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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각기 본향으로
전투 직전에 아합이 꾀를 냈다. 여호사밧은 그대로 왕복을 입고, 그러니까 왕이 입는 갑옷을 걸치고 적과 싸우고, 자신은 장교급으로 위장을 한 거다. 순진한 여호사밧은 그대로 따른다. 시리아 군대의 과녁이 된 여호사밧은 놀라 기겁하며 소릴 지르며 포위를 뚫고 나갔다. 빗발치는 화살 하나가 왕의 갑옷 사이를 비집고 가슴에 꽂혔다. 살려고 도망치려 해도 격렬한 전투라 빠져나오지 못하고 싸우다가 죽었다. 예언대로 그의 갑옷에 묻는 피를 개가 핥았다.
쫄보는 쫄보다. 사내 대장부답게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못하고, 이전에는 이세벨 뒤에, 이번에는 여호사밧 뒤에 숨었다.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가는 꼼수쟁이라 이번 타깃이 자기임을 잘 아는 거다. 피하자고 피한 길이 황천길이 되었다.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지도 않고, 후방에서 작전 명령을 하달하기보다 진의 한 가운데쯤 자리 잡고 사방을 방패막이 삼아 요리 피하고, 저리 피하며 애꿎은 군사들만 죽어 나갔지 싶다.
내가 배우라면 가슴에 꽂힌 화살도 뽑지 못하고 피 흘리며 마차 주변에 몰려든 적과 싸우는 아합을 어떻게 연기했을까? 막판에 회개하였듯, 죽는 순간만은 최선 다해 적의 목을 베는 영웅적 모습일까? 여전히 살려고 마차에 탄 호위병을 화살받이 삼아 숨었을까? 내 창밖의 나 같은 아합, 개 같은, 개만도 못한 아합에 걸맞게 제 상처와 피를 핥아주는 개들의 송별을 받으며 본향으로 갔다. 참 안 됐다와 참 잘 됐다 사이에서는 나는 어디로 갈까? (왕상 22:29-40)
10/27
슬픈 표정
이세벨의 음모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처리되었다. 함정에 빠진 나봇은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합은 그 땅을 차지했다. 하나님도 가만있지 않았다. 엘리야를 파송하였다. 아합이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전달했다. 그제서야 겁을 먹은 걸까, 제정신을 차린 걸까, 아무튼, 그는 하나님도 인정하리만치 회개했고, 우리의 인정 많은 하나님은 아합을 긍휼히 여기사 심판을 연기하신다.
난 이세벨의 말을 듣는 아합의 표정이 어땠을까? 를 계속 생각했다. 떼쓰던 아이가 마침내 손에 집어넣을 때처럼 손뼉 치며 기뻐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을까? 그래도 체통이 있어서 헛기침하는 척 고개를 돌리고 웃고, 짐짓 슬픈 척하며 애도의 말을 건네며, 천천히 일어났을까? 그건 분명하다. 그의 발걸음은 갈수록 빨라졌고, 가뿐해졌다는 것 말이다. 돈은 아픈 사람도 낫게 하고 원기를 회복케 하는 초능력이 있다. 특히 아합 같은 인간에게는 말이다.
엘리야 만난 그의 표정은 똥 밟은 사람일 듯. 허나, 미구에 닥칠 죽음 소식에 벌벌 떤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진실해진다. 아합에게서 내가 보여 기분 나빴는데, 인제 보니 나보다 훨씬 낫다. 죽을 뻔한 순간 지나고 아침에 눈 뜨며 드리던 ‘선물 같은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라는 기도가 달포를 넘지 못하고, 가뭇없이 사라졌다. 하나님이 이토록 악한 인간을 그토록 쉽게 용서할만하다. 그의 생명 연장되었듯, 내 생명도 연장되도록 해야겠다. (왕상 21:11-29)
10/26
침대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우리의 쪼잔한 아합왕이 삐졌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 탐난다. 왕궁과 가까워 정원으로 가꾸면 딱이다.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 돈 주고 사겠다고. 근데, 안 팔겠단다. 성군은 아니라서, 하긴 성군은 이런 제안을 안 하지, 아니다, 성군도 갖고 싶어 하겠다. 여튼, 허허 웃으며 ‘굿 잡’ 한 번 날리고 말 텐데, 폭군은 털어서 먼지 날 때까지, 아니 재 뿌리고, 감빵에 처넣을 텐데, 이리도 못 하고 저리도 못 하고 끙끙 돌아누웠다. 으이구, 찌지리 궁상. 한심한 것.
역시 우리의 이세벨답다. 그래야지. 그래야 최고의 악녀지. 아니다. 그건 왕으로서 당연한 거지. 그걸 하고 싶어서 왕이 된 건데, 그걸 하라고 왕이 있는 거지. 헌데, 조상님이 어쩌고저쩌고, 토라의 가르침이 뭔 말이냐.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무튼, 이걸 못하면 내 복장 터져서 미친다. 나봇 상판대기를 보니 엘리야가 아른거려 기분 더럽다. 왕권의 지엄함도 보이고, 엘리야 못 죽인 분풀이 해야겠다. 으이구, 살러 이 땅에 왔나, 죽이러 이 땅에 왔나. 못된 것.
아아, 우리의 불쌍한 나봇~ 조상님들은 여호수아 시절 제비 뽑을 때, 그 많고 많은 땅 중에서 하필이면 여기를 골라 후손을 궁지에 몰아넣은 건지. 하필이면 오므리가 도읍과 왕궁을 예 건축해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팔 땅도 아니라서, 불로소득 하나 얻은 것 없는데, 뭐랄까 착찹하다. 무튼, 성경이 말하는 대로, 부모님이 가르친 대로, 내 믿는 바의 확신 따라 살았으니, 죽어도 믿음의 조상님들과 울 하나님 뵐 면목은 있겄다. 잘 살았다. (왕상 21:1-10)
10/25
마음이 상하여 화를 내며
아합이 벤하닷을 그대로 돌려준 뒤, 하나님은 신속히 움직인다. 명령받은 예언자는 동료에게 가서 심하게 자기를 패달라고 한다. 거절한 그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다른 벗이 세게 때려눕혀 심한 상처를 입는다. 그 꼴로 왕을 우연히 만난 듯 감시하라는 포로를 놓친 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처결을 어찌할 것인지를 묻는다. 당연히 그에 합당한 벌이다. 그제야 그게 바로 너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고, 우리의 쪼잔한 아합은 성질부리며 돌아선다.
예언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침을 질질 흘리는 광인 연기로 아카데미 주연상감인 다윗처럼 못해도, 심하게 다친 흉내 내고, 분장해도 될 텐데, 애먼 동료 잡아가며, 자신을 병자로 만들어야 하나? 신의 명령은 절대적이라 순종 vs. 불순종이지 합리 vs. 비합리가 아니다. 그리고 예언은 자기 목숨을 내기판에 판돈으로 거는 일이다. 누군가 노래했다. 모든 걸기에 외로운 거라고. 한 다리만 걸치니까 예언자가 과격해 보이는 것이다. 인생 참 대충 산다.
아합은 또 어떤가. 벤하닷을 멸망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도 돈 되는 쪽으로 내 맘대로 처리했다. 그 옛날 아간은 전리품을 숨겼다가 아골 골짜기에 묻혔다. 사울 왕은 아각을 살려주었다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이제 화내며 돌아선 아합 차례다.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 아합아, 모두가 걸어가는 그 길이 어찌 사울이며 아간이랴.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오. 인생 참 마음먹기일세. (왕상 20:35-43)
10/24
놓아주었다
한 번의 승리는 한 번 승리다.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군대를 움직이는 철에 적들은 재침한다. 적은 이스라엘의 신이 산의 신이라서 진 것이니 평지에서 보병과 기병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쓸어버리는 전략을 세운다. 엄청난 전력 차이임에도 수십만의 적군이 죽고, 도망간 성도 허물어뜨리니 남은 자가 초라하다. 패전국과 패장답게 패배를 인정하고 목숨을 구걸하니 아합은 살려주는 대신에 부왕 때 빼앗겼던 성을 되찾고 무역을 통한 실리를 챙긴다.
벤하닷은 지난 전쟁의 패인을 잘못 분석했다. 잘한 점부터 나열하자면, 소국의 왕들과의 연합이라서 손발이 맞지 않았던 반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장군들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른 것은 좋은 선택이다. 무기와 수적 우위를 기반으로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전략은 교과서적이다. 아합의 탐욕을 이용해서 위기 탈출하는 것도 묘수다. 허나, 하나님을 잘 몰랐다. 이 전쟁은 신들의 전쟁인데, 야웨를 언덕배기 신으로 축소했으니 울 하나님 킹 받았다. 너희들 다 죽었어.~
아합도 승전 요인을 잘못 분석했다. 여기도 잘한 점을 읊으면, 철저히 준비했다. 전장의 지형지물이 손금 보듯 훤하다. 물러설 곳도 없다. 지면 나라 망한다. 그리고 전쟁사에는 소수가 다수를 이긴 예가 수두룩하다. 우리의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그렇다. 허나, 아합은 절대 고정 상수인 하나님을 몰랐다. 함께 하면 이기고, 떠나면 진다. 그분이 차려 준 밥상에 한 술만 떴으니, 밥상 걷어찬 격이다. 울 하나님, 속상하다. 너희들 밥상 빼~ (왕상 20:22-34)
10/23
술에 취해
아합과 벤하닷,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대전이 시작되었다. 사마리아를 공략할 충분한 군사와 군량을 확보한 벤하닷은 아합이 거절할 만한 요구를 제시한다. 국가의 재물과 왕실의 여성들이다. 그 요구를 왕은 물론이고 신하와 원로들은 굴욕적인 항복 조건이라며 결사 항전을 불태운다. 그때 한 예언자가 왕이 총지휘하여 적진을 칼날같이 돌파하라는 전략을 제시하고, 그대로 시행하여 승리하였다.
벤하닷의 패배는 어이없지만 예견된 일이다. 32개의 연합국을 결성한 벤하닷은 전력이 압도적이다. 반면, 북이스라엘은 삼년 기근으로 피폐하고, 상대적으로 약소국이다. 전력이 뒤처진다. 그런데 아합은 소수 정예병을 이끌고 적진 깊숙이 밀어붙인다. 송곳처럼 한 곳을 집요하게 치고 들어가자 대나무 쪼개지듯이 갈라지고, 바람에 나는 겨처럼 흩어진다. 오다 노부나가의 오케하자마 전투의 승리를 연상시킨다. 적은 군사로 큰 군사를 이겼다. 신난다.
젊은 친구들이 선봉에 서고, 총지휘를 왕에게 맡긴 것도 탁월한 전략이다. 청년 병사들은 힘과 깡이 넘치고, 아합은 능구렁이 같은 약은 지혜가 있다. 게다가 왕이 후방에 남지 않고 직접 참전하니 용사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밖에. 이런데도 벤하닷은 대낮에 술 처먹고 있다(12, 16). 왕이 이럴진대 기강이 해이하고, 사기도 떨어지고, 상하 간 손발이 안 맞고, 재빠른 대처가 어렵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하나, 왕이 대낮부터 술 먹으면 망한다. 골로 간다. (왕상 20:1-21)
10/21
열정적으로
열정이라면 뉘게도 뒤지지 않을 엘리야가 지쳤다. 자기 제사장 수백 명이 죽었으니 죽이겠다는 겁박에 엘리야는 인적 없는 광야로 도망친다. 천사가 먹여주는 맛난 빵과 단물을 마시고 먹고 자기를 몇 번. 엘리야는 하나님이 무슨 말만 해도 자신의 열정을 두 번(10, 14)이나 내세우며 자기 신세타령이다. 그분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천지를 진동하는 바람과 지진과 불길이 아닌 부드럽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우리 하나님, 참 착하다.
겁 없던 엘리야가 이리도 낙담하고 탈진한 걸까? 위대한 영적 전투의 승리에도 별 변화가 없고, 자신만 죽을 처지에 놓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목숨을 걸었던 일들이 손바닥 안의 모래와 물처럼 빠져나갔으니 그럴 법도 하다. 천지 사방에 동지는 간데없고 그만 홀로 쓸쓸히 남았으니, 그럴밖에. 이럴 때는 장사 없다. 미친 듯이 일한 그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이제 좀 쉬렴. 괜찮아. 너 없어도, 아니 너가 없어야 일이 잘 돌아간단다. 우리 엘리야, 푹 쉬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하나님을 열광적으로 섬기는, 광란의 예배를 드리는 바알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엘리야의 열심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과 지축을 흔드는 지진과 세상을 태우는 불길에도 하나님은 없다. 낮고 부드러운 말에 하나님은 계셨다. 나 살자고, 남 살리자고 죽을 듯이, 죽일 듯이 일했던 모든 것이 나도 죽고, 남도 죽였고, 하나님도 없다. 이젠 떠날 때다. 새 사람이 새 일을. 안녕, 우리 엘리야. (왕상 19:1-14)
10/20
엘리야가 말하였다
광란에 가까운 바알 제사장들의 축문이 실패한 후, 엘리야가 등장한다. 천천히 여유롭게 파괴된 제단을 다시 쌓는다. 둘레에 도랑을 파고, 물로 채운다. 소를 각 떠서 물에 축축하게 젖은 나뭇단 위에 가지런히 놓는다. 조상들의 하나님, 참 하나님께 역사적 신앙에 따른 격조 높은 고백과 기도를 드린다. 순식간에 하나님은 응답하고 모든 것을 불로 태운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승리했던 기손 강가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모두 죽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엘리야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에 있어서는 바알의 방식을 추종하고 있지 않을까? 찬양을 할 때도, 기도를 드릴 때도, 설교할 때도,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 등은 바알 제사장들이 하던 짓의 판박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그분의 목소리를 가뿐히 잠재울 정도로 우리가 대신 말하고, 떠들고, 미친 듯이 춤춘다. 하나님의 말씀이 안 들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 시끄럽다.
