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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장편소설]
붕정만리(鵬程萬里)
오 현
1 꿈을 지니고
일천구백구십 연대 초였다.
연길시 중심지인 광명 가엔 몇 해 전부터 대형 한국 음식점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코리아나’, ‘서울’, ‘한양’, ‘종로’ 등 어금지금한 고급 술집들이 우후죽순처럼 얼굴을 내밀었다. 간판만 보면 한국의 번화가로 착각할 정도로, 화려한 조명에 고급 인테리어, 한국의 대중가요까지, 모두 지나가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연길은 연변의 중심 도시이다. 연변은 중국의 소수 민족의 자치주의 하나로서 중국의 변방지대이다. 지리적으로 한국에 인접해 있고, 일제 때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해 조선 민족의 피난처로 한국인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는 지역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생활도 한국 양식과 별로 다른 점이 없이 살아가므로, 많은 연변 사람들은 한국을 모국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한국의 실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정치적 이유나 지리적 조건으로 북한은 쉽게 다녀올 수 있지만, 남한은 가고 싶어도 절차가 까다롭고, 많은 경비가 들 뿐 아니라, 또 남한을 갔다 오면 주위로부터 갖은 의혹을 받아 화제의 대상이 되므로, 한국에 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연변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남북 간의 긴장 상태가 많이 완화하고, 한국과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연변에 한국 신문들이 들어오고, 방송국이 설립되어 한국의 폭넓은 소식을 접하게 되고, 연변 대학을 비롯해 여러 단체들이 한국과 연변과의 교류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교류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이 무렵, 한중 교류의 물살을 타고 한국 상인들이 연변 지역에 많이 드나들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한국의 선진화된 문화생활과 고도의 산업 발전을 자랑했다. 산업체에서는 일손이 부족해 해외에서 손을 빌려와도 모자란 실정이고, 한 달 월급이 연길 지역의 일 년 생활비에 해당된다는 등 화려하게 늘어놓자, 이를 듣는 연변 사람들이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한국 가요를 즐겨 불렀고, 한국 TV연속극에 심취되었으며, 모처럼 한국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나면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는 걸 자랑거리로 삼았다.
연변 주민들의 생활수준은 한국의 50연대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몸부림치는 가운데 한국의 높은 경제생활을 부러워할 수밖에.
한편, 한국인들은 친절하고 신의 있다는 처음 인상과는 달리 점점 부정적인 면도 비쳐지기 시작했다. 한국 상인들은 연변에서 보지 못하는 생활용품들은 물론, 전자 가전제품들을 소지하고 있자, 한국 사람들을 부러워하여 한국 제품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구입하고 싶어 했다.
“방안 청소도 세탁도 모두 기계가 해 준데.”
“돈도 지참할 필요 없이 카드 한 장이면 모든 거래가 이루어진데.”
한국을 부러워하면서 한국인들의 상술에 쉽게 넘어가기도 했다. 값싼 생활 용품 하나를 무료로 주고 나서, 그걸 미끼로 값비싼 전자 제품을 구입하도록 요구했고, 결혼에는 한국의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오디오 시스템 등을 갖추어야 결혼식답다는 의식을 심었다. 이로 인해 연변 사람들은 한국 제품을 구입하는 데 부담이 됐지만, 처음 들어보는 월부 매력이 여성들 마음을 휘어잡았으나 나중엔 월부로 인해 가정 경제가 파탄되고 심지어 집까지 한국인에게 넘긴 사람도 많았다. 한국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사채놀이까지 하여 돈을 벌기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갈수록 한국인의 인상이 부정적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연변과 한국은 활발하게 교류하여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연변은 한국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연변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서 취업하고 있다. 그래서 빚을 내고 집을 팔아서라도 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한국 드림에 젖어 있었다.
승우는 술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퇴근길에 두 동료와 함께 생맥주라도 한 잔 들이키며 피로를 풀어 보려고, 화려한 색 전등이 늘비한 ‘서울카페’에 들렀다. 홀에는 손님이래야 젊은이들 예닐곱이 두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 뿐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조용했다. 맥주를 시키자 맥주에다 과일 안주까지 풍성히 가져왔다. 시키지도 않은 비싼 안주까지 가져오자 얼른 바가지라는 말이 떠올라 당황해 했으나, 웨이터의 서비스라는 말에 마음 놓고 마시고 나서, 가라오케에 서투른 한국 노래까지 실으며 즐겁게 보냈다.
