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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ictorial Context of Korea Performance Art and the Identity of Spontaneous Generation
Kim Young-jai(Art Philosopher, Ph. D.)
Korean Performance Art 1967-2007 exhibition and the opening performance was shown lately, at the Korea National Contemporary Museum of Art. The exhibition is characterized to cultivate the materials and documents, more flexible than 1989 Young Artists exhibition by same museum, partly because the organizers want to be neutral in evaluating the Performance art, partly because Korean people urged to see what they know in terms of their natural and spontaneous temper.
In appreciating and criticizing the performance art, we have to keep in mind that the Performance Arts-including Happening, Event and other arts based on behavior and act, are basically keep an exclusive boundary within the context of the painting & drawing, allowing considerably no other genre, like sculpture, craft, music and dance, and the like.
As a result of a structural recording and analysis of two characteristic performance arts as an art critic and video maker, two definitions were made. In 1989 Performance Arts Festival out of 18 artists, the definition was that the "dramatized sympathy of life and art, engagement messages are staged with one-man show style". Meanwhile the definition in 2005 Kopas Experimental Arts Festival by 30 performers were, "the self-statements in terms of little theater type, by the symbolic meaning of life and arts, the metaphor by staged situation and visualizing the logic and the sympathy."
Upon analyzing the most important cases in 40 years, it is concluded that the symbolic, narrative and archetypical drives are most characterized and important in Korean Performance Art. From the very beginning of the Happening in Korea to the Performance now, symbolism roles most crucial part of the context. Narrative factors are well shown from the Pansori-narrative drama in Korea to the story-telling or suggesting style Performances. Archetypal trends are shown at most of the Performance with traditional objects, cultural heritage and Korean temper.
Korean performance arts has been exposing considerable discrepancy ranged to more than 20 years to that of the world performance art history. During the interval, the spontaneous Korean temper and Korean context-symbolism, narrative and archetype-were able to mixed with t
he so called the Performance Arts. Therefore,
34Korean Performance arts face two barriers to be the world-wide trends. that is to say, one is rebuild in terms of pictorial context, the other is to re-organize Korean characters like symbolism, narrative and archetype in the main stream of the world Performance Arts.
#행위미술 #해프닝 #이벤트 #퍼포먼스 #한국행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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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과 자생의 퍼포먼스 -한국 80-90년대
김영재(미술사상가, 철학박사)
한국미술의 80년대는 모던 아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국전의 폐막과 아카데미즘의 퇴조, 신형상이라는 표현양식을 추구했던 현실과 발언, 임술년, 시대정신, 젊은 의식 등의 작업과, 서울 국제 메일아트전 등의 사조들이 행위 및 설치미술과
함께 활발히 시도되고 있었다. 이러한 실험정신은 90년대까지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한국행위미술의 80년대, 그리고 90년대는 행위와 설치가 양극화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한국미술의 대표성을 획득하려고 하는 듯한 치열한 대결 및 견제의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행위미술은 행위가 끝나면 행위를 기록으로 남긴 후 설치만을 남기게 된다는 특성이 있다 보니, 행위미술이란 설치미술 속에서 행위하는 미술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 80년대 한국의 행위미술이었다.
행위미술은 그 기록이 풍성하다. 80년대에 이어 90년대에는 개인적인 행위와 함께 단체행위가 눈에 띈다. 1988년에는 퍼포먼스협회가 결성되어 다른 개성과 주장과, 양상과 반응이 다른 행위들이 한 자리에서 순차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개인 작업으로는 백남준, 육근병, 김용문, 이상현, 홍오봉, 김석환, 조현재, 유도화,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그룹 행위로는 「1986년, 여기는 한국전」,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 1989년의 「행위미술제」,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서울전」,「동방으로부터의 제안-도쿄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청년작가전」 등 단발성 행위와, 자연 또는 인문환경을 업고 정기적으로 발표활동을 벌였던 야투, 교감예술제, 겨울대성리 등에서의 행위를 들 수 있다.
예술가는 개인으로 세계를 제패한다
김용문은 1983년 고사목지대에서 「매장, 그리고 발굴전」, 1984년 「수장제」 1985년 「방사(放死), 방생(放生), 방사(放赦)전」, 1986년 「애장제(-葬祭)등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무속인 굿과 연계된 작업을, 고상준과 15명의 행위자에 의한 1986년 「생의 굴레」, 1986년의 「소리와 서주」, 1986년 「사교전」을 통해 New Dance 적인 요소를 가미한 문명비판적인 몽상과 은유를 행위화한다.
1988년 이상현은 「잊혀진 전사의 여행」, 「지진시계」 등을 통해 안드로메다의 여왕, 안개여왕과 네모 함장의 만남 등의 소재에서 읽을 수 있듯이 기상천외의 발상에 의한 동화적인 환상과 설화성을 극대화한 설치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1990년 7월 20일 현대화랑의 뒤뜰에서 33백남준의 보이스(Joseph Beuys)추모 퍼포먼스가 있었다. 껍질만 남은 「TV 수상기」와 「자빠진 피아노」라는 자신의 식별표지 위에 수의를 덮고 흙을 뿌리는 것은 매장의 형식이었고, 보이스의 영정에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 바르고 쌀을 뿌리며, 갓 위에 마요네스와 케첩 및 쌀을 뿌리고 얼굴을 박는 행위, 두 개의 장죽에 불을 붙여 국악기의 하나인 편종처럼 놋향로를 매달고 대야에 혼 부르기 장단을 맞추다가 머리를 놋대야에 부딪친다는 행위는 초혼의 의식이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상황이나 오브제를 빌려온다는 의미에서 차용, 상황이나 오브제를 먼저 설정하고 자신이 그에 동화 또는 일체화한다는 화육(化肉)의 행위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퍼포먼스가 한국적인, 그러나 국제화한 한국적 원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신도 세계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지향하는 작가들에게 범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적인 소재는 홍오봉에게서도 극적으로 행위화한다. 1991년 작, 「나의 누이 혜경궁 홍씨」 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모곡의 형식에 사도세자의 세자비 홍씨를 내세운 기념비적 거대한 동력이었다. 족보와 한국인의 뿌리의식에 바탕을 둔 한국적인 대본(Story Board), 지역정서의 적절한 안배, 미리 파묻었던 족보를 꺼내 읽는다는 시간차 연행의 치밀함, 한국적 퍼포먼스의 원천적 장애라고 할 수 있었던 연극적 요소의 역이용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홍오봉의 행위는 이 한국적인 콘텍스트에 핵심적인 위치라 할 수 있다. 「작업일지전」에서 보여주었던 「요왕할머니(1990)」에서는 굿당이나 신당같이 종이를 금줄처럼 주렁주렁 매단 가운데 행해진다. 보조 행위자가 용왕할머니를 부르면서 해초와 밀가루 등을 던지는 등 격렬한 행위가 지난 후에 매달린 종이 등의 금줄은 태워져 정화나 벽사의 의식으로 연상 결합된다.
1993년 육근병은 카셀 도쿠멘타 9(Kassel Dokumenta 9)에 설치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100일간의 전시를 위해 100일간 만들어지고 설치된 무대에서 「랑데부」라는 타이틀의 퍼포먼스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 나아가서는 한국과 독일의 만남을 의미하는 작품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경주 왕릉에서 취재하였으며, 현지 언론이 「잔디 입힌 이글루」라고 불렀던 봉분에 비디오 모니터가 설치된다. 봉분의 모니터에는 한국 어린이의 눈이, 프리히드리히 궁전의 기둥대신 세운 원기둥 위 부분의 모니터에는 독일 어린이의 눈이 마주치도록 구성했다. 그 시선이 만나는 광장에서 하얀 칠을 하고 자루 옷을 입은 동과 서의 사람들이 ‘랑데부(Rendezvous)’를 외치며 노끈에 매달린 장막으로 접근하면, 육근병의 합성된(Synthesized)메아리(Echo)로 ‘어머니’를 부른다. 사람들이 장막의 깃발과 로프를 태운 후 사물놀이에 맞춰 봉분을 돌다가 함께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역시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라는 대전제에서 볼 때 한국미술의 저력을 과시한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체행위
1986년 5월 ‘1986년, 여기는 한국전’ 퍼포먼스에서 신영성, 신동효, 강상중이 참여했다. 1986년 10월 아르코스모 미술관 기획, 초대의 ‘서울’86 행위, 설치미술제‘에는 강정헌, 송일영, 윤진섭, 이건용, 이두한, 전원길, 강용대, 김준수, 안병섭, 성능경, 신영성, 고상준, 남순추, 방효성, 안치인, 한주택, 고승현, 김용문, 이강희, 조충연이 참가하고 있다.
