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 논어(論語) 1 신축년(1781)에 이시수(李時秀), 홍이건(洪履健), 이익운(李益運), 이종섭(李宗燮), 이현묵(李顯默), 박종정(朴宗正), 서용보(徐龍輔), 김재찬(金載瓚), 이조승(李祖承), 이석하(李錫夏), 홍인호(洪仁浩), 조윤대(曺允大), 이노춘(李魯春) 등의 대답을 뽑았다
[양화(陽貨)]
이 장의 상근(相近)의 성(性)은 기질(氣質)을 말하는 것이고 맹자(孟子)의 성선(性善)의 성은 본연(本然)을 말하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가 성을 말한 것에 이렇게 본연과 기질의 차이가 있음은 어째서인가? 《집주》에서 주자는 말하기를, “여기 이른바 성이라고 한 것은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고 하였고, 정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기질의 성을 말한 것이지 성의 근본을 말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기질을 겸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기질만을 오로지 가리킨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과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이노춘이 대답하였다.]
이(理)와 기(氣)가 비록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기질 속에서 그 이(理) 하나만을 가리키면 본연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기(氣)를 겸하여 가리키면 기질의 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른바 기질의 성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서로 가까운 것[相近]이지 일찍이 서로 먼 것[相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생품(生稟)의 다름을 논하여 그 바로잡기를 힘쓰도록 한 것이고 맹자는 부여(賦與)받은 근원을 미루어 하여금 잘 돌이키게 하려 한 것이니, 말에 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장에서 겸하여 말하였다느니 오로지 말하였다느니 한 것은, 성을 말하기만 하면 이미 기질 안에 붙어 있는 것이니 어찌 성 밖에서 기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의 말을 정설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이 장의 불이(不移)는 주자는 ‘변화시킬 수 없음[不可移]’을 위주로 하여 말하였고 정자는 ‘변화하려 하지 않음[不肯移]’을 위주로 하여 말하였다. 어느 것이 정설인가? 만약 ‘성인이라도 생각을 안 하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생각을 잘하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는 말로 보면 정자의 말이 옳고,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이 불초했던 일과 사흉(四凶)을 교화시키기 어려웠던 일’로 보면 주자의 말이 옳다. 절충한 의논을 듣고 싶다.
[김재찬이 대답하였다.]
이 장은 유(惟) 자에 무게가 실려 있으니, “오직 이 변화시킬 수 없는 자는 바로 상지(上知)와 하우(下愚)이고, 상지의 아래와 하우의 위는 모두 변화시킬 수가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자의 말을 이 장의 정설로 삼고 정자의 말은 단지 또 다른 하나의 학설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위는 양화편(陽貨篇)이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陽貨]
此章相近之性。氣質之謂也。孟子性善之性。本然之謂也。孔孟言性。有此本然氣質之異。何也。集註朱子則曰。此所謂性。兼氣質而言。程子則曰。此言氣質之性。非言性之本也。或以爲兼氣質。或以爲專指氣質者。果孰得孰失歟。魯春對。理與氣。雖不相離。然就氣質中。單指其理。則曰本然之性。兼指其氣。則曰氣質之性。而所謂氣質之性。亦相近而未始相遠。故夫子。論生稟之異。而勉其矯捄。孟子。推賦與之原。而欲其善反。言各有所主也。至如此章。兼言專言之分。則纔說性。便已寓氣質中。豈容於性外。言氣質耶。恐當以朱子爲正。此章不移。朱子則主不可移說。程子則主不肯移說。何說爲正。若以惟聖罔念作狂。惟狂克念作聖觀之。程說是。若以朱,均之不肖。四凶之難化觀之。朱說是。願聞折衷之論。載瓚對。此章重在惟字上。猶言惟此不可移者。卽上知與下愚。而上知之下。下愚之上。皆可移也。然則當以朱說爲此章正義。而程說特備一說爲當。 以上陽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