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루중신기(映湖樓重新記)
영호루(映湖樓)는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고호임)의 명루名樓이다. 그 강산江山의 뛰어나고 기이한 장관은 비록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에는 손색이 있다 하겠으나, 똑같이 낙동강洛東江의 언덕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서 상산商山에 있는 관수루觀水樓와 일선一善에 있는 월파정月波亭은 자못 이 누각과 갑을甲乙을 겨룰 수가 없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이 고을에서 거가車駕를 멈추고, 이 누각에 올라 노닐면서 즐기다가 환도還都한 뒤에 서연書筵에 나가서 손수 이 누각의 편액扁額으로 영호루映湖樓 세 글자를 크게 써서 하사하였다. 그러자 이 고을 사람인 통판通判 신자전申子展이 누각의 제도를 더 크게 하고 편액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 빛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바로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전이 이 누각의 제도를 증대시킨 지가 지금 백 년이 넘었으니, 그 사이의 수재守宰들이 어찌 기둥과 서까래, 마룻장과 난간의 썩고 휘어진 것과 지붕의 기와와 층계 벽돌의 뚫리고 깨진 것들을 수리한 적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다 같지 않다. 그래서 인사人事를 곡진하게 닦는 자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며 문안을 드리기에 급급하고, 한갓 규모規模만 지키는 자는 관청의 잗단 사무만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니, 그 누가 누각의 황폐하고 퇴락한 것을 수리하면서 자기가 저축한 재용財用을 소비하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이 누각이 날로 퇴락해가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그런데 나의 동년同年인 제안齊安 김후 질金侯耋이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있다가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수년도 다 못 되어서 정사는 통창하고 사람들은 화합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리고 토지土地와 노비奴婢에 대한 소송訴訟은 온 도내道內의 사람들이 감사監司에게 진정서陳情書를 내어 김후에게 가서 판결 받기를 원하였다. 김후는 매양 이분(二分 원고原告와 피고被告를 뜻함)의 즈음을 당할 적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신중히 생각하여 재결裁決하니, 승소勝訴한 자도 패소敗訴한 자도 모두 다 만족하게 여겼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판결료判決料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가득 차서 넘치게 되었다.
그러자 김후가 이에 이민吏民들과 함께 의논하여 이 누각을 고쳐 짓기로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무신년 3월 어느 날에 일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이방吏房과 호장戶長에게 윤번으로 이 일을 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집터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면적의 척수尺數는 자못 더하거나 줄인 것이 있다. 그 높이와 너비는 예전의 것보다 3분의 1을 더하였고, 그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박을 입힌 편액의 경우는 또한 밝게 빛나서 면목이 일신되었다. 시작한 지 겨우 두어 달을 지나서 공사를 마치니,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를 막론하고 모두 쳐다보고 감탄하면서 다 신神이라고 여기었다.
그 다음해에 김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문記文을 지어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문득 자신을 헤아리지 않고, 속으로 담암淡菴, 목은牧隱 두 노선생老先生과 함께 그 사이에 이름을 연기聯記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여, 마침내 붓을 잡고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후의 정사 하는 것은 청렴하고 공평하고 까다롭지 않으며, 모든 일을 법도에 맞게 한다. 그러니 그 인사나 곡진하게 닦는 자에 대해서는 개돼지처럼 취급할 뿐만이 아니고, 그 한갓 규모나 지키는 자에 대해서는 종僕이나 하인처럼 취급할 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민吏民들이 김후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마치 천백 년 뒤에 공수龔遂, 황패黃霸를 다시 보는 것처럼 여기니, 그가 한 누각을 위해서 공功을 일으키는 것이야 어찌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예로부터 풍속이 순후淳厚하다고 일컬어진 곳으로 이 고을 만한 데가 없으니, 그 백성은 응당 부리기가 쉬울 것이다. 더구나 이 누각을 수리한 뜻은 편안히 노닐기 위한 것이 아니요, 후세에 명성 얻기를 위한 것도 아니며, 다만 옛 규모를 떨어뜨리지 않는 데에 그친 것임에랴. 여기에 대해서 또한 나는 더욱 느낀 바가 있다.
옛날 성화成化 초년(1465, 세조11)에 나는 몸소 활집과 화살통을 메고 울산蔚山의 군막軍幕에서 모두 2년 동안을 군직軍職에 종사하였다. 그때에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여기에 가기만 하면 반드시 이 누각에 올라서 이리저리 배회하며 사방을 조망眺望하였다.
그 동쪽 30리는 곧 청부靑鳧의 땅이니,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구름이 성대하게 하늘에 닿아서 곧장 주실周室의 유태有邰의 경사와 더불어 그 장구長久함을 같이하고 있다.그리고 그 북쪽 10리는 곧 병산甁山이다. 여기에는 역적 견훤甄萱의 일천 기병騎兵이 험조險阻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무너져 달아났고 위장僞將은 머리를 바쳤다. 왕씨(王氏 고려 태조)의 의기義氣가 동남쪽에서 크게 떨치게 된 것은 바로 이 싸움이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
서쪽으로 풍악豐岳을 바라보면, 원봉元逢이 먼저는 귀순했다가 뒤에는 배반하여 육인六人의 태사太師와 함께 공명功名을 누리지 못한 것이 슬프다. 남쪽으로 갈나산葛那山을 바라보면 푸른 산봉우리 하늘을 떠받쳤는데, 그 연운煙雲과 초목草木이 완연히 김생金生이 글씨를 배울 때에 붓을 휘둘러 먹을 뿌리던 여세餘勢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배회하다가 피곤해지면 반드시 배를 띄우고 노 저어 가는 대로 맡겨서 이리저리 굽은 물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혹은 밤중에 이르러서야 홍취가 다하여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누각의 여러 가지 좋은 경치는 왼쪽이나 오른쪽 어디서나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어 얻은 것이 많았다. 그로부터 지금 벌써 20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잊지 못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오락가락하고 있다. 그러니 혹 김후의 임기 동안에 내가 남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성취하게 된다면, 곧 의당 하인 한 사람과 말 한 필의 간단한 차림으로 재차 이 호수湖水 위에서 노닐며, 김후와 함께 이 누각에 올라서 옛일을 이야기하고 시도 읊곤 하여 이 고을 백성들의 칭송을 이을 것이다.
