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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궁차(宮差)
정의
조선시대 궁방에서 파견한 차인.
개설
조선시대 각 궁방(宮房)에서는 자체적인 재원 마련 수단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둔전을 궁방전(宮房田)·궁장토(宮庄土)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관리하고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궁방에서 파견한 차인(差人)이 바로 궁차(宮差)였다. 궁방전은 크게 궁방이 직접 개간하였거나 조정으로부터 절수(折受)받아 소유권적인 지배를 하고 있는 형태인 유토(有土)와 조정으로부터 민간의 소유지를 통해 재정만을 지원받는 형태인 무토(無土)로 구분되었다. 여기서 무토는 조정에서 직접 수세(收稅)하여 궁방에 지급하지만, 유토는 1종 유토와 2종 유토 모두 궁방에서 직접 궁차를 파견하여 세금을 걷었다. 궁방의 수조율은 일반 민전의 지대율보다 낮은 1/3이나 1/2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수취 담당이었던 궁차나 도장(導掌)의 농간으로 인해 실제 부담은 훨씬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궁방에서는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궁방전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궁방전이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궁방의 직접적인 관리가 불가능하였다. 궁방전은 궁방의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으므로 궁방에서는 이를 철저히 관리·감독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각 궁방에서는 궁차를 파견하였다. 궁차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정해진 지대(地代)를 징수해 오는 일이었다. 그리고 토지의 이상 유무와 경작 상태를 파악하는 일도 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시대 궁방전의 운영 체계는 크게 궁방-차인-농민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차인의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되었다. 먼저 궁방이 직접 궁방소속의 직원인 궁차를 파견하여 운영하는 방식이 있고, 청부인에게 운영 및 세금 징수를 위임하는 도장제(導掌制)가 있었다. 궁방이 도장제로 운영할 경우, 도장이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조세 징수 과정에서 농민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과 마름[舍音] 등의 처벌을 궁방에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나 도장은 이러한 권력을 배경으로 농민에게 정상적인 세율 외에 과중한 조세를 부과하며 작인(作人)들에게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하였다. 이러한 도장권은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각종 주인(主人)의 권리와 같이 매매되었다. 농민들에게는 궁방보다도 직접적인 관리자인 도장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도장이 지정되지 않은 곳에는 궁방에서 직접 사람을 파견하였는데 이것이 궁차였다. 궁차는 신분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도장과 같이 우월적 권리를 이용하여 농민들을 관리·감독하였다. 궁차는 위로는 궁감(宮監)의 지시를 받았으며, 아래로는 궁방전에 소속된 마름을 통해 농민들을 통제하고 조세 징수를 완수하였다. 이 밖에도 궁차는 궁방전을 확대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무리하게 민전(民田)을 침탈하는 등 부정을 저질러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궁차는 궁방전의 변화와 함께 그 규모와 성격이 변화하였다. 궁방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오랜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생산력을 조속히 회복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적극적으로 개간을 장려하였고, 특별한 재원을 마련할 방안이 없었던 궁방들은 전국적인 개간사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궁방의 둔전개발은 전후(前後) 토지를 복구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였지만, 17세기 말에 접어들면 주인 없는 황무지를 대상으로 해야 할 개간사업이 일반 백성들의 토지를 노골적으로 침탈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변질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또한 면세지였던 궁방의 둔전이 확대되면서 왕실의 재정 수입에도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궁방의 둔전 확대를 규제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그것도 거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정조대에 이르러 ‘궁부일체(宮府一體)’ 논리에 입각하여 궁방의 면세전을 줄이고 중앙의 재무 기관인 호조를 통한 일원적인 재정 운영을 도모하지만 이마저도 정조 사후 흐지부지되면서 궁방의 면세전은 계속해서 중앙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또 궁방전은 백성에게도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각 궁방에서는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전국에 궁차를 파견하였는데, 궁방전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파견되는 궁차의 수도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때 파견된 궁차들이 백성에게 많은 농간을 부리고 있었다. 정해진 세율보다 높게 세금을 받거나 곡식의 품질을 문제 삼으며 추가 징수를 하는 식이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부정한 궁차의 처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작인(作人)들에게 우월적 위치에 있던 궁차들의 농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궁차는 궁방전이 유지되던 조선의 마지막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금양잡록(衿陽雜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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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 2, 일조각, 1971.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연구』, 경인문화사, 2006.
이영훈, 『조선후기사회경제사』, 한길사, 1988.
급복(給復)
정의
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이나 각 능의 수호군, 열녀·효자 등에게 호역을 면제해 주는 것.
개설
급복은 호조(戶曹)·선혜청(宣惠廳)의 관문(關文), 즉 공식 문서 없이는 시행하지 못하였다. 급복은 그 대상자에 따라 왕족·권장·진휼·특수인·군호, 관아에서 특정한 역을 담당하도록 지정한 호인 정역(定役)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수혜 기간에 따라 그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영년복호(永年復戶)와 기한이 정해진 한년복호(限年復戶)로 구분할 수 있다. 모든 급복전(給復田)은 호역(戶役)을 면제해 준 토지인 만큼, 호역의 일종인 공물을 거두지 않았다. 따라서 대동법 시행 이후 급복전에서는 같은 지세라 하더라도, 애초 토지에 부과하였던 전세와는 달리, 대동미는 수취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대전회통』 「호전(戶典)」 요부(徭賦)에) 의하면 급복의 대상자는 각 능의 수호군(守護軍), 구장릉(舊長陵)의 산직(山直), 장령전(長寧殿)의 수호군, 비전직(碑殿直), 대왕사친묘(大王私親墓)·세자사친묘(世子私親墓)·대원군묘(大院君墓)·창빈묘(昌嬪墓)·인빈묘(仁嬪墓)의 수직군(守直軍), 왕후의 고비묘직(考妣墓直), 육상궁(毓祥宮)의 고비묘직 등이 해당되었다. 또한 고려시대 절의명신(節義名臣)인 정몽주(鄭夢周)나 이존오(李存吾), 조선시대에는 조광조(趙光祖), 삼학사(三學士)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엄흥도(嚴興道)의 묘직 또는 사우직(祠宇直) 등이 포함되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이름난 사람의 묘직도 왕에게 청하여 복호를 내려 주었다. 충신·효자·열녀로서 복호로 지정된 자는 본인이 사망한 후에 처자(妻子) 또는 자부(子婦)가 있으면 그들에 한하여 계속 복호를 내려 주었고, 후손이 없으면 3년 동안 복호로 지정해 주었다.
한편 급복전(給復田)은 전세(田稅)만 수취하고 대동미는 거두지 않았다. 전국의 급복전에 해당하는 경작지의 결수(結數)는 다음과 같다. 선혜 분청인 경기청에서 관리하는 토지 55,411결(結) 가운데 복호전(復戶田)은 6,705결이고, 세외복호전(稅外復戶田)은 5,059결이다. 강원청에서 관리하는 토지 17,403결 가운데, 각종 복호전은 2,730결이다. 호서청에서 관리하는 토지 127,478결 가운데 각종 복호전은 9,499결이다. 호남청에서 관리하는 토지 199,039결 가운데 각종 복호전은 11,786결이다. 영남청에서 관리하는 토지 204,941결 가운데 각종 복호전은 15,569결이다. 해서청에 관리하는 토지 67,811결 가운데 각종 복호전은 9,531결이다.