엘리야는 열정적 신앙의 소유자이다. 홀로 850명과 대결할 만큼 대담무쌍하다. 허나, 그의 예배 행위는 조용하다. 제단 수축도, 불 내려달라는 기도도, 무릎 사이로 고갤 넣고 소리 없는 기도를 할 때도, 강단 있는 낮은 목소리다. 물처럼, 공기처럼, 호흡처럼 주와 동행하니 굳이 소릴 지를 이유가 없다. 지껄이던 입 닥치고 닫았던 귀를 열어 불이 타는 소리, 비가 오는 소리 들어야겠다. 내 목소리 작아야 주의 음성 크게 들리니까. (왕상 18:30-46)
모두 죽였다.
광기 어린 광란의 카니발이다. 고래고래 소릴 지르고, 몇 시간째 온몸을 뒤흔들며 노래한다. 지칠 만도 한데, 하다 하다 안 되니 제 몸에 칼을 댄다. 여기저기 찔러대고, 죽죽 그어댄다. 그렇게 피를 흘려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들은 그리 가르쳤다. 반면, 엘리야의 예배는 고요하다. 말과 말의 향연이다. 참 하나님은 응답하고, 거짓이 들통난 850명의 이교 제사장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가 승리했던 기손 강가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모두 죽인다.
왜 죽였을까?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백성들이 주께로 돌아왔다. 이번 승리는 두고두고 모든 이스라엘이 노래할 역사적 사건이고 회자할 이야기이다. 그들을 죽인 것은 신명기의 가르침이자, 이세벨이 죽인 예언자에 대한 보복 행위일 수도, 그들이 살아남아 저항할 싹을 원천 제거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보복은 또 다른 피를 부르는 법. 자기 몸에 상처를 낸 바알 제사장보다 타인을 학살한 엘리야의 신앙이 더 무섭다. 왜 죽였을까? 왜 죽여?
순수한 진리를 향한 열정은 죽음을 부르곤 한다. 그 옛날 미디안에서 비느하스가 그랬다. 지금도 진리의 이름으로 타자 살해가 멈추지 않는다. 내 밖의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진리에 이르지 않는다. 내 안의 불순한 악을 정화하고, 자기 부인과 자기 살해를 거쳐서 타인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의 길인데, 사람 죽이러 다메섹 가던 바울이 만난 십자가의 예수인데도, 예수 없는 엘리야, 내가 만든 허수아비 엘리야를 추앙한다. 엘리야가 다시 오면, 누구를 죽일까? (왕상 18:30-46)
10/19
괴롭히는 자
드디어 세기의 대결이 벌어진다. 엘리야 vs. 아합. 서로 누가 괴롭히는 자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엘리야는 방향을 바꾸어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칠 것이냐고 백성을 꾸짖는다. 엘리야 vs. 백성. 이교 사제 850명과 한 판 붙자고 제안한다. 누가 참된 하나님인지, 누가 비를 부르는지를 증거로 결정하자고. 하나님 vs. 바알 또는 엘리야 vs. 850. 쪽수가 많은 쪽이 먼저 시작한다. 그리 용쓰고 난리를 치고, 자해 공갈단 짓을 해도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바알과 아세라 여신의 제사장들만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제 몸을 괴롭힌 것은 아니다. 아합도 뒤지지 않는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자신의 ‘주’이자 ‘예언자’로 공경해 마지않았지만, 아합에게 그는 그저 비판질만 해대는 고약한 종교인 나부랭이다. 정의니, 자유니 뭐라 뭐라 떠들어도 입만 나불거리는 비현실적 존재들이다. 그놈 말대로 비가 오지 않아 땅이 타들어 가니 온 땅과 만백성을 갈구는 망측한 요물이 따로 없다. 그러니 엘리야 저놈이 만악의 근원일세.
아무리 봐도 아합의 말이 맞지 싶다. 하나님이 아합을 들볶고 있다. 신이면 인간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면 그만이지, 우리가 바치는 제물 먹고 복 빌어주면 그만이지, 그딴 것은 안중에도 없다. 출애굽의 하나님만 섬기라, 애굽의 체제를 닮지 마라, 약자를 짓밟지 말고 사랑하라, 는 시답지 않은 소리나 해대니, 하루도 맘 편히 호사를 누릴 수 없네. 그러니 하나님이 아합을 괴롭히는 것이 맞네, 맞아. 고생 많다. 한 대 더 맞자. (왕상 18:16-29)
10/18
오바댜를 찾아서
삼 년 기근이면 종자로 쓸 씨앗마저 사라졌겠다. 우리 하나님, 당신 백성이 가엽다. 더는 못 참고 엘리야 불러 비 소식을 전한다. 아합도 다급한지라 수원지 찾아 전국 순행에 나선다. 대동한 오바댜는 예언자들이 학살될 무렵 백여 명을 몰래 빼내 지금껏 먹여 살린다. 그 의인이 엘리야를 만났다. 여기 그대로 있을 테니 왕을 데려오라는 말을 전하는 걸 두려워한다. 신출귀몰한 예언자라, 허투루 전했다가 목 날아갈 판이다. 엘리야의 확답을 재차 확인한다.
아합에 대한 선입견이 약간 허물어졌다. 이세벨이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무참히 살육할 때, 그녀 뒤에 숨어 꼬붕 노릇하는 무책임한 악인으로만 알았다. 그가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게다가 말과 노새를 걱정한다. 예언자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 없는 악인을 부각하는 서사일까? 그런 악인도 타인의 안위와 생명에 관심 있다는 걸까? 기근으로부터 책임지기 싫어 쇼하는 걸까? 왕으로서 책임지는 행동일까? 그런 것도 안 하는 축에 비하면 좀 낫다.
오바댜에게서 구약의 여러 인물이 포개어진다. 권력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제국의 신민을 살려낸 요셉, 조국과 성전을 박살 낸 왕과 제국의 충신인 다니엘이다. 오바야는 악한 정치의 폐해를 최소화하고, 착한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닮아 있다. 체제를 떠받치면서도 체제 내 망명자라는 이중국적자들이다. 좁고 협착한 길을 걷는 그를 욕하기는 쉬워도 그처럼 살기는 어렵다. 엘리야는 아합을 찾고, 아합은 물을 찾고, 나는 오바댜를 찾는다. (왕상 18:1-15)
10/17
사르밧 과부
긴 가뭄인지라 그릿 시냇가도 바짝 말랐다. 주님은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라 한다. 그곳에서 만난 여인에게 물은 얻어 마셨지만, 허기를 달랠 빵은 없다. 독생자와 먹고 죽을 마지막 한 끼 식사 거리밖에 없다. 무슨 배짱인지 이건 믿음인지 그걸 달라고 한다. 이후, 여인의 집에는 먹고 마실 것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독한 아들이 끝내 앓다가 죽자 상심한 여인은 예언자 품에 안겨 울며 통곡한다. 엘리야는 온 몸을 던져 기도하고 죽은 아이를 살려낸다.
나는 엘리야는 아닌데, 그의 능력에 비하면 언감생심인데도, 그가 베푼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내게 사르밧 과부를 많이 붙여 주셨다. 가족과 교우는 물론이고 로고스서원 식구들의 존재, 무엇보다도 ‘위기 청소년을 위한 희망의 인문학’을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다. 매달 각자만의 밀가루 한 움큼, 기름 몇 방울을 정성스레 보내주신다. 그것으로 위기 청소년을 책 읽히고, 글 쓰게 하고, 영화도 보고, 서점도 들르고 저자와의 만남도 한다.
오늘 말씀을 보니 더 부끄럽고 미안하다. 엘리야를 만난 과부는 먹거리가 떨어지지 않고, 아픈 아들도 낫는데, 나는 해 줄 게 없다. 1~2주일에 한 번, 문자로 소식을 전하는 것뿐이다. 후원하는 보람을 그렇게라도 돌려주고 싶다. 한결 같이 한길 가는 우보천리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으로 신뢰를 주고 싶다. 엘리야에 비하면 초라해도, 후원자들의 가정에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 않기를, 아픈 이들이 없기를, 행여 있다면 속히 낫기를 마음 모아 기도를 바친다. (왕상 17:8-24)
10/16
까마귀
강력한 독재자요, 절대적 악인이요, 독실한 바알 신앙의 사람인 아합왕에게 제대로 대들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내 말 한마디에 기근이 오고, 다시 입 떼기 전에는 절대 해소되지 않을 거라고, 치수(治水)의 책임자인 왕인 너는 벌을 받을 거라고 당당히 외쳤다. 그의 위협을 피해 달아나 깊은 골짜기, 까마귀 떼만 찾아드는 외진 곳에 몸을 숨겼다. 까마귀가 어디서 구해서 물어 나르는지 빵과 고기 먹고 살았다.
무모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대담함이 맞겠다. 언제부턴가 세속에 때가 절어 너무 선하지도 너무 악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곳에서 남들 욕먹지 않고, 얼마간 착하게, 가늘게 살고 싶어 하는 내게 엘리야는 무섭다. 고독의 시간을 오롯이 받아내며 모진 외로움에 몸을 웅크리고 눈물 한 방울 툭, 그가 안쓰럽고 가엽다. 이슬 한 방울의 타협 없이 외로이 고군분투하는 그가 멋있고 박수를 보내지만, 나를 굳이 그 자리에 밀어 넣고 싶지 않은 비겁함이겠다.
까마귀를 괴롭히며 살고 싶지도 않다. ‘까마귀의 도움을 받았어.’ ‘그분은 내게 까마귀야.’ 목사들의 시시껄렁한 농담이자 진담이다. 내 손으로 일해 먹고 살아야겠다고, 죽어라 공부하고 일하다가 죽을 뻔한 내게, 엘리야처럼 정의롭기는커녕, 그처럼 처절한 고독하게 묵묵히 견뎌내기는커녕, 하릴없이 시간 때우며, 누군가에게 까마귀 된 적 없으면서도, 입 벌리고 하늘 나는 까마귀 쳐다보는 이들도 징그럽다. 그러다 날다 지친 까마귀 똥 떨어질라. (왕상 17:1-7)
우와, 엘리야다!
아합의 폭정이 나날이 악화하고, 배교의 시간이 길어지는 어느 시점에 엘리야가 나타났다. 아합에게 강력한 하나님의 경고를 날린다. 비가 오지 않아 몇 년 동안 가뭄이 있을 것이라고. 그런 연후에 척박한 자연환경인 곳으로 피신해서 되레 자연의 도움을 받으며 연명한다. 까마귀가 물어 나르는 빵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며 버텼다. 이스라엘 전 지역에 미친 가뭄으로 그곳도 결국 떠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했다.
느닷없는 등장이다. 엘리야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어떤 성향인지에 관한 어떤 설명 없이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엄혹하고 암흑의 시대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아합왕을 최대로 괴롭히는, 아니 폭군에게 진리와 정의를 외치는 불후의 사자가 되었다. 자신을 아테네라는 살찌고 노둔한 말을 움직이게 하는 등에를 자처한 바 있고, 상대의 말문을 막고 멍청한 머리를 일깨우는 전기가오리 같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영락없이 엘리야다.
위대한 영웅의 서사는 시대의 징후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와 초한지와 삼국지의 영웅들, 일본의 전국 시대의 위대한 다이묘들, 조선의 임진년 전쟁으로 이순신을 비롯한 불멸의 영웅들이 별처럼 나타나고 사라졌다. 엘리야 홀로 떨쳐 일어나야 할 만큼, 사람들은 아합 체제에 깊이 순응했다. 사람이 없어서 까마귀가 나섰다. 독고다이로 일하게 해서 엘리야에게 미안하지만, 그가 있어 참 좋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엘리야! (왕상 17:1-7)
10/15
악의 정점 오므리
여로보암의 왕조를 단 2대에 끝장내고 새로이 시작한 바아사도 그 운명을 피해 가지 못하고 아들 대에 끝났다. 그러나 시므리는 7일 천하로 무대에서 내려오고, 오므리가 권력을 차지한다. 그래도 오래 지속된 오므리 왕조가 창건되었다. 오므리의 사후, 왕이 된 아합은 아내 이세벨과 함께 여로보암을 능가하리만치 악하고 악랄하였고,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종교 혼합주의는 극에 달했고,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와중에 예언(수 6:26)된 대로 장자를 잃었다.
가관이다. 혼돈 그 자체다.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가 천지에 진동한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군벌들의 각축전으로 죽어 나가는 것은 백성들이고 특히 노약자와 여성, 아이들이다. 중국의 춘추전국과 일본의 전국 시대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어느 놈이 더 나쁜가,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듯이 보인다. 악의 끝판왕은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이고, 악인의 세계를 제패하였다.
악의 특징은 학습 없이 저절로 배우며, 악해지는 속도가 가파르다는 점이다. 마침내 악이 악인을 집어삼킨다. 악이 악인을 심판한다. 악을 악의 방법으로 이겼던 자들은 바로 그것에 의해 제거된다. 여로보암, 바아사, 시므리가 그랬다. 다음 차례는 아합이다. 증좌가 아합의 장자의 죽음이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했다. 악으로 일어선 자는 악으로 멸망한다. 자식부터 악의 제단에 바친다. 그것이 악의 필연적 법칙이요, 악인의 절대적 미래다. (왕상 16:15-34)
10/14
바아사와 엘라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들고 북왕국을 건설한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나답의 왕조를 끝낸 것은 바아사다. 그의 24년 치세 중에 예언자를 통해 경고를 듣지만, 그는 안하무인이다. 아들이 왕위를 이었지만, 겨우 2년이었고, 술에 취한 그는 아버지일 수도 있고, 그일 수도 있는데 군부의 중책을 맡긴 시므리 장군의 칼에 목이 날아갔다. 이 모든 것은 다윗이 아니라 여로보암의 길을 반복했고, 여로보암의 운명의 전철을 따랐다.
역사는 반복한다던가. 여로보암과 나답의 길을 바아사와 엘라가 걸었다. 각각 왕조가 단명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권력이 이양한 지 얼마 못 되어 피바람이 불었다. 그 희생은 아들이다. 나답도 2년, 엘라도 2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고, 죽어야 했다. 삼족이 뭔가, 구족을 멸했을 터.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입었다. 반역한 자는 또 다른 반역자에 의해 철저하게 도륙당했다는 점도 같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참 무상타.