1987년 2월 바탕골미술관에서 열린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에서는 강용대, 고상준, 김영화, 남순추, 문정규, 박창수, 방효성, 안치인, 윤진섭, 이두한, 조충연 등이 참가, 복합매체나 총체예술 지향적 성격의 퍼포먼스를 발표한다.
80년대를 관통하는 이러한 행위의 양상을 윤진섭은 다섯으로 나누고 있다. 이 중에서 중복되는 작가의 작품 및 경향을 제외하고 보면
1. 환경예술적인 빛, 소리, 냄새, 연기 등 생활주변 물질의 도입- 이두한(미술, 패션, 연극인의 공동작업에 의한 복합비타민」, 박창수「호흡VI」 방효성 「백일몽」
2. 기성사물의 인식이나 상황을 변화시키는 작업-조충연「무제」, 문정규「신체성의 四角, 그리고 공간성의 매체」
3. 해프닝 적인 요소가 포함된 총체예술적 작업- 김영화 「죄다 죄다」
4. 은유와 상징-고상준「제4회공간」, 안치인 「드로잉 퍼포먼스」, 윤진섭, 「보호구역」
5, 관객참여-강용대 「미라의 환생과 해방을 위하여」
등이 거론된다.
이들 행위는 개인, 혹은 단체로 이루어졌으되 단체라 하더라도 개인 행위들을 하나의 공간에 순차적인 시간대에 보여준다는 특성상 개인작업의 성격이 짙다. 그런 각도에서 본다면 이 행위는 해프닝을 창안했던 카프로(Allan Kaprow)류의 컴파트먼트(Compartment)적인-논리적 연관이 없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행위의 집결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적 삶의 정서와 행위
그리고, 28나우 갤러리의 1889년 18작가의 행위미술제 역시 전시장을 몇 개의 공간으로 세분한다. 그 컴파트먼트는 시차를 두고 다른 행위자가 행위해야 하기 때문에 전후, 좌우의 행위와는 논리적으로 연관이 없다는 점 역시 카프로 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행위미술제의 컴파트먼트는 시차를 두고 한 행위자에 의해 단막극 무대처럼 설치미술의 형식을 띄는 단막극 무대의 형식이었다. 그러므로 행위를 보조한 후에 다시 다음의 행위자를 위해 비워져야한다는 순차적인 측면에서 카프로 류의 행위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행위미술제에서 이들의 행위를 분석하고 개념을 추출하여, “삶이나 예술의 정서, 현실고발의 메시지 등의 극한을 추구하기 위하여 주제와 제목이 있는 행위자의 각본, 연출, 연기를 원초적인 무대와 소도구를 이용하여 주로 일인극의 형태로 보여주는 행위미술”이라는 정의가 도출되었다.
삶이나 예술의 정서로서 문정규는 접착 테이프로 관객을 묶는 행위, 육근병은 입고 있는 옷을 짤라 동여맨 후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행위, 조충연은 직접 만든 비닐 옷에 칠을 하고, 로프로 묶는 행위를 보여준다. 현실고발의 메시지는 남북을 상징하는 색을 입힌 얼음 덩어리를 깨는 남순추의 행위, 퍼포먼스의 언어적 유희와 관념을 부시는 방효성의 행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행위는 주제와 제목과 행위자의 각본에 따라 연출되고 연기된다. 그러나 단순한 개념적 설치에 의한 지극히 원초적인, 이를테면 마당극이나 판소리의 무대처럼, 무대를 고집한다는 점에서 연극적이라기 보다는 미술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일인 행위지만 보조행위자가 있다 하더라도 판소리의 고수처럼 행위자를 보조하거나 보완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다만 상징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행위의 예를 보여준 신영성의 행위는 보조자가 비교적 행위자와 동시적, 동비중적 행위로 연행된다. 물 속에 잠겼다가 나와서 구멍난 모래자루를 지고 가는 행위자의 행위가 상징의 주체이겠지만 돈 돈을 외치는 포대 속의 사람, 종이 비행기를 날리는 보조행위자 역시 상징의 의미를 증폭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의 행위 중에는 과격하게 생각되는 메시지와 행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온건하고 원만한 양상들이 주류를 이룬다. 반하여 가학과 자학의 극한을 보여주는 행위도 있다. 김준수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맞춰 닭의 목을 면도칼로 자르는 가학적 행위를, 윤진섭은 자신의 피를 뽑아 뿌리는 자학적 행위를 보여준다.
행위와 설치의 한국적 콘텍스트
여기서 삶의 정서와 극한이란 행위에 수반되는, 또는 행위를 위한 간이무대에서 배어 나오는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적인 소품들, 농가의 부엌 같은 혼돈 속의 질서로 구현되었다. 이것은 ‘화면으로부터 돌출, 이탈, 유리되는 오브제의 주장력이 화면환경 속에서 극대화하되, 관객의 참여하거나 포함되므로 써 완결되는 분위기’라는 설치미술의 정의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정의는 한국의 행위미술과 설치미술이 하나의 콘텍스트, 즉 한국적인 콘텍스트에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정의라 할 수 있다.
1989년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은 한국의 이건용, 방효성, 김재권과 함께 이께다(池田 一)등 일본의 작가들이 참여한 교류전의 형식이다. 방효성은 관객의 소지품을 석고에 개어 하나로 굳어 가는 과정을, 김재권은 현장음을 전자음악으로, 현실의 오브제를 미디어 오브제로 변주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29이건용은 대가족제도에서 볼 수 있는 독 등 가재도구를 보여주면서 가족이야기, 민간요법, 한국문화의 뿌리 등을 친밀하게 보여주는 행위를 스스로 독 속에 들어가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이 전시에서의 특히 이건용의 행위와 설치는 “5천년 농업국가의 아카타입과 신화를 배경으로 성숙되는 원형지향적인 미술” 규정되었다.
행위, 국가적 관심사가 되다
198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청년작가전」에는 전시 작품 전체가 설치미술 혹은 설치의 범주에서 해설될 수 있는 작품과 아울러 네 팀의 행위미술이 선보였다. 설치미술은 서구적인 오브제 혹은 콜라주의 개념에서 먼저 규정된다. 작품은 화면이거나 화면에 부착되거나 화면을 외연하는 분위기를 가지므로 써 콜라주의 개념을 충족하며, 화면에서 떨어져 나오더라도 시각적, 연상적 연결을 가지는 소도구 소품들이 집적되거나 구조화하거나 공간을 점유하거나 혹은 환경을 이루면서 설치되었다.
이 「청년작가전」에서는 안치인, 이불, 윤진섭, 이두한의 행위가 연행되었다. 그러나 행위 자체가 설치의 충분조건이며 설치는 행위의 필요조건이라는 관계에서 진행되었다.
안치인은 계단 아래서 천을 감싼 행위자가 계단을 굴러 올라가서 색종이를 뿌리면 아래의 관에서 나온 사람이 다른 색의 종이를 뿌리는 행위이다.
이불과 보조행위자들은 헐리웃 영화의 외계인처럼 낙태에 의해 버려진 생명들을 상징하는 형상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행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윤진섭은 “Stop Terrorism"이라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보이스 류의 지팡이를 들고서 전단을 뿌린 후, 전시장 바깥에서 전시장의 유리창에 계란을 던지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두한은 관중이 자신의 옷을 가위로 찢는 행위와 생선 타는 냄새가 자욱한 속에 무희가 춤추는 상황을 설정한다. 그리고 미라처럼 천으로 감싼 보조행위자를 애완견처럼 끌고 관객들과 소통한 후, 석고로 자신을 감싸는 행위를 보여준다.