한편 복호로 인한 재원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거두는 전세를 복호미(復戶米)라 하였다.
변천
본래 복호는 호역 중 잡역만을 면제하도록 하였으나, 수령들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 전세·공물(貢物)까지 면제하는 사례가 많았고, 여러 궁가(宮家)의 복호 남용이 빈번했다. 이에 1629년(인조 7)에는 왕명으로 이를 엄격히 시행하였다.
대동법은 공납물의 전결세화(田結稅化)를 기한 제도이다. 이 때문에 대동세는 전세를 부과하는 근거가 되는 수조안(收租案)에 따라 부과되었다. 대동법은 수조안에 등록된 전결 가운데서 호역을 면제하는 각종 급복전을 제외한 모든 전결에서 1결당 쌀 12두(斗)씩을 부과·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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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철, 「조선 후기 속오군 급보(給保)·급복책(給復策)의 추이」,『전주사학』 4, 1996.
기인(其人)
정의
조선시대 궁중에 땔나무와 숯 등의 땔감을 조달한 공인.
개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현물로 징수되던 공물이 대동미·포·전으로 바뀌어 납부되었다.공인은 정부로부터 대동미·포·전을 공가로 지급받아 관청의 수요품을 제조하거나 구입하여 납부하였다. 공인의 공물 상납은 정기적으로 조달하는 원공(元貢)과, 원공만으로는 부족하거나 공안(貢案)에 없는 새로운 물품을 조달하는 별무(別貿)로 나뉜다. 공인도 원공공인과 별무공인, 공가도 원공가와 별무가로 나뉜다. 원공은 선혜청, 별무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대동법 실시에 따라 기인의 신역(身役)도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지급받아 서울 공계(貢契) 등을 통해 물종이 상납되는 경작공(京作貢) 형태로 전환되었다. 기인은 공조(工曹) 산택사(山澤司)에 소속된 공인으로, 상납 물종이 선혜청의 원공에 포함된 원공공인이다. 『만기요람』의 선혜청 57공(貢) 가운데에도 기인이 포함되어 있다. 기인의 권리를 매매하는 문서에 ‘기인공방(其人貢房)’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를 통해 기인은 공방이란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기인공방에 소속된 계원 자녀끼리 혼인관계를 맺은 경우도 있다. 기인 공인권은 조선후기에 중요한 매매 대상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기인의 역은 해당 읍의 향리 수에 따라 경중의 차이가 컸다. 경기는 향리 90명에 1명, 강원도와 황해도는 70명마다 1명을 두고, 경상·전라·충청도는 향리 50명에 1명을 차정하였다. 이처럼 기인의 분정(分定)은 고정화되어 있어서, 향리가 감소하면 그만큼 남아 있는 사람의 부담이 증가하였다. 기인이 입역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가포(價布)의 형태로 거두었는데, 처음에는 향리나 관속(官屬)에게 거두어들이다가 점차 일반민에게 전가되었다. 이로 인해 기인이 입역하는 데 드는 가포를 징수하는 것은 새로운 민역(民役)으로 인식되었다. 각 도의 폐단 가운데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할 정도도 민에게 지워진 가포 징수의 부담이 막대하였다. 여기에 공조의 낭관이나 아전이 방납인(防納人)과 결탁하여 기인가포를 방납하는 폐단도 야기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기인가포를 논·밭 등의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징수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 갔다.
1624년(인조 2) 강원도에 대동법이 실시될 때, 대동세미 속에 기인역가가 포함되었다. 이후 기인역가는 도마다 대동세에 포함되어 상납되었다. 이로써 공가를 받고 땔감을 조달하는 시탄공인(柴炭貢人)인 기인이 출현하게 되었다.
내용
『경국대전』 공전에는 경역리(京役吏)에 대한 규정이 있다. 경역리는 서울에 머물면서 서울에 관한 지방관청의 업무를 대행하는 향리란 뜻이다. 이 경역리는 기인을 가리킨다.
경기는 향리 90명, 강원도·황해도는 각 70명, 충청도·전라도·경상도는 50명마다 1명씩을 정하여 총 332명의 기인이 입역(立役)하였다. 이들이 해마다 차례로 서울에 오면 공조에서 여러 관청에 나누어 배정하여, 숯과 땔나무를 준비하게 하였다. 332명 가운데 233명은 사재감, 99명은 선공감에 배속되었다. 사재감에 배속된 기인은 1인당 하루에 소목, 즉 땔나무[燒木] 57근, 2일마다 뉴거(杻炬), 즉 싸리나무홰[杻炬] 1개를 납입하였다. 선공감에 배속된 기인은 1인당 하루에 숯 5두 5승을 납입하였다. 기인 대립가(代立價)는 한 달에 면포 5필이었다. 이처럼 기인은 조선전기에는 도별로 향리 수에 따라 입역해야 할 기인의 수가 정해졌으며, 이들은 경역리로서 상경하여 땔감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시기가 지나면서 점차 대립제가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대동법 실시와 더불어 기인은 공물주인, 즉 공인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때 기인은 땔나무·숯·싸리나무홰·싸리나무 등을 조달하는 공인의 신분을 띠었다. 기인은 공조 산택사(山澤司) 소속으로, 시탄공물주인이면서 동시에 그 공물명을 가리키는 용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기인은 공시탄인(供柴炭人)·공시탄자(供柴炭者)·공물공시목자(貢物供柴木者)·기인공물주인·시탄공물주인·시탄공인·공조기인 등으로 불렸다.
이로써 조선후기 기인은 공인 중에서도 각처의 제향(祭享)이나 궐내 각 전궁, 그리고 여러 관청에 시탄공물을 조달하는 원공공인을 일컬었다. 기인역에 대한 가포의 총액이 인조 때 많은 경우에는 연간 35,000필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당대 기인 수가 326명으로, 이들은 1인당 110석을 받는데 1년 받는 공가는 무려 35,000여 석에 이른다고 하였다. 순조 때에 편찬된 『만기요람』에서도, 1년에 지급되는 기인 공가의 총액은 38,721석 13두로 나타났다. 그중 원공이 38,437석 13두, 이문원미(摛文院米)가 162석 6두, 강화미(江華米)가 121석 9두였다. 이 가운데 이문원미와 강화미는 별무가미로 호조에서 지급한 것이다.
이 공가 총액은 기인 1인이 1년에 조달해야 하는 땔감 20,520근, 탄 132석, 뉴거 6,000자루, 뉴목 6,000속에 대한 비용이다. 땔감 20,520근, 숯 132석은 『경국대전』에 규정된 하루 소목 57근, 탄 5두 5승을 360일로 잡고 계산한 수치였다. 기인에게 지급되는 공가는 선혜청 57공 가운데 가장 많은 액수로, 두 번째인 제용감(濟用監)의 17,395석에 비해 2배 이상이나 되었다.
