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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미문화지킴이(문화탐방단./ 옛.생활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거사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102호)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당간지주에서 개천을 건너면 보원사지 오층석탑과 뒷편에는 법인국사 보승탑과 탑비가 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104호)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쇠꼬챙이가 높이 솟아있다. 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보물 106호)
비 받침인 귀부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부도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 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 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덕사
(덕숭(德崇)이라 함은 좋은 품성과 행실을 숭상 함을 말하며
수덕(修德)은 그 덕(德)을 높이기 위하여 수행을 함을 이른다)
수덕사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계룡산의 동학사와 청도 운문사에 견주는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또한 호서의 금강이라 일컫는 덕숭산(580m) 기슭에 자리잡은 유서 깊은 사찰로 서기 599년 백제의 지명법사가 세운 뒤 원효대사가 다시 지었다고 전해지며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년)에 건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그 후 조선시대 중종, 영조, 순조 때에 보수한 기록이 있으며,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 대에 대웅전 전체를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때 포벽에서 고려, 조선시대에 그린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수덕사는 근대 한국불교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경허, 만공스님이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도량이기도 하며,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머물던 곳으로도 유명해 졌다.
경내에는 대웅전, 청련당, 조인성사, 황하정루, 금강문, 천왕문, 일주문을 비롯하여 법고각 범종각 등의 건물이 가득 들어서 있고 또한 덕숭산 서쪽 줄기에는 비구니 제일 선원인 견성암이 있으며 김일엽 스님이 있었던 환희대와 극락암, 선수암의 비구니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 이야기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고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 · 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수덕사 3층석탑 화강암으로 만든 3층석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2개 층이며 지붕석과 몸석은 각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가 있는 것이 특징인데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갖춘 석탑이다 수덕사 노사나불 괘불탱(보물 1263호) | ||||||||||||||||
당진
당진(唐津)이라함은 당나라를 가기위한 나루터인데 신라 고승 원효대사께서 깨달음을 얻기위하여 당나라로 가기전에 이곳을 지나다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을 얻엇음이라. 또한 당나라 군대가 백제를 치기위하여 이곳에 도착하여 진을 쳣음이라, 이는 소정방 군대가 왓다하여 생긴 소래(蘇徠)포구나 서불이가 돌아갓다는 서귀포(西歸浦)와 비슷함이라.
해미읍성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미읍성의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成)’으로 이 성의 축조를 지시한 사람은 조선 세 번째 임금인 태종이다. 1416년(태종 16년) 서산·태안지역을 돌아본 태종은 왜구에 대한 방비책의 하나로 해미내상성을 쌓도록 지시했다. 해미읍성은 조선 초·중기 서해안 지역 수호하던 군사기지이자 피비린내 나는 절규가 울려 퍼지고 수천의 목숨을 앗아간 형장이 되어 버린 얄궂은 운명의 역사를 지닌 곳 조선시대 군사기지였던 해미읍성은 성 안에서 자란 소나무와 느티나무는 이곳에서 마차나 무기로 제작됐고, 소나무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 자란 대나무를 잘라 활과 화살을 만들고 무기제작에 보조 재료로 사용하는 등 전시에 대비해 많은 무기를 성안에서 자급자족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 성문은 동ㆍ서ㆍ남 세 곳에만 있고 북에는 암문(暗門)이 있으며, 해미읍성의 주 출입문인 진남문(鎭南門)은 다듬어진 돌로 된 아치형 홍예문(虹霓門)이다. 성곽의 둘레는 1,800m이며 성곽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탱자의 한자 음을 따서 지성(枳城)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성밖에는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판 구덩이인 해자(垓字)가 둘러져 있으며 발굴조사에 의해 북쪽 해자의 일부를 복원하였다고 하며, 기록에 의하면 성벽 위에 여장(女墻)과 옹성(甕城)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동헌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겸영장은 인근 12개 군, 현의 병무업무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한 지위였다. 책실(冊室)은 병마절도사 또는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으로 일명 책방(冊房) 또는 책사(冊舍)라고도 한다. 동헌부속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 배치로 보아 고자실로 추정되는 건물로서 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던 하급관리를 고자(庫子)라 하였으며 고자실(庫子室)은 이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동헌-동헌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비롯한 현감겸영장(縣監兼營將)의 집무실로서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건물이다 ▲책실(冊室) 병마절도사 또는 현감겸영장의 사적인 일을 돕거나 그들 자제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던 곳으로 일명 책방(冊房) 또는 책사(冊舍)라고도 한다 ▲고자실(庫子室)-관아의 물품을 보관하고 출납을 맡아보던 하급관리를 고자(庫子)라 하였으며 고자실(庫子室)은 이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아(內衙). 내아(內衙).는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는 관사 건물로 살림집이다 淸虛亭(청허정) 청허(淸虛)라는 뜻은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다. 청허정(淸虛亭)은 해미읍성(海美邑城)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이곳에 올라서면 천수만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거 시회(詩會)를 하거나 문인들이 시를 읊었던 곳이다.