잠시 후에 사십대쯤 되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이 ‘서울 카페’ 한 사장이라고 명함을 내놓으며 자리를 같이하면 어떠냐고 했다. 사연이야 어떻든 싫진 않았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감색 양복을 입고 붉은 나비넥타이에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큰 키에다 체구까지 우람하여 거방지게 보였다. 사장이라면 나이가 지긋하고 손님들과 거리감을 두고 데면데면하게 폼을 잡고 앉아 있으리라는 승우의 예감은 빗나갔다.
한 사장은 묻지도 않은, 자신이 연길에 카페를 개업한 취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한국을 자랑하기에 말을 쉬지 않았다.
“연길 지역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정치적 이유로 교류하지 못했죠, 그러나 이젠 정부를 비롯해 민간단체들이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으므로, 저도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일찍 카페를 열었습니다.”
승우 일행은 듣고만 있었다.
한 사장은 다시
“젊은이들이 매우 능력이 있게 보이는데…….”
하자, 원하지도 않은 말인데다 갑자기 칭찬하는 말에 다소 경계심도 없잖았으나 싫진 않았다. 잠시 후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더니,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는, 구직 광고가 어지럽게 실린 한국 신문을 펼쳐놓았다. 승우는 물론이지만 친구들도 한국을 알고 싶었던 차에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서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장은 한국이 한때는 경제가 휘청거렸으나, 지금은 고도성장하면서 아세아 경제를 주도하며 세계 십위 권에 도약하고 있다는 등 자랑을 길게 늘어놓았다.
승우는 오래 전부터 한국에 가는 게 소원이었다. 승우 증조부는 평양에서 태어나서 평양에서 고교 국어 교사로 근무했다. 일제 식민지를 살아가면서 수업 시간에 시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치르고 나서 반일 운동은 물론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자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여 이를 견디지 못해 가족을 이끌고 연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증조부는 어려운 가운데 가족이 살아갈 만한 터를 닦았으나 넉넉하진 못했다. 조부가 뒤를 이어 열심히 황무지를 개발하고 농사를 지었으나, 어렸을 적에 증조부를 따라 만주에 와서 만주 기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아들을 낳고 나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이 결혼하여 승우와 승우 여동생을 낳아 키우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농사도 짓고 기회 있으면 북한을 드나들면서 보따리상을 하며 살아왔는데, 아버지도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승우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승우가 어릴 때부터 자주 일러 주었다.
“다음에 커서 기회 있으면 남쪽 한국으로 가서 살아라. 그래야 네 꿈을 실현할 수 있고, 편히 살 수 있다.”
귀에서 떠나지 않은 말이었다. 그래서 승우는 평소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달리 컸고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알아보았다.
승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연길에서 농업협동조합에 근무했다. 연길에서는 좋은 직장으로 여기지만 생활하는 데는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서 항상 한국에 대한 꿈을 잊지 않았다. 일부 젊은이들은 산업 연수생으로서 한국에 가기도 했으나 거기에도 많은 돈을 들여야 했고, 조건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승우는 한국에 가려 해도 한국에 아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가는 길도 까마득히 몰랐다. 그래서 한 사장의 말이 승우 마음에 각인되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서 승우는 뜨악하기도 했으나 혹시나 하고 서울 카페에 들러 한 사장을 만났다. 사장에게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네까?”
“길이 있긴 하지만 쉽진 않네. 누구나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한국에 가려면 여권과 주민 등록증도 있어야 하고 취업 보장까지 받아야 하므로 경비가 적잖이 드는데 가능할까? 하기야 경비는 한국에 가서 몇 달 월급 받으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주선할 수도 없는 일이니…….”
“얼마나 듭네까?”
한참 침묵하다 말했다.
“줄곧 잡아 천이백만 원은 필요하네.”
