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암, 그리고 삶의 여유
누군가 여행은 창조이며, 희망이며, 행복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여행은 낯선 곳에서 다른 사람이 먹던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다른 사람이 덮던 이불을 덮고 자는 일이라고도 했다. 숲생태해설가의 나들이는 전문 여행가나 여기를 즐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과는 다르다. 현장 답사를 통해 숲해설가로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낯익은 곳에서 벗어나 멀리 낯선 곳을 다녀온다는 의미에서는 일반 여행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매달 한 번씩 다녀오는 현장답사는 심화학습을 겸한 나들이로 숲생태해설가로서 자질 함양에 도움이 된다. 여수 향일암과 오동도다. 푸른 다도해의 아름다움도 감상하고 난대식물의 숲 생태도 관찰할 예정이다. 매번 팀별로 돌아가며 나들이를 운영해 왔다. 이번에는 내가 속한 팀이 맡았다. 아침 일곱 시 삼십 분 예정대로 출발했다. 답사지에 대한 기대, 함께 가는 동료들과의 즐거움, 차창에 비치는 초가을 풍경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원만한 답사를 위해 한 달 전부터 준비했으나 현지의 숲 생태에 대한 정보 부족은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날씨는 최상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차창을 비춘다. 멀리 보이는 산에는 나무와 풀들이 가을을 준비하는 듯 한여름의 푸름과 빛깔이 다르다. 들판에는 누른 벼 이삭이 영그느라 분주하고 산비탈에 자리 잡은 작은 밭뙈기에는 콩이며 고추가 여문다. 드문드문 보이는 배추와 무도 길차게 자라 풍요로움을 더한다. 이어지는 들녘의 풍광이 가을 그림이다.
여수에서 돌산대교를 지나 금오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높아진 푸른 하늘과 서늘한 바람이 우리를 반긴다. 진녹색의 숲이 우거진 능선을 따라 향일암을 찾아간다. 풀과 나무로 덮인 산길이 미로를 만들기도 하고 갑자기 다도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길가에 핀 가을꽃을 관찰하기도 하고, 낯선 나무의 이름을 서로 묻기도 한다. 주름조개나물·며느리밥풀·며느리밑씻개·박쥐나물 등 별난 풀이름에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소사나무·광대싸리·굴비나무·예덕나무·비목나무·까치박달나무 등의 특징을 찾아 공부도 한다.
이리저리 낯선 길이 헷갈릴 때면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고맙다. 산길이 지루할 때쯤이면 멀리 산 아래로 짙은 푸른색의 바다가 마음을 달랜다. ‘해를 바라본다’는 뜻을 지닌 향일암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은 암자이니 쉽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일행은 앞서 가고 맨 뒤에 최 선생님과 함께 남았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많고 몇 년 전에 위암을 앓았다. 다른 일행이 기다리니 먼저 가라고 독촉을 하나 함께 보조를 맞추어 걷는다.
“내가 이렇게 천천히 가는 것이 무리하다가 다치는 것보다 동료에게 피해를 적게 주는 것이다.” 무릎을 치게 하는 철학이다. 내심 최 선생님이 좀 더 빨리 가기를 바라고 있지 않았는가. 삶의 연륜이 숨어 있는 말씀을 되새기며 ‘그래, 빨리 가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 일행은 좀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제일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다. 금오산 정상 323Km란 표지석을 지난 후부터 시작되는 계단 길에서는 더욱 자세를 낮추며 조심조심 내려왔다.
향일암 들어가는 바위틈 길이 이색적이다. 큰 바위가 서로 의지하며 틈을 내어 만든 길이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좁다. 아무리 급해도 한꺼번에 빨리 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자연석 바위틈 길이 내 마음을 달랜다. 행복한 삶에는 바쁠수록 천천히 가야 한다고……. 시간이 지체되어 급해지던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향일암은 전남 여수시 돌산읍 금오산에 있는 암자로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다. 안내문에 의하면 서기 644년 신라 선덕여왕 13년 원효대사가 원통암( 圓通庵)으로 창건했으나, 고려 광종 9년 (958년) 윤필대사가 금오암(金鼇庵)으로 개칭했고, 다시 남해의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해돋이 광경이 아름다워 조선 숙종 41년(1715년) 인묵대사가 향일암이라 불렸다.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86년에 지어졌으며, 불행하게도 2009년 12월에 불이나 대웅전, 종무소, 종각을 태웠단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종각 등의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관음전 앞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모습이 장관이다.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다도해가 더욱 푸르다. 섬 사이로 보이는 수평선이 내 마음을 정화한다. 마음속 갈등과 물욕이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떠난다. 푸른 하늘과 바다가 영겁의 세월을 이어 왔지만, 아직 하늘과 바다일 뿐이라며, 백 년도 못사는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애를 써도 인간일 뿐이란다. 내가 태어날 때 갖고 온 순수함이나 잃지 않고 살라고 한다. 곁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멀리서 푸른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향일암에서 밤을 보내고 싶다.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지고, 해안가에는 파도가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먼 바다에는 고기잡이배 한 척 외롭게 빨간 불빛을 비추며 서서히 살아진다. 가끔 바람 따라 들려오는 풍경소리 들으며,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삶의 모습을 그러본다. 벌써 생의 끝자락에 와 있다고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갖고 싶은 물건 등 희망, 혹은 새 출발이란 말과 연결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간이란 고독의 순간에 가장 순수해질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무덤덤한 일상에서 삶을 돌아본 하루다. ♡
(2011. 9. )
첫댓글 몇년전 개인 볼 일, 등산회, 활동하고 있는 사회단체에서 돌산대교, 이순신대교,향일암,
금오도 등을 연이어 다녀 온 적이 있는데 해변가 굴 농장이란데서 굴을 구어 먹으며 손을 몇 군데나
덴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난 날들을 기억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