역사보다 권력이 더 강한가 보다. 반정이라는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도 결국은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자들이 권력을 탐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감행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아마도 그들 생각은 이랬지 싶다. ‘저놈도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나라고 못 할쏘냐.’ 그리고 ‘나는 그들과 달라. 나는 방비를 할 수 있어.’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들도 너랑 똑같은 생각을 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거든. 역사는 반복되거든. (왕상 15:33-16:14)
10/13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
한참을 망설였다. 본문을 몇 번 읽으면서도 여기서 주인공이 여로보암일까, 나답일까, 바아사일까? 순서대로 말하면 여로보암의 북왕국을 건국하면서 처음부터 설계를 잘못하는 바람에 그 자신부터 아들, 모든 백성까지도 죄악의 소용돌이 속으로 처넣었다. 그 결과 아들은 고작 2년 왕 노릇 하고 처참하게 죽었고, 주변 일가친척 모두 학살당했다. ‘숨 쉬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멸시켰다’는 구절을 읽을 때, 소름이 돋았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 나답 이야기다. 그는 아히야 예언자의 무서운 경고를 알고 있었을까? 행여 그런 불길한 저주가 실현될까 두려웠을까? 알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무시했을까? 알았든 몰랐든, 두려워했던 아니 그랬든, 결과는 똑같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미운 짓, 죽을 짓만 골라서 했다. 결국 자기 의지이고 선택이다. 귀로 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고, 눈으로 본 대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다가 골로 간다. 자기 숨도 끊고 남의 숨도 끊는다.
그리스 비극은 필연적으로 결정된 운명을 비켜서려고 몸부림칠수록 운명의 나락에 빠져드는 비극적 영웅의 이야기라면, 성경의 비참한 인물들은 구원의 길로 이끄는 강력한 신의 의지에 반하여 제 욕망에 충성하려는 완강한 의지를 고수하다가 끝내 파멸한다. 나답이 그랬다. 안 망할 길을 알면서도 즐겁게, 신나게, 열심히 망하려고 용쓴다. 나답 부류의 인간의 모토는 이것이다. 죄짓고, 죄짓게 하고! 몹쓸 것. (왕상 15:25-32)
10/12
아사가 왕이 되어
아사왕은 일평생 한 마음으로 정치를 펼친 선한 왕이다.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내치와 외치. 내부 개혁은 주로 종교개혁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버지 아비야의 때 이른 죽음으로 아마도 섭정이었을 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기득권층을 탄핵하는 데 성공한다. 얼마나 역겨웠던지 가증스럽다고 한 남창과 우상도 제거한다. 허나, 산당 철폐는 완성하지 못했다. 산당을 둘러싼 지역 토호들의 완고한 동맹을 격파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북왕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은 왕국의 존망이 걸린 문제다. 라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1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그곳에 요새가 건설된다면 결정적 타격을 입을 터다. 성전에 비축해 두었던 은금으로 북이스라엘의 동맹이었던 아람을 포섭해서 되레 적들의 배후를 공략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결국 바아사는 철수하고 안전을 확보한다. 건설 중단된 라마의 돌과 목재를 몇몇 요충지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였다.
아사는 남왕국에서 몇 안 되는 현군이다. 이후로는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있을 뿐이다. 시종여일하게 악한 폭군이 많았는가 하면, 시작은 괜찮았으나 나중은 자멸한 왕들도 몇 있다. 41년 재위 동안 한계가 있었지만 한결같았다. 나보다 재능이 특출난 사람 보고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가 아닌 어떤 것을 탐내다가 나를 잃지 말고, 많든 적든 받은 달란트 그대로, 처음 품은 마음 그대로,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한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왕상 15:9-24)
10/11
넌 뭐냐 아비야
아비야는 남왕국으로는 2대 왕이고, 사울부터 치자면 5대 왕, 다윗 왕조로는 네 번째 왕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3년이고, 하나님과 토라에 기반한 정치에 충성했던 다윗과 달리 우상과 욕망의 정치에 충실한 르호보암, 또는 후기 솔로몬의 길을 따랐다. 분단 상황이라 남북의 교전이 잦았고, 적국을 무너뜨리는 일에 골몰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일을 삼 년여 동안 하다가 죽었다. 신체적 허약함 때문인지, 과도한 국정에 심신이 허물어져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사실을 보도하는 이 기사는 두 가지 점이 눈에 띈다. 하나는 분량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고작 여덟 절이다. 앞의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아들인 아사에 비하면 현격히 차이가 난다. 적을 게 없다는 뜻이렷다. 쓸 거리, 말할 거리가, 기억할 거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삶이 텅 비었다는 증좌다. 왕좌에 오른 자로서 그다지 기억할 가치가 별로 없는 삶을 살았다. 나는 내 삶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은 내 삶에 대해서 할 말이 있을까?
다른 하나는 정작 본인 보다는 타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 1-2절은 여로보암과 어머니 이름이 나오고, 다음 세 절은 다윗 이야기가 차지한다. 마지막 세 구절도 앞의 르호보암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복붙이다. 자기 삶에 주체적이지 못했고, 자율적이고 독립적 존재가 아니었다.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고, 아버지가 지은 죄에 휘둘리며 살았다. 넌 뭐냐? 아비야야, 아비야야, 너 답게 산 거냐, 너 없이 산 거냐? (왕상 15:1-8)
10/10
마흔한 살
북왕국의 여로보암 이야기가 끝난 후 남왕국의 르호보암에 관한 내용이다. 마흔한 살에 왕위에 올라 재위 기간은 17년이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숭배하다 못해 신전 남창까지 있을 정도라는 것, 이집트의 침략으로 성전과 왕궁 보물이 탈탈 털리고, 금방패가 놋방패로 바뀌었다는 것, 남과 북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그리고 죽고 아들이 뒤를 이었다는 것으로 끝난다.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다. 북왕국이 야웨 신앙을 비틀어 왜곡했다면, 즉, 황금 송아지를 섬기고, 제사장을 남발한 것 등이다. 반면, 남왕국은 야웨 신앙에 이질적인 것을 주입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긴개긴이다. 방귀 뀐 놈이냐, 똥 싼 놈이냐 차이다. 따지고 보면 정통성이야 남왕국의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예루살렘’에서 통치했으니까. 아니, 그렇기에 앞으로는 근엄한 척 정통성을 운운하지만, 뒤로는 호박씨 까는 거, 더 나쁘다.
또 하나는 어머니다. 르호보암 왕조 실록은 시작할 때도 마칠 때도 암몬 여자인 어머니가 있다. 길지 않은 글에 왜 두 번? 마흔한 살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왕들은 대개 재위 기간 외에 등극한 나이는 적지 않는다. 모든 일이 모후의 영향이며, 나이를 자실 만큼 먹은 양반이 엄마 젖도 못 뗐다고 돌려까기하는 건가? 철딱서니 없이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것들 말만 쫓다가 조국을 분단하더니, 이제는 엄마 뒤에 숨어 무슨 짓거리냐, 이게. (왕상 14:21-31)
10/9
자식 잡아먹는 여로보암
자식이 병들어 누웠다. ‘아무리 악해도 자식에게는 좋은 아비’가 되고 싶다. 그리고 자식이 아프면, 아비도 아프다. 몸져누운 상태를 보니 예사롭지 않다. 자칫하다가는 죽을 판이다. 내로라하는 어의도, 용한 의사도, 백약이 무횰세.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렇다고 아무나 왕이 되겠냐. 나를 왕이 되리라 예언하고, 실제로 떡하니 왕좌에 올려놓은 아히야 예언자라면, 살 방도가 아주 없지 않을 테다. 상상 불가의 길을 현실로 만든 분이니까.
직접 가자니 왕의 행차라 눈에 띄고, 다윗처럼 행하면 왕위가 장구하리라는 말이 목에 걸린다. 아내 더러 평민처럼 꾸미라 하고 약간의 복채를 들려 보냈다. 그는 노환으로 잘 보지 못한다. 그래도 영안은 열려 발걸음만으로 알아차리고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이 아들은 그나마 편하게 죽는다. 다른 내 집 식구들은 정육점 고기처럼 죽을 것이다. 내 왕국과 백성도 먼 나라로 끌려갈 것이다. 다 내 잘못이라 한다. 내 죄가 자식에게는 벌이 되었다.
위기 청소년들과 희망의 인문학을 한지 일곱 해가 지났다. 아이들 글을 보면, 여기가 작가의 산실이다 싶은 정도다. 아이들 삶을 보면, 저며 오는 아픔에 몸을 가누기 어렵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는 팔목을 칼로 긋는다. 엄마 찾아 동남아 찾아갔다가 모진 말 듣고 돌아온 아이는 사랑 찾아 헤매다 몸이 만신창이다. 허구한 날 맞고 자란 아이는 폭력으로 여기 와 있다. 여로보암은 편히 잠들었고, 자식들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왕상 14:1-20)
10/8
젊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북왕국으로 가라는 지령을 내렸다. 무허가 제단에서 예를 갖추는 새 왕에게 경고와 심판을 선언하라신다. 헌데, 조건이 이상타. 북왕국 땅에 들어서는 시간부터 물도, 밥도 먹지 말란다. 담대히 선포했고, 저항하는 왕의 손이 마비되었다. 기도드렸더니 나았다. 휴식과 선물도 단칼에 거절하고 돌아오는데 늙은 예언자의 호의에 속았다. 지쳐 쉬고 있는 이에게 천사의 말이라는 것과 물과 밥은 달달하다. 그러다가 사자에 물려 객사했다.
늙은 예언자가 조만간 내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사람은 얼마 전 내 모습의 실사화다. 그는 부름 받았으니 순종한다. 일국의 제왕이라도 겁 없이 외친다. 배곯고 피곤해도 한 길 간다. 나도 평생 그리 살 줄 알았다. 나의 첫 책, 「공격적 책읽기」에는 영적, 지적 거물을 향해 날 선 비판을 날렸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연재 당시 원고료도 없었고, 글이 실리고 책이 된다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 책을 가슴에 꼭 안고 행복해했다. 강사료는 안중에 없이 달려갔다.
우윳값 떨어지기도 하고, 학원과 과외는 언감생심. 세 끼 끼니 겨우 해결하는 가난은 서럽다.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목회가 가당치도 않다. 고난과 가난의 출구요 해방구이던 목회와 저술이 밥벌이로 전락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불충한 하나님의 사람처럼 주의 음성이 직접 느껴지지 않는다. 이따금 주님이 그리워 목맨다. 늙은 예언자처럼 나는 어제의 내게 위안을 건넨다. “아이고 내 형제여.” 이사야처럼 지금의 나를 통곡한다. “화로다 나여.” (왕상 13:20-34)
10/7
늙은 예언자
한 늙은 예언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자의로 북왕국의 우상 체제에 속하지 않았다. 살던 곳이 북쪽이라 그냥 그곳에 산다. 남쪽 출신의 예언자가 서슬 퍼런 왕을 향해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얼른 나귀 타고 쫓아가서 쉬던 예언자를 만나 제집으로 초청한다. 사양하는 그에게 천사의 말을 따라왔다는 거짓말을 둘러댄다. 그제야 남쪽 예언자도 순순히 일어선다. 마침 시장하고 고단했던 모양이다.
왜 그럴까?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은 나와 거리가 멀다. 그들의 공과를 읽으며 비판하기 편했다. 왜 두 예언자와는 자기 동일시가 잘 될까? 특히 늙은 예언자는 20년 후의 내 모습, 아니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아니, 아니, 거의 완성 직전의 내 모습이 아닐까? 한편으로 패기 넘치는 젊은 예언자를 만나고 싶은 아름다운 마음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얼마든지 거짓말로 호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노회하고 음흉한 예언자 말이다. 애먼 사람 하나 작살냈지만.
나이 들수록 덜 늙겠다고 젊은 후배들을 가까이한다. “독서 모임 하자, 내가 밥 살게,” 늙는 말이 길을 안다 했다. 내 딴에는 될성부른 싹이라 도우려는 거다. 너나 잘하세요. 여하튼, 경청과 공감은 어디 가고 어느새 나 혼자 떠든다. ‘읽은 책과 경험으로 보면 그게 그런 게 아니야. 그건 말이지.’라며 천사의 말인 듯 ‘라떼’를 시전한다. 나는 괜찮은 후배들을 벼려주는 걸까, 버려놓는 걸까? 여기 맛이 가버린, 한물간 한 늙은 예언자가 살고 있다. (왕상 13:11-19)
10/6
선물도 주고 싶소
백성의 마음을 규합하는 새로운 상징 창조, 더 정확히는 하나님을 떠나고, 욕망을 억제하는 봉쇄선을 풀어주는 상징 조작의 전면에 나선 것은 왕이다. 그러니 왕부터 예를 갖추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불같은 경고를 날리고, 그것이 실제임을 실연한다. 예언자의 중보로 제지하다가 마비되었던 왕의 손이 풀리자 선물 공세를 퍼붓는다. 단호히 거절한 예언자는 부르심 대로 되돌아간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로보암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옹졸한 태도와 뻔뻔한 변명으로 일관한다. 하나님의 위협적인 경고에 그는 강압적인 태도로 나섰다가 손이 굳어서 움직일 수 없자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회복되자 먼 길을 달려온 예언자의 여독을 풀고 선물 보따리를 안길 생각부터 한다.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자기 잘못을 회개하기는커녕 시인하지 않는다. 회피할 생각만 한다. 그에게는 돈이 있으니까.
돈이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를 노래하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예언자의 진심도 돈이면 그만이다. 금송아지 만들고 무면허 제사장을 뽑았으니 매관매직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돈을 희생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이와 돈으로 사람을 이용하고 환심을 구걸하는 이다. 그런 자와 물도, 밥도 먹지 않는 법이다. 그런 자에게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선물을 주고 싶소. (왕상 13:1-10)
10/5
여로보암의 마음에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한 셈이니 해야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전 정권인 르호보암과의 차별성을 확실히 다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민심을 얻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당연지사. 그것은 일차적으로 무거운 세금을 줄이고, 과도한 부역을 삼가는 일이다. 그것이 이전 군주와 확연히 다르면서도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믿고 나가면 새 왕국은 탄탄대로다.