변천
기인은 고려초에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향리 자제를 서울로 데려와 볼모로 삼으면서, 그 출신 지역 일에 대한 고문으로 삼았던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고려말에는 원래 임무와는 달리 성격이 변질되어, 여러 잡역을 담당하는 잡역부(雜役夫)로 전락하였다. 기인에게 부과된 역이 과중하여 도망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자, 고려말에는 이 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조선초 기인제도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정종 때는 기인 수를 조정하고, 중앙관청의 땔감 수요를 줄이도록 하였다. 태종 때는 땔나무를 수납하는 법을 고쳐서, 경기도가 공납하는 땔나무 1,935,000근을 면제해 주고, 기인 103명을 증원하여 땔나무 공급을 담당하는 소목역(燒木役)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또 기인의 역 부담이 무거운 곳[苦役處]과 가벼운 곳[歇處]을 번갈아 입역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시대에 기인은 사재감·선공감에 소속되어 서울의 각 관청이나 왕실 전궁에 땔감 연료를 공급하였다. 각 지역의 향리 중에서 번갈아 입역하는 기인의 전체 수는 1416년(태종 16)에는 490명이었다. 기인의 선발은 지방 각 관의 향리 수를 기준으로 하였다. 성종 때 반포된 『경국대전』은 기인을 경역리로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에는 기인의 도별 배정, 소속 관청, 납부 물품, 대립가가 규정되어 있다. 이로써 기인의 공역이 땔나무와 싸리나무홰를 납품하는 역으로 정착되었다.
대동법 실시 후 기인역을 대동(大同)에 흡수하여 선혜청의 각 청에서 공가를 지급하였다. 이는 『속대전』 「공전」 경역리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대동법을 창설한 뒤에는 향리입역제를 폐지하고, 경인(京人)이 대가를 미리 받아 기인공물을 담당하고, 그 사람을 기인이라 칭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동법 실시 후 기인은 향리의 신역으로 동원되었던 조선전기의 기인과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경국대전』과 『속대전』의 경역리조를 비교해 보면, 조선전기 경역리로서의 기인에서 조선후기 공인으로서의 기인으로 성격이 변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다른 공인과 마찬가지로 18세기 이후 기인의 공폐(貢弊) 역시 자주 논의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기인이 납부하는 땔나무와 숯의 양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편 가징(加徵)·늑징(勒徵) 등의 방법으로 기인을 수탈하는 폐단을 막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공폐(貢弊)』
『만기요람(萬機要覽)』
『성호사설(星湖僿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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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육(臘肉)
정의
납향에 쓰는 희생 고기.
개설
납향(臘享)은 동지(冬至) 뒤 세 번째 미일(未日)에 종묘 등 조종(祖宗)의 신위에 희생(犧牲)을 바치고 한 해의 농사나 그 밖의 일을 고하는 제사였다. 납향에 사용하기 위해 지방관청에서 진상(進上)하는 산짐승의 고기를 납육이라 하였다. 납육을 진상하는 것을 납일(臘日)진상이라고도 하였다. 납육은 대개 생돼지[生猪]·생노루[生獐]·생꿩[生雉]·생사슴[生鹿]·생토끼[生兎] 등이었다. 이들 동물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민간에 여러 폐단을 야기하여 납육의 정기 진상에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영흥군읍지』나 화순읍지인 『서양지』에는 납육을 각각 진공방물(進貢方物) 또는 진공(進貢)이라 제목을 붙여 진상물선과 구분 없이 열거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납육진상에 관한 기록은 “대전(大殿) 외 4전에 진상하는 납육을 반으로 줄여서 봉진하라.”고 한 실록 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성종실록』 4년 12월 3일]. 이를 통해 1473년 이전에 대전을 포함한 5전에 납육이 진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25년(중종 20) 10월에는 납육 진상을 핑계로 수령이 백성을 동원하여 사냥하는 폐단을 엄금하였다.
납육은 대동법 시행 이후 공물화되어 선혜청의 공물가로 마련되었다. 각 도에서 진상해야 하는 납육을 공인을 통해 대납·봉진하는 형태로 바뀌어 간 것이다. 숙종 때에는 호서 지역의 납육을 서울에서 공납하도록 하였다. 1867년(고종 4) 편찬된 『육전조례』에 의하면, 강원대동청이 강원도감영을 대신하여, 각 궁에 강원도의 납육 값을 대납(代納)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납육을 변통하는 조치도 있었는데, 정조 때에는 사냥으로 인한 민폐를 고려하여 경기나 호남에서는 멧돼지·노루·사슴을 꿩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
형태
1728년(영조 4) 편찬된 『진상별단등록』에 의하면, 외공(外貢)으로 전라도 납육진상을 상납하는 곳은 대왕대비전·왕대비전·대전이었다. 진상하는 종류는 생돼지·생노루·생꿩·생사슴이었다. 이는 각 영의 유치미(留置米)로 직접 구입하여 상납하였다. 대왕대비전에는 생돼지 3마리, 생사슴 4마리, 생노루 5마리, 생꿩 70마리가 봉진되었으며, 왕대비전도 이와 같았다. 대전에는 생돼지 3마리, 생사슴 3마리가 상납되었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788년(정조 12)에는 강릉 지역의 꿩을 잡는 엽치군(獵雉軍)을 없앴다. 종전에는 강릉부가 포군(砲軍) 수십 명을 정하여, 납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간에 포군 1명당 꿩 10마리씩을 대납하게 하였다. 포군에게 궐액(闕額)이 많으므로 엽치군을 혁파하도록 한 것이다.
참고문헌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Ⅲ , 일조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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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成外志子, 「조선후기 공납청부제와 중인층공인」,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내궁방(內弓房)
정의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사용하던 활이나 화살을 만들고, 보관하는 궁내의 관아.
개설
조선시대 활은 물소뿔[水牛角]로 만들었다. 물소뿔인 수우각은 궁각(弓角)·흑각(黑角)이라고 하며, 수우각을 원료로 만든 활은 각궁(角弓)·흑각궁이라 불렀다. 수우각은 15세기 말까지는 주로 중국을 통해 수입되었으나, 16세기 이후에는 동남아시아산이 일본을 통해 수입되었다. 화살의 원료인 전죽(箭竹)은 각 도에서 진상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궁중에서 소요되는 활과 화살을 제작·보관하는 기관으로 내궁전고(內宮箭庫)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내궁전고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내궁방으로 바뀌었다. 1438년(세종 20) 사간원의 상소문에는 “자문〮선공감(紫門繕工監)에 내궁방을 설치하고, 환관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한 지가 오래되었다[『세종실록』 20년 11월 23일]”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내궁방을 처음 설치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적어도 1438년 이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관이 내궁방을 관장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 1438년 이후부터는 선공감이 관장하도록 하였다.
조직 및 역할
내궁방에는 활과 화살을 만드는 공장(工匠)들이 있었다. 이들을 내궁인(內弓人)·궁장(弓匠)·궁공(弓工)·내시인(內矢人)·시장(矢匠)·시공(矢工)이라 불렀다. 군기감 소속의 궁장들이 내궁방의 일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지기[庫直]인 내궁방직이 있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는 훈련도감 소속 포수와 사수가 내궁방 내시인으로 투속하기를 원하는 일이 있었다.