승우는 놀랐다. 승우의 처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액수였다. 포기하려다 기회는 자주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비용이 너무 많다며 다른 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다. 사장은 금테 안경을 벗어 냅킨으로 안경을 닦으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넨 학력이 높아서 한국에 가면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네. 특별히 팔백만 원에 성사시켜 주겠네.”
승우는 사장 얼굴만 쳐다보다가 그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한 사장은 승우 표정을 보고 짐작했는지,
“경비도 지금 다 내는 게 아니고, 여기에서 삼백만 원만 내고, 나머지는 한국에 가서 취업하면 월급으로 갚을 수 있도록 해 보겠네.”
하는 사장의 말은 승우 마음을 움직였다. 다른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길을 몰라 가지 못하는데 이런 호기를 놓칠 수야. 며칠이 지나 승우는 한 사장에게 약속을 지켜달라고 다지르고 나서 약속한 금액을 건네고 사장의 말에 따라 대련으로 향했다.
승우 어머니는 처음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 아는 사람도 없는 한국에 가는 게 모험이고, 자식을 보내고 혼자 살아갈 일이 막연하여 반대했으나, 딸이 자신이 생활비를 벌겠다는 당찬 포부로 어머니에게 힘을 주자, 승우의 장래를 위해서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승우는 한 사장이 소개해 준 대로 대련으로 가서 개성 상회 심사장을 만났다. 심사장은 제법 큰 인삼 상회를 경영하고 있었다. 승우 말을 들은 심사장은 한숨을 지었다.
“글쎄, 한사장과 평소에 친분은 있고, 전에도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네. 사흘 후에 다시 오소,”
심드렁한 말이었지만 믿고 기다릴 수밖에.
심사장의 말은, 쉽게 가는 길은 밀선을 이용하는 방법이라며, 요새는 날씨가 좋지 않으므로 사월 초에 한국에 갈 배가 있다고 했다. 스무날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다음에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어떻든 한국에만 갈 수 있다면 스무날이 아니라 두 달인들 기다리지 못하랴. 심사장 말이 두루뭉실하긴 했으나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머무를 수 있는 곳까지 심사장이 안내해 주어, 대련 시내에서 십여 킬로 떨어진 혜련이라는 마을을 찾았다.
혜련은 얕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거센 문명의 바람도 이 마을만은 외면했는지, 시냇가에서 빨래 방방이 소리가 들렸고, 주민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 공터에서 출발하는 트럭을 이용해 외지에 드나들었으며, 석양이 되면 마을로 들어오는 웽그렁, 댕그렁 덜거덕거리는 달구지 소리에 하루가 저물어 갔다.
승우는 심사장이 안내해 준 조선인 농부 집에서 묵었다. 주인은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데 농사를 짓고 있었다. 별채를 숙소로 제공해 주고 식사는 같이 하자고 했다. 인정이 몸에 밴 듯했다. 승우는 이곳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수야, 진석이 모두 승우와 비슷한 또래였다. 이들도 심사장의 안내로 같은 날 같은 밀선을 이용해 한국에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낯설지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희떱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셋은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주인이 서분서분하게 대해 준들 스무날을 판들거리고 놀 수만은 없지 않은가.
“우리 함께 주인 일을 도와 드리자.”
셋은 평소에 해 보지 않은 천트는 일이지만 그래도 밥값이라도 해야 한다고 정성을 다해 주인의 밭일을 도와드렸다.
수야는 연변 출신으로 일 년 전에 한국에 가려고 나섰는데, 청진행 배를 인천행 배로 잘못 알고 탔다가, 북한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중에 허술한 감시망을 뚫고 중국으로 탈출하여 다시 한국에 가려고 헤매다 기회를 얻어 기다렸다.