[주1] 공수(龔遂), 황패(黃霸) : 공수는 한(漢) 나라 때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경내(境內)를 대단히 잘 다스렸던 훌륭한 지방관이었고, 황패도 역시 한 나라 때 영천 태수(潁川太守)가 되어 그 고을을 매우 잘 다스리어 명성이 높았던 훌륭한 지방관이었다.
[주2] 청부(靑鳧)의……같이하고 있다 : 청부는 곧 청송(靑松)의 고호이고, 사록(沙麓)은 지명인데, 춘추 시대에 사록이 무너지자, 태사(太史)가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645년 뒤에 성녀(聖女)가 날 것이다.”고 하였는바, 과연 한 원제(漢元帝)의 황후 왕씨(王氏)가 났다는 고사에서, 즉 왕비(王妃)가 나는 경사를 의미한다. 유태(有邰)는 곧 유태씨(有邰氏)의 딸로서 주(周) 나라 시조(始祖) 후직(后稷)의 어머니가 된 강원(姜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바로 청송 심씨(靑松沈氏)의 집안에서 세종비(世宗妃)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났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3] 원봉(元逢) : 본디 풍산현(豐山縣) 사람인데, 처음에는 그가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귀순하였으므로, 그 현(縣)을 순주(順州)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그가 다시 견훤(甄萱)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다시 이 현을 하지현(下枝縣)으로 강등시켰다는 고사가 있다.
[주4] 갈나산(葛那山) : 전설(傳說)에 의하면, 신라(新羅) 때의 명필(名筆) 김생(金生)이 이 산에서 글씨를 배웠으므로, 뒤에 이 산을 문필산(文筆山)으로 개칭(改稱)했다고 한다.
映湖樓重新記
映湖。永嘉之名樓也。其江山瑰偉之觀。雖或讓於晉之矗石。密之嶺南。然而同據洛水之岸。在商山曰觀水樓。在一善曰月波亭。殆不能與斯樓爭甲乙焉。高麗恭愍王。避紅巾南奔。駐蹕于州。遊是樓而樂之。旣還都。御書筵。手寫樓額三大字以錫。州人通判申子展。增大樓制以揭之。至今輝映于甍棟間。此則矗石,嶺南之所無有也。子展之作。距今百有餘年。其間守宰。豈無治其楹桷板檻之腐橈者。蓋瓦級甎之穿缺者。然人心不同。曲修人事者。苞苴問遺之爲急。徒守䂓模者。簿書期會之不暇。誰肯用力於修擧廢墜。以渫吾所畜之財用乎。樓之日以頹圮。無足恠已。吾同年齊安金侯耋。由御史中丞。綰左符于玆。未數年。政通人和。仍歲穰熟。且土田臧獲之訟。一道之人。投牒監司。願歸于侯。侯每當二分之際。夙夜裁决。伸者負者。俱滿其意。由是。收質之錢布。充溢帑藏。侯於是。謀諸吏民。改構斯樓。遂以戊申三月日。召募游手。輪役吏戶。基地則因舊。而尋引丈尺。頗有增損。其崇廣頓加三之一至其赤白之飾。金泥之牓。亦煥耀改觀。才閱數月。而厥功已就。州民耆幼。瞻仰咨嗟。咸以爲神焉。越明年春。侯抵書於僕曰。願有述。僕輒不自揆。竊喜與淡菴,牧隱二老。聯名其間。遂操觚而嘆曰。侯之爲政。廉平不苛。動以法度。其視曲修人事者。不啻若狗彘。其視徒守䂓模者。不啻若僕隷。吏民愛而敬之。如見龔,黃於千百載之下。其爲一樓而興功。豈不有餘裕哉。况古來稱淳厚之俗。無如是州。其民可以易使乎。况是樓之修。非爲逸遊也。非爲後世名也。只毋墜舊䂓而止乎。抑僕益有所感矣。昔成化初。身屬橐鞬。從事于蔚山戎幕。凡二朞。嘗以事往來是州。非一二遭。至則必登是樓。倘佯瞻眺。其東三十里。卽靑鳧之境也。沙麓祥雲。藹藹屬天。直與周室有邰之慶。同其久長。其北十里則甁山也。逆萱千騎。扼于險阻。遂至崩奔。僞將授首。王氏之義氣。大振于東南。此戰爲之兆也。西望豐岳。哀元逢之先順後悖。不得與六太師。共享功名。南望葛那山。蒼翠撑空。其烟雲草木。宛帶金生學書揮洒之餘勢焉。徙倚旣倦。必泛舟信棹。灣碕曲渚。溯洄上下。或至夜分。興盡而旋。凡樓之勝賞。左右逢原。而所得者多矣。今已二十餘年。尙耿耿往來于胷中也。倘使侯之大滿。獲遂余南還之計。則當以單僮匹馬。再遊湖上。與侯登樓。話舊且賦詩。以續夫州民之輿頌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