내궁방에서는 상현궁(上弦弓)을 비롯한 각종 활이나, 장전(長箭)·통전(筒箭)·백우전(白羽箭)·호전(虎箭) 등 각종 화살을 만들고, 보관하였다. 왕은 활이나 화살을 도총사 등 장수에게 하사하거나, 변방을 지키는 군졸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숙종 1675년(숙종 1) 4월에는 내궁방에 있는 창과 칼을 훈련원과 어영청에 지급하여 전차(戰車)를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변천
1505년(연산군 11) 5월에는 “상의원(尙衣院)·군기시(軍器寺)의 관원으로 각각 4명을 증원하여 내궁방에 근무하며 내관(內官)과 함께 보살피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내궁방에서 만드는 활의 원료인 물소 뿔은 동남아시아산이므로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1698(숙종 24)에는 물소 뿔의 조달을 전담하는 궁각계(弓角契)라는 공인계가 조직되었다. 이들에게는 일본에서 수입한 구리를 공가로 지급하였다. 내궁방은 조선후기 내내 존속하였다가 1882년(고종 19) 무렵 혁파된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해 12월 29일 감생청(減省廳)에서 올린 별단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김동철, 「조선후기 수우각무역과 궁각계공인」, 『한국문화연구』 4, 부산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1.
대납(代納)
정의
공물 품목을 다른 사람이 대신 납부하고 그 대가를 받는 것.
개설
공납제는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각 지방에서 나는 토산물로 직접 거두어들이는 임토작공(任土作貢)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특산물이 많은 지역은 중앙 권력에 의해 항상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임토작공의 원칙에 위배되더라도 때로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을 배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입법 당시에는 생산되었어도 시간이 지나 더 이상 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편 일반 백성이 만들어서 납부하는 물품 가운데 각궁(角弓)·선척(船隻)과 같이 만들기 어려운 ‘난비지물(難備之物)’ 역시 민가에서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임토작공을 원칙으로 하는 공납제에는 원래부터 대납(代納)의 소지가 있었다. 이에 국가는 일찍부터 대납을 허용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태조 때부터 단종 때까지는 원칙적으로 대납을 금하였지만,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특정인에게 대납하도록 하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그 까닭은 첫째, 필요한 물품을 적절한 때에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백성이 구입하기 어려운 것을 일괄 구입하게 하면 상납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으면서도 대납자에게는 적절한 이익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셋째, 승려들에게 대납권을 주게 되면, 절의 건립과 같은 큰 역사(役事)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를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종실록』 즉위년 4월 28일 1번째기사].
내용
처음으로 인정한 공물 대납자는 승려였다. 세종 때 절의 건립이나 수리, 불상의 조성, 불경의 간행 등 막대한 경비가 드는 역사(役事)에서는 국법의 예외 규정에 따라 담당 승려들에게 공물의 대납권을 주었다. 관인·부상대고(富商大賈)·각사이노(各司吏奴) 등도 대납권을 얻었다. 이들은 미리 서류를 발급 받아서 중앙 각사(各司)에 공물을 대납하였다. 그리고 가을에는 수령에게 어느 집은 몇 말, 어느 집은 몇 되를 수납하라는 문서를 받아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가를 받아냈다.
국법에서 예외 규정으로 인정했던 대납 공물의 품목은 초둔(草芚)·정탄(正炭)·부등목(不等木)·토목(吐木)·소목(燒木)·지지(紙地)·금칠(金漆)·청밀(淸蜜)·지율(芝栗) 등이다.
세조 때에는 전면적으로 대납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대납 허용책은 여러 가지 폐단을 불러일으켰고 예종 때부터 다시 강력한 대납 금지책을 실시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12월 9일]. 이 금지책은 성종 때에 완전한 기틀이 잡혀 비로소 조선시대의 공납제로 완성되었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대납의 금지책과 허용책이 번갈아 시행되었다. 그러다가 공물 대납에서 하나의 큰 전기가 마련된 것은 세조대였다. 즉, 세조 이전까지는 일부 공물에 한해 부분적으로 대납을 허용하였으나, 1461년(세조 7)에 이르러 공물 대납에 대한 여러 규정이 정해졌다[『세조실록』 7년 1월 3일]. 즉, 공물 부담자와 대납인이 동의할 경우에만 대납을 허용하였고, 대납 금액은 수령이 민가에서 공물 금액을 받아 대납자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백성이 희망하지 않는데도 강제로 대납하는 행위, 대납 금액을 정가 이상으로 징수하는 행위, 그리고 대납 청부인이 관에 신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직접 민가에서 대가를 징수하는 행위는 금지되었다. 대납 금액은 대납자가 모든 각사의 필납문첩(畢納文牒)을 받았을 경우에만 받는 것을 허용하도록 하였고, 이를 어길 때는 그 값을 관에서 몰수하였다[『세조실록』 7년 1월 3일]. 대납의 허용은 공물 가운데 백성이 납부하기 어려운 것을 백성의 바람에 따라 대납하게 하여 민의 재산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민간에서는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공물까지도 백성의 의사를 묻지 않고 대납 허가를 내주는 일이 많았다. 수령이 방납 모리배들의 간청에 응하거나 혹은 그들의 위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세조대에 허용되었던 대납은 예종이 즉위(1468)하면서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예종실록』 즉위년 10월 16일]. 즉 “앞으로 대납하는 자는 공신·종실을 막론하고 사형에 처하고 가산은 적몰한다. 비록 공사(公私)로 인한 범법자라도 마땅히 논죄할 것이다.”라는 조치를 내렸다. 예종은 5일 후 법령을 위반한 지방관에 대해 극형에 처할 것을 반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법으로 금하기 이전에 대납한 대가의 징수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이 문제는 이듬해(1469) 정월 대납 금지를 반포하기 이전의 대납 금액은 관에서 징수하여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예종실록』 1년 1월 27일]. 대납 금지책이 반포된 지 3개월 후에 내려진 이 조치는 새로운 법을 상당히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금지책은 『경국대전』에 “공물을 대납한 자는 장(杖) 80대, 도(徒) 2년에, 영구히 서용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참고문헌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강제훈, 「조선 세조대의 공물대납정책」, 『조선시대사학보』 3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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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봉, 「조선초기의 공물방납에 대하여」, 『사학연구』 26, 1975.
박도식, 「조선전기 공물방납의 변천」, 『경희사학』 19, 1995.
백승철, 「16세기 부상대고의 성장과 상업활동」, 『역사와 현실』 13, 1994.
박도식, 「조선전기 공납제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대동법(大同法)
정의
조선후기에 여러 공물을 대신 쌀과 포목·돈으로 대신하여 바치게 하던 부세제도.
