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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朝鮮人民軍のエース」金英哲を韓国に派遣した金正恩の本当の狙い
文大統領も、それは分かっている
近藤 大介『週刊現代』特別編集委員
"조선인민군 에이스" 김영철을 한국에 파견한 김정은의 진짜목적
문 대통령도, 그것은 알고있다
2018. 02. 27 近藤 大介(곤도 다이스케) 번역 오마니나
북한이 "승부"를 걸어왔다.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 일행의 방한이다.
2018년 동계 올림픽의 개회식에서의 김여정 당 부부장 &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장의 방한에 이어 김정은 정권이 "진심도"를 내보인 것이다. 개회식에서 나타난 것이 김정은 정권의 "표면의 얼굴"이라면, 폐회식에 나타난 김영철 부위원장은 "이면의 얼굴"이라고 할 수있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김정은 위원장이 전폭적인 신뢰를 주는, 이른바 120만 인민군의 에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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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경력
김영철 부위원장은,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에, 북중 국경 근처인 양강도에서 태어났다. 명문인 만경대 혁명학원, 김일성 군사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 인민군 15사단의 일원으로서, 한국군과 대치하는 DMZ(남북 비무장 지대)에서 근무했다.
김영철의 이름이 한국 측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8년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사건(미군 정보선을 북한이 나포한 사건)때이다. 김영철은 조선인민군의 군사정전위원회 연락 장교를 맡았었다.
이 사건에서 미국은, 북한에 사과문을 작성하고, 미군 납치피해자를 풀어달라고 하는 굴욕을 맛봤다. 북한은 이 건을 "미국에 대한 승리"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그 수훈자의 한 사람이 젊은 김영철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김영철이 한국 측에 발자국을 남겼던 것은, 서울 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2 월부터 1990년 7월까지, 인민무력부(방위성)부국장(소장)으로서, 남북 고위당국자 회담 예비회담에 참석했을 때다.
김영철은 제 1회부터 제 8회까지 북측 대표를 맡았다. 그 후, 공식적으로 시작된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도 대표를 맡았다. 1990년 9월 제 1회부터, 1992년 9월의 제 8회 까지다. 또한 1992년 3월부터 8월까지 남북 고위급회담 군사분과위원회 북측위원장을 맡았다(제 1회부터 제 7회까지). 여기까지가 김일성 시대의 일이다.
1994년 7월부터 김정일 시대로 들어가서는, 1988년 9월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다시, 한국과 관계하게된다.
같은 해 4월, 2개월을 앞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의 의전경호 실무자 회의에서, 북한 측 수석대표를 맡았다. 이어서, 2006년 3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조선인민군 중장으로서,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의 북한측 대표를 맡는다(제 3회부터 7회까지).
2006년,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을 위해 방한한 김영철 [PHOTO] gettyimages
정찰총국의 톱으로 취임
2008년 8월에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영향으로, 이듬해 2009년 1월부터, 김정은이 후계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1월 8일, 김정은이 25세 생일에 아버지로부터 후계자 준비를 명받았을 때, 부자간에 가벼운 물의가 있었다. 김정은은 아버지로부터 포부를 질문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도 아버지를 이어, 강성대국 구축하려고 한다. 강성대국 건설은 정치·군사· 경제 등 3개 분야로 구성되어있다. 할아버지(김일성 주석)는 주체사상을 가지고 노동당을 장악 하고, 고국의 정치를 발전시켰다. 아버지(김정일)는 선군정치(군 최우선의 정치)을 가지고 조선인민군을 장악해 국가의 군사를 발전시켰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혁명 위업을 계승해 내각을 장악해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한다"
이 대답은 언뜻 보면 "모범답안"이지만 김정일은 아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당(조선노동당)은 나라의 기둥이고, 군(조선인민군)은 당의 기둥이다. 그리고 군의 기둥은, 핵무기와 미사일이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놓을 때가, 우리나라가 미제(아메리카)에 소멸당할 수있는 때다. 따라서 핵과 미사일, 그리고 군대를 최우선으로 해야한다. 군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정은도 지지는 않았다. 곧바로 반박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실전뿐만 아니라, 사이버 전쟁에도 승리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군은 사이버 전에 약하다. 나는 이것을 강화하겠다"
이렇게 해서 다음 달에 김정은이 창설한 것이 정찰총국이었다. 그리고 김정은이 정찰 총국의 지휘자로 지명한 것이 김영철이었던 것이다. 김영철은, 김정은이 김일성 군사 종합대학에서 군사교육을 받을 때, 군사이론 교관이었다.
조선인민군 최고 엘리트 부대
나는 몇몇 망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조선로동당 「35 호실」과 작전부 및 인민무력부, 정찰국이, 한국 및 해외 첩보활동을 해왔다. 여기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납치, 테러, 암살, 위조 지폐와 마약 제조, 판매, 무기 밀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3개 부문을 통합해 정찰총국을 인민무력부 내에 설치한 것이다. 사실, 최초의 '김정은 직할부대'였다"
이 김정은과 김영철의 정찰총국은 120만 인민군 최고의 엘리트 부대가 되었다.
