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림 싸메아"(פּוּרִים שָׂמֵחַ, Purim Sameach)!!!
오늘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받은 이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절기'로 잘 알려져 있는 '푸림'(פּוּרִים, Pūrîm, 제비들")에 대해 몇 가지 나누기 원합니다.
'LA 시간으로 2(월)일 해가 저물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면, '푸림'(פּוּרִים, Pūrîm, 제비들")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 속의 유대인 마을의 거리에는 웃음 소리가 넘쳐납니다. 아이들은 멎진 가면을 쓰고, 어른들은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건네며, 최고로 흥겨운 밤을 보냅니다. 특히,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읽어나가며, 서로에게 질문합니다. “운명은 누구의 손에 달려있는가?”라고.
'푸림'(פּוּרִים, Pūrîm, 제비들")! 우리 성경으로는 '부림절'이지요. 이 단어의 단수형은 ‘푸르’(פּוּר, pūr, “제비, 또는 운명”)입니다. 바벨론식 운명의 표시처럼 보였던 인간-하만-이 던진 작은 돌맹이들이 역사를 바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붓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1. 감추어진 이름, 드러난 구원
에스더서에는 단 한번도 하나님의 이름(יהוה, YHWH)이 직접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침묵은 부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심오하고 깊은 관계의 언어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숨기다, 은폐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사타르'(סָתַר, sātar)에서 파생된 이름이 바로 에스더(אֶסְתֵּר, ʾEstēr)입니다. 그녀의 이름 속에 이미 “숨겨진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시간과 장소에 상관 없이 항상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스며 늘 함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능력의 손길을 통해 사랑으로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에스더가 왕후로 선택됨, 충성의 행위가 기록으로 남겨짐, 왕의 불면과 기록의 낭독, 대적 '하만'이 모르드개를 높이라는 명령을 직접 수행하게됨, 우연한 만남과 때맞춘 용기...,
연이어서 전개되는 모든 사건들이 우연으로 포장되어 마치 한 편의 극적인 드라마나, 정교한 직조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전복의 놀라움을 전해주는 살아있는 역사의 기록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숨은 섭리는 '예수아'의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세상은 그를 실패자라 불렀으나, 하나님은 그 분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 부르셨지요. 십자가의 나무가 저주의 표지처럼 서 있을 때, 그 안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구원으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무려 세 언어-히브리,헬라, 로마-를 총동원하여 세상을 향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요 19:19-22).
'푸림'의 전복은 십자가의 역설을 예고하는, 어둠 속에 밝게 빛나는 한 줄기 별빛과 같습니다. 보이지 않음 속에서 더 또렷해지는 사랑, 침묵 속에서 더 깊어지는 관계, 이것이 에스더서가 보여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이요, 각별한 사랑인 것입니다.
2. “죽으면 죽으리이다”—관계의 결단
에스더의 고백은 떨림 속의 결단이자, '푸림'(פּוּרִים, Pūrîm) 신학의 정점입니다.
"베카아셰르 아바드티 아바드티"
(וְכַאֲשֶׁר אָבַדְתִּי אָבַדְתִּי, ve-kha’asher āvadti āvadti )
직역하면 "내가 망하면 망하리이다." 의역하면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그녀의 말은 영웅담이 아니라, 심오한 관계의 언어입니다. 왕 앞에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다. 이는 단순한 용기가 아닙니다. 자기 생명을 담보로 공동체를 구하는 대속적 결단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민족 공동체를 향해 내딛는 비장한 한 걸음. 왕후 에스더의 이 한 걸음이 포로기 언약 백성 유대인들의 역사의 물줄기를 180도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예수아'는 깊은 관계와 결단의 모범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신 하늘 아버지와의 친밀함(요 8:29), 제자들과의 3년여의 동행, 잃어버린 자를 향한 무한한 연민(눅 15장), 배반한 제자들에 대한 변함 없는 신뢰 관계를 지속하셨습니다(요 21:1-23). 또한, 구속 사역 완성을 위한 절연한 의지의 결단을 하실 때에도, 의사 누가는 다음의 본문을 통해 한치의 주저함이 없으셨음을 밝혀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이후로, '예수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실 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명확하게 알고 계셨고, 결코 뒤돌아 보지 않고, 대업을 위해 쉼 없이 올곧게 나아가셨습니다(눅 13:22, 33, ;17:11 ;18:31,35 ;19:28, 41). 그리하여 죄로 단절된 세상의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대속 제물이 되어 자기 전부를 십자가에서 쏟아부어 주심(요 19:33-34)으로 관계의 절정, 결단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심지어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도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있으리라"(마 28:20)고 하시며, 영원한 관계로 완성하셨습니다.
