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카: 집을 떠나 집의 의미를 배우다
초막절!!! 이스라엘 전역에는 예사롭지 않은 진 풍경이 벌어집니다. 25일 금요일 해질녘 시작된 5787년 초막절 첫날은 안식일과 겹칩니다. 해가 예루살렘의 석벽을 천천히 떠나면, 익숙한 거리가 낯선 마을로 변합니다. 발코니마다 작은 지붕이 돋아나고, 공동 마당에도 임시 벽이 세워집니다. 모두가 매우 짧은 시간에 허술하게 지어진 집들입니다. 어떤 벽은 천이고 어떤 벽은 나무판이지만, 갈대와 가지로 얹은 지붕은 모두 하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만든 종이 장식 아래 식탁과 의자가 놓이고, 이웃의 초막들도 하나둘 불을 밝힙니다.
이처럼 임시 거처로 만들어진 초막집 한 채를 히브리어로 수카(סֻכָּה, Sukkah)라고 하고, 수코트(סֻכּוֹת, Sukkot)는 그 복수형입니다. 레위기 23장 42–43절은 이스라엘이 일곱 날 이 거처에서 지내며 출애굽 뒤 광야의 세대를 기억하도록 명합니다. 책 속 삽화를 바라보듯 잠깐 관찰하는 기억과는 다릅니다. 평소 집에서 하던 식사를 초막으로 옮기고, 날씨를 느끼고, 식구들과 그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광야의 조상에게는 임시 거처가 하루하루의 현실이었음을 몸으로 배우는 방식입니다.
수카의 지붕에 얹는 스하흐(סְכָךְ, S’khakh)는 나뭇가지처럼 땅에서 자란 재료를 뜻합니다. 유대 율법 전통인 할라카는 지붕에 쓰는 재료와 그 놓는 방식에 관해 자세히 논합니다. 흔히 별이 보이는 지붕을 떠올리지만, 별이 얼마나 보여야 하는지 등 세부 기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장면은 집 안에서는 잊기 쉬운 바람과 빛을 초막 안에서 다시 느낀다는 데 있습니다. 수카는 불안정한 거처에서 살아야 하는 이웃의 고통을 흉내 내는 장소가 아니라, 광야의 생존을 기억하고 지금 받은 보호를 감사하는 자리입니다.
| 수카의 요소 | 무엇을 가르치는가 | 오늘의 질문 |
| 임시성 | 인간의 삶과 소유가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한다. | 나는 무엇을 영원한 보장처럼 붙들고 있는가? |
| 열린 지붕 | 하늘을 향한 시선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배운다. | 내 일정과 계획 사이에 기도의 여백이 있는가? |
| 공동 식사 | 기쁨을 혼자 소비하지 않고 나눈다. | 내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
| 장식과 아름다움 | 감사를 눈에 보이게 표현한다. | 내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기억하고 전할 것인가? |
| 문과 벽 | 보호와 환대의 균형을 배운다. | 공동체의 안전이 누군가의 배제가 되지는 않는가? |
◈ 구약이 그린 초막절의 장면들
레위기 23장을 펼치면 절기의 동선이 먼저 나타납니다. 일곱째 달 열닷샛날에 시작하여 일곱 날을 지키고, 첫날과 여덟째 날에는 성회로 모입니다. 거두어들인 열매와 가지를 들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한 뒤, 자녀에게 왜 초막에서 지내는지를 알려 줍니다. ‘애굽에서 인도해 내던 때’라는 한 구절이 열매를 든 현재와 광야의 과거를 연결해 줍니다. 이를 통하여 열매를 주신 분을 기억하는 만큼, 안정된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의 현실에도 눈길을 돌리게 됩니다.
신명기 16장은 절기의 식탁을 더 넓게 그립니다.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득을 기뻐하되 아들과 딸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풍성한 수확을 소유한 사람과 가진 몫이 적은 사람이 한 잔치에 불립니다. ‘온전히 즐거워하라’는 말은 아무 어려움도 없는 척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기쁨에 참여할 수 없는 이가 문밖에 남아 있지 않은지 살피라는 공동체의 요청으로도 들립니다.