여로보암은 다른 길을 택했다. 세금과 노역도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정의로운 국가 건설도 아니고, 남 유다와의 체제 경쟁이었다. 상징 조작이라고 해도 되고, 이념 전쟁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럴만하다. 다윗과 솔로몬의 나라에 대한 향수가 짙고, 귀속 본능이 언제 발동할지 모른다. 그날은 제삿날이다. 그도 어느 정도 알았으리라. 국가를 경영하는 노고를, 솔로몬까지는 아니더라도 르호보암과 동지적 의식을 느꼈으리라. 그러다가 둘 다 망했지만.
하나님이 금한 것, 인간 본연의 욕망을 보장하는 종교를 만든다. 우상을 만들고, 무자격자를 제사장으로 세우고, 임의로 절기 날짜를 바꾸었다. 하나님을 뒤틀어 우상으로 변질시키고, 백성의 요구를 비틀어 욕망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제멋대로 하고픈 여로보암의 마음이 백성에게 그대로 반사되었다. 이러면 국가는 제 욕망을 날 것 그대로 실현하려는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하는 공간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나라는 일찍 망한다. (왕상 12:25-33)
10/4
받을 몫이 없다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그에게는 패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원로의 것이다. 과중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은 백성을 괴롭히고, 왕은 백성을 섬기는 자이니, 백성의 소리를 하늘의 소리로 듣고 따르라는 조언이었다. 왕좌에 오래 앉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나를 졸로 보냐, 아버지보다 못하겠냐, 종놈이 왕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야? 고생을 안 해봐서 그렇구나, 쇠 채찍이나 받아라, 는 젊은 엘리트의 것이다. 르호보암은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것들 패를 골랐다. 나라는 분단되었다.
인적 드문 산길을 지나는데, 무덤가에서 한 여인이 슬피 곡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이 이리 구슬피 우느냐고 제자를 통해 물었다. 몇 해 전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시고, 몇 달 전에는 지아비가, 이번에는 아들마저 같은 사달을 겪고 죽고 말았다. 놀란 공자께서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물었겠다. 이곳에는 인정사정없는 관리들의 세금 포탈과 재물 착취가 없기 때문이란다. 공자 왈,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혹한 정치, 곧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도다.
각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 보면, 결국 세금 문제다. 고려도 그랬고, 조선 후기 삼정 문란도 그랬다. 다산 정약용의 시, “애절양”(哀絶陽)은 죽은 지 3년이 지난 아버지와 갓난 아기에게까지 군포를 매기고, 군역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남성이 관청 앞에서 자신의 것을 잘라버린 현실을 통곡한다. 출애굽의 백성은 정치를 피해 달아나지 않고, 양물을 베어내지 않는다. 하나님이 뒷배라서 그렇다. 왕이 달아나고, 국가를 잘라냈다. 이스라엘 만세! (왕상 12:12-19)
다윗 왕조에 반역하여
권력욕에 눈먼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정무적 판단으로 나라가 분단 위기에 처했다. 백성을 떼로 보았는데, 주체적으로 왕을 거부하자, 강제 노동 담당자 아도니람을 보낸다. 군대도 아니고 강제노동관? 분노한 백성의 돌팔매에 그는 맞아 죽고, 놀란 왕은 도망치기 급급하다. 반 쪼가리 왕으로 추대받고 국토를 회복하겠다고 대군을 일으켰다. 스마야가 이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동족과 싸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이로써 전쟁 위험은 일단락된다.
당태종이 신하들과 정치에 관한 문답을 나눈 책, 「정관정요」의 한 대목이다. 왕이 신하들에게 창업과 수성 중 어느 것이 어렵냐고 물었다. 그와 함께 창업의 일등 공신은 당연히 난세를 평정하고 창업하는 것을, 나라의 안정과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는 신하는 수성을 선택했다. 각각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말한 것인데, 왕은 창업의 시대는 지났고, 지금은 수성에 나설 때라고 말한다. 즉, 수성이 더 어렵다는 것이다.
사울을 보면, 창업의 어려움을, 르호보암에게는 수성의 고충을 본다. 다윗은 창업에 가까운 수성을, 솔로몬은 오롯이 수성에 힘쓴 왕이다. 3대에 걸쳐 국가를 세우고, 하나님께서 순종이라는 단 하나의 부대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다윗 왕조를 영원히 유지할 것을 굳게 약속하셨다. 호조건에서 시작했음에도, 다윗이 빈손, 맨몸으로 일군 나라, 솔로몬이 지혜롭게 유지한 나라를 거덜 내는 데는 순식간이다. 위대한 제왕 여부는 후임자가 결정하는 모양이다. (왕상 12:17-20)
동족과 싸우지 말고
나라가 두 쪽 나게 생겼다. 아니, 왕부터 죽을 판이다. 폭동이고 한 번 지나가는 거친 바람 정도로 여겨 군대도 아니고 강제 노역 책임자인 아도니람을 보냈다. 그는 백성을 통제해 온 경험이 자그마치 몇 년인가. 그가 어이없게도 돌에 맞아 죽었다. 해서 18만 명의 대군을 소집했다. 전쟁해서라도 되찾아야 할 내 것이니까. 왕은 그리 생각했다. 헌데도 하나님이 금한다. 떨어져 나간 10지파를 조정한 것은 하나님이고, 동족끼리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그래도 르호보암은 순종한다.
신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영원하리라던 다윗 왕조도 순종이 없는 한, 파투 날 숙명이었으니까. 더욱이 솔로몬에 관해서는 그의 배교와 폭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된 상황이었으니까. 정치적으로 보면, 그의 위대한 업적 이면에 드리운 폭정이 폭발할 때가 된 것이다. 폭압적 정치가 나라를 둘로 갈라놓았는데, 폭압의 정점인 전쟁으로 나라를 되찾는다는 것은 형제간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긴다.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고,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지나간 일은 탓하지 않는다.” 공자님 말씀이다. 한국 전쟁으로 북쪽은 괴뢰정부와 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며 정권을 연명하고, 남한은 레드 콤플렉스에 빠져서 조금만 달라도 참지 못하고 낙인찍어 배제한다. 적대적 공생관계가 어언 75년이고, 기생하는 이들의 배만 불렸다. 그러니 어찌 말하지 않으랴. 어찌 아프지 않으랴. 가족끼리, 동족끼리 싸우지 마라. 죽이지 마라. 상처가 너무 깊다. 오래 간다. (왕상 12:20-24)
10/3
백성의 종
솔로몬이 죽었다. 아들이 왕위를 잇는다. 즉위식에 북부 지파 사람들은 여로보암을 앞장세우고 고충을 토로하고 해결을 호소한다. 크게 두 가지다. 세금과 노역이다. 줄여달라는 것이다. 르호보암은 삼 일간의 말미를 얻는다. 원로파의 의견을 듣는다. 왕이란 모름지기 백성의 종이니, 그들을 섬기는 왕이 되라 한다. 그래야 왕좌가 오래 간다. 소장파는 반대로 조언한다. 세금과 노역을 더 무겁게 부과하여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다.
원로파가 온건파라면, 소장파는 강경파다. 대개 원로들은 보수적이고, 소장은 진보적이라는 공식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둘의 차이는 왕권과 백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원로는 왕은 백성을 섬기는 자로, 소장은 백성을 부리는 자로 인식한다. 원로파는 백성을 바다로 본다. 평화로울 때와 달리 성나면 거대한 배도 뒤집는다. 소장파는 백성은 생각 없는 동물로 본다. 시키는 대로 하는 아래 것들, 잡것일 뿐이다. 더 많은 세금과 노역으로 철권 정치를 지향한다.
솔로몬을 닮은 르호보암의 첫 출발은 좋다. 백성의 요구를 듣고, 조정의 양대 세력에게 자문한다. 솔로몬의 ‘듣는 마음’이다. 다윗의 마음과 솔로몬의 지혜는 없어도, 온건파와 강경파를 통제하면서도 조정하고, 백성에게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한다면 괜찮은 왕은 될 터. 르호보암의 선택은?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백성의 종으로 살고자 하면 왕이 되고, 백성의 왕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어느 쪽을 택할 건가, 나는? (왕상 12:1-11)
10/2
왕을 대적하는 까닭
어제는 외부의 적들에 관한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내부의 적에 관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예언자 아히야와 용사 여로보암이다. 여로보암은 과부의 아들로 자라서 왕의 총애를 받는 관료가 되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폭정과 배교를 심판하여 왕국이 분단될 것이며, 10지파가 속한 나라의 주인으로 선택했다고 고지한다. 물론, 경고도 잊지 않는다. 다윗처럼 살아라. 솔로몬처럼 살지 말아라. 그러면 네 왕조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 대한 반역을 추동하는 것이 괴이하다. 가만히 있는 예레미야를 꼬드기던 하나님이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로보암을 충동질해서 반역자가 되게 한다. 나중에 북왕국을 건국한다. 하여간에 그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응징한다. 자비로움을 잃지 않지만, 정확하게 심판하는 무서운 얼굴의 하나님이다. 반면, 심판하면서도 자비를 잊지 않는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왜 여로보암일까? 과부의 아들이라 반항아적 기질이 농후했나? 능력과 신망을 겸비한 지도자감이라 선택된 걸까? 솔로몬에게 충성하면서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있었나? 체제와 정권의 붕괴는 밖의 도전과 안의 배신의 결과이다. 체제의 문법을 철저히 익히면서도 약점을 간파한 자가 앙시앵 레짐을 뒤엎는다. 비판을 들으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나, 죽이려 들면 왕국은 파국이다. 적은 내부에 있다. 있다. 내 삶의 원수는 내가 결정한다. 고로 내 적은 나다. (왕상 11:26-43)
10/1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솔로몬의 타락 이후의 상황을 묘사한다. 먼저, 공감을 자아내는 영웅 서사의 주인공인 하닷이다. 왕손일 적, 다윗의 정복 전쟁에 나라를 빼앗기고, 모세처럼 이집트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성장했고, 이집트 왕녀와 결혼한다. 장성하여 고국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의 동남쪽을 공략해 들어왔다. 그리고 르손은 다윗을 피해 달아났다가 나중에 이스라엘을 오래도록 괴롭히는 이스라엘의 동북쪽 국가의 군주가 되었다. 서쪽 바다를 제외하고 삼면의 적을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님 안에서만 완성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기 배반의 사랑은 타인의 배신을 추동해 낸다. 가만 보면, 그것은 솔로몬의 잘못이 아니다. 다윗 대의 정복으로 약화된 세력이 힘을 비축했다가 제 고토를 회복하려는 것이니, 이 사단을 솔로몬에게 돌리는 것은 무리다. 그토록 요새를 구축하고, 최신식 무기를 비축하고, 강군을 양성해도 적을 제압하지 못한다. 최종 군 통수권자의 무능력이다. 탓할 수 없다. 결국 솔로몬의 책임이다.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이 엊그제인데, 사면초가를 듣고 있자니 격세지감이다. 성적 욕망을 따라 취한 발걸음으로 이방 저방을 헤매도 헛헛한 마음 채울 길 없고, 권력욕을 따라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했건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강력한 군사력에 의지했으나,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을 등지니 모든 것이 등을 지고, 척을 진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은 이스라엘의 왕이다. 솔로몬을 괴롭히는 적은 솔로몬 자신이다. 하나님 없는 솔로몬 말이다. (왕상 11:14-25)
9/30
외국 여자를 좋아하였다
솔로몬의 후반부 인생 드라마가 시작된다. 그 시작은 외국 여자를 좋아하였다는 말이다. 이집트의 공주 외에도 주변국의 왕녀와 세력가의 딸, 아리따운 여성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자그마치 1천 명이다. 그들과의 결혼으로 이스라엘이 금하는 신앙과 문화가 무분별하게 들어왔다.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제 자식까지 바치는 제의가 횡행한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경고해도 들은 체 만 체했다. 급기야 나라가 분단될 것이라는 운명에 처한다.
왜 그랬을까, 솔로몬은? 낯설고 이질적인 외모의 여성을 나라를 잃을 만큼, 주님을 떠날 만큼 좋아한 걸까? 왕성한 지적 호기심의 발로이었을까? 돈 쥬앙 같은 호색한이어서? 아니면 모든 것을 가진 자의 허무함 때문인가? 더는 차지할 것이 없으니 숱한 여성을 정복하려는 욕구인가? 돈이 차고 넘치니 여자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 짓다가 눈으로 보이는 감각적이고, 손으로 잡고 만질 육체적인 것에 중독된 걸까?
솔로몬의 그것을 에로스적 사랑이라 하겠다. C. S. 루이스는 “에로스는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단명하기로 악명 높은 사랑”이라 했다. 즉각적이고 찰나적 사랑이다. 변치 않고 영원하리라는 헛된 믿음이다.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 하나님 있는 사랑은 사랑의 완성이나, 하나님 없는 사랑은 자기 배반적이다. 그가 좋아한 것에서 미움과 버림을 받은 셈이니 솔로몬의 영광은 짧았고, 나라는 갈라졌고, 그의 사랑은 물거품 같아서 헛되고 헛되다. (왕상 11:1-13)
9/29
병거와 기병을 모으니
솔로몬의 업적이 계속 나열되고 있다. 교육과 문화가 번성하고, 교역과 경제가 발전하여 사방 각지, 원근 각처에서 몰려들고, 외교와 국방도 튼튼하고, 제왕의 리더십도 확고하다. 그 연장선에서 해마다, 때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조공과 세금, 해상무역으로 나날이 강성하다. 왕의 권세를 드높이고자 상아로 보좌를 만들고, 금으로 방패를 만들고, 전차와 기병 부대를 양성하였다. 모든 국가의 이상인 부국강병한 나라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솔로몬의 지혜이다.
