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에 대한 제문 祭退溪先生文
융경(隆慶) 5년(1571, 선조4) 세차 신미(歲次辛未) 1월 갑자삭(甲子朔) 4일 정묘(丁卯)에 후학 고봉 기대승은 먼 곳에서 주과(酒果)의 제전(祭奠)을 갖추어 재배(再拜)하고 곡하여 보내어 퇴계 선생의 영좌(靈座) 앞에 감히 아룁니다.
아, 애통합니다. 대들보가 꺾이고 태산이 무너졌으니, 제가 다시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습니까. 위로는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짐을 애도하옵고 아래로는 만학(晩學)이 의지할 곳을 잃음을 슬퍼하오니, 어찌하여 저로 하여금 뼈가 놀라고 혼이 날아가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지난해 중동(仲冬) 초순(初旬)에 저는 한 통의 편지를 올려서 기거(起居)를 문안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인편에 혜서(惠書)를 받자오니, 10월 15일에 쓰신 것으로 이웃 고을의 자제에게 부탁해서 전해 부쳐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을 보오니 저에게 모가 너무 드러남을 경계하셨고, 또 시사(時事)가 염려스러울 만함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물격(物格)과 무극(無極)의 해석에 있어서 번거로이 서찰을 왕복하면서도 끝내 합하지 못하던 것들이 마침내 의견이 합치하여 한 길로 돌아가게 되오니, 다행스러운 마음과 위안되는 충정(衷情)을 말로는 진실로 다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다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다면 친히 장구(杖屨)를 모시고 직접 음성을 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헤어져 있는 시름을 씻고 어리석음을 계발(啓發)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어 그달 보름에 이생 함형(李生咸亨)의 인편을 통해 편지 한 장을 올려서 구구한 정을 아뢰었습니다. 하인이 돌아올 때가 되어서는 마침내 손수 쓰신 편지를 곧바로 부쳐 주셨습니다. 처음에 우환이 심하여 더욱 사람을 응접하는 데 권태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였고, 다시 가슴에 담증(痰症)이 갑자기 일어나며 다른 증세까지 합병하여 신음하고 있다고 말씀하였고, 끝에는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였으며, 저에게 오랫동안 한가히 있으면서 고요히 공부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자획(字劃)이 전과 다름을 이상히 여겼으나, 신기(神氣)가 크게 감소하셨음을 깨닫지 못하고는 망녕되이 생각하기를 옛날 증세가 우연히 발작한 것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쾌차하시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이 영결(永訣)하는 글이 되어 다시는 가르침을 받들 수 없을 줄 알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납월(臘月) 20일에 저는 마침 금성(錦城)의 서촌(西村)에 있었는데, 이생(李生)의 급보를 받고 선생이 8일 저녁에 역책(易簀)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놀라 울부짖어 실성통곡하며 애통함이 흉중에 가득하였으므로 이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영손(令孫)인 상사(上舍)의 편지를 얻고서야 그간 선생이 병환을 앓으신 상세한 내용을 알았으며, 또 뒤에 제가 올린 편지는 선생의 병환 때문에 미처 궤안(几案)의 옆에서 봉함을 열어 아뢰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득한 천지에 만나 뵈올 길이 없사오니, 오직 여생을 다하고 지하에 간다면 혹시라도 선생의 의형(儀刑)을 접하여 남은 종적(踪迹)을 뒤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저는 삼가 생각하건대 완악하고 비루한 자질로 실로 인도해 주시는 지극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은혜가 이미 깊고 의(義)가 중하여 마음이 매양 향해 달려가서 감히 그대로 있지 못하였습니다. 생각에는 영외(嶺外)의 수령 자리를 얻어서 몸소 문장(門牆)에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세월이 더욱 빨리 흘러감을 탄식할 뿐이고, 항상 도체(道體)가 장수하시고 강녕하시기만을 축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의 일을 기약할 수 없어서 갑자기 부음(訃音)을 받는단 말이옵니까.
애통하여 사모하면서 길이 울부짖으니 가슴은 답답하고 답답하여 더욱 서글퍼집니다. 천 리 먼 길에 애도하는 말을 엮어서 한 잔 술에 부치오니, 애통하여 저의 정을 다할 수 없사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선생의 영령이 계시면 부디 저의 작은 정성을 굽어 살피소서. 아, 애통하옵니다. 흠향하소서.
