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내 왼쪽 상단 글 설명>
현대 표준말로 다시 표현하면 아래와 같고
한국의 대표적 소설가 <이문구> 작가의 충청도 방언(구어체)이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가을이 끝나고 쌀쌀한 기운이 돌 때쯤이면 꼭 기억나는 것이 있다. 학창시절 겨울방학 전 전교생이 산토끼 몰이가 추억으로 생생하다. 산토끼 몰이는 중학교 시절 행사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었기에 은근히 기다리자는 날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 3번 토끼몰이를 한 적이 있다. 60년대 후반 70년 초반에는 산에 나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민둥산이라 토끼가 잘 드러나 보이기 때문에 토끼잡이가 어렵지 않았다. 봄, 가을의 전교 행사인 소풍처럼 학생들에 심신단련의 목적으로 학교 내에서 정하여 실행한 것이다. 언급하였듯이 그 당시는 학교 주변 산들은 모든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키 작은 소나무, 오리나무, 싸리 등 관목 정도 조금 있었을 뿐 산이라 해도 거의 풀밭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미술 시간에 야외 풍경을 그릴 때면 산의 색칠을 초록색이 아닌 황토색을 그릴 정도였겠는가!, 실제로 주위에 보이는 산들은 모두 땅이 보이니 황토색이었고 산 정상에는 더욱 심하게 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것은 동네 인근 산에 풀을 먹이러 아이들이 소들을 몰고 산에서 풀을 뜯게 하려고 고삐를 풀어 놓고 땅을 많이 디디고 뛰는 등 놀이터 삼았었기에 정상은 풀도 없이 흙이 드러나 있었다. 소먹이는 일이 소가 있는 집 아이들의 방과 후 일과이기도 하였다. 소는 풀을 뜯게 하고 아이들을 비교적 평평한 곳에 모여 땅따먹기 놀이를 하거나 고무줄놀이 등을 하곤 하였다. 그렇게 놀면서 개구리나 뱀을 잡아서 불에 굽기도 하곤 하였다. 아마 먹기도 하였던 것 기억이다. 소가 없는 집의 아이들도 간혹 같이 어울려 놀기 좋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산에 가곤 하였다. 아이들 가운데 나이가 몇 살 위인 형들이 불을 지펴서 그렇게 하곤 하였다. 아마도 산에는 풀만 무성할 정도였기에 정상 부근에서도 개구리들이 있었고 자연 뱀들도 흔하게 보였다.
산토끼 몰이는 12월 겨울 방학하기 전날 꼭 하는 행사였다. 학생들 각자 1 미터(meter) 2미터 사이 정도의 튼튼한 막대를 준비하여 전교생이 인근 야산으로 소풍 가듯이 줄로 서서 모두 간다. 아마 남학생들만 토끼 사냥을 하러 간 것 같았다. 본인이 다닌 학교는 면 소재지 학교가 유일하였기에 남녀 공학이었다. 남학생이 4반 여학생이 2반으로 운영되었다. 이때 음악 선생님은 나팔을 꼭 챙긴다. 산 밑에서 나팔소리로 은신하고 있던 토끼들을 깨우고 도망가게 한다. 토끼는 앞발이 뒷다리보다 짧기에 달아날 때는 수평으로 달려가다가 높은 곳으로 꼭 간다. 그래서 아래에서 토끼를 쫓으면 정상 근처에 한 줄 혹은 두 줄로 촘촘히 능선을 따라 일렬로 쭉 서 있기에 토끼가 거의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몽둥이로 때려잡는 식이었기에 잔인한 죽임이었다. 요즈음은 동물 학대로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해마다 여러 마리씩 꼭 잡는다. 이렇게 잡은 토끼를 학교 소사(小使)가 가죽을 벗기고 손질하여 큰 솥을 이용하여 삶았다. 학교 수위 겸 잡일을 도맡아 하시는 분을 소사(小使)라 불렀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에서 운동장 한쪽 구석진 곳에 임시로 큰 솥을 걸어두고 동네 주민들이 큰 모임이나 운동회 등으로 모일 때 사용하기 위하여 갖추고 있는 시설이다. 지금처럼 식당이 따로 있어서 학교에서 학생들이 식사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점심 식사는 집에서 모두 도시락을 준비하여 해결하였다.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학생은 점심시간에 밖으로 나갈 수는 없으니 소위 개구멍을 이용하였다. 개구멍은 개나 고양이들이 드나드는 작은 통로인데 그 당시 학교 담장이 가시 탱자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사람은 통과하기 불가했다. 개구멍을 통해 빵이나 과자를 사서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하곤 하였다. 빵은 도넛이었고 과자는 라면처럼 꼬불꼬불하게 기름에 튀긴‘라면땅’이었는데 그 당시 가장 인기 있는 군것질거리였었다. 이 <라면땅>이 출시되기 전까지는 <삼양라면>을 스프(Soup) 봉지로 양념 삼아서 과자처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