"김정은은, 이 테러부대를, 장차 조선인민군의 핵심 중의 하나에 구축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거국적이며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구축했다.
우선 전국의 초등학생 중에서 이과 영재만을, 평양 금성중학교에 모아, 철저한 컴퓨터 교육을 실시했다. 그 중에서 다시 선발해 군총참모부 산하의 자동화 대학(미림 대학)에 입학시켜 영재교육을 한다. 졸업생들은 모두 군정찰총국 산하 사이버 테러부대에 배속된다 "(망명자)
김정은과 김영철은, 정찰총국이 출범한 지 1년을 거쳐, "실전"으로 전환했다. 2010년 3 월 26일 오후 9시 45분 남북 바다의 국경인 NLL(북방 한계선)부근을 항해 중인 한국 해군의 1200t 급 군함인 "천안호"에 어뢰를 작렬시킨 것이다. 승무원 104명 중 46명이 즉사했다.
이 사건은 한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되었다. 예를들어, 사태를 원만하게 끝내기 위해 김정일이 방중했다.
하지만 북한 내에서는, 반년 후에 김정은이 인민군 대장으로 공식석상에 등장하는데, 딱 어울리는 "훈장"이 되었다. 2010년 9월, 김정은은, 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때 동시에 김영철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된 것이었다.
201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65돐 경축 열병식 군사 퍼레이드를 김정일과 함께 관람하는 김정은[PHOTO] gettyimages
계속되는 도발
이렇게 군의 요직에 오른 김정은과 김영철은, 다시 대담한 도발을 실행했다. 2010년 11월 21일, 김정일총서기, 김정은대장, 김영철 정찰총국장, 이영호 총참모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김격식 4군단장이라는 조선인민군 수뇌부는 남쪽 최전선인 계모리 해안포 기지와 무도기지의 포병대대를 시찰했다.
이틀 뒤인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이 두 기지에서 갑자기 170발의 포탄이 한국을 향해 발사되어. 한국 측의 연평도와 주변 해역을 강타해 한국 전역을 패닉에 빠뜨렸다. 연평도에서는 한국군 해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정찰총국의 도발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 2011년 4월 12일, 한국의 농협시스템에 사이버 테러를 일으켜 이를 파괴했다. 그 후에도 사이버 테러를 반복했다.
같은 해 12월에, 김정일이 급사, 김정은 시대를 맞이하자,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요소 요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를들어, 2013년 2월에, 3차 핵실험을 강행해,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이듬해인 3월 5일 조선중앙 TV를 통해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3월 11일부터 백지화하고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를 차단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인 4월 7일에는 김영철 국장이 평양 주재 각국 대사들을 모아서, "미제와 남쪽의 괴뢰(한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으므로, 안전을 위해 평양에서 멀어지도록" 통보했다.
이러한 중요한 선언을 김영철 국장이 행한 것은, 누구보다 김정은 위원장의 신뢰가 두텁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후, 김국장은, 2016년 1월에,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에 취임. 같은 해 5월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 부위원장, 당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에 올랐다.
문재인 정권의 "진심도"는
이번에, 김정은 위원장은, 이러한 조선인민군의 에이스, 과거에 없었던 이 거물을, 평창올림픽 폐막식에 파견한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도, 김영철 부위원장을 파견하면, 한국에서 파문이 일어날 것은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다. 실제로 "천안호 사건"의 유족과 야당인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북한 대표단의 앞길을 막거나, 숙박지인 서울의 5성급 호텔 "워커힐"(김여정 일행이 숙박한 곳과 같은 호텔)앞에서 구호를 제창하기도 했다.
그래도 굳이 김영철 부위원장을 보낸 것은, 무엇보다, 문재인 정권의 "진심도"를 확인한 것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쪽도 진심이니, 그쪽도 진심을 보여달라는 의사표시다.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은, 25일 밤 8시부터 열렸다. 귀빈석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인 이반카 보좌관과 김여철 부위원장이, 바로 근처에 앉아 관전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비밀 접촉"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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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에는, 문 대통령의 "왼팔, 오른팔"에 해당하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배석했다. 북측은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김 성혜, 조평통 서기국 국장, 최강일 외무성 북미국 부국장 등 총 8명이다.
이어, 오후 6시 반부터 7시 반까지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주최로 만찬이 열렸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중요한 회담의 내용은 26일 밤 현재, 상세히는 공개되어있지 않다.
"청와대"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하기위해 방한한 김영철 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을 만나 남북관계 전반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이어 폐막식에도 대표단을 보내 축하해 준 것, 그리고 평창 동계 올림픽이 안전하게 진행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특히, 남북이 통일팀을 구성해, 공동으로 입장하면서, 전세계에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다. 남북의 이같은 노력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문장 대통령은 남북 관계가 향후 광범위하게 확대하고 진전 나가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북측 대표단은 김정은 위원장도 같은 생각이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가 향후, 광범위하게 확대해, 진전해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북측 대표단은, 김정은 위원장도 같은 생각이라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을 위해서라도, 북한과 미국의 대화가 신속히 이뤄져야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대표단도 미국과의 대화를 할 충분한 용의가 있으며, 북한도 남북관계 및 북미관계를 같이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데 같은 생각을 나타냈다>
남북은, 26일에도 계속해 서울에서 대화를 계속했다. 김영철 부위원장 일행은 27일 귀국길에 오른다.