이들 「청년작가전」의 행위는 동일한 플로트에 의한 행위의 반복과 심화, 그리고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연극적일 수 있지만 장소와 관객에 따라 다른 상황과 반응양상 및 해석을 가진다는 점에서 연극과는 다른 행위미술의 본령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주제집약적 행위미술
1991년에는 「비무장지대예술작업전-DMZ Art Project」의 전시가 열리는 예술의 전당 미술관과 주변은 거대한 퍼포먼스의 장이 되었다. 기원의 춤, 팬터마임 등 퍼포먼스와 무관한 공연 역시 비무장지대라는 대전제로 수렴되었지만 특히 행위미술은 비무장지대와 그 주변상황을 소재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를테면 황민수의 미군부대 소품과 아동들이 그린 포스터의 결합, 이경근의 G. I를 연상케 하는 변신, 안봉규와 여대생들이 손발을 묶고 붓을 입에 물고서 ‘조국은 하나’라는 글씨를 쓰는 행위 등은 한국행위미술이 서구행위의 틀 안에서 답습이나 모방이 아니라 주제에 유연하게 대처할 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행위의 문법은 어느 정도 서구적인 의미의 해프닝, 혹은 퍼포먼스의 틀을 빌어오되 그 문법이 재구성되거나 파괴되는 시점에서 벌어진 행위미술이기에 그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자면 세계 퍼포먼스와는 다른 한국적인 면모를 가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01 행위미술이라는 것은 Tafel(질료)와 Malerei(매체)를 이용하여 시각적 질서를 가진 구조물을 구축하는 형태의 미술양상 - 이를테면 회화나 조각 등에 비하여 행위를 질료로 삼고 예술가 자신이 매체가 되어 보여지는 시각적 현실을 막론하고 두루 실험되어 왔던 예술의 한 분야이다. 이를테면 중국 명말, 오위, 장로, 왕악, 주단의 왕래사학파의 광란적인 미술행위에서 직접,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바 있으며 1940년대에서 50년대 유럽을 강타했던 타쉬즘 Tachisme와 앙포르멜Informel들은 행위미술의 한 양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는 행위를 이용한 시각적 구조물의 구축이 목적이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행위미술이라고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는 아니한다. 그러나 1956년 도쿄의 오하라 홀에서 열린 09구타이 그룹의 카즈오 시라가, 사부로 무라가미, 지로 요시하라가 보여준 행위와 함께 해프닝happening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이로부터 해프닝이라는 말이 바로 행위미술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데 그렇다고 이들의 행위가 세칭 행위미술의 원조는 아니다. 왜냐하면 1952년 존 케이지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메르스 커닝햄이 보여준 이벤트event가 선례로서 기록되기 때문이다. 존 케이지의 이벤트는 행위미술의 골격인 무연과 무용의 용(無用之用)등의 개념을 정립하는 중대 사건event이며 이후 미술계에서 하나의 장르로서 숱하게 실험과 검증을 거치게 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케이지 자신의 음악이론을 행위로 표출한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단지 행위미술의 원조라는 입장에서는 언급이 회피되고 있다.
한국 퍼포먼스의 사상-신명성, 설화성, 장소성, 자생성
김영재(미술사상가, 철학박사)
한국의 행위미술은 자생적이라고 할만큼 깊은 뿌리와 폭넓은 사상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퍼포먼스라 할 때 그 틀이 그러하듯이 그 얼개는 서구에서 빌려온 것이다.
해프닝
퍼포먼스라는 이름 이전에 많은 행위미술이 서구에서 연행되었다. 해프닝, 이벤트, 바디 아트 등이 행위미술, 혹은 행위+미술로 알려져 있다. 가장 보편적인 개념으로 자리잡았던 사조는 해프닝(Happening)이다. 해프닝은 비문맥(Non-Matrixed Performance)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고도의 문맥에 의한 이론이 있다.
20세기의 행위미술들은 대부분 원조가 명기되어 있다.05 해프닝의 원조는 카프로(Allan Kaprow)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원조의 원조 혹은 영향원은 무용(舞踊)의 3차원 공간, 초현실주의의 꿈의 해석과 클레르(Rene Clair), 브뉘엘(Louis Bunnel), 콕토(Jean Cocteau)등의 영화, 컴바인 페인팅의 환경, 루솔로(Russolo)의 소음, 케이지(John Cage)의 불확정성, 아르프(Jean Arp)의 우연의 법칙, 뒤샹(Marcel Duchamp)의 무한차원, 폴록(Jackson Pollock)의 무한공간 등이 거론된다.
해프닝은 06커비(Michael Kirby), 아르토드(Antonin Artaud)등이 이론적인 뒷받침을 제공했다. 커비의 유명한 정의, 즉 “해프닝은 각자 다른 칸막이 안에서 논리적인 연관이 없는 행위들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일종의 극장이라 정의될 수 있다(Happenings might be described as a form of theatre in which diverse elements, including nonmatrixed performing, are organized in a compartmented structure)”라는 정의에 의해 해프닝은 해괴한 짓거리, 엉뚱한 행위에서 벗어나 미술의 한 장르로 편입될 수 있었다.
07아르토드는 해프닝이란 “움직임, 조화, 리듬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표현하되 음악, 무용, 판토마임, 모방극(Mimicry)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라 했다. 이러한 정의를 떠올리면서 한국 행위미술을 살펴보면 한국의 해프닝, 혹은 행위미술은 서구적인 콘텍스트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차용(借用)했다는 점을 일러준다.
한국의 해프닝
한국에서 해프닝은 이러한 고차원적인 논리나 영향원과는 결별된 이름 그대로 해프닝이라는 표출양상에 치중된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해프닝은 엉뚱한, 해괴한, 또는 웃지 못할 행위나 처신 등으로 해석된다.
한국 최초의 해프닝은 1967년, 평론가 오광수의 기획으로 23「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 한국청년작가연립전에서 소개되었다. 당시 무동인과 신전동인이었던 강국진, 정찬승, 정강자, 심선희, 김인환 등이 참여했다. 연극적인 구성, 상징적 행위와 노래, 테마 등이 있는 이 해프닝은 서구의 해프닝을 이 땅에 도입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지만 비논리, 비연극적, 관객참여적인 행위를 내세우는 미국의 해프닝과는 연관성이 희박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엉뚱한 짓’이라고 불러도 그다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해프닝은 카프로 류의 행위미술과 다를 뿐 아니라 동양권의 행위, 혹은 행위미술과도 다른 바가 있다. 먼저 물감을 던져 만들어진 궤적을 보고 즐겼다는 광태사학파 적인 현실도피, 귀족 혹은 유한취미적인 광태와는 다르다. 또한 광태사학파의 행위를 연상케하되 우연을 유발하고 그 행위의 과정을 기록하며, 결과로서의 흔적을 ‘무대에 올린’ 일본의 구타이(Gutai)그룹 같은 비현실화한 사건이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비교하고 보면 그것은 이 땅의 진솔하고 소박한 서민적인 의식을 표방한 행위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어 한국의 해프닝, 혹은 행위미술은 1968년 「한강변의 해프닝 I.II」(1968), 정강자의 「투명고무풍선과 누드」(1968),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1969)」, 제1회 서울국제현대음악제에서 차명희와 백남준의 「컴퍼지션」 실연(1973), 이강소의 「화랑 내 술집」(1973년), 이건용의 「오늘의 방법전」(1975), 성능경의 「Newspaper」(1976), 장석원의 「혼인이벤트」(1977), 정찬승의 「삭발」(1978), 권칠인의 「권칠인에 의한 6가지 행위전」(1978), 이건용의 「달팽이걸음(1979)등이 김영재의 한국양화백년(1988)에 기록되어 있다.