국방력은 국가의 규모로 보자면, 너무 과중하다. 맹자의 「맹자: 진심하(盡心下)」편에 의하면, 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동원한 전차 3백 대, 날랜 군사가 3천 명이었다. 은의 전력에 비하면 1/4에 해당하고, 그때가 BC 1028년이다. 거의 동시대인 솔로몬(BC 990-931)은 병거가 천 4백, 기병은 1만 2천 명이었다. 단순 비교의 위험을 안고 말하지만, 국방비를 그만큼 투자해야 하고, 강군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군사 국가화의 모습도 엿보인다.
공자의 말처럼, 정치의 요체는 국방과 경제, 신뢰이다. 셋은 하나이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뺀다면 국방이고, 다음은 경제이다. 신뢰가 가장 기본이다. 솔로몬은 신명기(17:16-17)가 반대한 외국 공주와 결혼하고 군마 양성에 전심력을 다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백성의 신뢰를 잃었다. 그의 사후, 그가 세운 찬란한 위업이 한 방에 날아갔다. 믿음 없는 지혜는 헛되고 헛되도다. 신무신불립(神無信不立)이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로다. (왕상 10:14-29)
9/28
참 행복한 백성들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진, 숱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스토리이다. 남방의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왔다. 많은 금은보화를 갖고서 방문한 여왕은 듣던 명성 그대로, 아니 그 명성이 실재를 전혀 따라가지 못할 만큼 솔로몬의 학문과 국가를 경영하는 높은 경륜과 통치력에 놀라 입을 쉬 다물지 못한다. 연이어 솔로몬과 솔로몬의 하나님을 드높이기에 여념이 없다. 기록자는 여왕의 공물을 언급하면서 해외 무역으로 인한 수입도 어마어마했다는 것도 살짝 넣었다.
여왕의 방문은 자신보다 앞선 선진 문화도 배우고, 경제와 국방, 외교 등, 양국의 교류도 넓히려는 의도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솔로몬은 스바 여왕이 청하는 것을 다 주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몇 해 전 모 방송국의 유대인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니, 스바의 후손들에게서 유대인과 동일한 유전자가 나왔다고 한다. 아무튼,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지혜는 물론이고 부와 명성까지 선물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 있다.
솔로몬은 학자 군주라 하겠다. 조선 시대의 세종과 성종, 정조와 같은 이미지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의 경연에서 되레 그들을 가르치고 더 공부하라고 질책할 정도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방 샌님만은 아니었다. 국방과 외교, 경제에서도 탁월했다. 스바 여왕의 말이 지금 나의 말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바란다. “임금님의 백성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저런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그저 꿈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왕상 10:1-13)
9/27
솔로몬을 위한 (궁색한) 변명
솔로몬이 행한 일 중 네 가지를 가려 뽑았다. 솔로몬의 모든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다. 성전과 왕궁 건설에 들어간 수많은 재정 중 일부는 두로의 히람으로부터 차관으로 들여온 것이고, 그에 대한 대가로 갈릴리 지역 일부를 할애했다. 외국 차관을 들여오거나 국채를 발행하는 식으로 국가적 사업을 진행한다. 그 대가로 국내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주곤 한다. 되레 솔로몬은 받은 것보다 준 것이 적다.
다음은 강제 노동 부분인데, 동족은 노예로 부려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순종하였다. 나중에 보면, 노예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노역을 했다. 대형 건축 사업에 동원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 그리고 성전 건축하고 3대 절기를 잘 지키고, 꼬박꼬박 제물을 잘 바쳤다. 논란거리는 바로의 딸인데, 그 결혼으로 무역과 군사 요충지를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대형 선박을 만들어 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이렇듯 솔로몬은 잘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진시황도, 수문제도, 광해군도 대대적인 토목공사로 정권이 흔들렸다. 이교의 풍습이 조용히 파고든다. 아직은 버틸 여력이 있고, 황금기라 별 탈 없어도, 저 체제는 솔로몬이 있어야만 작동하지만, 그라도 지탱하지 못하는 비등점이 다가온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면, 반대로 성공 속에 실패가 있다. 파도만 보고 바닷속을 보지 못하면 성공한 그 방식이 나를 부순다. 잘 나갈 때 조심하자. (왕상 9:10-28)
9/26
다윗처럼 살아라
대역사를 마치고, 화려하고 웅장한 봉헌식도 끝나고, 길이길이 기억될 위대한 기도도 바쳤다. 그 모든 것은 솔로몬의 바람이었다. 이만하면 위대한 성취요 견줄 왕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다시 나타난 하나님은 조금 짧은 축복의 말씀과 조금 더 긴 경계의 말씀을 한다. 성전에 거할 것이며, 약속대로 왕좌를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주의 계명과 율례를 어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성전을 외면하고 너희를 웃음거리로 만들겠다고 하신다.
‘아버지 다윗처럼 살아라’라는 대목이 걸린다. 아들 솔로몬도 잘 안다. 그랬기에 성전 봉헌식에서 그 이름을 재차 언급했다. 그것이 행위의 정당성이자 권력의 정통성이 아니던가. 나이가 차고, 재위 기간이 한참 지난 그에게 부왕의 이름이 따라다니면, 그는 독립적 존재, 자율적 개인이 아니라는 뜻도 되겠다. 성인이 아니다. 이제 솔로몬으로 서고 싶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길을 걷고 싶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들에게 아버지는 넘어야 할 산, 길을 막는 벽, 지고 가야 할 짐이다. 정면교사이자 반면교사이다. 기준이요 척도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신을 거인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라 했다. 딛고 올라서면 더 멀리, 더 높이 본다. 아비의 존재를 부정하면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고, 긍정하고 넘어서면 디딤돌이 된다. ‘처럼’을 달리 읽자. 다윗처럼(like) 되고자 애쓰지 마라. 나도, 너도 다윗이 아니다. 다윗을 닮아라(like). 다윗처럼 형통하리라. (왕상 9:1-9)
9/25
태평을 주셨으니
진실로 장엄한 기도이었다. 오랜 기도를 마친 후, 천천히 저린 발을 펴고, 지친 어깨를 내리고 돌아서서 백성을 향해 마지막 권면과 축복의 말을 건넨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 주와 그분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면 이 태평성대가 누대에 걸쳐 지속되리라는 것을 주지시킨다. 엄청난 양의 화목제물을 드려 모두 먹고 마시고 태평한 안식을 누리기를 곱으로 하고, 마침내 만백성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목사로서 내가 한 설교를 이따금 볼라치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성경을 묵상하라고 그리 자주 말하지만, 직업으로 대할 때가 얼마나 많으며, 까먹고 놓치기 일쑤다. 내가 쓴 책을 훑어봐도 그렇다. 고통에 관한 몇 권의 책, 거의 모든 책마다 등장하는 용서와 비폭력, 평화에 관한 말을 볼라치면, 숨을 곳이 없다. 나는 용서가 가장 어렵고, 외부의 자극에 폭력적으로 응수하고픈 열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내 들으라고 설교하고, 내 읽으라고 책을 쓴 건가?
솔로몬의 기도와 축복은 동시에 자신을 겨냥해야 한다. 재위 내내 모든 것이 은혜요, 순종이며, 제물을 나눠 먹는 화목제처럼 국가의 이익을 백성에게 골고루 노나주면, 태평성대가 지속될 것이다. 솔로몬이여, 너의 기도가 남 들으라는 것이었다면, 축복이 왕의 소유를 시혜처럼 베푸는 것으로 여겼다면, 태평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로되, 주께 바친 기도가 너의 다짐이고, 백성에게 건넨 축복이 왕으로서 다짐이었다면, 너는 태평하고 태평하리라. (왕상 8:54-66)
9/24
원수의 땅에서라도
솔로몬의 기도는 절정으로 치닫지만, 갈수록 절절하고 절실하다. 외적이 쳐들어와서 전쟁에 나서는 백성과 용사들이 기도할 때, 설사 패배하고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살이하더라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낯설고 물 설은 이방 땅, 그러니까 내 나라를 무너뜨린 원수의 나라에 가서 살게 되더라도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 철철 흘리는 피눈물의 기도로 회개하고 자비를 구하면 들어주십사 아뢰고 또 아뢴다.
국가에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예외 없는 나라 없다. 어느 나라가 건국하고 영원하더냐. 천세, 만세를 이어갈 듯이, 무궁화꽃처럼 무궁하기를 바라지만, 그 꽃도 고작 화무십일홍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하여, 왕은 이 대목에서 잠시 목이 멨을 듯하다.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애절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후손들이 저주받은 땅에서 망국의 설움을 속으로 삼키며 살아야 할까. 한 국가도 그러하고, 단체나 개인도 다르지 않다. 시작은 거창하지만, 흥하는 것도 다 한때다. 기우는 때도 오는 법. 슬프고 슬프다.
해서, 솔로몬은 기도하며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원수의 땅에서 사는 유배민들아, 너희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야, 영영 잊힌 존재는 더욱더 아니고, 흥할 때만이 아니고, 망할 때도 망한 후에도 변함없이 기도 들으시는 주가 계셔.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로운 주가 계셔. 그러니 하나님은 안 보이고, 성전도 없는 곳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기도하는 네가 성전이 되라고, 같이 무릎 꿇자고, 전대미문의 길을 가보라고 내 지친 어깨를 떠민다. (왕상 8:44-53)
9/23
하늘에서 들으시고
절절한 기도이다. 신전을 바치는 솔로몬의 첫 일성은 찬양이었고 축복이었다. 이어지는 기도의 내용은 죄다 용서해 달라는 읍소 뿐이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 기근과 가뭄이 닥쳤을 때, 심지어 이방인이라도 와서 기도하면 꼬옥 들어달라고 호소한다. 그런데 그의 기도 중에서 인상적인 말이 하나 있다. 하도 많아서 셀 수가 없다. 기도마다, 말끝마다 ‘하늘에서 들으시고,’ ‘하늘에서 들으시고’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나는 ‘성전에서’라고 할 줄 알았다. 당연히 ‘성전에서’라고 해야 하지 않나? 거룩한 장소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강조하더니, 여기에서는 웬 ‘하늘에서’란 말인가. 성전 봉헌식인데다가, 하늘의 하늘의 하늘이라고 모실 수 없는 그분이 친히 좌정하시고 당신의 주거지로 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하늘에 거한다고 한다, 성전이 아니라.
성전과 하나님이 일체가 아니며, 성전도 기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건축물인지라 망치와 해머로 내리치면 무너지고, 세월 따라 쇠락할 터. 게다가 그곳을 당신의 거처로 정한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저 은혜다. 가닿을 수 없는 하늘이기에 고개 들고 우러러, 어디나 충만한 하늘을 꼭 품어 안고 싶어 두 손 모아 간곡히 기도드리나이다. 하늘이여, 제가 잘못했어요. 내 속에 득시글거리는 악함과 약함 아시니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고쳐주세요. (왕상 8:33-43)
9/22
이곳을 보며 기도할 때
성전을 짓기까지의 길고 긴 이야기를 회고한 솔로몬은 무릎 꿇고 두 팔 벌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한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도의 기초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다. 그런 다음 그는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여러 상황을 콜콜하게 아뢴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부터 역병과 기근이 왔을 때, 전쟁에서 패했을 때, 유배지로 끌려갔을 때, 등등. 진심으로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해 달라는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린다.
성전의 일차적이고 고유한 기능은 누가 뭐래도 제의, 곧 예배이다. 자기가 지은 죄에 따라서 번제를 비롯한 5가지 제사, 곧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를 드린다. 그런데도 성전 봉헌에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솔로몬은 초지일관 기도를 말한다.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 가 아니다. 성전에 나와서 또는 성전 향해 기도하면 들으시고, 고치시고, 용서하고, 회복해 주기를 청원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56:7)이라고 성전을 규정했고, 다니엘은 바벨론 땅에서, 하루 세 번, 무릎 꿇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기도드렸다(6:10). 성전과 하나님을 일치시키지 않은 덕에, 제의 중심의 성전이 기도 중심이 되었고, 반드시 성전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안에, 내 앞에, 내 옆에, 내 뒤에 계신 나의 하나님, 나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기도하는 그곳이 성전이고, 기도하는 사람이 성전이다. (왕상 8:22-32)
9/21
그는 말하였다.
솔로몬의 일장 연설이다.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고개를 쳐들었을까, 깊이 숙였느냐는 모르겠다만, 먼저는 하나님을 향한다. 깊은 어둠 속에 모호하고 신비한 하나님께서 환하고 명명백백하고 웅장한 성전 한 가운데 오시기를 청원을 드린다. 돌아서서 백성을 향해 지난 역사를 회고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다윗과 약속하시고 지키신 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택한 사람, 하나님이 거한 사람은 다윗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다윗이었다.
연설이라고 했지만, 이야기다. 출애굽의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한 다윗의 이야기다. 저 높고 높은 하나님이 낮고 낮은 노예를 위해 친히 활동한 이야기의 핵심은 성전, 즉 성전이 되는 삶과 공동체다. 위대한 다윗이 얼마나 야웨를 사랑했고, 그분을 기리려고 했는지, 다윗에 비해 형편없는 자신이 왜, 어떻게 그 이야기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회고한다. 하나님이 바라시는바, 아버지가 못다 이룬바, 그 이야기를 구호로 외친다면 이렇다. ‘성전을 짓고, 성전이 되고.’
한 사람, 한 사회의 아이덴터티는 이야기에서 말미암는다. 그의 직업이나 외모, 소유가 정체성은 아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어떤 이야기 일부인지를 말해주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솔로몬은 하나님과 다윗의 삶을 말하면서 자신의 정체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하나의 일을 마쳤을 때, 또는 하나의 일을 시작할 때, 돌아보라. 너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이제 네 이야기를 좀 들어 볼까? (왕상 8:12-21)
9/20
돌판 말고는
성전 봉헌을 드린다. 이 모든 일은 솔로몬이 하나님을 대리하고 대신한 것인 동시에 백성을 대표하고 동역한 것이라 모든 이스라엘이 동참한다. 먼저 기물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제물을 바쳤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언약궤의 위치와 내용물을 주목하게 한다. 궤는 날개를 펼친 그룹 아래 두었고, 그 궤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 두 개만 넣었다. 제사장들이 궤를 그곳에 두고 나올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였다.