왕후 에스더는 금식 후에 왕 앞에 섰고, '예수아'는 겟세마네의 기도 후에 십자가를 향해 거침 없이 앞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에스더의 삼일 금식은 '예수아'의 죽으심 이후,삼일간의 무덤과 묘하게 겹쳐집니다. 한 사람의 '일사각오'의 결단이 민족을 살렸고, 한 사람 '예수아'의 순종하심으로 온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에스더의 용기와 십자가의 사랑은 서로를 비추는 두 거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나무에 달린 자: 하만과 '예수아'
'하만'(הָמָן, Hāmān)은 에스더서에서 조연의 핵심되는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각 사람 함무다다의 아들로 소개됩니다. 여기서 아각(אֲגָג, Agag)은 아말렉 족속의 왕의 이름(삼상 15장)인 연고로 '하만'(הָמָן, Hāmān)을 이스라엘의 대적 아말렉의 후손이라는 상징적 표지로 구약의 오래된 적대 서사를 이어가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만'의 분노는 한 사람 유대인 모르드개에게 당한 개인적 모욕에서 시작되지만, 곧 민족적 말살의 흉계로 확장되었습니다. '푸르'(פּוּר, pûr, "제비")를 뽑아 날짜를 정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제가를 받아 페르시아 제국 전체에 유대인 학살 칙령을 반포합니다. 여기서 '하만'은 교만이 권력을 만나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에스더서 3장까지의 전반부만 보면, '하만'은 자신의 가진 모든 것들을 총동원하여 결국에는 유대인 말살의 흉계를 실현할 모든 것을 완변하게 마무리한듯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며칠 후에는 눈에 가시와 같은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집에 50 큐빗(약 22.5 미터)나 되는 큰 나무 장대를 만들어 세워놓기까지 했습니다. 그 높이는 단지 처형의 실용적 장치가 아니라, 교만한 인간의 자아가 닿고자 했던 치밀한 의도가 숨겨있는 고도의 은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굴욕 위에 자신의 존귀를 세우려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그 나무에 함께 결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바대로, 바로 다음 날, 왕후 에스더의 연회에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반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왕의 분노는 하만의 치밀했던 계산을 송두리채 삼켰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세워놓은 장대에 오히려 자기자신이 매달리는 형틀이 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에 7:10). 타인을 겨냥한 도구가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순간. 한편으로 저주를 위해 준비되었던 도구가 오히려 다른 편에서 구원이라는 놀라운 반전을 가져오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뒤집힘', '반전'의 개념이 '프림'(פּוּרִים, Pūrîm)의 핵심입니다.
율법은 단호하게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아래 있다”(신 21:23)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심판의 가시적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하만의 장대는 악의 자기폭로인 동시에, 바른 정의의 엄중함을 증거하는 표지입니다. 악인 '하만'은 의로운 타인-모르드개-의 죽음을 설계했으나, 그 설계는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패악을 향한 판결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또 다른 나무가 서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반역 수괴를 처형하는 형틀, 십자가입니다. 그 위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예수아'이십니다. 하만은 죄의 결과로 매달렸지만, '예수아'는 죄 없이 온전한 순종으로 매달리셨습니다. 하만의 나무가 자기 파멸의 증거라면, 십자가는 자기 비움(빌 2:5)의 증거물입니다. 하나는 교만의 높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종결이 아니라, 구원으로의 완전한 반전의 자리입니다. 인간이 마련한 처형의 도구를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을 위한 구원의 통로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처참한 패배처럼 보인 장면이 영광스런 승리로 기록되고, 칠흙같이 어두운 침묵의 시간에서 찬란한 아침을 여는 여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빛,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만의 나무에서 우리는 정의의 엄정함을 보고, 십자가의 나무에서 우리는 은혜의 광대함을 봅니다.