이벤트
한국에서 해프닝이 일시적 차용이었다면 심층적으로 자생적으로 행해진 표상적인 행위는 이벤트라 할 수 있다. 산발적인 행위들은 나름대로 행위미술이나 해프닝, 행위 등으로 부르고 있었던 반면 이벤트는 행위에 대한 이론과 실연이 확실한 자기주장과 함께 연행되고 기록되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벤트는 똑같이 빌려온 개념이지만, 해프닝보다는 더욱 한국적인 행위로 기록된다. 12미국에서의 이벤트(Event)는 단선구조적 사건으로 해석된다. 케이지(John Cage)가 1952년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커닝햄(Merce Cunningham), 튜더(David Tudor),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올슨(Charles Olson)과 함께 초연했던 「극장 제1편(Theater Piece No.1)」에서 비롯한다. 이벤트는 이름 그대로 사건(Event)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은 환경적인 요인이 거의 배제되며 다만 어느 시각 어느 장소의 어떤 한 장면을 선택하여 단일화한 인상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자연발생적인, 혹은 인문적인 사건과는 구분된다.
한국에서 이벤트는 김용민의 화랑바닥 백묵의 원을 뒤따르는 사람이 지우는 이벤트, 장석원이 풀어놓은 손목시계를 3분 후에 차고 들어가는 이벤트로 이어진다. 그리고 김순기의 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었다가 다시 메우는 행위 등과 함께 이건용의 논리적 이벤트가 있다.
이건용은 26논리적 이벤트(Logical Event)라는 이름 하에 일련의 이벤트를 실연한다. 1975년 오늘의 방법전에서는 뭉쳐진 테이프를 풀면서 대각선의 길이를 잰 후에 모자라는 길이를 오각형 전시장의 길이를 재고 난 다음 테이프로 보충하는 「테이프 자르고 잇기」, 접은 한지를 편 후 임의의 크기로 잘라 화랑 공간을 채운 후 빗자루로 쓸어내는 「동일면적」 이벤트를 보여준다. 27「달팽이걸음(1979)」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백묵을 맨발로 기어가는 발 앞에 무수히 긋고 그 그어진 선들의 띠를 맨발이 지우며 지나간 두 개의 선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이벤트이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적 이벤트에 대하여 이건용은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일어난다는 논리적 문맥과 일어나고 있는 그 신체적 행위는 양의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고 그것 두 개가 전혀 분리되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하나 그 자체이다. 논리적 이벤트(Logical Event)는 이러한 양의적 의미 속에 논리와 신체를 하나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벤트에 이르러 행위미술은 작가의 논리적 발언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바디아트
바디아트(Body Art)는 신체와 외부, 혹은 우주와 만나는 장소의 장소성(Cite Encounter)을 극대화하기 위해 신체를 이용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1970년 미국 동부의 작가들이 주창했다. 이를테면 맥레디(Jim McReady)의 소리나는 조각(Sound Sculpture)은 네 명의 여자가 빛나는 나일론을 뒤집어쓰고 카펫 위를 걸어가면서 만들어지는 소리가 주제가 된다.
한국에서는 엄밀히 바디아트라는 개념을 앞세우거나 그 강령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은 없다. 그러나 행위미술이라는 이름에는 많은 부분 바디 아트의 문맥이 차용된다. 바디+아트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수용되어 신체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통용되는 것은 단지 신체와 미술이 함께 보여진다는 의미가 강하다.
퍼포먼스
그리고 퍼포먼스(Performance)가 있다. 퍼포먼스는 해프닝의 범주에 묶여지는 경우가 있지만 해프닝에 비하여 보다 연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이벤트로 정의된다. 또한 해프닝이 특별히 고안된 환경 속에서 관객참여, 혹은 관객이 그 환경 속에 포함되므로 써 완성되는 분위기를 내세우는데 비해 퍼포먼스는 관객참여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존슨(Ellen Johnson)에 의하면 1970년대 14아발란치(Avalanche)잡지에서 소개되면서 퍼포먼스는 일상화한다. 1971년 노만(Bruce Nauman)의 「퍼포먼스 복도(Performance Corridor)」, 버든(Chris Burden)의 「보관함-5일간의 생활(Locker-Five Day Locker Piece)」의 뒤를 이어 1981년 앤더슨(Laurie Anderson)의 뉴 웨이브(New Wave)음악, 「이동하는 미국인(Americans on the move)」등이 소개된다. 또 백남준, 아콘치(Vito Acconci)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이후 퍼포먼스는 15골드버그(Rosely Goldberg)처럼 비상업적인 것, 02크림프(David Crimp)처럼 무대화, 즉 ‘그림을 무대에 옮기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6비상업적이라는 것은 1960년대 뉴욕의 화랑들이 휘어잡은 제도적인 헤게모니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컨셉츄얼 아트처럼 팔고 살 수 있는 유형적인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요, 무대화라는 것은 화면이라는 무대를 일상으로 옮겨 그 중에서도 정채있는, 또는 의미있는 혹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분을 짤라낸다는 의미가 있다. 크림프가 말하는 ‘그림’이라는 것은 회화를 의미하지만 방송제작에서 말하는 ‘그림이 좋다’라는 관용적인 의미까지가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다.
퍼포먼스는 한국에서 빠르고 쉽게 수용되었다. 빠르다는 이야기는 서구의 양상이 한국에 전파되는 속도가 예전의 해프닝이나 이벤트 등에 비하여 주기가 빨라졌다는 뜻이고, 쉽다는 것은 해프닝 등 해괴한 양상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관객에게 ‘저게 행위미술이라는 것이야’라는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한국의 관객 수준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뜻이다.
서구와 한국의 퍼포먼스
서구에서의 퍼포먼스는 패스트푸드 같은 공감대에서 탄생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혹은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는 음식인 패스트푸드처럼, 누구나 납득할만한 미술적이면서도 민주적-최소한 상식을 배반하는 모멸감을 주지는 않는 방관자적인 행위... 그것이 퍼포먼스였다. 미술사라는 골방에서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받는 사람의 사생활, 개인적인 기호, 성향 등과 무관한 전단을 나누어주거나, 신체적이나 감정적인 위해를 느끼지 않을 만한 호의적인 깜짝 쇼를 보여주거나, 또는 퍼포머 자신이 불특정 다수의 한 사람이 되어 인파에 파묻혀 들어가거나 ... 그것이 패스트푸드 같은 퍼포먼스의 모습이었다.
초기 한국의 퍼포먼스는 역시 서구의 패스트푸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미술이라는 대전제를 업고 나름대로 한 권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많은 행위미술들은 퍼포먼스라는 개념에 따라 행위하면서도 본격적인 퍼포먼스라는 용어와 범주에서 작업하지는 않는 경향이었다. 행위미술 자체가 한국적인 양상으로 자리잡았으니 굳이 퍼포먼스라는 말을 빌어올 이유가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오히려 퍼포먼스라는 이름이 부제로 따라붙었다.
1987년 2월 바탕골미술관에서 열린 ‘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에서는 총체예술지향적인 행위미술에 대하여 퍼포먼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작가들 역시 안치인의 「드로잉 퍼포먼스」처럼 퍼포먼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행위미술=퍼포먼스니까... 하는 생각으로 생략하는 경향이었다. 그만큼 퍼포먼스가 보편화되었던 시절이었다.
1990년 7월 백남준의 요셉 보이스 추모 퍼포먼스는 세계적 대가인 백남준이 세기적 대가였던 보이스를 추모한다는 초혼행위를 퍼포먼스라고 불렀다. 퍼포먼스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이 땅에서 행위미술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퍼포먼스의 양상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행위미술이라는 말을 그대로 적용한 듯한 퍼포먼스는 한국인의 퍼포먼스에 대한 콤플렉스를 잘 반영한다. 행위미술은 이들에게 행위+미술이 된다. 미술적인 행위거나 행위를 미술적으로 포장한다는 태도가 그러하다.
행위가 미술이 되다
17이렇게 미술이 행위의 필요조건이고, 행위가 미술의 충분조건이면서 행위+미술이 행위미술 혹은 퍼포먼스의 필요충분조건이어야 한다고 믿는 한국인들에게 퍼포먼스는 미술지상적인 행위로 수용되었다. 이를테면 이 부류의 작품들은 붓이나 걸레 등으로 그리고, 물감이나 먹물 등으로 칠하고 건물의 벽이나 혹은 벽과 차단된 비닐 위에 물감을 묻히면서 그 과정을 기록하고, 그 결과가 미술적인 행위의 결과로서의 흔적이기를 원하게 된다.
