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t...Traditional Korean hat signifying Sun-worship thoughts which represent Korean dignities and cultural identities...
싱거비 가아 합니다. 뭐 어느 학예연구원은 갓이 머리를 보호하고 예의를 나타내지만 이조500년 써온 것은 우리민족의 멋스러운 것이라던데...또 누구 학예실장은 한국인에 종합적인 능력을 가졌던 DNA가 있어서 갓도 만들고 반도체도 만들고...그랬다는데...거 참...

우서비 보오 합니다. 어느 씨는 조선총독부가 이조李朝=이씨조선李氏朝鮮으로 비하한 왜색잔재는 왜 들고 나오셔? 누구 씨는 정교하게 만드는 DNA라면 안성맞춤 유기鍮器가 더 좋은 비유일텐데...밴댕이 소갈딱지같은 소견머리인지...문화사적인 접근에는 두뇌용량이 모자라는 건지...
매깨비 자아 합니다. 이족夷族의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흰 옷에 상투를 틀고 은나라 문화권인 조선에 왔다 잖아...동이東夷로 찌그러들어도 우리 조상은 동양문화의 주역이었다는 자부심으로 태양숭배의 징표인 흰 옷을 입고 상투를 존중해서 갓을 썼다...그건 이해가 힘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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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인용-金永材 민화의 고향 자유문고 2020 현재 인쇄대기 중-에서 발췌
당서唐書의 배구전裵矩傳에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주나라 때에 기자의 조선이 되고, 한나라 때는 조선을 현도, 낙랑, 대방의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三國遺事1卷 古朝鮮., 朴時仁 알타이 신화 청노루:서울,1994,p.128.
한국인의 입장이다. 기자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동족이라는 점, 동이東夷로서 동이의 땅인 한반도의 왕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고 할 때에, 신하가 왕을 치는 것은 불인不仁이니 은나라를 치지 말라고 말린 백이, 숙제도 동이의 나라 고죽국의 두 왕자였고, 무왕의 태사가 되어 은나라를 칠 때에 큰 무공을 세우고 제후가 된 태공망도, 은나라를 친 후에 무왕에게 정치의 대법을 가르쳐 준 조선왕 기자箕子도 동이였다. 그리고 회이, 엄 등도 동이였고 이들을 정벌한 것을 축하한 식신息愼도 동이였다. 그리고 주나라를 세운 것은 서이였다. 이와 같이 은· 주 혁명은 중토에 들어가서 살고 있던 이夷, 즉 오늘날의 말로 알타이 어족의 여러 집단 간의 전쟁이었으며, 그 중에서 새로 중토에 들어간 무리인 주가 먼저 들어가서 왕조를 이룬 은을 치고 선 것이다. 史記 61卷 伯夷列傳孤竹國註에 遼西 令支에 있었다고 함. 설문에 首陽山이 遼西에 있다는 것과 부합된다. 先秦時의 遼西는 지금의 山西省에 있었다. 朴時仁 알타이 신화 청노루:서울,1994,p.99.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
기자가 동쪽으로 온 것은 같은 씨족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국인이 주장하는 기자설의 요점이다.
중국의 상 주 시기 B.C. 11세기에 원래 중국 요동 지역에 살던 동이족이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상의 귀족이었던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세웠다는 기록은 이러한 이주의 사실을 역사서에 반영한 것이다. 孫進己東北民族源流 林東錫 옮김東文選:서울,1992,p.395.
옛날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기자는 예의와 농사 양잠을 가르쳤고 8조의 교를 제정했다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敎以禮義, 田蠶, 又制八條之敎라 했고 삼국지 동이전 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이는 고조선이 기자가 인솔해서 동쪽으로 간 상나라 사람 즉 동이인의 한 지파와 한반도에 토착해했던 예인이 결합하여 이루어져 있었음을 표명한 것이다. 孫進己東北民族源流 林東錫 옮김東文選:서울,1992,p.395.
서백이 은나라 마지막 왕을 정벌하고 그 왕의 아들 녹부로 하여금 은나라의 남은 백성들을 다스리게 한 것은 은나라 세력이 커서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은나라가 망한 후에 조선의 왕이 된 기자箕子는 은나라 왕족이자 대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은나라 왕족도 본래 동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녹부祿父도 송宋의 미자微子도 동이였다. 朴時仁 알타이 신화 청노루:서울,1994,p.99.