제한된 시간은 다가오고있다
향후의 당면의 포인트는, 3월 18일에 장애인 올림픽이 끝난 후, 예년과 같은 대규모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지의 여부다. 관건은 역시 문재인 정권의 향방이다.
한미합동 군사훈련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5가지 밖에 없다.
① 예년대로 실시(미국의 주장)
② 규모를 축소
③ 미군의 최신무기를 사용하지않고 실시
④시기를 축소
⑤ 올해는 중지(북한의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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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북미 직접협상은, 북미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전제조건이 평행선인 상태다. 즉, 미국의 주장은, 북한의 핵무기를 완전히 돌이킬 수없는 검증이 가능한 폐기를 전제로 협상한다. 한편, 북한측의 주장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협상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북미 사이에 서있는 것이 문재인 정권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월 8일에 실시한 펜스 미국 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에서, "어쨌든 지금은 북한문제를 한국에 맡겨달라"고 강조했다. 다음 날인 9일의 아베 신조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본심이, 북한 측과 더 가깝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너무 북한에 가까워지면 트럼프 정권으로부터 다양한 보복이 있을 것이며, 국내 보수파로부터의 반발도 예상된다.
그래서 생각되는 것은, 북한의 핵 미사일 문제를 두 단계로 나누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동결" 즉, 더 이상 발사실험을 실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제 2단계의 "폐기"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이라고 생각된다. 김영철 부위원장과도, 이 선에서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한미합동 군사연습까지의 시한은 다가오고있다. 한국군의 전시작전 통제권은 유엔군에게 있다. 즉 한국군은 실질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통제 하가 아니라, 브룩스 주한미군 사령관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의 "일성"으로 한미 합동 군사연습의 중지를 결정할 수없는 사정이 있다.
앞으로, 혹시 문재인 대통령이 긴급 방미해, 트럼프 대통령과 담판을 할 가능성도 있다. 김영철 부위원장으로부터 얻은 어떠한 타협을 "선물"로, 올해의 한미합동 군사연습의 중지를 요구하기위해 워싱턴에 갈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게 뼈아픈 것은, 본래라면 아군이 되어 줄 것인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이 약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3월 5일부터 15일 경까지 실시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의, 헌법개정에서 간부인사까지, 5년에 한 번인 대개편을 실시하기 위해, 지금은 아무래도 한반도 문제에 깊숙히 관여할 여유는 없다. 그것은 3월 18일에 대통령 선거를 앞둔 러시아의 푸틴 정권도 마찬가지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권과 아베 정권의 관계는 견원지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밀월관계는 아니며 우호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친북"인 문재인 정권에게, 지금의 일본은 어느 쪽인가 하면, 매우 짜증나는 존재로, 도무지 의지할 수 없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후 수단"
지난 주, 트럼프 정권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2월 23일, 총 56개에 이르는 북한, 중국, 대만의 운수회사 등을 새롭게 독자적인 제재대상으로 추가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유엔 안보리의 제재로 금지대상이 되고 있는 북한을 위한 석유나 석탄 등을 해상에서 전달하는 것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회견에 임해, 장기인 공갈을 작렬시켰다.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한 대북제재다. 잔인한 독재국가의 핵무기에 의한 협박에 우리는 일치단결해 대적해야한다. 만약 이번 경제제재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제 2의 국면"으로 전환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매우 거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 트럼프의 발언은, 일본에서도 센세이셔날하게 보도되었다. "제 2의 국면"이란, 북한 공습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트럼프 회견 장면을 보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전쟁할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트럼프 자서전"(치쿠마 문고)와 최근 화제인 트럼프 폭로책인 "화염과 분노"(하야카와 책방)를 읽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게 주먹을 치켜들 때는 상대방과 협상할 의사가 굳어진 때인 것이다. 즉, 협상 전에 조금이라도 조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고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원래, 현재의 트럼프 정권이 직면하고있는 가장 시급한 국제문제는, 북한문제가 아니라, 중동문제다. 미 국무부는 23일, "5월의 이스라엘 건국 70주년(5월 14일)에 맞춰, 텔 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이전 할 것"이라고 발표하므로서, 중동은 드디어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아니면 "왼팔, 오른팔"(조명균 통일부장관과 서훈 국가 정보원장)중의 하나가 긴급 방미할 경우, "북한과의 협상을 시작한다"고 말하기 시작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만약 트럼프 정권이 강경할 경우, 문재인 대통령은 "최후의 수단"이 있다. 그것은, 4월 15일의 "태양절"(김일성 생일)에 맞춰, 문재인 대통령이 전격방북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한미합동 군사훈련도 할 경활이 아니다.
여하튼, 올림픽의 뜨거운 싸움은 끝났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싸움은, 끝날 일이 없다.
http://gendai.ismedia.jp/articles/-/54625?pag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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