성전의 본디 기능은 제사다. 구약의 제사는 동물을 잡아서 번제, 곧 불에 태워드리는 것이 기본이다. 그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죄를 씻고, 회복한다. 헌데, 희생제사는 살짝 언급하고 언약궤의 향방에 우리의 시선을 잡아다 다른 무엇도 보지 못하게 하고 오직 그것 하나만 보게 한다. 성전 건설 작업 중간에 뜬금없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라는 칭찬인지 경고인지 양의적 말씀하신 것도 이 때문이리라. 성전의 중심에는 십계명, 곧 말씀이 있어야 한다고.
성전이 중심인 듯 보여도, 앙꼬 없는 찐빵에 다름 아니다. 언약이 공동체와 개인의 삶의 기본이자 중앙이다. 말씀은, 십계명은 족쇄가 아니다. 의미의 기축이며, 가치의 지향이다. 단단하고 든든한 안정이며, 행동을 규율하는 넓은 울타리이다. 신성한 보호막이 사라지거나 뚫리면, 죄다 흔들린다. 나의 성전 깊숙한 곳에는 무엇이 자리하는가? 내 중심을 잡는 것은 무엇인가? 예배인가, 성경인가? 화려한 건물인가? 묵직한 말씀인가? 말씀 말고는 없다. (왕상 8:1-11)
9/19
모든 일을 마쳤다.
모든 일을 마쳤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둘러보았다.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제작하는데 여럿이 달려들어 서로 힘을 보태고 손발을 맞추느라 애를 많이 썼다. 손이 많이 가는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것들로는 기둥에 새긴 나리꽃 모양이나 받침대와 대야가 있겠다. 어떤 것에는 종려나무와 활짝 핀 꽃 모양을 새겨넣는 일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모든 일을 하루하루 성실히 수행했더니 일곱 해가 후딱 지났고 모든 일이 끝났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은 처음부터 녹록하지 않았다. 나랑 손발을 맞추었던 두로의 일꾼들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허나, 본토박이들은 나를 박힌 돌 빼낸 굴러온 돌 취급했다. 내 능력을 의심했고, 이방인 따위가 거룩한 성전 기물 작업의 우두머리라고 투덜거렸고, 두로팀과 이스라엘팀 간의 소통도 만만치 않았다. 일하는 습관과 문화, 기술력의 차이, 언어적 장애도 있었으니까. 긴 시간 함께 하니 이제 정들어 헤어지려니 잡은 손 쉬 놓지 않는다.
그 시간을 견디게 한 것은 단 하나.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솔로몬 통해 나를 불렀다. 그분이 불렀으니 왔고, 왔으니 열심히 일했다. 대왕은 나에게 하늘의 하늘이라도 모실 수 없는 하나님이니, 아름답고 웅장하기를 원하셨다. 시킨 대로 했다. 아, 하나 더. 매일 매일, 7년을 하루 같이 일했다. 오늘 일만 생각했다. 오늘 일은 그날 마쳤다. 오늘이 쌓여 7년이 되었다. 하루만 열심히 일하면 된다. 모든 날이 오늘이더니 모든 일을 마쳤다. (왕상 7:40-51)
9/18
그는 만들었는데
나는 어쩌다 장인이 되었을까? 어머니 쪽 사람들은 나를 이방인 취급한다. 신앙을 버렸다느니, 조국을 등졌다느니. 아버지 쪽은 또 어떻고. 작은 나라 출신이라고, 우리가 너희 모자를 거두어준 것만으로 평생 감사하라고. 약자와 빈자의 대명사인 과부로 살기에 어미 등이 너무 약했다. 삶이란 ‘등이 휠 것 같은 무게’가 아니던가. 핏덩이 안고 먹고살자고 전전긍긍하다가 새 아비 만나 새 땅으로 건너왔다. 아버지의 직업이 내 직업이 되었다. 청동 기술자.
일은 고되었다. 대장간에서는 굴러 들어온 천덕꾸러기인데다가 모계는 신앙이 어쩌고를 주야로 읊조리며 실제 손으로 하는 일을 천히 여겼다. 그래도 어머니는 고국의 언어를 잊지 말라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선조들 이야기를 늘 들려주셨다. 아버지는 손재간도 있고, 눈썰미도 좋다며 바쁜 시간 틈내서 따로 가르쳐주셨다. 남 일할 때 일하고, 남 잘 때 일하고, 남 놀 때 일했다. 그랬더니 나더러 장인이란다. 명장이란다. 일이 하나도 안 힘들었다.
그런데 영리와 기술에 밝은 아버지, 신앙과 고국을 그리워하는 어머니. 둘은 내 안에서 으르렁대며 싸웠다. 내 속의 불화로 내 영혼은 성말랐다. 헌데, 대왕께서 성전에서 사용할 청동 기물을 만드는 일을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만든 것이 성전에 들어간다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된다니.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 둘이 하나가 되었다. 오늘따라 내가 만든 받침대며, 대야가 더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구나. 보기에 참 좋다. (왕상 7:27-39)
9/17
두로에서 후람을
성전의 외형이 얼추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내부의 기물을 만들 차례다. 건물 공사하면서 같이 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솔로몬은 두로 출신 후람 또는 히람에게 그 일을 맡긴다. 그는 놋쇠, 곧 청동 기술자이다. 일차적으로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그리고 많은 물을 담을 바다라는 물통을 만든다. 그 바다를 떠받치는 소 12마리와 물두멍, 놋쇠 대야와 받침대도 제작한다.
그가 지혜와 지식, 총명을 지녔다는 말은 성막 제작자인 브살렐(출 36:1)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그의 역량이 출중했다는 뜻이리라. 그의 출신과 가족이 눈에 걸린다. 기술은 이방인 두로 사람 아버지로부터 배웠는데, 어머니는 두로에 인접한 납달리 지파요 과부다. 재혼해서 만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한 후에 조금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인 걸까? 인정받고 안정된 삶을 누렸을 텐데, 어찌 살았을까? 어찌 돌아온 걸까?
노후의 안정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팠던 건, 아닐까? 제 기술이 의미가 있었으면 바랐거나, 그 일 관두고 다른 일을 하고팠을 수도. 내가 하는 일, 곧 직업은 주의 일이 아니다. 밥벌이 수단이다. 그러나 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할 수 있다. 자기 영역에서 실력과 경험을 갖춘 이가, 약간의 희생 감수하고, 내게 보람 되고,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 한다면 그가 후람이다. 이런 목사도 필요하고, 성도들은 더더욱 그렇다. 누구 없소, 후람으로 살 사람? (왕상 7:13-26)
9/16
7년 대 13년
왕궁 건축에 13년이 걸렸다. 규모도 크다. 성전은 길이가 예순 자, 너비가 스무 자인데 왕궁은 일백 자요 쉰 자이다. 높이는 똑같이 서른 자다. 비율은 얼추 2 : 3 정도다. 분량은 38절 대 12절이니 성전 건축이 세 배 더 길다. 7장의 13~51절은 성전 기물 제작을 다루니 예닐곱 배가 되겠다. 크기 차인 줄 몰라도 백향목이 훨씬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레바논 수풀 궁이라니 말이다. 아, 중간에 같은 궁전을 바로의 딸에게도 지어주었다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성전 공사 후 왕궁 건축이 아니라 거의 동시에 진행했을 것이다. 이 본문의 앞과 뒤는 성전 건축과 성전 기물 제작이 포진한다. 왕궁은 간막극처럼 가볍게 다루거나, 샌드위치처럼 중요한 것을 가운데 끼어두었을 수도 있다. 성전을 짓는 솔로몬의 진심이 왕궁과 바로의 딸에게 있다는 인상을 준다. 초장부터 솔로몬은 변심의 씨앗이 뿌려졌던가. 성전 보다 왕궁을 더 중요시했나? 대국의 공주에 대한 합당한 예의이자, 국제 외교상 불가피한 선택인가?
허나, 규모와 시간의 차이를 과장할 바는 아니다. 성전은 왕궁에 비하면 아무래도 단순하다. 상주하는 인원에다가 관료들이 일하는 데라 궁전은 딸린 건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걸로 솔로몬을 트집 잡으면 과하다. 그래도 그게 아니라고 박박 우긴다면, 당신이 교회 건축에 드린 헌금과 집을 사기 위해 저축하고 대출한 돈의 규모, 헌신한 시간을 내게 말해 달라. 그러면 그대의 진심을 진실로 믿겠다. 너무 그러지 마라. 솔로몬이 더 나을걸. (왕상 7:1-12)
9/15
성전 건축을 마쳤다.
출애굽으로부터 무려 480년이 지나 시작한 성전 건축이 드디어 마쳤다. 시작부터 마치는 날까지 총 7년이 걸렸다. 앞의 본문의 성전의 크기와 규모로 독자를 압도했다면, 이 본문은 건축 자재에 초점이 있다. 몇 번이고 백향목을 사용했다는 것, 그리고 ‘금으로 입혔다’라는 말을 찾기가 귀찮은 정도다. 지성소의 그룹도 금으로, 성전 내부도 마루도. 그러니까 지성소도 성전 내부도 모두 금을 입혔다. 그러니까 성전으로 아예 싹 다 도배를 해버렸다.
화려함의 극치라고 해야 할까? 금으로 번쩍이는 성전 내부는 값비싼 재료를 많이 사용한 성전은 웅장하고 으리으리하다. 값비쌈과 화려함으로 압축 표현할 수 있는 성전 내부는 거부감부터 준다. 결국 건물이 아니던가.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 돌 위에 돌을 쌓은 것일 뿐. 예언자들의 우상 비판을 여기에 갖다 붙이면 결국 인간이 만든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 가는 세월 잡지 못하듯, 쇠락하는 성전도 어찌할 수 없는데 뭘 저리 돈을 처바르는가?
그분의 영광에는 억만의 억만 승의 1에도 미치지 못함을 알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값하심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고 싶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크고 아름답다 말하고 싶은 거다. 이제 그는 묻는다. 성전인 너의 내면은 값으로 매기면 얼마짜리니? 무슨 색깔이니? 노랗게 반짝이는 황금이니, 누렇게 냄새를 피우는 황금색 똥 덩어리만 푸짐하니? 빛나니? 냄새나니? 너의 내면 성전 건축은 언제 끝나니? 아니, 시작은 했고? (왕상 6:14-38)
9/14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솔로몬 성전의 건축 설계도 같다. 성전의 길이, 높이, 너비에 대한 언급이 많다. 성전 전체의 크기에서도, 본관의 현관도, 성전 안의 다락도 크기와 규모를 말하고 있다. 성전의 위용을 말한다. 다음은 건축할 할 때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러니까 외부에서 제작해서 그 자리에서 안성맞춤으로 조립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고급스러움과 향그러운 건축 자재를 사용했다. 이 본문의 앞에는 건축 시점이,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노예살이하던 애굽을 떠나온 지,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지 어언 사백팔십 년이다. 고려(474년)와 조선(518년)의 영욕의 세월과 맞먹는다. 출애굽의 이상이 무엇이었나.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19:6)가 되고 성전공동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이 꿈으로 남지 않고 실천되고 실현되고 있다. 건물로서의 성전과 성전공동체 또는 제사장 나라 사이에는 약간의 틈이 있어서 동일시할 수 없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법. 이제 그 이상을 보는 도다.
까다롭다, 우리 하나님. 진심을 읽기 쉽지 않다. 솔로몬에게 네가 드디어 성전을 짓는다고 하신 다음 당신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라는 말씀을 던진다. 둘을 잇는 접속사는 뭘까? ‘그래서’일까, ‘그러나’일까? 칭찬일까 경고일까? 둘 다일까? 착한 일을 시작했으니 본질도 잃지 말라는 격려일까? 성전공동체가 건물이 아닌데, 그것을 까먹고 고작 건물 하나 덜렁 짓고 할 일 다 했다고 자만 말라는 질책일까? 하나님을 그깟 성전에 구겨 넣지 말라는 뜻이려나? (왕상 6:1-13)
9/13
성전 건축 준비
솔로몬은 성전 건축 준비를 한다. 자국 내의 물자와 기술력만으로 불가능한데, 원하는 것을 소유한 두로의 히람 왕과의 조약으로 성공적으로 확보한다. 구체적으로 일하는 방식과 노동력에 대한 처우, 작업에 동원된 인원수와 그들을 관리하는 이들의 숫자까지 나열한다. 그 대가로 무엇을 주고 받을지도 결정하였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기록하는 시선은 하나님이 약속한 지혜를 따라 솔로몬이 행한다는 것, 그리고 평화로웠다는 것이다.
타이밍이 적절하다. 다윗은 전쟁의 시대이었고, 솔로몬은 평화의 시대이다. 다윗이 준비해 준 것도 많다. 또한 외교와 무역, 군사, 경제, 학문이 융성하여 경제력이 충분히 떠받쳐준다. 성전 건축에 대한 종교적 합의도 이미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백성의 마음을 모으고, 대 역사를 통해 경제도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동원된 인부들 모두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충분히 준비한 다음 건축을 시작했다.
동서고금의 역사에는 왕들이 국력과 재정에 비해 무리하게 왕궁이나 거대 건축물을 짓다가 쫓겨나는 경우가 많다. 예배당 건축하면서, 건축 후에 어려움 겪는 교회나 목회자도 적지 않다. 권력 강화와 주의 영광 위한답시고 무모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링컨은 나무를 자르는 6시간 중 4시간을 도끼 가는 데 사용하겠다고 했다.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도 없다. 기회가 와도 날린다. 준비하라. 하늘의 기적을 꿈꾸지 말고, 주변의 도움을 기웃대지 말고. (왕상 5:1-18)
9/12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화를
이를 두고 태평성대라 해야겠지. 솔로몬의 치세는 한 국가의 모든 면에서 풍요로웠다. 영토도 상당히 넓어졌다. 한편으로 복속된 주변국으로부터 조공 무역으로 많은 이문을 남겼고, 다른 한편으로 외교적으로 분쟁이나 갈등을 잘 관리하여 평화를 유지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외교와 무역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막강했다. 전차와 군마를 최대한 확보했다. 솔로몬 치하에서 외적은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강성한 나라가 되었다.