민수기 29장의 제사 규정은 다른 풍경을 펼칩니다. 첫날 수송아지 열세 마리에서 시작해 하루에 한 마리씩 줄여 일곱째 날에는 일곱 마리를 드립니다. 합계는 일흔 마리입니다. 탈무드 수카 55b는 후대에 이 숫자를 세상의 여러 민족을 위한 제사와 연결했습니다. 민수기 본문 자체는 그 상징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목소리의 거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 거리 안에서 독자는 제사 규정의 규모와, 그것을 열방을 향한 기도로 읽은 후대 유대인의 마음을 각각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의 성전 봉헌은 일곱째 달의 절기와 맞닿습니다. 언약궤가 지성소에 들고 구름이 성전을 채운 뒤, 백성은 하나님 앞에 모여 기뻐합니다. 시간이 흘러 느헤미야 8장에서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율법을 다시 듣습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가지를 구해 옥상과 뜰에 초막을 짓습니다. 성전을 세우던 시대와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던 시대가 서로 다르지만, 두 장면에서 말씀을 들은 백성은 삶의 공간을 바꾸어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스가랴 14장의 시야는 예루살렘을 넘어 열방으로 뻗습니다. 모든 민족이 올라와 하나님을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키는 미래의 장면입니다. 이를 실제 순례에 대한 예언으로 읽는 이도, 하나님 통치 앞에 서는 열방의 상징으로 읽는 이도 있습니다. 본문이 오늘의 교회에 어느 해의 여행 일정을 지시한다고 서둘러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절기에서 시작된 그림이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닿는다는 사실만큼은 놓칠 수 없습니다.
1. 유대 학자들의 목소리로 읽는 아르바 하미님
토라가 명한 네 식물의 목록을 보는 것과, 후대 주석이 그 식물에 부여한 뜻을 읽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그 차이를 기억하며 먼저 초막 자체에 관한 랍비들의 대화를 들어 봅시다. 탈무드 수카 11b는 랍비 엘리에제르가 광야의 ‘영광의 구름’을, 랍비 아키바가 사람들이 실제로 만든 초막을 떠올렸다고 전합니다. 한쪽은 보호하신 하나님을, 다른 쪽은 임시 거처에서 살아야 했던 백성을 선명하게 보게 합니다. 이 논쟁은 초막이 하나의 장면보다 넓은 기억을 담아 왔음을 보여 줍니다.
네 식물에 관한 친숙한 비유는 미드라시인 『레위기 라바』 30장 12절에 있습니다. 미드라시는 성경을 풀이하고 이야기로 확장하는 랍비 전승입니다. 맛과 향이 모두 있는 에트로그는 토라의 배움과 선행이 함께 있는 사람, 맛은 있지만 향이 없는 대추야자 가지는 배움이 있으나 행함이 부족한 사람으로 읽습니다. 향이 있는 도금양 가지와 맛도 향도 두드러지지 않는 버들은 또 다른 이웃의 모습이 됩니다. 이 비유의 끝에서 네 식물은 따로 판정받아 버려지지 않고 한 묶음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이것이 토라가 각 식물에 직접 부여한 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중세의 유대 사상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8–1204)는 『방황하는 자들을 위한 안내서』 3부 43장에서 네 식물이 광야에서 풍요로운 땅으로 옮겨 간 기쁨을 떠올리게 한다고 풀이합니다. 현대 이스라엘의 식물 연구자 노가 하레우베니(Nogah Hareuveni)는 식물마다 다른 생육 환경과 물의 필요에 주목했습니다. 전자는 여정의 변화를, 후자는 땅에서 자라는 생명의 다양성을 보게 합니다. 한 전승을 다른 전승의 정답지로 삼을 필요 없이, 각 해석이 어디에 시선을 두는지 살피는 편이 더 풍성합니다.
이제 네 식물을 실제로 손에 든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향이 짙은 가지와 향이 옅은 가지, 열매와 잎이 한 자리에서 움직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야 한다는 미드라시의 말과, 땅과 물에 대한 감사는 그 손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확신보다, 다른 이와 함께 설 자리가 있다는 감사가 먼저입니다.
2. 아르바트 하미님: 네 가지 식물이 한 손에 모이다
아르바트 하미님(אַרְבַּעַת הַמִּינִים, Arba’at HaMinim, “네 종류의 식물”)은 초막절의 또 다른 상징입니다. 레위기 23:40절에는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 종려나무 가지, 무성한 나무의 가지, 시내 버들을 가져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첫날에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의 가지와
시내 버들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기뻐하여라.”(레 23: 40)
울레카흐템 라헴 바욤 하리숀 프리 에츠 하다르 카포트 테마림 바아나프 에츠 아보트 베아르베 나할 우스마흐템 리프네 아도나이 엘로헤이헴 쉬브아트 야밈.
וּלְקַחְתֶּם לָכֶם בַּיּוֹם הָרִאשׁוֹן פְּרִי עֵץ הָדָר כַּפֹּת תְּמָרִים וַעֲנַף עֵץ־עָבֹת וְעַרְבֵי־נָחַל וּשְׂמַחְתֶּם לִפְנֵי יְהוָה אֱלֹהֵיכֶם שִׁבְעַת יָמִים׃
Uleqakhtem lakhem bayom harishon pri etz hadar kappot temarim va’anaf etz avot ve’arvei nachal usemakhtem lifnei Adonai Eloheikhem shiv’at yamim.