해미읍성 시설 중 하나인 청허정(淸虛亭)은 그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성현(虛白堂 成俔, 1439~1504)이 지은 “청허정기(淸虛亭記)”에 그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청허정(淸虛亭)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부임한 조숙기(曺淑沂)가 성종 22년(1491년)에 세운 정자이다. 당시 충청도병마절도사영성(해미읍성)을 들렸다간 문인들이 가면서 남긴 시들이 남아있다.
조위(梅溪 曺偉, 1454~1503)가 충청도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올린 청허정이란 시가 있고, 절도사와 수령이 복무를 마치고 함께 청허정에 모여 지은 “청허정연회도(淸虛亭燕會圖)”, 이경전(李慶全, 1567~1644)이 지은 시가 전하고 있다.
1872년 고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古地)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고지도 작성 이전에 청허정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에는 청허정 자리에 신사를 만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현재 청허정은 과거 관련기록을 근거로 2011년에 개축하였다
호야나무(회화나무)
이 나무는 140여 년 전 병인박해 때 형장의 교수대가 되어 가톨릭 순교자 수천의 목숨을 앗아간 얄궂은 운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고목은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해미읍성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이 이 나무 동쪽 가지에 매달려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나무는 자신의 몸에 매달려 죽어갔던 순교자 1000명의 한 과 피가 서리고 고통스런 죽음을 말없이 바라봐야만 했던 탓일까. 나뭇가지들 대부분이 부러져 빈약했고 한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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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자(垓字)
성 둘레에는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인공수로인 해자(垓字)가 만들어져 있는데, 평상시에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로 사용하다가 비상시에는 다리를 들어올려 통행을 끊었다고 한다. 해자(垓字)는 북쪽에 일부만 시설을 복원해 놓았다
성곽의 종류
성곽은 외부 세력의 침입이나 재해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시설물로, 성벽과 성문 등을 포함하여 그에 부설되는 이를 테면, 여장, 옹성, 치성, 암문, 수구문 등의 여러 가지 시설을 통틀어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오천년 장구한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세력끼리 각축을 벌여왔고, 또한 숱한 외침도 겪었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쌓은 성곽의 수와 종류가 많고, 그 축조 기술 등도 발달해왔다. 오랜 역사 현장 자체인 성곽과 그 자취는 선인들의 생사고락의 내력을 간직한 문화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자연과 함께 하는 성곽 여행은 우리 선조들이 21세기 후손을 위해 특별히 남겨놓은 선물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나라의 성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헌상으로는 사마천의 <사기(조선전)>에 기원전 1세기 무렵 고조선의 도성으로 지어진 왕검성(오늘날의 평양 지역)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처음이다.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팽팽히 힘을 겨루던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성곽의 축조 방법이나 구조가 크게 발달했으며, 이때 쌓은 성곽들은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 수많은 외침을 이겨내는 기본 바탕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읍성이 해안가를 중심으로 많이 축조되었다. 