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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두천 시민들의 투쟁
11월 4일 동두천민주시민회, 한소리회(다비타의 집, 두레방, 막달레나의 집, 양지공동체), 동두천지역 택시노동조합, 북두노조, 전교조 동두천양주지회, 동두천시 대학생회를 주축으로 지역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전날인 11월3일에는 시민회와 지역단체들이 자체 조사한 내용과 한국 경찰의 일부 진술을 근거로 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각 사회단체와 언론사, 동두천 시민들에게 배포되었으며, 그 반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성명서 배포와 더불어 택시노조에서는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을 시작하였다. 시내에서 장사를 하는 업소들도 미군의 출입을 거부하였으며, 이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언론들을 움직이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성명서에서는 수사권이 한국정부에 있음을 강조하고 한국의 현행법에 의거하여 사건이 처리되어야 하며, 향후 모든 미군 범죄의 수사권 및 재판권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장악을 요청하였다. 또한 범인이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11월 5일 서울을 중심으로 한 50 여개의 사회단체들이 공동대책위를 결성하고, 지역대책위와 공동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지역대책위에서는 11월 7일 미2사단 정문 앞에서 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7일 규탄 대회는 지역대책위에 소속되어 있는 300여명의 시민들이 시내 중심 터미널에서 미2사단 정문 앞까지의 행진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경찰은 가두 행진을 시내에서부터 저지하였으며, 미2사단 정문 앞에도 병력을 배치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자아내게 되었다. 시내에서의 경찰 저지선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돌파되었고, 미2사단 앞에는 2천여명이 시민들이 집결하여 미군의 천인공노할 범죄에 대해 분노를 폭발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대위는 미군 범인을 즉각 한국 검찰에서 구금·수사할 것과 한미행협 파기, 미대통령과 미2사단장의 공개적인 사과를 요청하였다. 국내 미군이 주둔한 지역에서 최대의 미군 범죄 규탄 시위가 개최된 것이다. 또한 시민들의 요구는 즉각적인 미군부대 이전으로까지 요구 수위가 높아졌다. 즉 지역의 발전을 가로막는 미군에 대한 존재를 확인하고, 나아가 주한미군은 미군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동두천 시민들은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11월 15일 동두천대책위에서는 2차 규탄집회를 하였다. 2차 대회에는 400여명이 시민들이 참가하여 미2사단 정문 돌파를 시도하는 등의 격렬한 몸싸움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시민들의 기세에 놀란 미2사단 측은 마침내 사단장 명의의 공개 사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사과문에서 미군 측은 공식적인 사과와 더불어 한국법원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겠다는 취지와 한국 당국의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마클 이병을 소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제 문제는 한국 정부로 넘어 왔다. 한국 검찰이 마클 이병을 소환하여 한국의 교도소에 수감할 지 여부는 한국 정부의 결정 사안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검찰은 11월 11일 케네스 마클 이병의 신병 인도 요청을 포기함으로써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였다. 이제 싸움은 검찰을 위시한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규탄과 시정, 굴욕적인 한미행협 개정, 그리고 잔혹한 살인 미군에 대한 공정한 법정 판결 촉구로 진행되었으며 동두천 지역의 범주를 넘어서 전국민적인 관심사가 된 것이다.
11월 17일 중앙 공대위에서는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고 윤금이씨 추도식 및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처음 윤금이씨의 어머니가 규탄 모임에 참석하였고, 그녀의 절규는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날 행사에는 약 700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으며, 미대사관까지의 가두 시위에는 수많은 시민들의 호응과 격려가 있었다.
11월 25일 공대위에서는 법무부를 방문해 항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2월부터는 살해미군의 한국 교도소로의 수감과 공정한 재판권 행사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이 시작되어 다음 해 4월까지 10만 여명(외국인 3백여명 포함)시민들이 서명을 하였다.