개설
대동법은 국가가 필요한 여러 물품을 현물 형태로 농민에게 직접 수취하던 것에서 일정한 양의 쌀[米]·베[布]·돈[錢]으로 납부하게 한 조세제도이다. 이후로는 각 군현에서 중앙 각사에 현물로 바치던 공물 대신 쌀·베·돈으로 납부하였다. 선혜청(宣惠廳)에서는 이러한 대동세를 일괄 수취하여 선혜청 소속 공인(貢人)이나 중앙 각사의 공인에게 공가(貢價)를 지급하여 물품을 상납하게 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각 군현에 배정한 공물은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징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런데 특산물이 산출되는 군현에만 공물을 배정할 경우 특산물이 나지 않는 군현에 비해 그 군현은 중앙 권력에 의해 항상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국가는 각 군현의 공물 부담을 균등히 하고자 그 고을에서 나지 않는 불산공물(不産貢物)을 배정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 해당 군현의 농민들은 공물을 내기 위해 산지에 가서 공물을 구입하거나 상인에게 그러한 행위를 위임하였다. 이러한 위임이 바로 방납(防納)이었다. 방납인들은 점차 공물의 값을 높게 불러 상당한 이익을 얻었지만, 농민들은 이로 인해서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방납의 폐해를 조정하여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려는 논의는 16세기 특히 후반부터 자주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진지하게 검토되었던 방안은 공물을 쌀로 대신 거두는 수미법(收米法)이었다. 16세기 사림계 인사들은 부임지에서 개별적으로 공물 대신 쌀을 거두는 사대동(私大同)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1594년(선조 27)에 유성룡(柳成龍)은 도별로 공납물에 상당하는 쌀의 양을 계산하여 도내 모든 토지에 균등하게 배분·징수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세웠다. 이는 징수한 공납미를 정부가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고 이들에게 왕실·관청의 소요물품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종래의(지금까지 내려온) 방납을 제도화시킨 것이다. 방납을 정부의 통제하에 두고, 이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였다.
유성룡의 논의는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임진왜란 후 다시 논의되어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혜법(宣惠法)이라는 이름으로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다. 그 후 대동법은 1623년(인조 1)에 강원도, 1651년(효종 2)에 충청도, 1658년(효종 9)에 전라도의 해읍(海邑), 1662년(현종 3)에 전라도의 산군(山郡), 1678년(숙종 4)에 경상도,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의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었다.
내용
대동법의 큰 원칙은 공납제 운영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일례로 공물 배정 기준으로서의 전결(田結) 문제를 보면,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도 실제로 공물 부담은 전결에 지워졌다. 다만 그에 관한 종합적이고 명확한 수취와 운영 규정을 갖춰 놓지 못했을 뿐이다. 대동사목(大同事目)의 근본 취지는 단순히 공물 조달에 따른 폐단의 방지나 안정적인 공물 확보가 아니라 공물의 수취를 어떻게 공정하게 전결 위에 정립시킬 것인가에 있었다.
또 명분상으로는 공물가(貢物價)를 낮추는 것이 좋게 들리지만, 이것은 현실의 재정을 돌아보지 않은 주장이었다. 현실과 당위의 괴리는 각종 불법적 양상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공물가 인하 조치는 나중에 더욱 악화된 형태로 백성들의 부담으로 전가되곤 하였다. 대동법은 종래 백성에게 대가 없이 수취하던 각종 항목들을 대동미(大同米)로 흡수시켰다. 이로써 이들 항목들을 중앙 정부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는 근거와 기준이 마련되었다.
나아가 대동법은 공물가 수취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현실의 다양한 위험들을 상쇄시킬 장치들을 마련하였다. 불시의 수요나 풍흉에 대비하기 위한 여미(餘米) 항목을 새로 만든 것, 사주인(私主人)에게 쌀과 베를 섞어 지급함으로써 풍흉에 따른 쌀·베의 상대적인 가격 변동을 조절한 것, 관수(官需)의 균등 지출과 1년에 4회에 이르는 보고 체계를 확립한 것 등이 바로 그런 예였다.
대동법은 기존 공물납의 극심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위험의 재발을 영구히 종식시킨 제도는 아니었다. 즉, 모든 물품들이 공물주인(貢物主人)을 통해 정부의 통제 아래 서울에서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여전히 각 군현이 직접 납부하는 책임을 졌다. 그에 따라 크게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방납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변천
대동법은 일차적으로 공물·진상인 공납을 전세화(田稅化)한 제도였기 때문에 전결을 대상으로 부과하게 되었다. 따라서 각 군현에서 수취하는 대동세는 각 군현의 토지 규모에 따라 차이가 났으며, 일단 대동세에 포함된 각종 공물과 역에 대해서는 추가 징수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깨뜨리는 주요 원인은 관아에서 불시로 징발하는 역에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최대한 자제하였다.
공물가 인하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공안 개정론과 달리 대동법에서는 공물가 지급액이 늘었다. 공물을 마련하거나 혹은 제작하고 수송하는 현실적인 경비를 공물가 내에 포함시켜 상납 과정에서 추가 징수의 폐단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런 원칙은 각 군현에 똑같이 적용되었다. 한편 방납에 참여하였던 사주인은 대동법을 시행하여 공물 조달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대동법은 공물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고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수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대동사목 안에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하였다. 바로 풍흉에 따른 불균형을 고려한 수취 방식, 공물주인의 물자조달을 감독하는 행정 장치 등이었다.
처음 실시된 경기도 대동법은 그 시행 세칙[事目·事例]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토지 1결(結)당 쌀 16두(斗)씩을 부과·징수하여, 그중 14두는 선혜청에서 중앙에 납부하는 경납물(京納物)을 구입하는 비용으로 공인에게 지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2두는 수령에게 주어 그 군현의 공(公)·사(私) 경비로 쓰게 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동법은 각 군현에서 중앙 각사에 개별적으로 상납하던 공물을, 군현 소속 토지에 근거하여 대동미로 전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을 크게 도모한 제도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은 농민의 열망 속에 1623년(인조 1)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도 확대하여 실시되었다.
그러나 인조 즉위년과 이듬해의 잇단 흉년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 세칙의 미비,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들의 반대 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전라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이로 인해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남방토적(南方土賊)이라 부른 조직적인 농민 단체를 비롯한 농민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되고, 재정의 핍박이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조익(趙翼)·김육(金堉)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시행 세칙을 새롭게 수정·보완하여 충청도에 다시금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 성공적인 결과로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에 기준하는 대동법이 각 도별로 순조롭게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앞서 실시된 경기도·강원도의 대동법도 이에 준하여 개정되어 대동법은 선혜청이 관장하는 하나의 통일된 재정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다만, 함경도·황해도·강원도의 대동법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군현별로 부과·징수를 상정하는 이른바 상정법(詳定法)의 특이한 규정을 두게 되었다.
대동법의 제정 자체가 지니는 의의나 그 실시가 미친 영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재정사 측면에서는 잡다한 공(貢)·역(役)을 모두 전결세화하면서 정률(定率)로 하고, 그 징수와 지급을 쌀로 하되, 무명이나 베 또는 화폐로도 대신하게 한 사실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정부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인·시인(市人) 등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상·공업 활동을 크게 촉진시켰다. 이로써 여러 산업의 발달과 함께 전국적인 시장권이 형성되고 도시의 발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상품화폐 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아가 상·공인층의 성장과 농촌 사회의 분화를 촉진시켜 종래의 신분 질서와 사회 체제가 이완·해체되는 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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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국, 「호서에 실시된 대동법(상): 대동법 연구의 일착」, 『역사학보』 13,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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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反田豊, 「嶺南大同事目と慶尙道大同法」, 『朝鮮學報』 131, 1989.
