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다’는 것의 참된 의미
상하(常夏)의 나라 아프리카에서 맨 처음 그 탐스러운 꽃들을 본 앙드레 지드는 황홀함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은 유럽의 꽃들보다 얼마나 더 크며 몇 배나 더 건강하고 또 원색적(原色的)인 것이었던가! 부족함이 없는 태양빛 속에서 사시사철 피어나는 그 꽃들의 표정에서 그는 낙원의 부러운 풍경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드는 얼마 안 있어서 아프리카의 그 꽃들에 대해서 곧 실망(失望)하고 만다. 언제 어디에서나 쉴 사이 없이 피어나는 그 꽃들은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 같은 녹색의 이파리, 꼭 같은 줄기와 꼭 같은 색채들…… 겨울이란 것을 모르는 열대의 식물들은 아무리 싱싱하게 살아있어도 화석(化石)처럼 굳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거기에는 꽃이 핀다는 감격이 없다. 얼어붙은 흙, 그 회색(灰色)의 공간 속에서 한 겨울동안 잠들어 있던 구근(球根)에서 어린 생명이 터져 나오는 그 긴장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위와 정적(靜寂)속에서 한 떨기 꽃들이 돌연(突然)히 개화(開花)하는 기적을 보지 못한다.
빈 뜰에서 피어나는 그 꽃이 진짜 꽃이다. 구근(球根) 속에서 겨울을 통과한 꽃이야말로 진짜로 필 줄을 안다.
핀다는 것은 침묵(沈黙)이 있었다는 것이다. 핀다는 것은 미리 그 앞에 죽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피어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어둠이 있어야 하고 닫혀지는 것, 숨겨져 있는 것, 결핍(缺乏)과 고통(苦痛)과 무(無)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하(常夏)의 나라 적도(赤道)의 땅에서는 꽃이 피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모른다. 그것은 돌처럼 그냥 거기 그렇게 흩어져 있다. 눈과 얼음에 덮인 겨울들판을 보지 못한 사람은, 흙덩이처럼 말라 굳어버린 구근(球根)을 보지 못한 사람은 또한 꽃들이 피어나는 그 참된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갈증이 있었을 때 비로소 물맛을 맛 볼 수 있듯이 들판의 황량함이 있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꽃의 빛깔과 그 향훈의 참뜻을 소유할 수 있다. 핀다는 것은 바깥으로 생명을 연다는 것, 작은 배가 수평선을 향해 닻을 올리고, 새가 죽지를 벌리어 하늘을 날아오르고, 마셨던 숨을 쉬는 것……. 안이 있어야 바깥이 있듯이 질 줄 아는 자만이 비로소 필 줄을 안다.
당신들, 詩를 쓰는 그 사람들도 먼저 구근 속에 깊이 잠들 줄 알아야 한다. 겨울을 통과한 言語만이 개화의 눈물겨운 그 빛과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다.
지은이: 이어령
출 처: 『 문학사상』1980.3
봄을 톡톡 터뜨리는 ‘봄동’
[봄똥]이라 말하고 봄동으로 써야 한다. 겨울과 봄이 부둥켜안은 이맘때, 꽃보다 고운 자태로 혀끝을 유혹하는 나물이다. 생김새만 고우랴. 비타민, 칼슘 등 몸에 좋은 건 다 품고 있다. 누군가는 봄을 마중하기에 봄동만 한 것이 없다고 치켜세운다. 납작해서 ‘떡배추’라고도 불리는 봄동은 전라도 진도 해남 완도 등지에서 초록에 싸인 노란 속살을 풀어헤치며 빠르게 봄기운을 퍼트리고 있다.
먹어 본 사람은 안다. 봄동이 얼마나 고소하고 달곰하고 향기로운지. 된장 풀어 국으로 끓여 먹고, 생으로 쌈 싸 먹고, 새콤달콤한 양념에 무쳐 먹고, 밀가루를 얇게 묻혀 전으로도 부쳐 먹고…. 어떻게 먹든 입 안 가득 봄이 톡톡 터진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오장육부에 활기를 불어넣기 충분한 채소다.
봄동은 간간해야 제맛이 난다. 간간하다는 입맛이 당기게 약간 짠맛을 뜻한다. 기분 좋을 정도의 짠맛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더 있다. 짭짤하다, 짭짜래하다, 짭짜름하다, 짭조름하다…. 이보다 조금 더 짠 듯하지만 입맛에 맞을 땐 간간짭짤하다고 해도 좋다.
음식이 맛없이 짤 땐 ‘간간하다’에서 모음만 바꾼 ‘건건하다’라고 하면 된다. ‘찝찌레하다’, ‘찝찌름하다’, ‘짐짐하다’ 역시 맛은 없는데 조금 짤 때 쓸 수 있다. 맛없는 표현들은 글자도, 소리도 맛이 없게 느껴진다. 말맛이 독특해 시골말 같지만 모두 표준어다. 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싱거울 땐 ‘밍밍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진진하다’는 입에 착착 달라붙을 정도로 아주 맛있을 때 어울린다. 맛에도 서열이 있다. 건건하다→간간하다→진진하다. 이 순서를 알아두면 밥상에서 맛 표현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게다.
봄의 들녘과 산 길섶은 언제나 푸지다. 햇살 한 자락과 바람 한줄기에 쑥 냉이 달래 등 나물이 쑥쑥 자라 밥상을 가득 채운다. 봄기운에 구전민요 ‘나물타령’이 절로 나온다. “한푼 두푼 돈나물/ 매끈매끈 기름나물/ 어영 꾸부렁 활나물/ 동동 말아 고비나물/ 줄까 말까 달래나물/ 칭칭 감아 감돌레/ 집어 뜯어 꽃다지/ 쑥쑥 뽑아 나생이/ 사흘 굶어 말랭이/ 안주나보게 도라지/ 시집살이 씀바귀/ 입 맞추어 쪽나물/ 잔칫집에 취나물(하략)”
봄+동(冬)’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었을까. 치우치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일 게다. 계절을 두부 자르듯 한순간에 나눌 순 없는 법. 눈 속에 파묻힌 봄동을 뽑아 눈을 탈탈 털어 내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봄 향기가 폴폴 난다.
지은이: 노경아(한국일보 교열부장)
출 처 : 한국일보 2024, 03.7
화조도 사진: 연합뉴스 박지호
<화조도 花鳥圖>
- 매화 꿀 따는 동박새-
그저 보기만 해도
눈 환해지고
가슴 부푸는
화조도
매화 꿀 따는 동박새라니
매화가지 튕기며
꽃술에 입맞추는 동박새
순간을 영원으로 넘기고
마음을 그려내는
봄날의 시선(詩仙)
매화가지 끌어안은 동박새
꿀 묻은 부리에서
매화향 피어나다
봄내음
둥글게 퍼져나가다.
( 유정독서모임은 2024년 3월20일 14:00, 춘천 실레마을(구 신남)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주에는 김유정의 소설작품 <봄과 따라지>를 함께 읽으며 작품에 대한 감상과 비평적 토론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은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3월 20일, 실레마을 김유정역,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2024. 3.17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