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동쪽 살곶이벌이다.뚝섬으로도 부른다.조선은 한양을 도읍지로 잡으면서 도성 밖 동쪽과 서쪽에 큰 벌판을 두고 경영했다.
서쪽에는 신촌일대를 아우르는 서교(西郊)가 있다.동쪽에는 살곶이벌 뚝섬을 두고 마장(馬場)과 궁궐 등 다양한 중요 국가시설을
집중 배치했다.서교(西郊)보다는 동교(東郊) 살곶이벌에 더 집중했다고 생각된다.해가 뜨는 동쪽이라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을 것으로 짐작된다.살곶이벌과 뚝섬 그 유래는 참으로 다양하고 흥미롭다.
서울에서 개나리꽃이 가장 먼저 피는 응봉(鷹峰)이다.삼국시대부터 매사냥을 좋아했던 우리 민족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말타기와 사냥을 즐겼던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사냥을 즐겨 하였다고 한다.
태조는 살곶이벌에서 사냥을 즐기기 위해 즉위 4년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그때부터 응방이 있던 산이라고 해서 응봉(鷹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기 전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이다.
그는 서울 도성 동쪽 벌판 동교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 때 응봉에서 활을 쏘자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의 살곶이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음료로 사용했던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 주변 벌판을 ‘살곶이벌' '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살곶이벌은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이곳은 자연히 평야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다.
또한 임금의 매 사냥터로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동교수렵(東郊狩獵)이란 말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살곶이다리란 명칭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과의 일화에서 비롯됐다고 야사로 전한다.
다섯 째 아들 방원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모든 걸 버리고 함흥으로 떠나버린 이성계,하지만 태종 이방원은 옥쇄를
받고 싶은 마음에 이성계에게 돌아와달라고 요청한다.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온다.그가 기다리고 있던 이방원과 마주친 곳이
바로 살곶이벌이다.이성계는 분을 사기지 못하고 아들 이방원을 향해 활을 쏘았다.그 화살은 행사장에 설치한 원기둥에 맞고
바닥이 꽂혀 버리고 만다.아들 태종이 아버지 상왕 태조를 환영하는 술잔을 올릴 차례다.
태종의 책사 하륜은 "주상은 상왕에게 직접 술잔을 올리지 마십시요!"라고 간한 뒤였다.하륜이 태종을 대신해 상왕 태종에게
술잔을 올렸다.옷속에 쇠뭉치를 품고 기회를 노리던 이성계는 모든 걸 포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래 천명이로다.이 모든 게 네가 왕이 될 운명이로다."
그리하여 화살이 꽂힌 곳이라고 해서 이곳을 살곶이 살꽂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살곶이벌의 또다른 이름 뚝섬이다.뚝섬전망문화콤플렉스(자벌레) 근처에 설치된 뚝섬의 유래를 전하는 표지석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사냥을 하거나 군사들의 무예를 검열하는 곳 뚝섬이다.왕이 군사훈련장에 거둥하였다는 독(纛)이라는
큰 깃발을 꽂았다.독기(纛旗)가 걸린 곳이라고 해서 '독도'라고 불렀다.그러다 뚝섬으로 바꿔서 부르게 되었다.
왕이 군사훈련을 참관하기 위해 거둥할 때는 수도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성덕정(聖德亭)을 찾았다.그 성덕정에 독기를 걸었다.
또 치우(蚩尤)천황을 기리는 사당 둑신사(纛神祠)에서 뚝섬이 유래됐다는 설이다.
치우(蚩尤)는 배달국의 제14세 자오지천황을 가리킨다. 지금부터 약 4,700년 전 백두산에서 현재의 중국 땅인 요서(遼西)를 넘어
산동성과 주변, 서쪽으로는 탁록까지 진출해 배달국의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성웅(聖雄)이다. 또한 동북아를 지배하며 제후들을
거느린 천자(天子)의 지위에 있었다. 특히 그는 탁록대전으로 수천년 지난 오늘까지도 그 위명(威名)을 떨치고 있다.