대동사목(大同事目)
정의
조선후기 대동법을 운영하기 위해 마련된 규정집.
개설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선혜법이 실시된 이후 인조대부터는 지역별로 대동법(大同法)이 순차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1623년(인조 1) 강원도를 시작으로, 평안도를 제외한 충청도·전라도·함경도·경상도·황해도에서 실시되었다.
대동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규정이 필요하였고, 이를 일관되게 모아 놓은 것이『대동사목』이었다. 『대동사목』에는 대동세를 징수하고 이를 중앙에서 상납하고, 지방에 유치하는 분으로 나누어 각기 운용하는 기본적인 원리와 방식을 담고 있었다. 이외에도 지리 환경, 인구, 토지 결수 등 지역의 경제적 특성을 반영하여 거두어들이는 대동세를 수취액수을 차별화하고, 상납과 유치미의 비율을 달리하는 등 지역 사정에 맞게 대동세를 운영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인조 때 강원도·충청도·전라도를 대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시에 사목의 제정이 추진되었다. 1624년(인조 2) 8월에 있었던 대동사목 제정 과정을 살펴보면, 강원도는 충청·전라도보다 경작하는 토지 결수가 적고, 생산량 또한 적다는 점, 충청·전라도 지역은 경기 지역과도 환경이 달라 대동세의 결당 수취액과 수송 방법, 징수시기를 달리해야 된다는 점, 따라서 낭청(郎廳)을 삼도에 보내어 민정(民情)을 살펴야 한다는 점 등이 의견으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대동사목』은 그 체제 형식은 비슷했으나 내용에서는 지역의 특색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었다.
현존하는 사목으로는 충청도의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전라도의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 경상도의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을 들 수 있다. 이 세 종류의 대동사목 역시 대동법을 운영하는 기본 원리는 동일하지만 지역의 사정에서 따라 징수하는 대동미(포)의 수가 달라지고, 지방 재정과의 관계 속에서 운영 방침을 조금씩 달리하였다.
충청도의 대동법은 1652년(효종 3)에 실시되었지만 대동사목은 1654년에 제정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호서대동사목』은 서문을 김육(金堉)이 쓰고, 대동사목의 마지막에는 호서선혜청(湖西宣惠廳)이 담당 기관임을 밝혔다. 모두 81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조항에는 『호서대동사목』의 조항 내용이 경기 지역의 예(例)를 따랐다고 하였다. 선혜법과 대동법이 둘 다 공물(貢物)을 미포(米包)로 바꾸어 백성에게서 징수하는 방식은 동일하므로 경기 지역에 실시된 선혜법의 시행 규정을 차용하여 대동사목을 제정한 것이었다. 제2조항은 호서대동청의 조직에 관한 것인데, 대동사목의 맨 뒤에는 호서대동청을 담당하는 관리의 명단, 즉 좌목(座目)이 첨부되어 있었다. 좌목에는 도제조(都提調)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며 제조(提調)는 호조판서 이시방(李時昉), 예조판서 남선(南銑), 호조참판 허적(許積)이 겸직하고 있었다. 제3조항은 문서에 찍을 인신(印信)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전라도의 대동법은 1658년(효종 9)에 실시되었지만 『대동사목』은 1663년(현종 4)에 제정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남대동사목』의 표제는 호남대동사목이지만 본문의 첫머리에는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이라고 되어 있었다. 『대동사목』의 마지막에는 그 담당 기관을 호남선혜청(湖南宣惠廳)이라고 썼다. 『호남대동사목』은 서문이 없고, 모두 73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조항에는 조항의 내용이 호서의 예를 따랐다고 하였다. 맨 뒤에 첨부된 호남대동청 좌목을 살펴보면, 도제조에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 제조에는 이조판서 홍명하(洪命夏), 호조판서 정치화(鄭致和), 병조판서 김좌명(金左明), 낭청 이장영(李長英)이 기록되어 있었다.
경상도의 대동법은 1677년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경상감사 이태연(李太淵)이 작성한 『영남대동사목』이 선혜청에서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대동법 실시가 연기되었다. 『영남대동사목』은 1678년(숙종 4)에 다시 제정되고 그 이듬해에 경상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영남대동사목』의) 필사본이 전해지는데, 1773년 이후에 기록된 것이지만 1678년에 제정된 대동사목과(『대동사목』과) 동일한 내용일 것으로 여겨진다. 표지에는 ‘대동추절목(大同追節目)’이라고 되어 있었다. 『영남대동사목』 뒤에는 「추변통절목(追變通節目)」, 「본도절목(本道節目)」, 선혜청과 비변사에서 경상도에 보낸 문서, 각종 시행 규칙과 관문(關文)이 첨부되어 있는데, 1681년(숙종 7)부터 1773년(영조 49) 사이의 기록들이었다. 『영남대동사목』은 모두 7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제1조항에는 조항의 내용이 호남의 예에 따랐다고 하였다.
내용
현존하는 세 지역의 『대동사목』은) 제1·2 조항이 모두 동일하다. 제1항은 각 지역 대동청을 선혜청 내에 설치하였다는 내용과 해당 사목이 기준으로 삼은 전례(前例)를 명시해 놓았다. 제2조항은 각 도 대동청을 운영하는 제조 당상군의 직제를 소개하였으며, 이후 제3조항부터는 조항마다 첨삭을 가하여 지역에 따른 운영 방침을 설명해 놓았다.
한편 세 지역의 『대동사목』에는 모두 대동세를 보관하는 내청(內廳)과 고사(庫舍)를 별도로 두고 있으며, 지역의 토지 결수와 거두는 쌀의 총량, 중앙에 바치는 경상납미(京上納米)와 각 도 군현에 남겨 두는 유치미(留置米)의 수량을 기재해 놓았다. 또한 중앙에 상납되는 대동세로 마련되는 중앙 각사의 원공물(元貢物)과 전세조(田稅條) 공물의 수량, 그리고 지방군현에 남겨진 유치미와 여미로 지출되는 경비 항목이 순차적으로 기재하였다.
『대동사목』은 각 도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사목 내에 대동미(大同米)를 징수하는 방안이 중요하게 모색되었다. 이 때문에 『호서대동사목』 제7조, 『호남대동사목』 제9조, 『영남대동사목』 제8조에서 모두 지역의 전체 토지 현황과 복호, 실제 수세할 수 있는 결수와 대동미의 수량, 서울로 보내는 대동미의 수량, 지역에 남겨 두는 유치미의 수량을 기재해 놓았다.
