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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장군 묘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1. 오늘 따라 4월말경의 봄날씨가 화창하다.
2. 홍살문 너머로 묘역이 규모있게 펼쳐져 있다.
3. 남부지방에서 3월 하순에 피는 목련이 파주에서는 4월 말경인데 아직 피어 있다.
4. 윤관 장군의 친필과 7세 어린이 적에 지은 시를 기록하고 풀이한 비석이다. 아래는 이 내용을 5부분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4-1 : 첫째 윤관의 친필 부분
4-2 둘째, 친필을 풀이하기 위해 후손이 단락을 나눠 본것이다.
4-3. 후손이 좀더 쉽게 우리말로 해석한 것이다.
관외(먼 지역)에 명을 받든 후 오래 적조하였소. 천은(임금의 은혜)이 망극(매우 커)해서 그 중에도 사명을 다했소이다. 나에게 성심 있는 자 있어 간혹 승당(승진)시처럼 주연을 베풀어 영화롭게 하니 이 또한 천은이거늘 이제 마침 영감이 윤경과 더불어 온다하니 분에 넘치는구려. 명일(내일)에 윤경과 같이 온다함은 틀림없이 나의 벗이 되려하나 주연을 베풀어 나이 많은 늙은이를 위로한다함은 틀림없이 아주 저버리지는 아니함이로세. 거듭바라는 바 절절하오. 경백 관 (윤관은 공경하여 사룁니다. 경백은 편지 끝에 쓰는 말) -----------
* 보충해설 ( )속에 보충 말은 이재익 주 윤관이 변방에서 근무하여 공을 세우니, 왕이 위로하기 위해 신하를 보내서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고자 한다. 본인은 윤경潤卿을 주연을 베푸는 일을 담당하는 실무자로 파악한다. 윤관은 위로하러 오는 분에게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써 보낸 것으로 보인다.
4-4. 윤관이 7세 때 지은 한시, 뽕나무를 읊은 것이다. 필적은 후손이 썼다.
4-5. 윤관의 7세 시를 한글로 풀어 해석한 것.
뽕잎은 누에를 길러 추위를 막게하고, (뽕나무) 가지는 굳센 활이 되어 오랑캐를 쏜다. 이름은 비록 초목일지라도 참으로 국보로다. 자르거나 꺾지 못하게 아이들을 훈계하리.
* 어린 아이가 뽕나무의 유용함을 이토록 절실하게 바라보고 있구나. 벌써 장차 장재將材가 될 그릇이 엿보인다.
5. 장군의 사당을 여충사라고 한다.
6. 여충사 전경
7. 여충사 전경
8. 장군의 묘역이 잘 관리 된 것을 보니 파평윤씨의 명문가 전통이 느껴진다.
9. 윤관장군 묘역 안내판
10. 석물이 참 다양하고 많은 편이다. 왠만한 왕릉 버금간다.
11. 잔디도 잘 가꿨다.
12. 왼쪽편 석물
13. 오른쪽 편 석물
14. 돌 양이 양쪽에 두마리씩 네마리다.
15. 가운데 석등은 장명등이라고 한다. 우뚝한 돌은 망주석, 망주석은 멀리서도 무덤을 알아 보게하는 표지석이다.
16. 문하시중은 고려 수상, 조선은 영의정에 해당한다.
17. 한가히 역사에 젖는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18. 교자총과 전마총 좌측은 윤관 장군이 타고 다니던 교자총(교자轎子의 무덤)이다, 오른 쪽은 전쟁터를 누비며 타고 다니던 戰馬의 무덤, 전마총이다. * 平轎子 준말은 교자 : 종1품 이상 및 기로소 당상관이 타는 가마. 앞뒤로 두 사람씩 네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
19. 장군의 묘에서 시원하게 바라보이는 묘역과 멀리 보이는 마을 정경
20. 이것은 장군의 묘 담장 바로 뒤쪽(윗쪽)이다. 여기에 원래 청송심씨 묘가 여러기 있었는데 이장하고 빈터가 됐다. 청송 심씨도 조선시대 세력있는 명문가여서 감히? 이곳에 묘를 썼나보다.
21. 두 가문은 2007년에 화해 했다.
22. 윤관장군 묘역 2~300m 오른쪽 도로가에 작은 사당이 있다. 파평윤씨 참의공파 윤해진 선생은 세적을 찾아 땅을 기부하고 문중을 규합한 공로자이다. 이 분은 24세에 북한쪽에서 단신 월남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23. 윤해진이 이룬 선조의 사당, 선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심지원 묘와 청송심씨 묘역
24. 조선 인조~효종시 명신 심지원의 사적
25. 신도비 : 왕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영26. 영의정 심지원의 묘
27. 영의정 심지원의 묘
28. 영의정 심지원의 묘
29. 영의정 심지원의 묘역 부근 일족들의 묘
30. 영의정 심지원의 묘역 부근 일족들의 묘
31. 4월 묘역의 진달래가 내방객을 반갑게 맞이하며, 운치를 돋운다.
32. 심지원의 아들 심익현은 효종의 부마가 됐다.
33. 청평위 심익현공 천장비, 위의 비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건대,
주인공 심익현은 인조 19년(1641년)에 영의정 심지원의 3자로 태어나서 숙종 9년(1683년)에 43세로 졸한 분이다. 10세때 효종의 3녀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청평위에 봉하여 졌다.
사신으로 청나라 연경(북경)에 3차례나 다녀오고, 오위도충부 도총관(요즘 육군본부 최고 지휘관 격, 실권보다는 명예적 의미가 강하다.) , 내섬시 제조를 지냈으며, 촉서체에 능하여 여러 곳의 비문을 남기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수명이 단명한 것이 안타깝다.
원래 산소는 고양군 원당면 석천리 도내동산에 넓은 선산에 묻혔으나, 1926년 몰지각한 후손이 매각하여 주위가 개발되고 주택이 들어서서 산소로소는 부적합 환경이라 문중이 고심하여 오던 차에 2009년 아버지 심지원 묘역 아래로 천장하고 11대 후손 심봉구가 대표가 되어 이 천장비를 세운 것이다.
그곳의 다른 선조들의 묘는 돌 볼 겨를이 없고, 우선 청평위와 숙명공주 내외분 합장묘만 옮겨 온 것이 안타깝다. 숙명공주는 숙종 24년(1699)에 60세로 졸하였다. 조상의 숭배와 조상의 산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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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람찬시간 공유 감사합니다...
멀리서 오셨네요. 우리나라 역사를 사랑하는 분 같습니다.
이 내용이야 널리 알려줘도 좋겠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