운보 김기창은 한때 걸레 그림을 선보였다. 백남준은 머리칼에 먹물을 묻히고서 바닥에 깔린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보여주었다. 운보는 비록 사진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기록되어 공개되었지만 그 결과로서의 흔적이 미술적이며, 나아가 종래 작업과 어떠한 형태건 내재율이나 내적 연관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미술적인 발상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백남준의 ‘그림’은 백남준이 붓대가 되고 머리가 붓이 되어 화면 위에 단일한 행위의 이벤트를 남긴다는 행위에 대한 창의적인 발상이 결과로서의 작품보다 우선되었다.
이 둘의 행위는 한국미술의 대가들에게서 대표성을 지닌 작품으로 행해졌지만 그 원조는 11양주팔괴의 광란적 행위에 있었다. 명나라 말기, 절파(浙派)의 한 계보로, 혹은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로는 오위(吳偉), 장로(張路), 왕악(王愕), 주단(朱端), 종례(鐘禮)등이 중심이 된다.
팔괴는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한 후에 먹에 사람의 머리를 담근 다음 바닥에 깐 화면 위에 끌고 다니다가 그 흔적으로서의 작품을 벽에 두고 감상했다고 했던 것이다. 이 때의 행위는 백남준과 비슷하고, 결과로서의 작품은 운보와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와 작품은 그 자체 행위미술, 특히 오늘날의 한국인이 행위미술이라고 말하는 미술의 양상과는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있다.
이렇게 미술의 흔적이 남아야 ‘행위미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작가들의 내심에는 미술이 빠지면 한국미술사의 콘텍스트에서 제외된 해괴한 짓거리로 치부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퍼포먼스의 한국적 정립
나아가 한국 행위작가들의 수용양상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외래적인 것을 번안하여 우리의 것으로 주장했던 이전의 행위미술에 비하여 퍼포먼스라는 이름의 사조는 매우 친근한, 나아가 자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해프닝보다 연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이벤트이며, 해프닝에 비해 관객참여가 지극히 제한된다는 강령은 그대로 준수되었다.
1986년 5월 ‘1986년, 여기는 한국전’, 1986년 10월 ‘서울’86 행위 설치미술제‘1987년’80년대의 퍼포먼스-전환의 장‘, 1989년’동방으로부터의 제안‘1990년 백남준의 요셉 보이스 추모 퍼포먼스 등은 비교적 큰 규모거나 많은 작가들이 연립전 형식으로 참여했던 행위 미술이다. 이들은 때로 행위미술이라거나 퍼포먼스라거나 등의 용어 구사는 차이가 있을망정 퍼포먼스라는 영역에 대한 예비지식에서 그들의 행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이건용은 1990년, 공간 156호에서 한국의 행위와 입체미술을 8개로 분류한다. 1. 통신, 대지예술과 맞닿은 행위미술, 2, 입체구조로서의 행위미술, 3. 프로세스를 통한 컨셉츄얼한 시도, 4. 투명한 의식과 신선한 구조, 5. 내재적 시간성과 시각적 공간화, 6. 직접적 캐스팅에 의한 구조적 관심, 7. 자연스러운 구조와 투명한 구조, 8. 인위적 조작을 통한 새로운 지각, 8. 상황의 시간성과 구조물의 생태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분류가 가능할 만큼 80년대에는 행위미술, 혹은 퍼포먼스의 층이 두터워지고 저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적인 행위와 구조를 관통하는 한국적인 양상이 두드러진 것이 또한 8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사조를 도입하되 한국적 자각에서 자기화한 퍼포먼스에 이르러 한국의 행위미술은 하나의 이정표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명성, 장소성, 설화성, 자생성으로 나뉠 수 있다.
신명성
한국의 마당극이나 판소리는 보는 사람이 저절로 흥에 겨워 어깨를 들먹이고 얼쑤 추임새를 넣을 수 있는 호흡을 내장한다. 35그 호흡은 오천년 농경사회에서 형성시켜온 이 땅의 감수성이고, 자연발생적인 멋과 신명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예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서정성, 한국적인 것을 표방하는 행위와 설치미술에서 공통으로 도출되는 으스스한 분위기, 한국이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빚어진 인문환경이 민족적 감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양상들은 비록 외래적인 것이겠지만 이 땅의 백성들에게서 녹아 이 땅에 귀화한 사상이 된다.
행위미술가들은 대부분 제한된 공간에서 몇 사람의 관객을 앞에 두고 연행을 벌인다. 많은 미술가들이 오늘의 삶과 예술에 눈을 돌리고 있지만, 한국적인 신명을 되살리는 작가들도 많다. 그들은 벽에는 때로 굿당이나 신당처럼 종이나 천, 부적 등을 주렁주렁 걸기도 하고, 금줄처럼 둘러치기도 한다. 때로 그 부적들은 행위 도중이나 끝난 후에 태우거나 태운다는 것을 암시하는 행위로 일관하기도 한다. 태운다는 것은 벽사, 정화의 의식으로 통한다.
설화성
판소리나 마당놀이의 기본 구조는 이야기판이다. 관객과 마당을 빼면 목소리와 장고장단, 그리고 추임새가 전부인 이야기판은 한국인의 극장이었고, 오페라였고, 그리고 오케스트라였다. 이것은 해프닝이나 이벤트 등 서구의 행위에서 보기 힘든 양상이며, 지극히 한국적이라 할 수 있다. 해프닝은 극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언어적인 요소가 최대한 배제된다. 가끔 말이 도입되지만 즉흥적(Ad lib)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서울에서 있었던36「동방으로부터의 제안(1990)」에서 이건용의 행위는 지극히 설화적이고 내용지향적이다. 한국에서의 퍼포먼스는 자신의 어머니, 어머니가 한국동란의 피난길에도 가져갔다는 독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행위가 이야기와 함께 보여진다. 퍼포먼스를 빌어 전통문화의 한 표상을 들어내는 행위가 형식이라면, 한국적 원형을 추적하는 구수한 이야기는 내용이 된다.
이러한 설화성(Narrative)은 도쿄에서 열린 「동방으로부터의 제안(1991)」 퍼포먼스에서도 연행되었다. 한국의 독을 앞에 두고서 도쿄의 까마귀 이야기를 하다가 도쿄의 물에 머리를 감고, 독 속에 고함을 지르고서 이윽고는 달아맨 독을 떨어뜨려 깬다. 이러한 행위는 어릴 적 지겨워하면서도 먹지 않으면 안되었던 꽁보리밥에 된장국 같은,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면 향수처럼 찾게 되는, 그러한 종류의 토종 퍼포먼스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장소성
그러한 이야기 전개의 편한 방식이 판소리였고, 마당놀이였던 전례가 행위자들에게 자생적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마당은 한국인에게 다목적 공간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넓은 공간이 필요하면 가장 넓은 마당을 가진 사람의 집으로 모였고, 가운데 마당을 비워두고 담이나 울타리주변은 농가의 부엌이 그러하듯이 잡동사니들이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를 잡고 놓여 있는 풍경은 우리네 농촌풍경에서 낯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36그 공간에서 무당이 굿판을 벌였고, 마당극이 펼쳐졌으며, 판소리 한마당이 구성지게 벌어졌으니 그 공간이 바로 한국 행위미술가들이 그토록 편안할 수 있었던 행위 판, 혹은 행위의 장소였던 것이다.
장소라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한민족의 5천년 역사가 바로 농경사회의 정착문화를 지키고 길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의 치맛자락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온 미술의 양상이 환경과 야외미술을 포함한 설치미술일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설치작업이 농가의 부엌이나 무당의 신당, 굿당, 서낭당 등을 연상케 한다면 환경이나 야외미술은 다분히 싸리 울타리에 금기를 친 마당과 장승이 서 있는 동구 밖을 생각케하기 때문이다.
