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백 동백꽃은 겨울 눈 속에서도 피기 시작하는데, 만개하면 봄이 온다는 신호이기에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반도의 중부 이남에만 분포하는 드문 존재인 동백꽃은 전라남도의 도화(道花)이자 부산시의 시화(市花)로 사랑받고 있다.
사진을 흔히 ‘순간의 포착’이라고 표현한다. 시간의 흐름을 잘라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진은 시간과 함께 언제나 공간을 담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고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인공적인 실내가 아니라면, 공간은 계절과 날씨라는 환경 속에서 존재한다. 계절과 날씨는 빛과 온도, 특유한 분위기, 매개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시간이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감각적으로 구체화한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계절과 날씨의 흐름을 포착하는 데는 언제나 휴대하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절, 사진의 온도
여인은 꽃이 되고 사내는 벌이 되어 일본 후쿠시마의 하나미야마(花見山) 공원에서 꽃놀이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이 남녀를 보았다. 두 사람을 방해하기 싫어 개나리 가지 뒤에서 찍었다. 다행히 여인은 눈치를 못 챘는지, 혹은 사진 찍히는 데 익숙해서인지 개의치 않았다.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얘기는 옛말이 되어버렸다. 1년 열두 달이 ‘봄 여어어어름 가을 겨어어울’로 바뀌었다는 우스개가 생겼을 정도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우리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에서 아열대 기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사계절이라는 계절 감각은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은 그렇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특정한 계절이 있다. 필자는 마른 체형이라서 그런지 여름의 더위보다는 겨울의 추위가 더 힘겹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모든 계절이 반갑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사계절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은 열대 지방 찜 쪄 먹게 덥고, 겨울은 한대 지방 뺨치게 추워 살기는 어렵지만 그만큼 다양한 계절감을 표현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계절은 가장 직접적으로는 기온의 변화로 나타난다. 하지만 온도계의 눈금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면 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결국 무엇에 비추어 보여줄 것인가로 귀결될 것이다. 하늘빛과 구름과 비와 눈 그리고 바람, 꽃과 나무의 변신, 거리의 풍경, 사람들의 옷차림과 음식 등 계절 감각을 표현할 매개물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수많은 매개물 중에서도 사계절의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꽃과 나무 사진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계절의 전령사, 꽃
이미지 목록 꿈속 연꽃[夢蓮]목련은 탐스럽다. 한 나무에 수십 송이에서 많게는 수백 송이가 피어난 모습은 장관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송이만 따로, 그것도 붉은 벽을 배경으로 따로 피어나니 꿈결 같다. | 그대 떠난 봄처럼 다시 목련은 피어나고 선배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가는 길에 병원 영안실 앞에 핀 목련이 눈에 띄었다. 해질 무렵이었는데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니 왠지 흑백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
그 해의 날씨에 따라 일주일 정도 앞서거나 뒤늦지만 꽃은 순서대로 피어난다. 제주도에서 출발한 꽃 전선은 바다를 건너 날을 거듭하며 북상한다. 봄꽃의 개화 순서는 대체로 동백 - 산수유 - 매화 - 목련 - 개나리 - 진달래 – 벚꽃 - 철쭉 순이었는데, 최근에는 이상 고온 현상으로 순서가 뒤바뀌거나 한꺼번에 여러 꽃들이 피어나서 ‘철없는 꽃’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꽃을 통해 계절을 표현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봄부터 가을까지 개화 순서를 따라 피고지는 꽃들을 계속 찍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한 가지 꽃을 봉오리가 맺혔을 때부터 활짝 핀 뒤 땅에 떨어지기까지의 주기를 통해 보여주는 방법이다. 물론 두 가지 다 병행할 수도 있다.
벚꽃 엔딩 활짝 피어난 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짧지만 빛나게 세상의 영화를 누리다 비에 젖고 바람에 흩날려 땅에 구르는 꽃잎들에겐 처연한 아쉬움의 미학이 남아 있다.
이미지 목록 벽장미5월 말이면 늦봄인가 초여름인가? 사람마다 계절 감각이 다르므로 정설은 없을 것 같다.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5월의 화왕은 장미라 할 수 있다. 이때쯤이면 어지간한 담장에서 볼 수 있기에 너무 흔하다 여겨질 정도로 만발한다. | 우주의 목숨을 태양이 끊어버렸다 코스모스는 가을꽃으로 알고 있었는데 여름에도 보이길래 찾아보니 6월부터 10월까지 핀다고 한다. 가을 햇살을 역광으로 받은 코스모스에게서는 쇠락의 느낌이 물씬하다. |
이미지 목록 사이 잎새[間葉]늦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작고 노란 국화더미 앞에 누렇게 익은 동그란 낙엽 하나 날아 왔다. 바닥에 깔린 짙푸른 인조 잔디만이 가을을 모른 체하고 있다. | 겨울꽃 하우스 재배가 아니라면 겨울엔 꽃이 피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다. 꽃 없는 계절이란 너무 쓸쓸했나 보다. 눈꽃이 내렸다. 얼어붙은 상식을 덮어버렸다. |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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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얼굴, 가면을 벗다어느 찻집의 뒤뜰에서 찍은 1월의 얼굴에는 눈코입이 다 있었다. 3개월이 지난 봄날, 이름도 몰라 더욱 쓸쓸해 보였던 나무에는 목련이 탐스럽게 피고 푸른 수염도 자라났다. 이렇게 같은 피사체나 공간을 계절과 시간을 달리해 찍어 비교해 보는 것도 사진 놀이의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
나무만큼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도 드물 것이다. 봄이면 연두빛 신록이 돋아나고 꽃까지 피어나며 여름이면 무성한 잎파리가 짙고 푸르다. 가을이면 화려한 단풍으로 물들며 겨울이면 줄기와 가지로 맨몸을 드러낸다.