이처럼 반만년 역사와 함께한 성곽 문화의 오랜 전통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곽 문화의 꽃으로 손꼽히는 ‘수원 화성’을 축조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성곽의 종류는 축조 목적과 기능에 따라 크게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도성’, 지방의 중심지에 쌓은 ‘읍성’, 유사시 방어와 도피를 위해 쌓은 ‘산성’, 국경과 요새지에 쌓은 ‘장성’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축성 재료에 따라 ‘석성’, ‘토성’, ‘목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성곽 축조 위치에 따라 ‘산성’, ‘평지성’, ‘평산성’, ‘장성’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곽은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다양한 형태로 발달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군사적 목적을 지닌 산성이 대다수이다. 산성은 성벽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산의 정상 부분에 머리띠를 두른 듯한 ‘테뫼식’과 성벽이 골짜기를 싸고 있는 형태의 ‘포곡식’, 두 방식을 혼합하여 축조한 ‘혼합식’이 되는데, 이와 같은 산성은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 성곽의 독특한 특징이다. 재료로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돌을 이용한 석성이 보편적이고, 네모꼴보다는 지형을 따라 자연스러운 포곡선을 가진 것이 많다.
(1) 목책성(木柵城)
나무를 땅에 박아 가로, 세로로 엮어 만든 담을 둘러 방어시설을 한 것으로 성곽(城郭)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璡夷傳)』에는 목책성에 관한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만, 목책(木柵)의 재질상 오랫동안 보존되지 못하여 지금 그 원형은 찾을 길이 없다. 이러한 목책은 고형식(古形式)이기는 하나 조선시대까지 간헐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의 이중 책성(柵城)과 진양군 진성면 월아산목책성(月牙山木柵城)이 대표적이다.
(2) 토성(土城)
토성(土城)은 석성(石城)과 함께 우리나라 성곽의 주종(主種)을 이루고 있는데 목책성(木柵城)과 함께 고형식(古形式)에 속한다. 축성 재료인 흙을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어 축성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석재 운반이 어려운 산지에서 많이 축조되었다. 토성의 기본축조 방법은 성내외(城內外)를 파서 그 흙으로 토루(土壘)를 쌓고 해자(垓字)도 조성(造成)하는 것이다. 성벽은 판축법(版築法), 성토법(盛土法), 삭토법(削土法) 등의 토축방법이 이용되었다.
3) 석성(石城)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축성되었는 데, 다른 어느 축성재료보다 방어력을 잘 제공해 주고 있고 성곽 주변에 적당한 석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성은 초축 당시부터 석성이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이다. 대부분의 석성은 이전의 토성·목책성·토석혼축성 등을 조선시대에 들어 개축한 것들이다.
(4)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
흙과 돌을 사용하여 성벽을 축조한 경우이다. 석축(石築)인 경우에도 우리나라의 석성(石城)은 대부분 바깥쪽에서 석축을 이루고 있으나 안쪽에는 토사(土砂)와 잡석(雜石)을 채워 비스듬히 쌓아올렸다.
(5) 전축성(塼築城)
벽돌을 성벽 축조(築造)의 주재료로 하여 축성하는 경우로 우리나라의 경우 그 역사가 오래지 않았다. 중국의 경우 당(唐)나라시대 벌써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들어와 축조되었다. 임란(壬亂) 이후 전축성(塼築城)에 대한 많은 이점(利點)들이 제기되면서 일부 성곽 축조에 이용되는데, 숙종대의 강화산성 여장(女墻)과 수원성의 일부에 벽돌이 이용되었다.