자생성
여기서 자생적 미술이라는 말을 음미해보자. 그것은 서구에서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나 환경미술(Environment Art)등으로 불리고 있는 미술양상에서 장소성과 절대장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아키타입과는 같은 맥락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적인 바탕과 원형과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요인들이 잠재한다는 데서 자생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37자생성이란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이 감수성의 이름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스스로 ‘우리 것’ 이라고 느끼는 체질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미술이란 행위의 산물이며, 미술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작품이다.
그 속에서 한국의 태양사상, 하늘님 숭배, 하늘 백성이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신념을 담은 우리의 옛 문화, 기층문화에 관심을 보이는 작품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1997년, 20유도화는 하늘 백성이 하늘의 뜻이 깃든 이 땅에 살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귀천 사상을 행위했다.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흰 천이 옥상에서 내려와 땅위에 펼쳐진다. 천 위에서 태극팔괘, 혹은 태양을 빛을 상징하는 8개, 12진을 상징하는 12개의 흰 고무줄을 관객에게 잡게 한다. 행위자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를 마치고 자벌레가 기어가듯 바닥을 한바퀴 돈다. 희생 변환의 고통스런 육성이 이어 천지인의 합일을 상징하는 흰떡을 관객에게 나누어준다. 거꾸로 올라가는 흰 천에는 ‘천지신명이시어, 일월성신이시어, 굽어살피소서’ 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귀천의 사상과 순환원리에 의한 치유기능을 상징했다.
이러한 원형적인 시도와 함께 한국인에게 작품이란 작가의 의식과 일상을 담은 노역의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인 고민과 모색의 결과로 힘들게 만들어지는 정신의 분비물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미술이란 인간이요, 정체성이요, 그리고 행위와 외관을 담는다.
한국문화의 한국적 요소, 나아가 자생적 요소란 엄밀히 따지자면 복합문화권의 표상적 공통소를 개념화한 것일 수 있다. 통과지대성이라는 반도의 특성상 한반도에는 상고시대부터 알타이문화, 동이문화, 중국문화, 불교문화, 남방문화가 반목하거나 상생하거나, 혹은 표리가 다르게 융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적이라 부르는 문화적 요인들을 개념화하거나 정의하게 되면 그것은 어느 정도 여러 문화권에서도 수용되고 적응될 수 있는 요인이 개입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자생적이라고 하는 개념의 이면에는 외래사조들이 이 땅에서 어느 정도 적응과 성숙의 시간을 가진 후 한국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이 이해하고, 주장하고, 그리고 확신하는 자생성이란 한국화한 외래사조라고 할 수 있다.
퍼포먼스 역시 외래적인 것이며 세계 미술사의 문법이지만 이 땅에서 예술가들은 원래 우리에게 있었던 것을 재발굴하는 도구로, 혹은 한국적인 것의 국제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원형을 드러내고 세계미술에 접합시킬 수 있는 도구로서의 퍼포먼스에 대하여 작가들은 당당히 우리의 것, 자생적인 것으로 표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퍼포먼스를 포함한 한국미술이 자생성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양화라 부르는 유화가 수입되고 나서도 60-70년이 지난 후였다. 비록 유화라는 재료를 써서 한국의 풍광, 우리의 서정 등을 그려왔다 하더라도 한국인에게 유화로 표상되는 서구의 사조, 풍조는 우리가 우리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문화나 예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유화에 비하여 퍼포먼스는 육화와 자기화, 그리고 자생성의 주장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것은 지구촌이라는 세계화의 추세에도 힘입은 바 크고, 한국인의 외래사조에 대한 자기화의 능력이 그만큼 증대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한국 행위미술의 회화적 의미와 자생성의 실체
김영재(미술사상가, 철학박사)
2007년 한국행위미술의 현주소를 잘 보여줄 “한국행위미술 1967-2007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1989년의 “청년작가전”에서 함께 선보였던 행위미술 이후 20년만의 야심적인 기획이라 할 만하다. 한국 행위미술 40년의 작품자료 100여 점과 개막행위, 도록 발간 등을 통하여 한국미술사에서 행위미술의 자료를 발굴, 제시한다는 의미가 제시된다.
1989년 “청년작가전”은 당시 세계적인 유행이었던 설치미술과 함께 윤진섭, 이불, 안치인, 이두한의 행위를 당대의 대표성 있는 한국미술이라는 각도에서 접근했다. 그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독단적 해석이라는 비난과, 서구적인 발상 및 이미 발표된 국내외 작품들과의 유사성에 대한 논란과 함께 한국적인 행위미술의 척도에 대한 요구에 이르기까지 반발이 예견된 기획이었다. 반면 2007년의 전시는 자료전이라는 성격을 부각시켜 독단적인 결론을 강요하지 않으므로 써 유연하고 민주적인 접근이 가능하도록 기획되었다. 그런 유연성에 힘입어 행위미술의 한국적 현상, 세계 행위미술의 흐름과 조화, 그리고 행위미술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인의 신명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행위미술에 관하여 이렇게 유연한 접근방식이 필요한 이유는 한국의 행위미술이 국민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장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신명과 끼의 연장선상에 행위미술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천 년 농경사회에서 형성시켜온 이 땅의 자생적인 감수성이 마당극이나 판소리에 어깨춤을 추고, 얼쑤 추임새를 넣을 수 있는 호흡으로 행위미술에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자생성은 조상 대대로 전승되어온 전통이 ‘우리 것’이라는 의식과 감수성의 이름으로 시각화한다. 통과지대성으로서의 반도에서 적응과 성숙의 시간을 가진 후 한국화 하는 과정을 거친 한국적 감수성이란 원체 외래사조가 한국화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자생성에 대한 의식은 상당히 개방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특정 기관이나 그룹이 감수성을 규정하고 강요할 경우는 더 큰 반발이 예상되기도 한다.
나아가 오늘의 행위미술이란 행위미술가들이 그 신명과 끼를 계승하지 못할 때 대중적인 외면을 받거나 공감대 확산 내지 미술적 콘텍스트 형성의 장을 마련하지 못할 때 평론과 미술사의 취재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때로는 활발한 활동이 오히려 주류에서 이탈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행위미술의 장르에 대한 정립과 역사적 교훈에 대한 성찰이라는 두 개의 잣대가 필요하다.
행위미술의 범주
행위미술은 미술이고, 중심은 회화이다. “그림을 무대에 올리는 방법의 하나”라는 03크림프(David Crimp)의 정의와 07“해프닝이란 움직임, 조화, 리듬의 요소를 중점적으로 표현하되 음악, 무용, 팬터마임, 모방극(Mimicry)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이라는 아르토드(Artaud)의 배타적인 정의는 오늘날 행위미술의 고전적 지침이 되고 있다.
행위미술은 미술, 특히 회화의 콘텍스트에서 해프닝과 퍼포먼스를 대표주자로 추대했다. 최초의 행위미술은 1956년 미술가인 카프로(Allan Kaprow)의 ‘여섯 개의 부분으로 나뉜 18개의 해프닝(18 Happenings in 6 parts)’ 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131952년 케이지(John Cage)가 창안한 이벤트(Event)즉 블랙마운틴 칼리지에서 커닝햄(Merce Cunningham), 튜더(David Tudor),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올슨(Charles Olson)과 함께 초연했던 「극장 제1편(Theater Piece No.1)」은 미술사에서 소외된다. 케이지가 음악가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전공인 음악 대신 플럭서스(Fluxus)의 미술 행위와 미술적인 비디오를 통해 세계적인 미술가(Artist)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적 감수성과 공감대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의 흐름과의 연대라는 각도에서 한국 행위미술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한국행위미술의 특징
1989년 나우갤러리에서 있었던 18작가의 행위미술제를 기록, 분석하여 “삶이나 예술의 정서, 현실고발의 메시지 등의 극한을 추구하기 위하여 주제와 제목이 있는 행위자의 각본, 연출, 연기를 원초적인 무대와 소도구를 이용하여 주로 일인극의 형태로 보여주는 행위미술”이라는 정의가 도출되었다. 테이프로 묶기, 물감 환칠 하기, 관념적인 오브제 부시기, 가학적 혹은 자학적 행위 등의 표상적인 특징을 귀납적으로 분석하여 이 정의는 도출되었다.