또 융경(隆慶) 6년(1572, 선조5) 세차 임신(歲次壬申) 2월 무자삭(戊子朔) 17일 갑진(甲辰)에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를 가지고 사람을 보내어 퇴계 선생의 궤연(几筵) 앞에 올리옵니다.
아, 선생께서 후학을 버리신 지가 지금 벌써 15개월이 되었습니다. 후학들이 추모하는 애통함은 날이 갈수록 쌓이니, 더욱 멀어질수록 잊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사(人事)와 세도(世道)에 대한 감회까지 겹치니 애통하고 애통하옵니다.
근년 이래로 저는 전리(田里)에 엎드려 있어서 비록 학문을 연구하고 탐색하는 일에 힘을 다하지는 못합니다만, 또한 때로는 한두 가지 새로운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질정(質正)할 곳이 없으니, 매양 옛날 선생과 왕복하며 논변(論辯)하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더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초기(初朞)에 저의 생각에는 멀리 한 잔 술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길이 멀고 노복(奴僕)이 적어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감히 소략하게나마 변변찮은 물건을 장만하여 작은 정성을 올리오니, 선생께서는 밝게 강림하시어 우리 후학들의 뜻을 도와주소서. 아, 애통하옵니다.
[주1] 대들보가……무너졌으니 : 퇴계(退溪)의 죽음을 슬퍼하는 말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2] 역책(易簀) : 스승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임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
祭退溪先生文
維隆慶五年歲次辛未正月甲子朔初四日丁卯。後學高峯奇大升。遠具酒果之奠。再拜哭迸敢告于退溪先生靈座之前曰。嗚呼痛哉。樑木之摧而泰山之頹乎。吾復何以爲懷也。上悼斯文之墜地。下憐晩學之失依。曷爲不便我骨驚而魂飛也。嗚呼痛哉。粵在去歲仲冬之初。委拜一書。以問起居矣。俄於便中。獲奉患書。蓋十月十五日所裁。而託鄰邑子弟。轉寄以來也。旣警我以稜角之太露。又申之以時事之可虞。矧乎物格無極之訓釋。繳紛往返。而不克合者竟同歸而幷趨。感幸之忱。慰滿之衷。言固不可以喩。而心亦不能以容也。以爲如此。雖未得陪杖屨。而親警欬。亦足以滌離愁而發愚蒙也。繼於是月之望。因李生咸亨之伻。仰修一狀。以達區區之下情焉。逮夫賤伻之言旋。乃眷手翰以還答。始言憂患之前迫。益致憊倦於應接。又言胸痰之暴起。挾以他證而呻伏。卒嘆請老之不遂。勉我久閑而靜學。私竊怪字畫之異昔。而未始覺神氣之愆瘁。妄謂舊痾之偶動。當見勿藥而有喜。夫豈知其爲永訣之筆。而不復更承於敎指也耶。嗚呼痛哉。臘月二十日。適在錦城之西朴。忽得李生之報。伏聞先生易簀於初八之昏。驚呼失聲。痛徹心膂。不自知此身之生而存也。倂得令孫上舍之書。乃知先生寢疾之詳。又知後來仰修之一狀。以先生疾而不遑披達於几案之傍也。茫茫天地。會晤無從。惟有畢餘生以遊地下。庶或有以接儀刑。而躡遺蹤也。嗚呼痛哉。竊念頑鄙之資。實蒙誘掖之至。恩旣深而義重。每因嚮往而不敢置思。欲乞郡嶺外。儻得躬造於門墻。慨日月之愈邁。恒祝道體之鬱康。何人事之不可期。遽承音於不祥。怛摧慕以塡傷。緘辭千里。以寓一酹。悲不能悉我之情也。伏惟先生英靈之如在。尙冀以鑒此微誠也。嗚呼痛哉。尙饗。
又
維隆慶六年歲次壬申二月戊子朔十七日甲辰。後學高峯奇大升。謹以酒果。伻奠退溪先生几筵之前曰。嗚呼先生之棄後學。今旣十有五月矣。後學追慕之痛。與日而俱積。蓋愈遠而難忘也。況又重之以人事世道之感乎。痛哉痛哉。比年以來。屛伏田間。雖不克盡力於硏索。亦時有一二之見解。顧無所於訂質。每念昔時往復論辨之樂。尤不勝其悲也。曩於初朞之際。意欲遠寓一奠。而路脩僕單。竟不得遂。恒抱悒悒之懷。今敢略具薄物。仰申微忱。庶幾先生之昭鑒。有以相我後學之志也。嗚呼痛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