대동법 운영에 기준이 되는 토지 결수와 수취액, 명목 등이 대동사목 내 우선적으로 명시되고 그다음에는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즉, 가렴징수를 막기 위해 대두(大斗) 사용을 금지하고 평두(平斗) 사용을 원칙으로 정한 조항, 서울 상납 때 필요한 선마가(船馬價)를 수미원수(收米元數)에 포함시키는 조항, 공인(貢人)에게 공물가를 지급하는 규정과 지급 방식, 전세조 공물의 처리 방식, 각종 면세전(免稅田)의 면세 규정, 수운(輸運)·은결(隱結)·수령의 답험(踏驗)에 따른 포흠(逋欠) 방지 규정, 각종 운송에 필요한 쇄마가, 복호(復戶)의 내역, 선박의 개조 비용 지급 등이 수록되었다. 그 다음으로 각 읍의 유치미 운용과 관련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이러한 공통된 내용 외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조항도 많이 나타났다. 특히 『영남대동사목』에는 조선후기 일본과의 교류관계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이에 대한 대동미 지급 내역이 나타나 있었다. 일본과의 공무역에서 결제대금으로 쓰이는 공작미(公作米)를 대동미의 일부로 지출하는 한편, 매년 왕래하는 일본인 접대 물품 및 비용 역시 대동 여미로 지급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각 군현에 유치하는 유치미와 여미를 통해 대동법이 서울 관청뿐 아니라 지방 재정의 확보와 운영에도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동법의 시행 세칙인 대동사목은 대동법의 공통적인 운영 원리와 각 도마다의 독특한 시행 방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1차 자료였다.
참고문헌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Ⅲ, 일조각, 1988.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六反田豊, 「『嶺南大同事目』と慶尙道大同法」, 『朝鮮學報』 131, 1989.
한영국, 「대동법의 시행」, 『한국사』 30 , 국사편찬위원회, 1998.
한영국, 「호남에 실시된 대동법(上)」, 『역사학보』 15, 1961.
한영국, 「호서에 실시된 대동법(上)」, 『역사학보』 13, 1960.
대동청(大同廳)
정의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각 도의 대동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던 관청.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 공납제의 폐단을 개선하려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수정하여,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에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이를 경기선혜법(宣惠法)이라 하였다. 이에 경기 대동의 일을 관장하는 경기선혜청[경기청]을 설치한 것이 대동청의 시초였다. 대동청이 창설되었다가, 선혜청에 병합되거나 또는 폐지되는 경위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내용
1623년(인조 1)에 경기의 선혜법을 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확대 시행하기 위한 삼도대동법이 논의되었다. 처음에는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익(趙翼)의 상소 이후, 경상도를 뺀 삼도를 대상으로 1623년 9월 삼도대동청이 설치되었다.
삼도대동청은 『대동사목』의 시행 문제와 방납의 폐단을 개선하는 방안 등 대동법 운영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당해 흉작과 각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지 못한 대동법의 시행 세칙으로 인하여 비판론이 일어났으며, 결국 대동법의 확대를 주도하였던 이원익(李元翼)이 삼도의 대동법을 잠시 혁파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1624년 12월에 삼도대동청이 폐지되어 충청·전라도 지역의 대동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강원도의 경우에는 철원 유생들이 대동법을 유지하자고 청원함에 따라 대동법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다만 호조 산하에 대동청이 설치되어 강원도의 대동법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조 대에는 상평의 업무와 경기도 대동법을 관장하는 선혜청과, 강원도의 대동법을 관장하는 호조 산하의 대동청이 병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각 대동청은 각자의 낭청을 두어 독립회계제도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창고를 각기 따로 사용하였다. 종이·붓 등과 같은 사무용품도 대동청 별로 각각 구입하여 사용하는 등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대동청과 관련된 사료는 각 도의 『대동사목』과 각 청의 사례가 있다. 『대동사목』은 대동법의 시행 규정을 담고 있으며, 대동법 운영에 관한 규정집이라 할 수 있다. 각 청의 사례는 대동청의 규모와 운영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정리하였으며, 첫 부분에는 각 청의 연혁을 설명하였다.
『만기요람』에서는 경기청·강원청·호서청·호남청·영남청의 대동청을 선혜오청(宣惠五聽)이라 하였다. 각 관청에 소속된 관원은 다음 표와 같다.
변천
1652년(효종 3) 김육(金堉)에 의해 정비된 대동법이 충청도에 다시 실시되면서 호서대동청이 선혜청 산하에 설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호조가 관리하던 강원청도 선혜청으로 이속되었다. 1652년에는 경기대동청·호서대동청·강원대동청이 모두 선혜청 산하로 이속되었다. 이후 선혜청은 삼도대동법과 상평 업무를 관장하는 새로운 재정 기관으로 확립되었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되면서 각 도의 대동법을 운영하기 위해 대동청이 설립되었다. 1658년(효종 9)에 호남대동청, 1677년(숙종 3)에 영남대동청이 설치되었다. 두 대동청 모두 창설과 동시에 선혜청에 소속되었다. 해서대동청은 황해감사의 요청으로 1708년(숙종 34)에 설치되어 호서대동청에 부속되었다가, 1758년(영조 34)에 강원대동청에 이관·부속되었다.
참고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Ⅲ , 일조각, 1988.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한영국, 「대동법의 시행」, 『한국사』 30 , 국사편찬위원회, 1998.
도계진상(到界進上)
정의
조선시대에 새로 부임한 감사·병사·수사 및 절제사 등의 지방관이 근무지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와 임명해 준 데 대한 사은 편지를 왕에게 올릴 때 예물로 함께 바치던 물선진상.
개설
진상은 지방의 토산물을 왕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다가와 고조[田川孝三]는 진상을 물선(物膳)진상, 방물(方物)진상, 제향(祭享)진상, 약재진상, 응자(鷹子)진상, 별례(別例)진상의 6종류로 나누었다. 물선진상은 정기적인 것과 부정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지방관은 임기가 있지만, 임기 내에 교체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도계진상은 물선진상 중에서 부정기적인 진상에 속하였다. 지방관이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 사은의 뜻으로 예물을 진상하였다. 이것을 과체(瓜遞)진상이라 불렀다.
내용 및 특징
도계진상의 물종은 물선(物膳), 즉 식자재인 생물(生物)·건물(乾物) 형태로 진상되었다. 생물과 건물은 대체로 짐승과 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외에도 해당 지역의 특산물이 진상되었으므로, 물종은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진상물은 보통 도에서 각 군현에 분정한 후, 이를 감영 차원에서 수합하여 중앙으로 상납하였다. 도계진상은 감사가 근무지에 도착한 후에 바로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승평지(昇平志)』를 보면, 전라도 순천부에는 전라감사의 도계진상으로 ‘전복 2첩, 홍합 4말 5되, 해삼 4말 5되, 분곽(分藿) 9근, 표고 7근’이 분정되었다. 과체진상도 마찬가지였다.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병마수군절제사는 도계진상으로 백랍(白蠟) 24근을 진상하였다.