왕궁의 먹거리로 봐서 백성들의 경제도 안정적이고 풍요로웠음을 알 수 있다. 주된 경제이자 농사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편안하다. 학문과 문화도 융성했다. 대표적으로 문학과 과학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문물, 곧 정신 문화와 물질 문화 모두 고루 발전하였다. 외국에서도 유학생들이 발전된 학문을 배워서 학위를 따고 제 나라로 돌아가는 문화강국이 되었다.
솔로몬은 외교와 국방, 경제와 학문 모두를 발전시켰다. 그러니 외교를 하고 불필요한,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거나 말려들지 말며, 용사들을 말도 안 되는 명령 내려 죽음으로 내몰고, 은폐하거나 격노하지 말며, 이념도 중요하지만, 민생을 잘 챙겨 먹고 마시는 것에 모자람이 없도록 할 일이며, 공무원이나 교사, 의대에 몰리고, 건물주를 꿈꾸지 않도록 창조하고 생산하는 분야와 기초학문을 권장할 일이다. 그러다가 시도 짓고, 책도 읽으면 더 좋고. (왕상 4:21-34)
9/11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
솔로몬이 국가 행정 조직을 재정비하고 완성하는 장면이다. 2~6절은 조선 시대로 보자면 육조 판서에 해당한다면, 7절부터는 각 지역 책임자, 지금으로 보자면 도지사 정도라고 보면 될 듯싶다. 전반부에서 눈여겨볼 것은 새로운 인재 등용도 관전 포인트이지만, 순서이다. 다윗 시대는 요압 장군, 즉 군대가 제일 앞 순위이었는데, 지금은 제사장, 서기관, 사관이 먼저이고 그다음이다. 권력 순위가 한참 밀린 건데, 우리 현대사로 치면, 문민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후반부는 중앙집권화이다. 지금까지는 각 지파의 최고 리더가 나섰다면, 이제는 중앙 정부에서 파송한 관리가 각 지역을 다스린다. 세금을 거두는 효율적인 체제가 자리 잡혔다. 솔로몬 사후에 유리에 금 가듯 와해하지만,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체제를 꾸리기 위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호불호가 갈리고, 각각의 장단이 있지만, 대개는 봉건 영주 중심에서 강력한 왕정으로 이행한다.
솔로몬의 통치는 법, 곧 토라에 의한 정치 플러스 행정 조직을 통한 합리적 질서 구축이다. 하나님께 구한 지혜는 재판 곧 법에 따른 정치이고 왕 역시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생모 찾기 재판에서 그는 인간 안의 자비심 곧 헤세드를 발현시킨다. 정치는 엄격한 법률에 매이지 않는다. 사랑에 기반한 법 + 행정으로 통치 체계를 완성한다. 법률과 행정, 헤세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헤세드라. 이로써 만백성이 평안해졌다. (왕상 4:1-20)
9/10
창녀 한 사람이
죄다 나를 욕한다. 거칠고 쌍스러운 욕설을 듣는 것이 이골난 데다가 그런 비난을 충분히 예상했기에 그닥 놀랍지 않다. 몸 팔아 먹고사는 년 주제에, 친구 자식마저 죽이려 들었다. 그렇게라도 불쌍한 새끼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무한한 죄책감을 사악한 방식으로 달래려 한 나는 욕 먹어 마땅하다. 그러자고 한 짓이다. 자식 죽은 어미라는 것만으로 영원히 죄인이다, 나는. 이보시오, 세상 사람들아. 나를 실컷 욕해 주시오. 그러면 고맙겠소.
있는 힘껏 던지는 그 묵직한 돌멩이. 그것이 둔중하게 내 머리통을 갈겨도, 성한 몸 하나 없이 망가지도록 던지는 돌에 처맞아도 아픈 줄 몰랐다. 내 몸 위로, 내 몸 안에 제 놈들 욕정 해소하려고 달려들던 자들이 내 몸 위로, 내 몸 안에 박아넣는 저 돌덩어리가 내 배 아파 낳은 내 새끼가 되면 좋으련만. 이보시오, 세상 사람들아. 실컷 돌을 던져 주시오, 그것이 내 배 속에서 애기가 될 줄 어찌 아오. 그리되도록 힘껏 던져주소. 맘껏 많이 던지시오.
배운 게 없고 막돼먹은 년도 산 아이 잡아도 죽은 자식 못 돌아온다는 것은 안다. 친구 자식 반으로 뎅강 갈라 무얼 얻을 심산이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랬겠는가. 방긋 웃는 아이가 내 아이 같아 젖 한 번 물렸더니 환장하겠더라. 이 짓 하면 아기 빨리 보러 갈 터. 그래도 니한테 참말로 미안하다. 니는 내 맘 알겄지만, 매우 섭섭했제. 먼저 가네. 애 잘 키우고, 좋은 세상 보고 천천히 오소. 이제 나는 애기 보러 가오. 내 새끼 젖 물리러 가네. (왕상 3:16-28)
솔로몬 왕이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내 눈앞의 강보에 싸여 울고 있는 핏덩이 어미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나더러 지혜롭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라 한다. 그래서 공정하게 재판했다고 다들 칭송한다. 다윗의 후광으로 쉽게 왕이 된 자라고, 칠칠치 못한 자가 아니라 똘똘한 것이 형이라면, 밧세바의 아들로서 감히 넘볼 수 없는 자리인데, 운이 좋아 왕좌에 올랐다고 비웃던 자들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한 여인은 뭐랄까 차가웠다, 다른 여인이 뜨거웠던 반면에 말이다. 눈물이 그렁한 눈만 봐도 알겠더라. 우는 아이, 젖을 보채는 아이를 무심히 바라보는 여인의 눈길과 자기도 모르게 젖을 물리려고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여인의 몸짓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여인네와 살려야 할 이유가 있는 그녀의 모습이 확연히 갈렸다. 그렇다고 재판을 그리할 수 없는 법. 하여, 아이를 반으로 갈라보라는 테스트를 했던 거다.
사실, 그날 그 자리에서 나는 다른 것을 보았다. 한 여인의 눈과 손과 몸은 내가 늘 보았던 그 여인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본 적도 없고, 물어도 몸 사리며 다들 입을 다물었지. 난지 이레 만에 죽은 아이, 아니 내 형. 나도 형이 있었으면 했는데. 남편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식 잡아먹은 년이라는 손가락질을 평생 받았던 여인과 겹쳐 보였다. 그래서 이따금 휑한 눈길로 허공을 보았던 거군요, 내 형이 그리워. 엄마, 엄마, 불쌍한 울 엄마. (왕상 3:16-28)
창녀 또 한 사람이
첫눈에 알아보았다. 저년이나 나나 팔자 사나운 것이라고. 말 안 해도 안다. 어릴 적 친척이나 친구에게 폭행당했는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집에서 입 하나 더느라고 팔렸는지, 남편 잃어 먹고 살 일 막막해서 이곳에 왔는지, 우리는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말해 뭣 하리오. 알아 뭣하랴. 기구한 팔자이거늘. 뭇 사내 욕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 받친 서러움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우리 둘은 벗이 되었다.
아이를 가졌을 때, 너무 놀랍고 무서웠다. 나고 보니 아비도 모르고, 어미는 모른 척하고 싶은 아기는 뭔 죄더냐. 행여 딸이면 이 짓 할까 봐 무섭고, 아들이면 엇나갈까 봐 두렵다. 거역할 수 없는 정해진 운명을 살아갈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아득하다. 이리저리 없앨 궁리 했지만, 생명은 귀하고 모질더만. 악착같이 죽지 않고 살더라. 헌데, 옆 방 동기도 아이를 가졌다. 같이 한참을 울었더랬지. 어찌어찌 한 달, 열 달 차더니 달처럼 예쁜 아가 태어났다.
갸가 그리 모진 짓을 할 줄이야. 그리 나쁜 애는 아닌데. 제대로 먹은 것이 없으니 부실한 갓난아이였고, 비실비실하더니 며칠 못 넘겼다. 걔는 울지도 못하대. 그래도 그렇지. 천벌 받을 거다. 대왕은 걔에게 뭐가 보였는지 목숨줄 거두지 않아 망정이지. 어디 가서 잘 살기 바랐는데. 세상도, 부모도 날 버렸고, 아비 되는 놈도 떠났지만, 나는 너를, 나도 나를 버리지 않을 거다. 이쁜 내 아가, 잘 키워야지. 내 새끼 건들면 싹 다 죽여 뿔거여. (왕상 3:16-28)
9/9
듣는 마음(I)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형제의 난을 깨끗하게 제압하고,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일체의 적들을 정당한 대의명분에 맞게 제거하고, 아도니야의 청을 대신 전하는 모후이자 어머니 밧세바마저 힘을 빼놓았으니 원로와 외척이 감히 정치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 국제 정치 역학도 파악하고 결혼 동맹을 맺고, 왕궁과 성전 건축 장기 프로젝트도 가동한다. 불길한 예감이 없지 않지만, 집권 초반기를 지나는 약관의 솔로몬의 정치력은 근사하다.
권력을 장악하는 것만큼이나 지키고 확장하는 것은 더 힘들다. 지금까지는 안팎의 적과 싸워야 하는 흑백의 세계이었다면, 지금부터의 정치는 알록달록한 세상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깔 무지개로 빛나는 세상이다.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각각의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하면서도 통제하는, 너와 나, 그, 그녀가 함께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다채로운 세상이 새 세상이다. 옳고 그름보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달라는 솔로몬은 사랑스럽다.
다윗은 전쟁의 시대를 통과한 영웅이었다면,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는 현자가 솔로몬의 모델이다. 시대 정신을 간파한 왕에게 지혜는 듣는 마음이다. 상명하복을 원치 않는다. 백가쟁명을 조장하고, 난상토론을 경청하고, 타협하며 중지를 모으는 것이 군왕의 최고 덕목이다. 듣지 않고 혼자 말하는가? 아무도 네 말을 듣지 않을 거며, 있던 것도 빼앗길 거며, 오래 가지 못할 거다. 그래, 너는 뭣 하러 王을 손바닥에 새겼는고? 네 생각 말고 듣기부터 하라. (왕상 3:1-5)
듣는 마음(II)
이번 화요일 저녁의 글쓰기학교에서 어느 목사님은 당신의 책쓰기 프로젝트를 이야기했다. 리더십인데, 이름하여 ‘듣는’ 리더십이다. “리더(Leader)는 리더(Reader)이다.”에서 Reader를 책을 읽는 것 보다는 사람 마음 읽기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듣는 사람이 리더라고, 오늘 우리 시대는 말 잘하는 사람 보다 잘 듣는 리더를 원한다고 적었다. 목사인 그는 자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이런 말을 던지면서 글을 맺었다. 말하기로 살렸던 그대, 이제 들음으로 살리는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솔로몬은 이방의 열왕처럼 부귀도, 건강도, 정적을 제거하는 것, 그리하여 제 욕망을 왕국을 튼튼히 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하기 급급할 때, 하나님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지혜 곧 듣는 마음을 소원했다. 제 통치 이념과 욕망을 관철하느라 급급한 왕이 아니라,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에 민감한 왕이고자 했다. 솔로몬은 확실히 듣는 리더이고, 사람 마음을 읽는 리더이고, 들음으로 왕국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만들었다.
난 심각해졌다. 나를 가르치는 자로 자리매김한 터라, 신경이 온통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그 하나에 가 있다. 해서, 잘 듣지 못한다. 머릿속을 휙휙 지나가는 말을 잊어먹을까 봐 얼른 잡아채서 서둘러 말하지만, 신속히 날아가 버린다. 결과는 신통치 않다. 하여, 흩어지는 내 마음 끌어모아 일천 번을 아뢴다. 듣는 귀를 주소서. 경청하는 마음 주소서. 타인이 들어올 여백을 주소서. 잘 들어 나 살고, 남 살리게 하소서. 내 기도를 잘 들으시는 주여. (왕상 3:1-15)
네 소원이 무엇이냐
솔로몬의 오매불망 소원은 잘 듣는 지혜로움이었다. 왕이란 왕궁을 짓는 건축가이요, 성전을 건축하는 종교인이요, 국제 역학 관계를 파악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가요,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합해야 하는 지휘자이다. 게다가 군사를 총괄하는 총사령관이다. 그 막중한 책무를 생각하면 잠이 쉬 오지 않으니, 이 모든 일을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로운 왕이다.
백범 김구에게 소원을 물었더니 문화가 있는 강국이라 했고, 마틴 루터 킹은 필라델피아와 조지아의 피부색 다른 인종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식사하는 것이라 했으며, 루터는 어떻게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를 물었고, 키르케고르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대에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를 알고자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원을 묻는 주님께 오로지 당신만이 내 소원이라고 아뢰었다.
그럼 내 소원은? 학자로서 길이 남을 책 쓰거나 작가로서 억쑤로 많이 팔리는 책 쓰기? 물론 바라는 바다. 교우가 늘어서 안정된 교회 되는 것? 요즘 최고 관심사다. 교인들이 잘 먹고 잘 살고 무탈하게 지내다 주일 예배 오는 것? 변함없는 소망이다. 아내와 잘 지내고, 아들딸이 결혼하고, 좋은 직장 잡고, 학자와 작가 되는 건데, 맘이 찌릿하다. 그래도 내 소원은 ‘학자의 혀’(사 50:4)로 사는 거다. 아빠, 내 소원 들어주세요. 하찮다 내치지 마시고 솔로몬의 그것 같지 않다고 쌀쌀맞게 말씀 말고요. 그런 김에 저 모든 소원 몽땅 들어줘용~ (왕상 3:1-15)
9/8
지당하신 말씀 / 이 말씀이 좋사오니
시므이가 실수를 자꾸 하지? 그의 행동은 기민하고, 생각은 영민했다. 다윗이 영영 몰락할 듯싶어 강 같은 저주를 퍼부었다. 재기하는 다윗 보고 아차 싶어 무리를 이끌고 번개처럼 내달려 고갤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이리도 재빠른지라 도망간 종놈 잡으러 신속하게 기동한다. 나이고 뭐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쫓아가 기어이, 기필코 잡아 왔다. 왕과의 약속도 잊은 채. 이 자는 추노를 했으면 잘 살았을 텐데. 여튼, 그러다 죽었다. 시므이는 왜 그랬지?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시므이에게 한 번 실수한 인간은 같은 실수 또 저지른다는 말이 딱이다. 다윗의 가슴에 못 박더니, 지혜로운 솔로몬과의 약속을 어겼다. 다윗은 상한 심령의 사람인지라, 속은 썩어 문드러져도, 속으로는 칼을 갈아도 겉으로는 웃으며 용서했다. 아비의 유지까지 있는 마당에 없는 꼬투리도 잡아 죽일 판인데, 절로 들어왔으니 결코 살려둘 수 없다. 암튼 나름 똑똑한 위인이 왜 이딴 실수 또 해서 죽을꼬.