이후 싸움은 중앙공대위를 중심으로 해서 중단없이 진행되었으며, 공청회, 공판참관운동, 관련기관 항의 방문, 클린턴에게 항의 엽서 보내기 등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윤금이씨 살해 미군인 케네스 마클은 94년 4월 29일 한국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되었다. 그의 잔혹한 범행에 비해선 턱없이 낮은 형량이다. 그마저 동두천시민들과 범국민적인 투쟁이 없었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3. 윤금이씨 사건과 투쟁의 의미 1) 민족의 자주권 확보를 위한 문제 제기 윤금이씨 사건은 동두천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동안 수없이 자행되어온 미군 범죄의 하나이다. 그러나 동두천 시민들은 이 사건의 배후에는 '한미행정협정'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민들은 윤금이씨 사건 이전부터 한미행협의 문제점을 지적하였고,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시정할 것을 우리 정부와 미국 측에 요구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미군 범죄에 대한 일시적인 검거 외에는 아무런 대안도 없었다. 윤금이씨 사건을 계기로 터져나온 한미행협 개정 요구는 우리 국민들이 진정한 자주권 확보를 위한 투쟁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이 투쟁을 계기로 한미행협의 부당성과 문제점이 일반 국민들과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으며, 한국정부도 더 이상 굴욕적인 외교 자세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문제는 반드시 시정될 수밖에 없으며, 이제 미국도 협정의 개정을 더 이상 미룰 명분도 없게 되었다. 실로 현명한 시민들의 문제 제기였으며, 우리 현대사의 한 획을 긎는 민족 자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위대한 투쟁의 시발점이었다.
2) 각계 각층의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대응으로 사회운동 발전을 한 단계 높여 사건 초기 동두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대응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택시 노동자들의 미군 승차 거부 운동은 우리 나라의 시민사회운동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또한 지역의 북두음향노조와 구리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참여 등은 우리 민족이 당면한 사회운동의 거시적 목표가 각 계층의 이해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또한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서울을 중심으로한 인권운동 단체 및 법률전문가, 학생들의 참여는 투쟁의 질을 한 단계 높여 내었다. 또한 공대위에 여성단체, 제 정당 등도 가입하여 활동함으로써 연대의 폭을 넓혔으며, 공판까지의 끈질기고 조직적인 투쟁은 우리 시대 사회운동 발전을 한 단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3) 공대위의 '주한미군범죄추방 국민운동본부'로의 전환과 미군범죄에 대한 장기적인 대응책 모색 '주한미군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주한미군의 범죄가 이 사건만이 아니라 그동안 지역적으로나 사건 수로 봐서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장기적인 대응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주한미군범죄추방 국민운동본부'로 다시 발족하게 된다. 운동본부의 발족으로 전국 각 지역에서 발생되는 주한미군 범죄에 신속하게 대응함을 물론 비슷한 경우로 고통받는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의 국제연대도 가능하게 되었다.
4) 계속되는 미군범죄,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 필요 주한미군 범죄는 윤금이씨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미국인들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땅을 기지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고 있다. 미군들은 일반 병사들도 우리 나라에 주둔한 미군 기지는 미국의 영토로 생각한다. 또한 자기들이 한국을 보호해준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다. 즉 그들은 국가적, 인종적으로 그릇된 편견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미군들이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범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잘못된 한미행정협정에서 기인되고 있는 것이다. 미군은 세계에서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이 우월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한 마디로 한국은 최고의 봉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인식은 전환되어야 한다. 미국은 언제까지 한국을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국가의 상태로 유지시키기를 원하는 것일까? 이제 그들도 북한과의 대화를 하는 등 여러 가지 냉전 해체를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밀집된 지역에서의 전쟁이며, 이에 대한 결과는 불과 수 일만에 수 백만명의 희생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예측할 때 전쟁의 무의미성과 더불어 미군의 주둔은 앞으로 냉전 해체 등의 요인으로 그 지위가 약화될 것이다. 아니 그러한 국제 정치 역관계의 변화까지 복잡하게 볼 필요도 없다. 이제 소위 국민을 위한 정부가 들어섰다. 그렇다면 최소한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는 외국으로부터 보장해주는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은가? 시민단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가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왔다. 이제는 정부의 적극적인 판단과 노력이 있어야 할 때다. 한미행정협정의 근본적인 개정이 있어야만 국민의 정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부는 미군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단체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