진석이 사연은 좀 복잡했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로동당원으로 활동했는데, 서민들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발표하고 나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로부터 가정은 급히 기울어졌다. 이때부터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가려는 모험을 지녔다. 친구를 설득해 함께 한국을 가자고 나섰다. 진석은 친구와 함께 두만강 주위에 있는 친척 집에서 사흘을 머물다가 함박눈이 쏟아지는 밤을 택했다. 마침 경비하는 인민군들이 초소를 비우는 틈을 이용해 두만강을 건넜다. 강이 꽁꽁 얼어 다행이었으나 눈이 많이 와서 자주 미끄러져 겨우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건너고 나니 잠은 오고 배는 고팠다. 마침 사람이 살지 않은 낡은 집이 있어서 그곳에 들어가 잠을 잤다. 자고 나니 배를 채울 일이 급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으나 겨울철 들녘에 먹을거리가 있을 리야. 마침 묵은 밭에 옥수수가 있었다. 철이 지난 옥수수라 말라 있다시피 했고 생것이지만 먹고 나니 기운이 일어났다. 이때 지나가는 트럭이 있어 통사정을 하여 대련으로 왔다.
대련은 편하게 있을 곳이 아니었다. 대련에는 한국으로 가려고 탈북한 사람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중국 공안원들의 감시가 심했다. 일주일을 헤매다가 보안 대원에게 걸려 임시 수용소로 잡혀 갔다. 임시 수용소는 텅 빈 창고였는데 탈북자들을 하루 이틀 짐짝처럼 가두었다가 북으로 보내고 있었다. 겁이 났다. 며칠이 지나면 북으로 강제 송환될 건 뻔했다. 그런데 웬 일인가. 다음날 많은 사람들이 끌러 와서 조사를 받다가 무슨 사연인지 탈북자들의 반란으로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 틈을 타서 수용자들이 거의 탈출하는 가운데 자신도 탈출했으나 함께 온 친구는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대련에서 식당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알선업자를 만나 한국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무날이 되어 약속한 날이 왔다. 모두 들뜬 기분에 뜬눈으로 잠을 설쳤다. 창문이 희끄무레해지면서 숙소를 나섰다. 주인아저씨는
“꼭 성공하라우. 기회 있으면 다음에 만나자우.”
하며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직 조용히 잠든 마을을 벗어나 자드락길인 고갯길에 올랐다. 그리 비탈진 고개는 아니었으나 흙길로 잗다란 풀들이 많았는데, 밤에 내린 비로 땅이 질퍼덕하여 오르기가 고통스러웠다. 수야와 진석이 모두 힘이 부치는지 할근거리더니 수야는 신발을 벗어 허리띠에 매달고 걸었다. 고개를 넘고 얼마를 가자 날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가끔 풀숲에서 단잠을 자던 새들이 깨어나 쫑쫑거리고 쫑알거리며 뛰어다녔고, 들에는 밭일하려는 농부들이 하나둘 보였으며, 밭 언덕에는 가끔 방치된 농기구들이 눈에 띄었다. 고갯길을 넘어 들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자동차에서 내뿜는 하얀 불빛이 산 위까지 휘두르다가 땅으로 내려와 주위를 낮같이 훤히 비추며 질주해 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모두 숲으로 숨었다. 비료 몇 포대를 싣고 어디론가 가는 트럭이었다. 한숨을 쉬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었다. 한 시간쯤 걸어 약속된 어촌에 이르렀다. 모두 바짓가랑이는 흙으로 범벅이 되었고, 몸은 풀냄새로 절어 있었다.
어촌은 아직 조용했다. 제법 큰 마을인데 집들이 건성드뭇하게 흩어져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먼 바다에는 배 몇 척이 가물거렸고, 연안에는 소형 어선들이 조용히 잠들고 있었다. 우리는 바닷가 공터에서 기다렸다. 동쪽 하늘이 빨갛게 물들며 여덟 시가 가까워서 남쪽 여 끝에서 배 한 척이 미끄러지듯 연안 쪽으로 다가왔다. 흰색 깃발을 단 약속한 어선이었다. 모두 서둘러 배에 올랐다.
선실에는 이미 다른 곳에서 승선한 세 사람이 잠에 떨어져 있었다. 선장은 젊은이로서 바다에서 그을렸는지 구릿빛 얼굴에 매우 강강하게 보였다. 배 안에는 그물과 어로 장비들이 흩어져 있었다. 선장은 구명복을 주면서 배에서 주의할 점을 일러 주고 나서, 조금만 고생하우, 하고는, 선미를 돌려 쫓긴 듯 먼 바다를 향해 속력을 높였다. 배가 얼마쯤 달려 뒤로 중국 대륙이 실띠처럼 가느다랗게 보일 때에야 무겁게 닫힌 선장 입이 열렸다.