주나라가 상을 멸하고 자신의 성씨인 희성과 강성을 여러 이인의 땅에 봉했다. 또 기자가 상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 조선으로 가자 주나라 왕실에서는 이를 조선후朝鮮侯에 봉했다. 기자가 통치집단으로 이용한 이들도 역시 이족이었다. 孫進己東北民族源流 林東錫 옮김東文選:서울,1992,p.433.
기자유풍箕子遺風
구당서 신라전 운: 그 풍속이나 형법, 의복이 고려와 백제에 소략하나마 같은 것은 조복에 흰 옷을 숭상하고 복색은 흰 빛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舊唐書新羅傳云..其風俗, 刑法, 衣服與高麗, 百濟略同, 而朝服尙白. 服色尙素. 莊練, 箕子與朝鮮-韓國的歷程 歷史 第46期, 民國80年, pp.25-29.
원래 당시의 조선 백성이 흰 옷을 입는 풍속은 기자를 본떠서 기자가 입었던 옷으로 인하여 야기된 것이 분명하다. 이 일단의 이야기에 따르면 기자가 한인의 눈이나 마음에 지위가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예기 단궁편 중에 은나라 사람은 흰색을 숭상한다-은인상백殷人尙白이라 했다. 原來當時的朝鮮人民著白衣的風俗, 乃起因於效法箕子而慕期衣著! 由此一段話, 當不難想像箕子在韓人心目中的地位如何. 按..禮記檀弓 篇中亦有殷人尙白之語. 莊練, 箕子與朝鮮-韓國的歷程 歷史 第46期, 民國80年, pp.25-29.
또 회남자 제속훈에 이르길, 그런 즉 은나라 사람의 흰 옷이 조선에서 들어 난 것은 바로 이렇게 은상의 풍속을 좋아하고 숭상했다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한국인이 기자의 예교와 훈도에 습관이 되고 후세에 또 뜻이 새겨져 보존된다는 것은 이천 년간 한인이 백의라는 특수풍속을 좋아하고 분명히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又淮南子齊俗訓云..然則殷人著白衣之朝鮮, 所顯示的正是殷商是人之風俗好尙. 韓國人習於箕子的禮敎薰陶, 加之後世又刻意保存, 於是就造成兩千年內韓人好著白衣的特殊風俗. 莊練, 箕子與朝鮮-韓國的歷程 歷史 第46期, 民國80年, pp.25-29.
서경의 첫 5편은 요순시대, 6-9편은 하나라,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멸망, 마지막 32편은 기원전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西周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경 역시 서주시대까지의 시가를 모았다. 그런데 이 시대는 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동이의 활동시기로 지목하고 있다.
왕명손은 이족夷族은 하족夏族과 나란히 동과 서를 대표하는 부족, 혹은 국가로서 특히 이족은 중국상고시대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고 주장한다. 王明蓀,論上古的夷夏觀邊政硏究所年報第14期, 民國72=1983年 10月 1-13項
은나라는 본래 동이의 한 지류였는데 은나라의 시조 설은 우번현 산동 등현을 서울로 하고 탕임금은 박亳-현 산동 등현을 서울로 삼았으니 설에서 탕에 이르기까지 14대 400여년이 지나도록 그 활동근거지 즉 정치경제중심 도읍이 산동山東에 있었다. 탕임금의 연호年號인 반경盤庚에 이르기까지 10대 20왕이 다섯 번의 천도를 했는데 그 중 세 번의 정도定都가 지금의 산동 경내였다. 은상문화는 동이 해대海岱문화가 기초가 되고 발전의 기반이 되는데 이는 동이 해대문화와 중원 문화가 결합한 결과였다. 殷本是東夷的一支, 殷的始祖偰都于蕃今山東藤縣, 湯都于亳今山東曹縣, 從偰到湯, 共傳14代, 經過四百余年, 其活動根據地, 則政治經濟重心, 都在山東. 從湯到盤庚, 十代二十王, 共遷都五次, 其中三次定都于今山東境內. 殷商文化是以東夷海岱文化爲基礎爲發展起來的, 是東夷海岱文化與中原文化結合的結果. 鄭一鈞 唐治卿 孫順華 孟天云 作 齊國史 山東人民出版社 1992, 濟南,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