2) 축성 목적에 따른 성곽 분류
(1) 행정적 목적
성곽(城郭)의 축조의 제 1차적 기능은 군사적인 목적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곽이 군사적 목적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평시 행정적인 측면이 중시되면서 유사시를 대비한 성곽으로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이 대표적이다. 읍성(邑城)의 경우, 대부분의 읍치(邑治)에 읍성(邑城)을 축조하였는데, 읍성(邑城)은 목사(牧使)와 병사(兵使)와의 이원적(二元的) 조직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2) 군사적 목적
성곽(城郭)을 축조하는 목적은 두말할 나위없이 군사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곽이 군사적인 방어시설물로 축조될 당시는 가장 훌륭한 방어수단이다. 군사적인 목적의 성일지라도 평시 거주 여하에 따라 대피성(待避城)·상주성(常駐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피성(待避城)은 평시에는 성내에서 생활하거나 근무하지 않으나 유사시에 입보(入堡)하는 형태를 말하는 것이고, 상주성(常駐城) 또는 거주성(居住性)은 이와는 달리 성내에서 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3) 지형에 따른 성곽 분류
(1) 산성(山城)
우리나라 성곽(城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성이다. 산성(山城)은 성곽이 위치한 지리(地利)를 얻기 위해 요해처(要害處)나 요충지(要衝地)에 산성을 축조하였는데 꼭 험준한 지형만은 아니었다. 평시 생활근거지에서 가깝고 유사시(有事時)에 즉시 입성하여 역습(逆襲)등의 전술(戰術)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 이러한 위치는 통상 평야를 바라보고 방어(防禦)에도 유리한 지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성은 성벽이 산지를 둘러싼 모양에 따라 테뫼식(머리띠 형식), 포곡식(包谷式), 복합식(複合式)으로 구분된다.
① 테뫼식(山頂式) 산성
성곽(城郭)의 축조된 지형이 산의 정상(頂上)을 중심으로 하여 일정 공간을 둘린 형태로 이러한 형식을 산정식(山頂式) 산성이라 하기도하고, 성벽이 통상 7∼8부 능선(稜線)을 따라 거의 수평되게 한바퀴 둘러쌓은 형태로 마치 머리띠를 두른 것 같다하여 테뫼식이라고도 한다. 테뫼식 산성은 그 축성 년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단기 전투를 대비한 성곽으로 축조되었다.
② 포곡식(包谷式) 산성
성곽(城郭) 안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것을 가르키며, 그 규모가 산정식(山頂式)보다 크다. 포곡식(包谷式) 산성은 계곡을 내포하여 주변의 산세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둘렀기 때문에 성내의 수원(水源)이 풍부하고 활동공간이 넓을 뿐 아니라 외부에 노출도 방지해 준다. 이러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은 산정식(山頂式)이 그 규모를 확대하면서 포곡(包谷)한 경우도 있다.
③ 복합식(複合式) 산성
성내에 산정(山頂)과 계곡(溪谷)을 공유(共有)하고 있는 형태로 일부는 퇴뫼식 산성이고, 일부지역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복합형식(複合形式)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식 산성의 형태는 자연 일정한 규모 이상의 산성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규모가 큰 산성(山城)이든가 도성(都城)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
(2) 평지성(平地城)
평지(平地)에 축성한 성곽을 말하는데 산성(山城)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평지성은 지리적 방어력의 이점(利點)이 부족한 반면 기타 공간활용, 관측, 수원확보 등 다른 면에서는 산성(山城)보다 유리하고 특히 일정한 방어력(防禦力)만 확보된다면 장기전(長期戰)에 더욱 유리하다. 성곽(城郭)의 형태가 방형인 경우는 전부 평지성(平地城)이라 해도 좋다. 이는 산지에서는 방형(方形)이나 장방형(長方形) 등의 정형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평산성(平山城)
구릉지와 평탄지를 각기 일부씩 포함하고 있는 지세(地勢)에 축조된 성곽(城郭)을 말한다. 평면형태가 성벽 축조에 유리한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으므로 원형에 가까운 형태가 많다. 평산성(平山城)은 산성(山城)과 평지성(平地城)의 장·단점을 고려하여 갖춘 형태이다. 따라서 평산성은 군사적인 방어시설물로서의 성곽 기능과 읍치(邑治)의 행정적 기능을 갖춘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4) 거주주체에 따른 성곽 분류
(1) 도성(都城)
왕이 거처하는 궁성(宮城)을 포함하여 국가권력의 상징인 왕(王)이 평시 거주하는 행정의 중심지에 내곽(內廓)인 궁성(宮城)과 외곽(外廓)인 나성(羅城)을 갖춘 형태이다. 우리나라의 도성(都城)은 삼국초기부터 발달되었는데 중국(평지성(平地城)의 바둑판식 구조)과는 달리 산성에서 발전된 방식으로 자연지형물을 이용하여 지형여건에 맞게 민가(民家)와 관청(官廳)건물을 수용하고 자연지세의 이점(利點)을 이용하여 방어력도 높혔다.