“걱정 마오. 조금 후에 공해에 나가면 안심이 되니까네.”
승우만 남고 두 친구는 선실로 들어갔다.
“열 시쯤 공해로 나가면 약속한 어선이 올 거라우.”
한 시간쯤 달리자 해는 점점 중천으로 오르고, 배는 바다의 심장에 이르렀다. 바람이 가볍게 불면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바람이 점점 세게 불어오자 너울이 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봄이라 하지만 매우 추웠다. 선실에 있는 담요를 꺼내어 몸을 감쌌다. 바다에는 계절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선장은 가끔 회오리바람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으나, 오늘 같은 날씨는 자주 있는 일이라며 안심하라고 했다. 선장은 하늘을 몇 번 보고 나서도 염려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 대륙이 가뭇없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드넓은 바다로 들어가자 동서남북을 헤아릴 수 없는 광막한 푸른 광장이 펼쳐졌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파란 비단 호수 위에 배가 떠 있는 듯했다. 가끔 큰 배들이 지나고 있었다. 바다를 처음 본 승우는 구경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푸른 바다도 장관이었지만 하늘에는 수백 마리 이름 모른 새들이 새까맣게 때를 지어 요란하게 소릴 지르며 날아다녔고, 구름은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무쌍하여 별천지를 보는 듯했다.
배가 한참 달리자 선장이 말했다.
“이제설랑 공해에 들어왔다우. 안심하라우.”
선장 말에 마음이 편하긴 했으나, 갑자기 하늘은 검은 구름이 끼면서 어두워졌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배는 간당거리기 시작했다. 투르륵 꽉, 방향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천둥이 내리쳤다. 파도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천둥소리는 바다를 가를 듯 요란했다. 하늘 한 쪽이 무너지는가. 선장도 긴장하는 표정이었다. 새까만 구름 떼가 머리 위에서 무겁게 빙빙 돌았다. 새까만 구름이 사라지자 잿빛 구름이 금세 붉은빛으로 변덕이 심했다. 비까지 쏟아졌다. 배는 더 나아가지 않고 구름이 덮인 하늘 한복판에서 빙빙 도는 듯했다.
번개는 그치지 않고 비는 계속 퍼부었다. 이러다 물귀신이 되지 않나 겁이 났다. 배는 계속 달렸으나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일행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갑자기 비가 그치고 바람도 간들거리면서 세력이 약해졌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타나고 바다는 다시 훤해지며 거친 숨을 죽였다. 광란은 순간이었다. 바다는 변덕이 심하다는 말을 실감했다. 배는 다시 속력이 빨라졌다. 바다는 햇살을 가득 싣고, 푸른빛과 은빛이 어울린 조각무늬를 펼쳤다. 새들은 고함을 지르며 남쪽으로 날아갔다.
배는 삼십 분을 더 달렸다. 바다를 향해 눈길을 두고 있을 때, 큰 어선 옆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모두들 어선으로 올랐다. 선원의 말에 따라 선실로 들어가 작업복으로 변장했다. 베에는 선원 네 사람이 있었고, 이 배도 어업에 필요한 그물과 도구들이 너더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선원들이 우리를 살갑게 대해 주어 마음이 펀하긴 했으나 선실은 좁은데다 어두워서 겨우 물체를 구별할 정도였다.
배는 공해상에서 헤매다 기회를 보고 인천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인천에 도착하기까지는 하루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선원이 주는 주먹밥으로 배를 채우며 공기도 잘 통하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퀘퀘한 냄새 속에 초조하게 시간은 흘렀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가 하자 선원이 인천에 도착했다고 알려 주어 모두들 눈물을 쏟아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모두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자, 갑자기 쿵……, 무거운 철제문이 열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터벅거리는 신발소리가 선실을 울렸다. 긴장했다. 가죽점퍼 차림의 두 사람이 들어왔다. 심장을 누르고 숨소리를 죽였다. 여기저기 둘러보고는 나갔다. 다행히 조사는 까다롭지 않았다. 저들은 밀수 조사원이라 밀항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선원의 말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모두 맛문한 상태로 인천에 도착했다. 한국으로 오는 데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몇 년의 고통을 겪은 듯했다. 승우는 눈물을 흘리면서 앞날이 무난하기를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모두 노그라진 상태였으나 부두에 내리자 기운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분주히들 서둘렀다. 모두 제 갈 길을 찾아 사라졌다. 승우도 두 친구와 헤어져야 했다. 수야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진석이는 전화를 하자 바로 안내원이 와서 데리고 갔다. 승우는 기다렸던 연락책이 나오질 않아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이 받았다.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잠시 후에 내일 다시 연락하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말씨도 쌀쌀스러웠다. 이국까지 찾아 온 사람의 심정은 생각지도 않는가.