2005년 코파스의 네 번째 18한국실험예술제 ‘채움과 비움’에서 4개국 30여명의 퍼포먼스를 기록, 분석할 기회가 있었다. 그 결과, “삶과 예술의 상징성, 연출된 상황의 메타퍼, 논리와 정서의 시각화를 위하여 미디어를 극대화하면서 관객참여를 최소화한 소극장 형태의 자기주장들”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1989년과 2005년의 시차는 일회용 일인극을 준비된 소극장으로, 메시지의 극한은 상징과 메타퍼로 바뀌었다. 행위미술이란 묶기, 환칠 하기, 오브제 부시기 등의 미술적인 것을 행위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의한 단순도식이 비전공자들의 상투어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대신 거기에 미디어의 일상화, 투철한 사명의식, 철저한 준비 및 자기 발언의 명징성에 힘입은 상징적이고 명상적인 행위언어가 자리 잡았다. 한국적 행위미술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행위미술에 대한 실증적 기록, 분석, 정의에 의해 한국의 행위미술을 몇 개의 지향성으로 묶을 수 있게 되었다. 상징지향성, 설화지향성, 원형지향성의 표상적 예를 보여주는 몇 개의 행위를 선별했다.
상징지향성
상징지향성은 1968년 한국 최초의 행위미술로 기록되어 있는 24‘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에서부터 방향 지워진 성격이었다. 평론가 오광수가 기획하고 신전 동인, 무 동인의 강국진 김인환 심선희 정강자 정찬승 등이 참여한 이 행위란 비닐우산이 핵우산, 녹두꽃 노래가 한국적 아이덴티티라는 한국적 상징성을 내포하였기 때문에 한국최초라는 의미부여가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1968년 정찬승, 강국진의 백사장에 사람을 파묻고 물을 붇는 ‘한강변의 타살’, 1970년 제4집단에서 상반신 누드와 비누방울이 만드는 ‘무체예술’ 등 상징화작업이 이어진다. 그리고 존 케이지의 이벤트를 한국적 상징성으로 번안한 이건용의 상징적, 설화적 단순사건(Event), 신영성, 이상현 등이 보여주었던 바, 상징주의 단막극이라 할 만한 유형의 행위는 한국의 행위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설화지향성
한국어에서 사설(辭說-chattering, nagging, account)은 잔소리, 이야기 투의 노래 등의 뜻으로 쓰인다. 설화(說話-narrative)는 이야기 구성을 일컫는다. 한국인에게 판소리나 마당놀이는 판소리 명인과 장고장단, 추임새, 그리고 관객과 마당으로 구성되는 오케스트라였다. 그러나 그 신명과 추임새는 행위미술에서 옛 이야기처럼, 혹은 설화이야기처럼 스토리와 이야기꺼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와 그 자체 사설이 따르는 경우로 나타난다.
1979년 19유도화는 하늘 백성이 하늘의 뜻이 깃들인 이 땅에 살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귀천 사상을 행위화 했다. 옥상에서 드리운 흰 천은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관객이 쥔 12개의 고무줄은 태극팔괘, 혹은 태양을 빛을 상징한다. 제의와 희생의 꿈틀거림, 변환의 고통스런 육성에 이어 천지인의 합일을 상징하는 흰떡을 나눠 먹는다. 거꾸로 올라가는 흰 천에는 ‘천지신명이시어, 일월성신이시어, 굽어살피소서’ 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귀천의 사상과 순환원리에 의한 치유기능을 상징했다.
1990년 이건용은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에서 설화적이고 내용 지향적인 행위를 보여준다. 한국동란의 피난길에도 가져갔다는 독 안으로 들어가면서 독의 내력과 가문의 전통과 된장 등 식문화의 원형을 상기하게 하는 이야기 마당이 펼쳐진다. 이어 1991년 도쿄에서 열린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에서는 한국의 독을 앞에 두고 도쿄의 까마귀 이야기를 하다가 도쿄의 물에 머리를 감고, 독속에 머리를 넣고 소리를 지른 후 달아맨 독을 떨어뜨려 깨는 행위를 보여준다. 한국인에게 이러한 행위는 어릴 적 지겨웠던 꽁보리밥에 된장국을 늙어가면서 향수처럼 다시 찾게 되는 유형의 토종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원형지향성
1990년 서울 현대화랑 뒤뜰에서 31백남준의 보이스(Joseph Beuys)추모 퍼포먼스가 있었다. 매장(埋葬)을 상징하는 껍질 TV와 자빠진 피아노 위에 수의를 덮고 흙 뿌리기, 보이스의 영정에 물감 바르고 쌀 뿌리기, 갓 위에 마요네즈와 케첩 및 쌀을 뿌리고 얼굴 박기 후에 담배 가득 담아 불을 붙인 두 개의 장죽 중 하나를 보이스에게 올린다. 놋 향로를 편종처럼 매달고 놋대야에 혼 부르기 장단에 맞추다가 머리를 부딪치는 것은 초혼 행위로 해석된다.
1991년 수원성에서 있었던 홍오봉의 ‘나의 누이 혜경궁 홍씨’는 홍씨 가문의 내력을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모곡 형식으로 펼친 행위이다. 족보와 한국인의 뿌리의식을 지역정서와 결합하면서 미리 파묻었던 족보를 꺼내 읽는다는 시간차 연행이 돋보였다.
1993년 육근병은 카셀 도쿠멘타 9 행위에서 경주왕릉을 본 딴 봉분에 설치된 비디오 모니터에는 한국 어린이의 눈과 프리히드리히 궁전의 기둥 대신 세운 원기둥의 모니터에는 독일 어린이의 눈이 마주치도록 구성 한 후, 그 시선이 만나는 관장에 하얀 칠을 하고 자루를 뒤집어 쓴 동서의 사람들이 랑데부를 외친다는 행위를 선보였다.
세계행위미술과의 연대
한국 행위미술은 서양의 행위미술과 상당한 시차를 보여준다.39 1957년 카프로의 해프닝과 오광수의 1967년 해프닝은 10년, 1952년 케이지의 이벤트와 이건용의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의 달팽이걸음과는 27년, 그리고 1970년대 초 노만(Bruce Nauman), 앤더슨(Laurie Anderson)등의 퍼포먼스와 1990년 백남준의 보이스 추모 퍼포먼스와는 20년이다. 이 시차는 서구의 행위미술이 귀화식물처럼 한국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 즉 상징, 설화, 그리고 원형에 의해 단련되어 한국화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38한국의 행위미술가들은 자생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자생성이란 세계 행위미술의 콘텍스트 안에서의 자생성일 때, 또한 세계의 콘텍스트를 주도할만한 역량이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먼저 세계 행위미술에 대한 개념화, 자기화를 통한 숙성의 의지와 시간, 그리고 힘을 기를 수 있는 토양과 자양, 그리고 자생성에 대한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 자생성이 쇄국주의일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면하더라도 세계 행위미술의 콘텍스트는 1957년 카프로(Allan Kaprow)가 주장하는 대로, “해프닝은 각자 다른 칸막이 안에서 논리적인 연관이 없는 행위들이 조합되어 나타나는 일종의 극장이라 정의될 수 있다(Happenings might be described as a form of theatre in which diverse elements, including nonmatrixed performing, are organized in a compartmented structure)”는 정의를 중심으로 운행되어 왔다. 이러한 정의와 영향원은 기본적으로 행위미술은 미술, 그 중에서도 회화에서 비롯되고 회화적인 콘텍스트를 가진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행위미술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영향원은 범 세계적이고 전 방위적이다. 무용(舞踊)의 3차원 공간, 뒤샹(Marcel Duchamp)의 무한차원, 폴록(Jackson Pollock)의 무한공간, 꿈의 해석과 클레르(Rene Clair), 브뉘엘(Louis Bunnel), 콕토(Jean Cocteau)등의 초현실주의적 영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철학에 의한 케이지(John Cage)의 불확정성과 루솔로(Russolo)의 소음, 컴바인 페인팅의 오브제미학은 서구적인 경향이다.