실수가 아니다. 세계관이다. 약자는 개, 돼지다. 아들에게 쫓겨나는 다윗이나 종살이 힘들어 도망간 놈들은 밟는다. 그런 잡것은 욕을 실컷 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런 썩을 것은 잡아다 족쳐야 성질이 풀린다. 난데없는 게 왕이 되고 지랄이야. 종놈은 죽어라 일하다 죽어야지 뭔 탈출(exodus)이야. 육시럴 놈들. 놀고들 자빠졌네. 말 한번 시원타. 그 말 참 좋다. 솔로몬 왕 보기에 네가 그렇다. 그게 네가 죽을 지당한 이율세. 잘 가라, 멀리 안 간다. (왕상 2:36-46)
9/7
아비아달과 요압의 최후
아도니야의 멍청한 또는 간교한 단독플레이가 날갯짓이 되어 폭풍우를 만든다. 불똥이 아비아달과 요압에게 떨어진다. 때를 기다린 솔로몬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 없다. 이때다, 싶어 모조리 날리는 영민함을 발휘한다. 아비아달은 제사장인데다가 아도니야를 지지한 것 외에는 큰 잘못이 없어 살던 고향으로 조용히 낙향시킨다. 요압은 무력을 지닌 데다가 선왕 때 저지른 큰 죄악이 두 건이나 있어 도저히 살려둘 수 없어 영원한 고향으로 서둘러 귀천시킨다.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고 구세력 척결인데 아비아달은 왜 살려줬을까? 특출난 과오를 저지른 것도 없거니와 물리적 힘은 없다. 허나, 그 힘을 사뿐히 능가하는 강력한 파워를 지녔으니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는 계급인 제사장이라서 그렇다. 종교 권력을 괜히 건드려봤자 반대파만 결집한다. 민심이 중요한 정치가는 민심의 풍향계를 조정하는 세력을 겁 없이 건들어서 얻는 실익도 적다. 하여, 가시는 길 고이 보내드린다.
그러면 왜 요압은? 그는 다윗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세력과 간악한 지혜를 지녔다. 주군 몰래 정적을 두 명이나 암살한 전력이 있다. 그 결과 전쟁이 길어질 뻔했다. 선왕의 특별한 유지도 있었다. 언제고 제 세력 규합하여 무슨 짓 할지 모른다. 왕권은 약해지고 국정은 혼란스러워진다. 때문에, 요압은 곱게 죽으면 안 된다. 하여, 가시는 길 빨리 보내주었다. 종교 권력은 살살 달래고, 군부 세력은 확실히 누른다. 멋지다, 솔로몬! (왕상 2:26-35)
9/6
아도니야, 밧세바, 솔로몬
실패한 쿠데타의 주역이 선왕의 여인을 달라고? 그는 끝끝내 버리지 못한 정치적 야망을 지닌 야심가인가? 성적 욕망에 껄떡대는 한갓 필부인가? 정치적 의미도 모른 채 요청했다면 한심하고 어리석은 작자이고, 정치적 의도를 숨긴 요구이었다면, 세력도 없고 국가 운영의 플랜도 없이 달려든 것이니 애초에 깜냥이 아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그것 하나로 왕위를 탐내는, 왕이 결코 되어서는 안 될 놈이라는 증좌다. 멍청해서 위험한 놈이로세, 아도니야.
밧세바는 권력자의 사랑과 지위를 탐낸 요녀인가? 아니면 순진하기 그지없이 다윗의 순간적인 욕망의 희생자인가? 이 사건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녀는 측천무후나 문정왕후 혹은 정난정은 확실히 아니다. 이번 요청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전혀 모른 채 해맑은 표정으로 아들에게 조신하게 요청하는 것으로 보면, 그녀의 정치력은 꽝이다. 아도니야의 세 치 혀에 놀아나는 꼴로 봐서는 예전에는 남편을 잡더니, 이번에는 아들을 위험에 빠뜨릴 뻔했다, 가여운 밧세바.
솔로몬은 왕이다. 그에게 정치 아닌 것이 없고, 권력 아닌 것이 없다. 한심한 아도니야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답답한 어머니가 알았든 몰랐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다. 왕국을 반석 위에 세우고, 왕권을 확고히 하고, 정적을 깔끔하게 제거할 명분을 얻었는데, 스스로 무덤 판 자를 놓치면 아니 되고말고. 자기 신하인 어머니를 따끔하게 훈계하고 아도니야를 단칼에 베버린다. 다윗이 후계자로 지목할만하다. 정치 쫌 할 줄 아네, 솔로몬 왕. (왕상 2:13-25)
9/5
그냥 죽게 하지 마라
솔로몬에게 왕의 길을 멋들어지게 유언한 다음 웬 사적인 원수를 아들 손에 피 묻혀 해결하려는 거지? 붉게 지는 노을처럼 아름답게 사그라지면 좋으련만, 좀스럽게시리 무슨 복수질이냐고. 사울 왕에게는 참으로 폼나게, 두 번씩이나 용서하더니만, 심복 중의 심복이요 일등 개국공신인 요압이 곱게 죽지 못하게 하라,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궁색한 나를 심하게 저주한 것을 잊지 말고 저주가 제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는 말과 함께 다윗은 죽, 었, 다.
이 사람, 다윗의 진짜 얼굴은 뭘까? 이 뒤끝 작렬은 뭘까? 정치적으로 본다면, 일면 타당하다. 다윗도 함부로 하지 못한 요압이 아니던가. 생사를 같이한 원로 그룹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노회한 그가 마음먹으면, 어린 왕이야 주머니 속 구슬이지. 국정농단이야 불 보듯 훤한 일. 시므이는 또 어떤가. 어느 때고 왕을 욕하는 일이야 만인의 오락인데, 그자는 심했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악랄한 저주를 퍼부었지. 그는 여론을 이용할 줄 아는 자다.
다윗은 민생 대신 권력 투쟁을 일삼고, 평화 대신 전쟁을 원하는 강경파를 통제하라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적의 위협을 과장해서 왕과 백성을 겁박하고 이념 과잉과 전쟁 불사 정책을 취할 자를 왕인 네가 통제하라는 거다. 권력의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굽신거리지만, 돌아서면 냉혹하게 짓밟는 간신배를 권력 근처에 얼쩡대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렷다. 다윗은 그냥 죽지 않는구나.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다. 이제 다윗이 죽, 었, 다.
9/4
집에 가 있으라
그야말로 전광석화다. 한 방에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아도니야의 결정적 실수는 늙은 다윗을 만만히 본 것이다. 그를 얼마든지 젖힐 수 있다고 보았다가 큰코다친 거다. 자신을 너무 과신한 탓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 저 스스로 무덤 파고 말지만 아직은 아니다. 추종 세력을 너무 의존했던 것인지. 다윗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웅장한 뿔 나팔과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 소리에 그들은 봄 눈 녹듯 지리멸렬하게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목숨은 질긴 거고, 소중한 거다. 일단 살고 볼 일이다. 성소로 난입해서 제단 뿔을 붙잡고 늘어졌다. 가엽게 보였던가, 형제애인가,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형을 죽이는 것이 조심스러웠던 건지, 아직 반대파가 건재하기에 때를 미루고 기회를 엿본 것인지, 아니면 즉위하면서부터 피바람 불면 정권의 방향이 안정과 평화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으로 치달을 공산이 커지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든 간에, 아무튼 솔로몬은 그를 살려주었다.
그렇다고 솔로몬이 무른 왕은 아니다. 살려주어 고맙다고 고갤 조아리지만, 한 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한다. 왕좌를 탐한 자는 제 죽을 줄 모르고 또 달려든다. 아비 다윗이 형 압살롬을 애매하게 용서하듯 처신하면, 또다시 사달이 벌어진다. 군마 대신 노새 태운 전통과 제 이름 석 자에 박힌 평화는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현실에 눈감지 않는다. 그는 죽으리라. 아니 죽이리라. 죽이고야 말리라. 지금은 아니다. 집에 가서 대기하라. (왕상 1:38-53)
9/3
다윗 왕이 명하여
나단의 말을 듣고 나이가 많아 늙은 왕이 기민하게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밧세바부터 부른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가장 먼저 제거될 그녀를 다독인다. 솔로몬이 왕좌를 차지할 것이라는 이전의 굳은 약속을 재확인한다. 그러고는 제사장 사독과 예언자인 나단 그리고 군부의 떠오르는 샛별 브나야를 불러 솔로몬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지시한다.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된 일인 양 순식간에 처리된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다. 비록 아비아달이 저쪽 편으로 넘어가 버렸지만, 그를 대체하고 대신하여 성전의 제사장 그룹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그 일은 사독의 몫이다. 나단은 어떤가. 다윗을 지지하지만, 툭하면 왕의 실정과 악행을 비판하는 예언자들의 지원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교활하기 그지없는 군부의 최고 실력자 요압을 제압해야 할 깡이 넘치는 장수가 없다면, 이 거사는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그가 대제사장의 아들인 브나야다.
다윗은 아비삭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 간신히 기대어 앉았으리라. 계속 대는 기침, 연신 밭아내는 가래, 숨을 몰아쉬며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겠다. 침전이라 어두웠을 듯. 허나, 점차 반짝이는 두 개의 눈동자, 그 형형한 눈빛은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속내를 감추고 세력 판도를 읽고 있었던 걸까? 벼랑 끝에 서보니 예의 그 투지가 되살아난 건가? 음흉하든, 노회하든, 현명하든, 그 모든 것인 다윗은 늙어도 다윗이구나. (왕상 1:28-37)
9/2
다윗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자는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가장 먼저 숙청될 1호인 밧세바와 솔로몬임을 간파하고, 그녀의 모성애를 자극한다. 제 아들 통해 왕위를 잇는다고 공언하지 않았던가, 다윗은. 침상에 무릎 꿇고 앉아 예전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이러다가 나 죽는다고, 아들도 죽는다는 그녀는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을 테고, 다른 한편으로 남편 죽고 울던 그때의 그 모습 떠올라 다윗의 죄책감을 촉발했을 터.
밧세바가 눈물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다윗의 마음을 뒤흔든 뒤, 나단이 등장해서 쐐기를 박는다. 왕이 알지 못하는 일이, 왕이 없이는 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그 한마디는 잠자는 왕을 깨운다. 선왕이 버젓이 살아 있거늘 저 스스로 왕관을 쓰는 자는 반역자다. 아도니야는 대놓고, 왕을 빼놓고 거사를 작당했다면, 예언자는 큰아들을 탄핵하지도, 동생을 추대하자고 압박하지도 않는다. 왕에게 책임전가하지 않고 왕의 일을 하라고 촉구할 뿐.
죄의 속성 중 하나는 무지이다. 예수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렇게 악랄하게 처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지 못해 무고한 사람이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깨끗한 물에 손 씻었다고 무죄할까. 늘 하던 대로 했던 일이 이리도 커졌으니 다윗은 알지는 못했으나 책임이 없다고 결코 말하지 못한다. 왕이라서 그렇다. 책임질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 왕관을 쓴 자의 무지는 무지무지 악하다. 빌라도가 그랬고, 다윗도 그럴 뻔했다. 너도 그렇다. (왕상 1:11)
9/1
나이가 많이 늙으니
다윗은 왜 이러는 걸까? 남정네가 아무리 늙어도 욕정을 지녔거늘 그 아리따운 처녀를 보는 둥 마는 둥 한다. 게다가 아도니야가 왕자의 난을 일으킬 조짐을 보여도 암시랑토 않은 척 못 본 척한다.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압살롬 사건을 잊었나? 역사에서 한 번은 희극이지만 두 번째는 비극이라고 했다지만, 이 경우는 저번에도 이번에도 모두 비극이 될 것이다. 애먼 사람들 서로 원수가 되고, 애꿎은 사람 나가떨어질 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죽게 생겼다.
다윗은 왜 이러는 걸까? 압살롬의 반역 때도 이랬다. 싫은 소리 한마디 못 했다. 그때 그는 무엇을 했던가? 그때 그는 무엇을 잃었나? 그때 그는 얼마나 아팠나? 그때 그는 얼마나 울었나? 그때 그는 무엇을 배웠나? 그런데도 또 싸우고, 또 잃고, 또 울고, 또 아플 건가? 되레 자식 가슴에 못 박고, 가족 상잔의 비극이 재연되고, 국가는 불붙은 내전으로 카오스의 세계로 빨려들 텐데, 다윗은 왜 이러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 이러면 어쩌누.
나이 들어 보니,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인가? 악을 쓰며 달려들어도 이만저만, 흘러가는 대로 냅둬도 고만고만한 것을 알아 설까? 달관의 경지가 아니라면, 한층 깊어진 영적 성숙미일까? 세상만사 주의 섭리인지라 순응하는 걸까? 아니면 오래도록 왕좌를 지키느라고 지친 걸까? 죽을 날짜 받아둔 듯한 늙은 다윗이 살아갈 날이 창창한 이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몰고 가누나. 늙으면 저러는 걸까? 아니야 아니야 저러면 늙은 게지. (왕상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