(2) 궁성(宮城)
왕(王)이 거처하며 통치하는 궁궐(宮闕)을 짓고 통치에 필요한 관청건물이 축조된다. 이를 중심으로 성벽이나 담장으로 둘러싸는데 이를 통틀어 궁성(宮城)이라 한다. 도성(都城) 내에는 왕이 있는 궁궐을 비롯하여 백성(百姓)과 행정관청(行政官廳)을 두루 갖춘 지역을 말하는데 도성 내(內)의 궁성(宮城)이라 할 수 있다. 궁성은 도성이 축조되지 않은 곳에도 있을 수 있어 반드시 도성이 축조된 내에만 있는 것만은 아니다. 궁성은 여러 명칭으로 상용되었는데 왕이 거처한다 하여 왕성(王城)이라 하기도 하고 황제인 경우는 황성(皇城)이라고도 불린다.
(3) 읍성(邑城)
거주주체가 왕이 아니고 군·현민의 보호와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한 성(城)이다. 우리나라 읍성형식(邑城形式)은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성(城)이라 할 수 있는데 읍성이 언제부터 축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邑城)의 대부분은 여말 왜구에 대비하여 조선시대에 연해주에 축조한 것이다. 읍성의 평면상태는 방형(方形)·원형(圓形)·자연지세형(自然地勢形) 등이 있는데, 초기 평지의 읍성은 방형으로 각 방향의 중심부에 성문을 두었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다소 받은 듯 하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원형(圓形)에 가깝게 조성되었는데 성 둘레가 클수록 자연지세형(自然地勢形)에 따랐다.
(4) 행재성(行在城)
도성(都城) 외에 왕(王)이 상주하지는 않으나 국방상·행정상 중요한 지역에 임시로 가서 머무는 성으로 이궁(離宮)이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경우 수도 개경 이외에도 남경(南京)·서경(西京) 등지에 궁성을 축조하였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수원성 또한 정조가 행차하여 머물던 행재성(行在城)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붕의 종류
<맞배 지붕>은 건물 앞뒤에서만 지붕면이 보이고 마치 책을 엎어 놓은것과 같은 지붕형태다.
맞배지붕의 좌우측면은 측면이 없기때문에 추녀가 없으며 측면이 비바람에 노출되
기 때문에 목재로 풍판(風板)이라는 바람막이 나무널을 대는게 보통이다.
추녀는 건물 모서리에 45도 방향으로 걸리는 방형단면의 부재....
<우진각 지붕>은 네면모두 지붕면이 만들어진 형태의 지붕이다.
그렇게 되면 앞.뒤에서보면 사다리꼴 머양이되고 양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모양의
지붕 형태가 된다 권위적인 건물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건물 형태이기때문에 일반
살림집에서는 압도적으로 이 우진각 지붕을 사용했으며 우리가 아는 초가집 대부분이
이런 형태이다.
<팔작지붕>은 합각지붕이라고도 한다.