우리 민족이 군신(軍神)으로 모셔온 치우의 사당 둑신사(纛神祠)를 곳곳에 두었다.뚝섬에도 둑신사(纛神祠)가 있었다고 전한다.
창경궁 옥천교 교각에 치우천왕을 상징하는 도깨비상이 있다.왕이 있는 창경궁을 치우천왕이 지켜준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순신장군도 전장에 나갈 때 둑사당에 들러 무운장구을 빌었다고 한다.
둑(纛)은둑 혹은 도라고도 읽는다. 지금 한강 뚝섬]에 있다.그 지명은 바로 둑(纛)에서 유래를 찾는다.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싣고온 많은 목재들이 들어오던 뚝섬나루다.
이곳까지 운송된 굵은 목재는 궁궐과 관아는 물론 사대부의 한옥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뚝섬나루에는 목재를 사고파는 경강상인의 숙박시설과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세소(收稅所)가 설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나루 주위에 땔감과 재목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점포가 40여호가 넘었다고 전한다.
목재를 켜는 제재소가 비교적 많았다.나루터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목재와 땔감이 집중되는 나루에는 참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는 먹거리가 풍성하기 마련이다.해장국집이 즐비했다고 전한다.
뚝섬나루에는 해장국이 많이 들어섰다.
새벽에 뗏목이 도착하면 뚝섬나루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시장통이다.
새벽에 도착한 뗏꾼들과 상인들은 해장국집을 찾아 허기를 메운다.
그때부터 유명한 뚝섬해장국이다.
해장국을 시키면 국말이떡이 3쪽 나온다.
이 국말이떡을 해장국에 담가서 먹었다.해장국 맛도 인기였다.
그 맛 좋은 해장국에 담가서 먹는 국말이떡의 맛은 더욱 좋다.
그래서 지금도 뚝섬일대에서는 국말이떡과 함께 즐기는 해장국이 여전히 인기다.
먹거리가 풍부한 나루터다.목재소가 많은 뚝섬 마포나루터는 더욱 그랬다.먼지를 많이 안고 사는 목재소 일꾼 등 나루터 사람들에게는 술과 고기가 필요하였기에 그 나루터에는 삼겹살 집 주물럭고기집 등 고기집도 많았다.마포에는 임금님에게 올렸다는 삼해주가
유명하다.뚝섬에는 목재와 채소가 많았다.새우젖이 유명한 마포다.뚝섬 채소장수와 마포 새우젖 장수는 이렇에 구별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뚝섬 채소장수는 뒷덜미가 까맣고 마포 새우젖 장수는 이마가 까맣다."
도성에 물건 팔러가는 뚝섬 채소장수는 아침에 해를 등지고 도성으로 들어간다.
오후에 도성에서 물건을 다 팔고 해를 등지고 뚝섬으로 돌아가야 했다.그래서 뒷덜미가 까맣다,
반대로 마포 새우젓장수는 아침에 해를 안고 도성에 들어간다.물건을 다 팔고 오후에 해를 안고
다시 마포로 돌아가야 했다.그레서 마포 새우젓장수는 이마가 까맣다고 한다.
서울권 한강에는 3대 백사장이 있었다. 광나루 백사장 뚝섬 백사장 그리고 용산 백사장이다.
지금은 한강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그 백사장은 다 사라졌다.그 백사장 자리에는 한강공원이 조성되었다.
조선 최고의 토목기술자 박자청이 설계한 살곶이다리이다. 석조예술의 꽃이라고 예찬하고 있다.
창덕궁 금천교(錦川橋)도 박자청의 대표적인 작품이다.박자청이 한껏 솜씨를 발휘해 돌로 빚어낸 금천교다.
살곶이다리에서도 박자청의 돌을 다루는 탁월한 솜씨가 더욱 돋보인다.세종 때 살곶이다리 건설을 시작했다가 중단한다.
