가 앞을 가리고 있다.
청송 심씨는 최고의 명문가로 꼽힌다.조선시대 정승 13명, 왕비 3명, 부마 4명, 대과급제 196명, 무과급제 350명을 배출했다.
정승 수는 전주 이씨 22명, 동래 정씨 17명, 안동 김씨 15명에 이어 네 번째다. 이중 심온의 후손에서 정승 9명, 왕비 2명, 대제학 2명, 부마 1명이 배출됐다.
청송 심씨는 대대로 명당 잘 쓰기로 유명하다. 시조인 심홍부의 묘는 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 산33에 있고, 2세 심연의 묘는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 산64-1, 3세 심용의 묘는 경기도 안성시 당왕동 산19-6, 4세인 심덕부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이미리 산110에 있다. 모두 이름 난 명당이다. 고려 때 영남에서 호남, 경기로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명당을 쓰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감수했던 것 같다. 오늘날 선산이 멀다는 이유로 조상 묘를 파묘해서 화장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청송 심씨 계보는 크게 둘로 갈린다. 심용에게는 덕부와 원부 두 아들이 있었다. 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고 좌의정에
올랐다. 반면에 원부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손들에게 조선의 녹을 먹지 말라고 유훈을 남겼다. 원부의 자손들은 대대로
‘선훈불사(先訓不仕)’의 유훈을 지켜 벼슬을 멀리했다. 그러나 덕부의 아들 7형제와 그 후손들은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살았다.
특히 넷째인 징(인수부윤군)과 다섯째인 온(안효공)의 후손들이 번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