쉽게 설명하면 우진각 지붕위에 맞배지붕을 올려 놓은 형태의 지붕이다.
그림의 망우헌의 지붕도 이런 팔작지붕의 형태 이다.
그림처럼 측면에도 지붕이 만들어 지기는 하지만 우진각지붕처럼 삼각형 끝점까지 기와가 올라가
는것이 아니라 작은 박공부분이 만들어 지는 형태.
<모임지붕>은 용마루가 없이 하나의 꼭지점에서 지붕꼴이 만나는 형태의 지붕.
모양에따라 사모지붕.육모지붕.팔모지붕 으로 구분하며 흔히 마을의 정자건물등에서
흔히 볼 수있는 형태이다
한옥의 지붕선은 곧은 듯 휘어지고, 하늘로 솟는 듯 마무리를 짓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모양만 보기 좋은 게 아니라 기능도 다양하다. 우선 지붕에는 암기와와 숫기와를 번갈아 얹어 놓아 비가 오면 기와골을 따라 자연의 법칙대에 따라 아래로 흐르게 만들었다. 또 기와 사이의 틈은 공간을 형성해 공기 흐름을 유도하고, 햇빛으로 뜨겁게 데워진 지붕 열기를 식혀주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한옥이나 중국의 집이나 지붕에 기와를 얹는 것은 동일하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옥은 기와 밑에 엄청난 양의 흙을 쌓는데 중국은 그렇지 않다. 한옥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엄청난 흙 때문이다. 흙을 지붕뿐 아니라 벽을 만드는 데도 사용해 친환경적인 집이 됐다. 초가집이 더욱 친환경적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옥의 지붕에 많은 흙이 올려져 있으므로 기와장이 깨어져도 기와 아래에 진흙으로 덮은 1차 방수 보온층이 있어 쉽사리 물이 새거나 열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지붕의 형태
1차적 : 빗물을 막아준다. 태양광선을 피하고... 실내온도를 조절해준다.
2차적 : 외관상의 의장효과를 의식.
*중국의 영향이 있지만 - 우리 풍토 기후에 맞게 발달 : 지붕의 경사도, 건물 높이에 대한 앙곡(현수곡선),
처마허리, 안 허리, (후림, 조로)
*맞배지붕 : 가장간단한 지붕이지만 측면관이 중요하다(외부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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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수덕사대웅전, 무위사 극락전
*갈모산방 : 약간의 앙곡 :양쪽이 처져 보이는 현상을 방지(착시교정, 의장효과)
*용마루 : 앙곡(현구곡선) 人+자연
*우진각지붕 : 지붕 높이가 팔작 보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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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해인사 대장경판고가 대표, 남대문을 비롯, 궁궐정문과 문루에서
*팔작(합각)지붕 : 정전이 되는 중심 건물에서 사용, 위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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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지붕 : 4모, 6모, 8모, t자형, +자형, 亞자형, 등등
*특수형지붕(층단지붕) : 지붕이 이중
예)일본 사천왕사금당, 법륭사 옥충 주자의 ‘층단지붕’, 부여 충토 ’산경문전‘의 선각건물, 눈썹천정 ‘눈썹지붕(살림집)
지붕의 구성요소
가구재의 윗부분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 따라서 ‘연목’으로부터 지붕의 구성재로 볼 수 있다.
방안-간접 조명으로 아늑하다
대청-겨울에도 볕이 잘 든다, 따뜻하다
토제
* 암기와, 숫기와, 암막새기와, 망와, 귀면,‘취두’(용마루),‘용두’(내림마루), '잡상’(추녀마루)등
* 중요점 : 주심(도리)에서 처마가 어느 정도 나아가는가.
* 기둥뿌리부터 30˚ 내외의 것,
* 하지 : 태양의 남중고도≒70˚ : 시원하고,
* 동지 : 태양의 남중고도≒30˚ : 따뜻하다.