여기서 두 나무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하나는 죄인된 인간의 오만이 어디로 가는지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내려오는지 보여줍니다. 하만은 타인을 매달기 위해 나무를 세웠으나, '메시아'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달리셨습니다. 전자가 높아지려다 무너졌다면, 후자는 낮아지심으로 지극히 높혀지셨습니다(빌 2:11). '예수아'는 저주의 형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저주의 종결과 동시에 구원이 시작된 자리입니다. 하만의 나무는 악인의 몰락이었고, '예수아'의 십자가는 죄의 몰락이자 사탄의 일을 멸하는 완전한 승리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푸림'(פּוּרִים, Pūrîm, 제비들")은 다른 말로 "전복, 혹은 뒤집힘"(ונהפוך הוא, ve-nahafoch hu, 베-나하포흐 후)의 절기(에 9:1)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뒤집힘"은 단순한 반전의 의미만 아니라, 권력 구조의 전복이요, 역전된 운명이며, 멸절의 저주가 새 생명으로의 구원이라는 깊은 영적 차원의 대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죽음이 생명으로, 애통이 기쁨으로, 멸절의 위협이 구원의 존귀로 바뀌는 날. 그래서 '예수아'의 십자가 역시 한 마디로 궁극적 “뒤집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푸림'(פּוּרִים, Pūrîm)의 본질은 '기쁨의 축제'이기에 앞서 '전복의 신학'입니다.
위와 같은 '푸림'(פּוּרִים, Pūrîm)에 대한 영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을 통한 구원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아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축복하는 자리에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복을 위한 기도
은밀히 일하시는 하나님, 아달의 한 날에 웃음을 주셨던 주여,
흩어진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멸절의 두려움이 구원의 노래로 바뀌었던 그 날처럼,
상처가 소명으로, 눈물이 기쁨으로 바뀌게 하소서.
'예수아' 안에서 관계의 문을 다시 여시고, 진리 안에서 모두가 화해하게 하시며,
주님의 몸된 교회가 교만을 벗고 겸손으로 서게 하소서.
3 - 3일의 금식처럼 우리의 시간을 거룩하게 하시고,
10- 하만의 10명의 아들들-의 완전함처럼 악의 뿌리를 끊어내시며,
12-아달월- 달력처럼 세대를 이어 기억하게 하소서.
127- 페르시아 제국의 도- 모든 땅 끝에서도 주께서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평화의 왕 '예수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푸림'(פּוּרִים, Pūrîm)은 유대인의 절기이지만,
성경의 메시지는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에게 숨겨진
심장의 박동소리로 뜨거운 울림을...,
운명이라 부르던 것이 은혜로 바뀌는 순간,
두려움이 노래로 변하는 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가장 분명해지는 시간.
그곳에서 우리는 '예수아'의 얼굴을 봅니다.
관계로 오신 하나님, 관계로 남으신 하나님,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푸림'(פּוּרִים, Pūrîm)의 빛 아래서,
우리는 다시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제비는 던져졌으나,
역사는 사랑의 손에 들려 있음을!!!
마지막으로 오늘도 다양한 재난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 멸절의 두려움 속에서 또 다른 '푸림'(פּוּרִים, Pūrîm)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구하는 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레, 닛시, 샬롬"의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길 '메시아' '예수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샬롬샬롬!!!
다시 한번 "즐거운 부림절 되세요"!!! '프림 싸메아'(פּוּרִים שָׂמֵחַ, Purim Sameach)!!!
유대인 회복과 선교동원의 '길을 여는 사람들'(미 2:12-13)
김성수(Yochanan), 현정(Rebekah)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