그 간접적 영향원에는 중국의 양주팔괴나 일본의 구타이 그룹 등이 거론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케이지의 무용지용(Useful Uselessness)과 같이 차용에 의한 자기화를 거친 서구적 산물로서 동양에 역수출될 따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주장하는 자생성, 한국성 등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출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퍼포먼스/설치미술의 진화도식,’“평단,” 1990 가을, 18호 pp.5-12.
퍼포먼스/ 설치미술의 進化圖式
김영재
행위,설치미술 前史
역사란 진화하는 법칙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키무라 시케노부(木村重信)는 고대가 자연의 법칙, 중세가 신의 법칙, 근대가 인간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개연적인 도식화에 따른 오류가 용인될지라면 미술사 역시 인간의 역사이므로 기본적으로는 비슷하더라도 보다 복잡한 동기에서 움직이는 도식이 가능할 수 있다. 이 모든 시대의 모든 분류의 바탕에는 행위와 대상이 있다. 조형제작은 대상을 매체로 하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원론적인 논의는 서구미술의 흐름에 맞추어져 있다.
동굴시대를 움직이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미분화를 목표로 모든 것이 결정된 듯한 시대이었다. 동굴벽화에서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그림을 그렸고 그것이 바로 환경이었다. 자연이 화면이고 자연이 안료이되 화면은 인간과 자연, 자연과 인간의 사이에 있었다. 인간은 자연물에서 연상되는 형체를 발견했고 불규칙한 화면위에 예측불허의 자연과 동물을 겹치고 겹쳐 그렸다. 그린다는 행위는 있되 행위의 주체에는 이름이 없었다.
고대는 제신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신을 발명하였으며 인간은 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신은 자연이나 동물과도 동격이었다. 표현을 위한 질료도 신의지에 합당한 것을 인간이 선택하는 형식이었다. 화면은 인간과 신의 중간에 세워졌고 인간은 인간을 척도로 행위할 수 있었다.
중세는 유일신의 규범에 따라 행위는 하늘을 향하여 행해졌다. 인간의 전생, 이생, 후생이 신의 의지에 따라 해석되었고 드높은 궁륭과 천정을 향하여 인간은 화면을 펼쳤다. 보다 인간을 수고롭게하는 질료와 안료가 선택되었다.
르네상스는 인간이라는 척도가 되살아난 시대이며 인간은 다시 자연으로 회귀했다. 인간은 화면으로 자연을 가로막은 후 화면이라는 창문을 통해 자연을 재현했다. 인간의 행위는 화면이라는 대전제의 뒤쪽으로 숨어들어가고 천재라는 대명사가 작가의 이름을 수식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바로 키무라가 말하는 이른바 자연, 신, 인간의 법칙을 미술에서 원용한 대목이다. 그러나 사진술의 발명과 양차대전은 인간의 의식을 자연과 신에게서 인간의 문제로만 국한시켰다. 기계복제와 대량학살의 결과 인간이 체득한 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행위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것의 한계거나 인간외의 물질적인 것에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 뿐이었다.
그 첫번째 징후가 바로 시각의 법칙이었다. 인상주의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을, 표현주의는 인간의 감정에 의해 체현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입체파는 2차원의 평면만을 고집하는 기계복제가 볼 수 없는 시각을, 절대주의는 인간의 조형의지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순수한 조형의 결과를 향해 행위했다. 그러므로 행위는 인상과 표현과 시각과 순수조형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 작가라는 영웅적 존재에 대표성을 물려주고 행위와 매체는 집념과 의지라는 이름으로 화면의 뒤쪽으로 숨어들었다.
물질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관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한다. 미학자를 실망시키기 위해서건 발견된 오브제가 전시장에 놓여지면 최소한 예술작품으로 오인될 소지가 생겨나거나 대량생산과 물질만능시대의 무개성한 상품이 그 자체로서 화면을 대신할 수 있다는 관점이 ‘발견’ 되었다. 행위는 발견된 오브제에 단지 작가라는 대표성을 명기하거나, 화면의 구성을 행위로 옮기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다다의 출현과 활동으로 나타난다. 뒤샹(Marcel Duchamp)은 물질이 인간의 실망을 대변해줄 수 있음을, 쉬비터스(Kurt Schwitters)는 물질이 환경이며 대상이면서 또한 행위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뒤샹의 오브제는 네오다다로, 컴바인 페인팅으로 나아가 미니멀 아트로 연결되면서 설치미술(Installation Art)로, 쉬비터스 의 메르츠 바우(Merz Bau)는 설치미술, 메르츠 극장(Merz Theatre)은 행위와 환경의 모형(Archetype)이 되고 있다.
격렬한 붓 터치로 구성하거나 먹물을 묻힌 솜뭉치등을 화면위에 던진 후 재구성하였던 타쉬즘(Tashisme), 물감을 뿌리거나 떨어트려 화면을 만들어나간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근원적인 생명의 징후를 생생한 포름을 통해 정착하려고 했던 앵포르멜(Informel)은 인식의 규범에 의해 움직인 것으로 인식되는 데, 행위는 의식과 무의식에 의한 조형의 질서와 생명을 구현하는, 그리고 결과로서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참고사항이었고 대상은 이미 행위의 보조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행위는 예를 들자면 미성년자에 비유할 수 있다. 자연인으로는 충분히 성숙하였지만 법적으로는 인간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시기와 같다는 뜻이다. 행위가 그럴진대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은 설치미술이라는 나비이기 위한 번데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해설의 근거로서 컴바인 페인팅의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가 오브제의 자족적 역할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행위의 법칙과 행위, 설치미술
이어 행위의 법칙에 의해 조형이 움직이는 시기가 온다. 이른바 이벤트(Event)와 해프닝(Happening)의 탄생이고 퍼포먼스(Performance)의 성장이다. 원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화가와 자연을 가로막아왔던 화면자체거나 화면이라는 텍스트가 사라지고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라고도 부르는 액션 페인팅에서 가능성을 성숙시켜온 행위만이 독립된 것이었다. 여기서 이벤트는 정확하게 1952년에 탄생했지만 해프닝은 1956년, 1957년등 약간의 이설이 있고 퍼포먼스는 70년대의 양상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문헌상에서 발견되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해프닝과 퍼포먼스의 사이에는 설치미술을 위한 두개의 가능성이 끼어들 수 있게 된다. 바로 환경미술(Environmental Art)과 펑크 아트(Funk Art)이다. 환경과 펑크는 개념미술(Conseptual Art)과 미니멀 아트(Minimal Art)가 주도하는 미술사에서 혹은 섞여 들어가면서, 혹은 보완적인 요소로서 꾸준히 시도되었고 설치미술의 범본이 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 개념미술과 미니멀 아트를 움직인 동인으로서 개념의 법칙을 상정할 량이면 사실상 미술사에서 갈 곳까지 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게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법칙이나 규범으로 설명되고 있는 단어를 나열해보면 자연- 제신-유일신-인간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있고 그 인간의 세계가 시각-인식-개념으로 미분되는 과정, 그리고 행위와 물질이 각기 나름대로 분화하는 과정으로 분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에서 개념까지의 미분과정이란 사실상 그러한 진화도식의 끝이거나 최소한 다른 개념이 들어서기까지의 정체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신표현주의(Neo- Expressionism)나 신구상주의(Neo- Expressionism)는 제이차대전이후 아트(Art)라는 이름을 붙이고 미술사에 등장했던 숱한 미술양상들을 다시 전전(戰前)의 이즘(Ism)의 시대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개념이라는 이름으로 화석화한 싸늘한 화면에 인간의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보면 퍼포먼스와 설치미술의 열기와 온기는 미술에서 인간의 체온을 되살릴 수 있는 미술의 양상으로 기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질료와 매체의 차이
행위미술이란 쉽게 말하자면 예술가의 신체를 매체로 삼고 행위를 질료나 안료로 구사하는 미술의 한 형태이다. 그렇게 본다면 설치미술은 환경을 매체로 삼고 오브제를 질료나 안료로 구사하는 미술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와 설치, 그리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작품을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