원문의 내용에서 아르바트 하미님(אַרְבַּעַת הַמִּינִים, Arba’at HaMinim, “네 종류의 식물”)을 그대로 옮겨 오면, 프리 에츠 하다르(פְּרִי עֵץ הָדָר, Pri Etz Hadar, “아름다운 나무의 열매”), 카포트 테마림(כַּפֹּת תְּמָרִים, Kappot Temarim, “종려나무 가지”), 바아나프 에츠 아보트(וַעֲנַף עֵץ־עָבֹת, Va’anaf Etz Avot, “무성한 나무의 가지”), 베아르베 나할(וְעַרְבֵי־נָחַל, Ve’arvei Nachal, “시내 버들”)입니다. 이것들을 유대 율법과 해석 전통은 에트로그, 룰라브, 하다심, 아라보트로 구체화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독자는 아래 표에서 먼저 열매 한 가지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가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 다음에 사람들의 손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놓이는지 읽으면 됩니다.
| 이름(히브리어·영문 음가) | 식물과 전통적 상징 |
| 에트로그(אֶתְרוֹג, Etrog) | 시트론 열매. 향기와 맛을 함께 지닌 열매로 설명되며, 마음과 행위가 함께하는 삶을 상징하는 후대 해석이 있다. |
| 룰라브(לוּלָב, Lulav) | 종려나무 가지. 네 요소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며, 곧고 위를 향한 생명력을 떠올리게 한다. |
| 하다심(הֲדַסִּים, Hadassim) | 도금향나무 가지. 세 줄기를 사용한다는 전승이 일반적이며, 향기와 은밀한 선행을 묵상하게 한다. |
| 아라보트(עֲרָבוֹת, Aravot) | 시내 버들. 두 줄기를 사용한다는 전승이 일반적이며, 향기보다 물가의 생명과 겸손을 떠올리게 한다. |
전통적으로 룰라브와 하다심 세 줄기, 아라보트 두 줄기를 묶고 에트로그를 곁에 둡니다. 축복 뒤에는 식물을 여러 방향으로 흔드는 관습이 있습니다. 회당마다 순서와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몸을 돌리며 찬양하는 동작은 세상의 어느 방향도 하나님의 돌보심 밖에 있지 않음을 기억하게 합니다. 두 손을 써야 하므로, 한 손에 네 종류를 모두 쥔다는 비유적 표현은 실제 의식의 설명과 구별해 읽는 것이 좋습니다.
『레위기 라바』의 맛과 향의 비유는 네 종류의 사람을 우열을 가리는 순서로 늘어놓으려는 분류표가 아닙니다. 배움과 실천이 두드러지는 사람도 있고, 아직 어느 쪽도 드러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쁨의 자리에는 그들 모두가 함께 서야 한다는 것이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공동체를 쉽게 평가하거나 한 부분을 배제하는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해석으로 읽을 때, 나뭇가지의 작은 묶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넓은 자리들 마저도 하나로 묶어내는 힘을 나타냅니다. 이를 랍비적 묵상을 현대적으로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네 종류의 기쁨은 완성되지 않는다.”
3. 흔드는 손, 흐르는 감사
사람들이 네 식물을 흔들 때 동서남북과 위아래라는 방향이 기도에 들어옵니다. 이 동작은 날씨를 만들어 내는 기술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비를 기다리는 땅과 그 땅에서 일하는 사람, 먹을 것을 나누는 이웃의 삶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는 몸짓입니다. 시편의 찬양을 입으로 부르는 동안 손이 그 박자를 따라 움직입니다. 믿음이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생활의 자세로 이어지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게 전해주는 도전
그리스도인이 이 유대 의식을 자신의 의무로 옮겨 올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손에 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받은 것을 붙들고만 있는지, 사람들과 나누는 데 쓰는지 말입니다. 실제 식탁을 열고 굶주린 이에게 식료품을 건네는 작은 행동은 초막절을 흉내 내는 행사가 아니라, 이 절기에서 배운 감사를 자기 삶의 언어로 말하는 방법입니다.
수카의 얇은 벽은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보여 주고, 네 식물의 서로 다른 모습은 공동체가 한 가지 재능만으로 서지 않음을 일깨웁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의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그 물음을 자기 삶에 담아 들일 수 있습니다. 안전한 집에 사는 이가 거처 없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가? 풍성한 손이 빈손을 찾아가는가? 작은 집에도 낯선 이의 이름이 놓일 자리는 있습니다. 하늘이 보이는 지붕 아래서 배운 감사는 문을 닫은 뒤에도 이웃의 삶을 덮는 작은 그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샬롬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