우리 곁에 언제나 말없이 있기에 그 변화를 눈치채기 어렵지만, 나무는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조용히 변신을 거듭하다 어느 날엔가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는 계절을 연기하는 가장 적절한 배우이다.
봄은 대동맥을 지나 실핏줄로 번지고 있다 잔가지 속 실핏줄에서는 새순을 돋아나게 하려 수액들이 끊임없이 돌고 있을 것이다. 이파리가 다 피어나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은 사라질 것이다. 까치집도 몸을 숨길 것이다.
이미지 목록 4월의 크리스마스 서울 성북동 길상사 입구의 나무에 사탕처럼 주렁주렁 걸린 연등이다.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내걸리는 수많은 연등을 보아 왔지만 이렇게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알록달록 풍선들이 노거수를 두둥실 가볍게 들어올릴 것 같았다. | 적벽 녹엽 서울 용산의 어느 후미진 골목길까지 붉고 누런 가을이 찾아 왔다. 부근에 있는 오래된 여관의 담벼락이 눈길을 끌었다. 요즘 짓는 건물들의 외벽은 이른바 첨단 소재에 깔끔할지언정 재미는 도통 없다. 이렇게 낡은 질감의 담벼락을 이토록 강렬한 색감으로 단장한 감각이라면 비록 오래되었을지라도 무척 깨끗한 여관일거라 짐작된다. |
이미지 목록 낮에도 별이 뜬다 단풍나무가 맞닿았다. 가을 하늘엔 노란 별과 붉은 별이 지천이다. | 마지막 잎새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사진작가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 맞은편 건물 벽에는 누군가 떨어지는 나뭇잎을 그려 놓았다. 나는 저 잎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김영갑이라 생각했다. |
눈 나무 동네 어귀의 이 나무는 평소에는 그리 눈길을 끌지 않았었다. 밤눈이 내리자 하늘이 신비하게도 밝아졌는데, 그때야 숨겨왔던 자태를 뽐냈다. 눈이 눈을 밝힌 것이다.
날씨, 천변만화를 담다
이미지 목록 쨍하고 해 뜰 날 며칠 동안 간간이 내린 소나기가 개자, 하늘은 푸르렀고 흰 뭉게구름이 가득했다. 눈에 닿는 모든 존재들은 제 빛깔을 뽐내며 자신을 찍어 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이럴 땐 손에 있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더욱 고맙게 여겨진다. | 해품못 맑은 날은 눈에 보이는 모든 색이 선명하다. 하지만 색의 매력은 강렬함에만 있지 않다. 흐린 날 찍은 사진은 부드럽고 차분하며 편안한 느낌을 준다. 나무도 구름도 얼핏 비치는 해와 빗방울까지도 다 품은 넉넉한 연못을 만났다. |
계절이 바뀜에 따라 날씨도 변화무쌍하다. “한반도 날씨는 ‘종합선물세트’... 아열대, 온대, 한랭 기후 뒤섞여 있어”라는 제목의 날씨 관련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가 “여름엔 집중 호우와 이상 고온이 지속되고 겨울엔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가 반복되는 이른바 ‘짬뽕 그릇 잡탕’ 날씨가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살기 힘들고 돈이 많이 드는 기후”가 되어 버렸다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사진을 찍는 입장에서는 이런 날씨는 기사의 제목 그대로 선물과도 같다. 여름에는 열대처럼 한낮에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지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노닌다. 겨울에는 한대를 방불케 할 만큼 폭설이 세상을 뒤덮어버린다. 이런 특별한 날씨를 사진에 담기 위해 굳이 해외로 찾아가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을까?
사진을 오래 찍은 사람들이 아침 하늘과 구름만 척 보고도 “오늘 저녁엔 노을이 아주 멋질 거야”라는 얘기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놀랍고 신기하다. 필자도 사진을 오래 찍으면 그럴 수 있을까? 아직은 날씨 등 여러 변수를 예측할 만큼의 관찰력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을 읽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맑은 날도, 흐린 날도, 비 오는 날도 필자에게는 그저 하루하루가 새롭고 경이로울 뿐이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사무실에 공용으로 쓰는 무지개 우산이 있어 언젠가 한번은 써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쓸 기회가 생겼다. 초여름에 시원한 비가 내리니 마음이 촉촉해졌나 보다. 나도 모르게 이른바 감성 사진을 찍게 되었다.
이미지 목록 안개 속 풍경 출근길이었다. 비는 거의 그쳤다. 강변북로가 막힌다. 고개를 돌려 밖을 본다. 창문 너머 동호대교가 보인다. 끊어질 듯 이어진다. 가로등도 휘었다. 박무(薄霧) 덕이다. | 바람 불어 좋은 날 태풍 볼라벤이 정면으로 들이닥친 것도 아니고, 한반도 중부 지방을 스쳐가면서 곁가지로 흘리는 미풍(?) 앞에 사람은 물론 건물도 나무도 흔들렸다. |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한겨울의 강원도 산골이라 추위가 굉장했는데, 펜션에는 장작을 때는 황토방이 있어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아침에 문을 열어 보니 기왓장 위에서 흘러내린 눈 고드름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뜨신 데서 잘 잤지? 난 밤새 이렇게 추웠단다.”
눈 내리는 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큰 나무들이 있다. 눈이 내렸다. 눈을 들었다. 눈이 쏟아졌다. 눈 속으로 눈이 들어와 눈을 뜨기 힘들었다. 눈에는 눈! 광폭한 눈에 맞서 실눈을 뜨며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