성종 6년(1475)에 중단된 다리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성종이 살곶이다리의 공사를 진행할 당시 자금과 인력의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어느 이름 모를 승려가 인원을 동원하여
많은 돌을 채벌해서 다리는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300여 보를 넘고 안전하기가 집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행인이 지날 때 마치
평지를 밟는 것과 같아서 왕이 '제반교(濟盤橋)'라고 이름 지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제9권에서
성종 14년에 이르러 스님들의 노력으로 1만개의 돌을 날라 300여보에 달하는 긴 다리를 놓는데 성공한 것이다.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살곶이다리를 실측한 결과 다리의 폭이 20척(6m), 길이가 258척(78m)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성부사는 또 교각을 횡렬 4열 종렬 22열을 배치하고 3장의 장대를 건너지른 뒤에 다시 동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좌우의 교안을 장대석으로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리의 교각은 마름모꼴로 만들었다.날카로운 부문에서 흐르는 물살을 받아내 속도를 줄여준다고 했다.
교각 곳곳에 가는 선을 그은 경우를 찾아 볼 수 있다.그 선을 홈통으로 물길을 유도하다고 있다는 것이다.
교각바닥에는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깔아 든든하게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돌과 돌 사이는 그랭이공법으로 연결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행렬이 이 살곶이다리를 밟고 지났다.
그의 세자시절 세자빈 순명효왕후(純明孝皇后) 민씨는 비운의 여인이다.그는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슬픈 세자빈 민씨도 이 살곶이다리를 밟고 용마산 기슭 유강원에 안장된다.순종의 부부가 슬프게 밟고간 살곶이다리다.
조선의 27대 순종과 세자빈 순명효황후는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건청궁을 난입한 일본인들이 저지른 시어머니 명성황후의
끔찍한 살인사건을 몸소 겪는다.일본인들이 칼을 광란할 때 이를 막아서다 쓰러지고 실신한다.다시 일어나 명성황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러나 명성황후는 아들 순종과 며느리 순명황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끔찍하고 처첨하게 살해당한다.
그때 그 참상을 몸소 겪은 세자빈 순명효활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33살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한다.
그는 이 살곶이다리를 건너 용마산 자락 너른 터에 자리한 영원한 안식처 유강원으로 가서 영면한다.
그의 남편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도 이 다리로 건너 남양주 유릉에 안장된다.일제는 순종에게 따로 능호를 주지 않았다.
부인 유강원의 능호를 이어 유릉으로 지어 부부가 합장된다.이 다리는 비운의 왕 순종 부부의 아픔을 증언한다.
살곶이벌에는 국립말목장이 있었다.남쪽의 자양동에서 북쪽 청량리 배봉산에 이르는 지역에 자리한 살곶이목장이다.
목장이 있었던 지역임을 상징하는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마장동은 숫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던 곳이다.자양동은 암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던 마을이다.장한평은 목장 가운데 자리한 큰 벌판이다.면목동은 목장을 마주 대하고 있는 마을이다.
건국대 캠퍼스 일대는 모진동이었다.모진동에 얽힌 우스게 소리가 전한다.
국내 대학캠퍼스 내에 있는 호수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국대 일감호다.
옛날 말은 군의 유일한 이동수단으로 중요하고 귀하게 여겼다.함부로 말을 잡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고기도 자유롭게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사고로 죽은 말을 가져가 고기는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일감호 일대는 늪지대였다고 한다.말이 달리고 달리다 그 늪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면 아녀자들이
달려들어 말을 끌어내 그 고기를 나눠 먹었다고 한다.그 여인들은 아주 모질게 말을 끌어내 고기를 취했다고 한다.
그 마을의 이름을 '모진동'이라고 정했다고 전한다.
과천으로 옮겨간 경마장은 뚝섬에 있었다.그 옛날 경마장이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서울숲이 조성되었다.
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 뒤에는 경마장이 있었던 곳임을 기리는 힘차게 내닫는 승마상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