* 해체건물 : 추녀와 갈모산방의 실측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와(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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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개 ; 장연과 단연 사이를 눌러주고 서까래가 흙과 닿지 않게 부식방지.
*적심(보토) : 기와를 깔기 전에 기본 바탕을 마련해준다.(보온효과)
*홍두깨흙 : 기와와 기와 사이를 메우는 것.
*개판 : 부식방지와 흙이 떨어지는 것 방지
*용마루 ; 치미, 취두
*내림마루 :용두
*궁궐에서는 회벽으로 ‘양성바르기’
*추녀마루 : 집상, 망와(도깨비), 머구.
*장식물 ; 지네철(박공판), 토수(사례, 추녀), 현어(일본 목조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공포의 종류와 쓰임새
① 주심포 양식
주심포 양식은 공포를 주두 위에만 짜는 목구조 형식중 익공 양식을 제외한 것이다. 이 양식을 특징은 기둥 위에 평방없이 바로 주두를 놓고 공포를 올리는데 있다. 또, 가구의 결구법이 간단하며 치목이 아름답게 되어 있으며, 건물 안에서 모든 가구가 잘 보이도록 가설하지 않는 연등천장을 하였다. 전통 목조 건축의 가구 형식중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기둥에 배흘림(엔타시스)이 있고 대부분 간단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첨차를 주로 교두형이 아닌 초새김형(쌍S형)으로 장식하고 대공을 파련대공이나 ㅅ자대공을 두는 등 화려한 장식을 하는 경우도 있다.
② 다포양식
초기적인 다포 양식은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모각된 포작이나 심원사 보광전, 봉정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심포계와 다른점은 공포가 기둥위에만 짜여지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 공간에도 배열되며, 이 공간포를 받치기 위해 창방 위에 평방을 더 올려 놓는다.
첨차는 대부분의 경우 교두형을 사용하며 또 살미첨차의 외단은 쇠서를 두는 경우와 교두형인 경우가 있다. 배흘림이 심하지 않고 가구의 아름다운 곡선형 새김이 줄어든다. 그리고 부재가 규격화되고 투박하게 되는 것은 내부반자를 두어 은폐한다. 다포 양식계 건축물은 대체로 건물을 장중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포작도 여러 층 겹쳐 짜고, 지붕도 팔작지붕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③ 익공양식
이 양식은 주심포나 다포양식과 같이 출목이 있어 지붕처마를 앞으로 길게 내밀어내는 역할도 없고, 또 그들 두 양식과 같이 주심도리를 높게 올리는 역할은 없다. 그러나 기둥 위에 새날개처럼 뻗어나온 첨차식의 장식을 설치해 얼마간의 장식적인 효과를 얻고, 또 주심도리를 얼마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익공양식에는 초익공 또는 익공이라 하는 초익형 장식부재를 한 개만 낀 것과 이익공이라는 부재를 두 개 낀 것도 있다.
대체적으로 익공 양식계 건축은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세워졌다.
④ 하앙형식
목조건축에서 공포 구성 발달 과정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원시건축에서 처마를 들어 올리고 처마를 깊게 돌출시키기 위하여 사용된 삼각버팀구조의 발달로 인하여 발생된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기둥머리를 장식하여 주두를 놓고 그 위를 장식적으로 꾸미면서 처마내밈 목적도 이루는 방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전자의 발전과정에서 발달된 것이 하앙형식이다. 그러므로 이 하앙은 지붕서까래와 도리밑에서, 건물 안으로부터 밖으로 길게 뻗어 나와 처마를 받쳐주고 있는 것인데 보통 서까래와 같은 방향으로 경사져 있다. 이것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그 한쪽 끝은 건물 안에서 눌러주고 다른쪽 끝은 밖에서 처마 밑을 받쳐 처마를 깊게 내밀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이러한 구조를 사용하였음을 자료(조선고적도보)들로 보아 알 수 있고, 현존하는 건축 유적으로 완주 화암사 극락전, 금산사 미륵전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