승우는 밤이 다가오자 초조해 했다. 낮에는 이곳저곳 구경하며 부둣가의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럭저럭 보낼 수 있었지만, 밤이 다가오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다. 대련에 있을 때 한국에 도착해서 취할 방법에 대해 많은 말을 듣긴 했으나 처음 밟는 이국에서 밤을 보내는 게 쉽지 않았다. 잡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보다도 피곤하여 어디에라도 주저앉고 싶은데다 잠까지 마구 밀려 왔다.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잘 만한 곳이 없었다. 바다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는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밤이 깊어지자 불은 하나둘 꺼져 시내는 점점 어둠에 묻히고 있었다. 여객 터미널에는 새벽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이들 틈에서 밤을 보내려 했으나, 이들도 자정이 넘자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터미널은 한산했다. 경비원들이 왔다 갔다 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자 신발 미화소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문이 열려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잠에 떨어져 있다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자 새벽이었다.
해가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었다. 안내원이 인천으로 왔다. 같이 사무소로 가서 소장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직업 안내소는 서울 영등포 당산동에 있었다. 들어서자 남자 직원 한 사람은 책상 위에 다리를 걸쳐놓고 담배를 즐기며 승우를 할끔거리고 있었고, 한 사람은 아침부터 졸고 있었으며, 한 여직원은 과자 부스러기를 먹으며 모바일을 열심히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소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소장 말은 간단했다. 승우가 찾는 직업 안내소는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다며, 승우의 딱한 처지를 고려해 직장을 알선해 주겠는데, 그 조건으로 첫 달 봉급을 주어야 한다며 서류를 내놓고 사인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불법 입국자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바로 추방당한다며 주의 사항을 일러 주면서 항상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안내소에서 대기하고 있자, 잠시 후에 다른 외국인 두 사람이 들어와서 한 직원을 따라 어디론가 갔고, 여직원은 여수와 시외 통화를 하는데, 베트남에서 온 근로자들을 안내하는 내용처럼 들렸다. 책상 위에는 아프칸 난민들의 사진이 실린 신문이 놓여 있었다.
인간은 일찍부터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발길은 쉬지 않았다. 시골 농부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기름진 땅을 찾아 이동하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찾아간 것도 모두 자신들의 더 나은 삶을, 양양한 미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의지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며 인간만이 지니는 신성한 특권이다. 지구는 넓다. 인간이 살아갈 터가 한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터를 인간에 의해 제약받는다면 그것은 신의 섭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살고 싶은 곳을 스스로 선택하여 자유롭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성주들이 자기들만의 안일과 부를 누리려고 철옹성을 쌓았고, 오늘날엔 몇몇 세력가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자기들 영역을 보호하고 확장하기 위해 주의니 국가이니 하는 이름으로 선을 그어놓고 인간의 이동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꿈을 위해 산다.
그 꿈은 그 사람이 보폭에 따라서 결정되는 게 아닐까.
오 현: ‘문학세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펜클럽 회원
한세회 회원
대한만국 예술교육 문화상 수상
허균 문학상 수상
21세기농민문학상 수상
고등학교 문학교과서 저자(김동리 공저)
고둥학교 작문교과서 저자(박동규 공저)
저서 : ‘한국 단편소설의 이해와 감상’, ‘바른 언어생활’ 등 다수
첫댓글 소설가 오현 님의 장편소설 "붕정만리"가
2022년 계간문예지 국제문단 봄 호부터 게재됩니다.
작가회원님들의 많은 관심과 독서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