1828년(순조 28) 12월 15일 황해감사에 임명된 이익회(李翊會)는 1829년 1월 20일 황해감영에 도착하였다. 부임하자 곧바로 대전(大殿)·중궁전·세자궁에 ‘말린 꿩고기 건치(乾雉), 생합(生蛤)식해, 익히지 않은 대합조개 생합, 건수어(乾秀魚), 꿀 청밀(淸蜜)’의 5품목을 진상하였다. 3곳 진상처에 대한 진상 물종은 동일하나, 수량은 진상처의 위상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었다.
변천
대동법 실시 후에도 관찰사의 도계진상은 외공(外貢)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1751년(영조 27)에 편찬된 『선혜청정례』에 의하면, 경기감사가 대전에 상납한 도계진상 물품의 목록은 ‘생꿩 15마리, 생선 5마리, 생노루 2마리, 수어해(秀魚醢) 1단지, 청밀(淸蜜) 2말, 진말(眞末) 8말’이었다. 이를 위한 경비로 쌀 29석 4두를 (책정하였다. 도계진상의 상납처는 대전 외에 중궁전·세자궁·대비전·세손궁 등이며, 진상물은 대동소이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선혜청정례(宣惠廳定例)』
『여지도서(輿地圖書)』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 Ⅲ , 일조각, 1988.
김옥근, 『조선후기경제사연구』, 서문당, 1977.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이재룡, 「진상」, 『한국사 24』, 국사편찬위원회, 1994.
도고(都賈)
정의
물화의 구매는 물론 판매까지 독점함으로써 가격을 임의로 조종하고 이익을 독차지하는 행위, 혹은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 또는 상인 조직.
개설
도고에는 관상도고(官商都賈)와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있었다. 관상도고는 시전상인이 금난전권(禁難廛權)을 근거로 자행하는 시전도고(市廛都賈)였다. 이 때문에 사료에 따라서는 금난전권을 도고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사상도고는 사상(私商)이 자본력과 상업 조직을 근거로 하는 도고였다. 양자 모두 17세기 이후 조선의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을 배경으로 등장하였다는 점과, 상인의 자본 집적을 위한 방편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양자의 방법과 과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집적된 자본의 궁극적 성격은 어디까지나 이른바 ‘전기적 상업 자본’이라는 점도 동일하였다.
조선후기 상업은 관상도고에서 사상도고의 우위로, 나아가 반(反)도고 운동에 의한 도고 해체의 과정을 밟고 있었고, 바로 그 상황에서 개항을 맞았다. 따라서 개항 이후 외채자본의 침입 앞에서 일정한 저항을 나타낸 토착자본의 핵심은 도고자본이었으며, 그 전망은 몰락, 매판화, 혹은 산업자본으로의 전화 등 세 가지 가능성 중 하나였다.
설립경위 및 목적
도고(都庫)는 본래 대동법 실시 이후에 공물을 원활히 조달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었으며, 그것은 또 공납품을 미리 사서 쌓아 두는 창고의 역할도 겸하였다. 이와 같은 도고의 의미가 차츰 바뀌어 독점 상업을 의미하게 되었다.
도고 상업은 17세기 이후 대외무역과 국내상업의 발달, 금속화폐의 유통 등 일련의 전통 사회 말기의 경제적 변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상업 형태였다. 서울과 지방의 농·수공업 생산력 증가와 그에 상응하는 활발한 상품 생산은 상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이러한 국내외 경제 환경의 변화로 상업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인 간의 경쟁이 심해졌다. 그러나 경쟁이 심해질수록 상업 이윤이 감소하게 되었다. 상인들은 이를 극복하고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노력하면서, 그 결과 도고 상업이 출현하게 되었다. 도고 상업은 상업 자본의 집적 과정에서 발달한 상업 형태이며, 이렇게 집적된 자본은 독점·매점·특권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전기적(前期的) 상업 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도고 상업의 출발은 임진왜란 이후 서울 상업계에서 난전(亂廛)에 대응하여 시전상인에게 금난전권을 제공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금난전권에 기반을 둔 시전상인의 상업 활동이 곧 도고 상업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이는 공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시전상인이나 공인들은 역(役)을 부담하는 대가로 조정에서 특정 물품의 독점권을 부여받은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상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의 독점권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울 일원과 지방의 영저 등 일정한 소비 도시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을 관상도고로 범주화할 수 있다.
한편 시전의 상대였던 난전상인들도 18세기 이후 상품화폐의 경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자본력과 상술을 밑천으로 도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상인이 경강(京江)상인과 개성상인이었다. 이들은 사상도고로 범주화할 수 있다. 사상도고는 개성·동래·의주와 같은 대외무역 지역, 서울과 지방 도시 근방의 상품 집산지, 상품 생산지 등에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히, 특권 상인의 금난전권이 미치지 못하는 서울 성 밖의 경강·송파(松坡)·누원점(樓院店)과 같은 상업 요충지에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사상층이 도고 행위를 하였다. 그들은 직접 생산자와 소상인들이 상품을 서울로 반입하려는 길목에 터를 잡고 대량으로 매점하거나, 아예 대리인에게 자본금을 주고 생산지에 보내어 상품을 직접 매점하였다. 한편으로는 지방에서 도고를 하는 여각(旅閣)·객주(客主)·선주인(船主人) 등이 매점한 상품을 다시 도고하였다[『정조실록』 5년 11월 1일].
이렇게 사상도고의 매점 활동은 주로 생산권과 소비권을 연결하는 장시(場市)를 근거지로 하여 전국적 범위에서 행하여졌다. 나아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 부분에 투자하고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일종의 선대제적(先貸制的) 경영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에는 그들의 유통 경제에서의 우위를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해 권력층과 결탁하는 변신을 꾀하기도 하였다.
도고 상업이 발전하던 당초에는 관부에서 받은 특권을 근거로 관상고도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차차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 사상도고가 관상도고의 특권을 극복하면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특히 1791년(정조 15)에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계기로 사상도고의 우세가 확연해졌다.
도고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서울 상업에서 특히 심하였다. 도고의 폐단은 물가 급등, 시민 실업, 도시민 생활 압박 등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도고 자본의 형성 과정에서 빚어진 특권성과 매점성은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일정한 시기에 배제되어 갔다. 신해통공을 시행하게 되었던 것도 반도고 운동의 결과였다.
19세기 전반기에는 관상도고 체제가 해체되고 사상도고가 발달하면서 한편으로 사상도고에 대한 저항 세력도 형성되었다. 즉, 조선후기 상업은 관상도고에서 사상도고의 우위로, 나아가 반도고 운동에 의한 도고 해체의 과정을 밟았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개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상도고는 자신의 독점적인 유통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궁방이나 아문 등 권력 기관과 결탁하였고, 이윤을 분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세도정치가 정치 운영 원리로 작용하던 19세기 전반기에서는 상품유통 부분에 권력기관이 개입하여 사상도고의 상업자본 축적은 큰 제약을 받았다.
개항 이전의 상품유통 구조 속에서 상업자본의 축적은 사상도고인 경강상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때문에 경강상인의 자본 축적 정도는 개항 이후 침투한 외래 자본과 경쟁하여 승리할 만큼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출판부, 1974.
강만길 편, 『조선 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 2000.
고동환, 『조선 후기 서울 상업 발달사 연구』, 지식산업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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