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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조스님의 단식
그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밥을 굶었다.
부처님처럼 설법으로 세상을 바꿀 능력이 못 되니 몸이라도 바쳐 조계종단을 변화시키려 했다.
녹색병원에 41일 단식후 회복을 위해 입원 중인 설조스님을 찾아뵀다.
설조스님과의 대담은 8월 18일 원인스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고원영: “부처님이 세상에서 행한 가장 위대한 업적은 뭐라 생각하십니까?”
설조스님: “부처님은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쳐서 세상사는 법을 알려주고, 자비를 가르쳐서 세상이 두루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려줬지요. 부처님은 부자와 권력자, 가난한 사람과 여성, 천민이 모두 평등함을 일깨워주셨어요. 부처님은 아마도 인류 최초의 평등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일 겁니다. 부처님은 여성도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인류 최초로 길을 열어주셨잖아요. 부처님에게 민족이나 국가의 벽 같은 건 없었답니다.”
고원영: “불교는 모든 걸 왜 괴로움으로 인식할까요? ”
설조스님: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할 일에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훨씬 많아서겠지요.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므로 삶 자체를 괴로움으로 본 거죠. 그 괴로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중생에겐 삶 자체가 괴로움이라 하신 겁니다. 중생이 느끼는 선과 악의 개념 또한 괴로움입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괴로움 가운데서도 지혜를 잃지 않으며, 남을 위해 자비를 베풀 수가 있겠지요. 존재의 본질을 깨달았을 때는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아니한 게 없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초월한 경지에서는 무엇이든 절대적 즐거움으로 바뀐답니다.”
고원영: “선불교는 가끔 유희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설조스님: “선불교든 그 밖의 불교든 부처님은 일반인과 같은 언어를 썼습니다. 교감을 배제한 언어는 유희일 수밖에 없지만 모든 언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든, 혹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든 교감이 우선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꽃을 바라보면서 아름답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 말에 꽃이 기뻐서, 꽃잎을 더 붉게 하여 내게 아름다움을 전해온다고 칩시다. 아름다움이 교감을 통해 더 아름다워져서, 서로가 사랑스러워지거나 자비로워지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교감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고원영: “불교를 과학적인 종교라고 하는데, 내생이나 윤회를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설조스님: “글쎄요. 옛날 선사들은 한 생각 전을 전생이라고 하고, 한 생각 후를 내생이라고 했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을 생사라고 했고요. 내생이나 윤회의 문제 또한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요. 그걸 과학적으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판단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니라고 봅니다. 과학도 생각의 차원에서 발달했을 테니까요.”
고원영: “서양의 철학자들은 일찌감치 부처님의 사유가 미래를 이끄리라 전망했는데 그 까닭은 뭘까요?”
설조스님: “무엇보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때문이겠지요.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는 특정 인종이나 국가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했잖아요. 부처님은 내가 곧 부처라는 인식을 심어 평등이 인간의 본질임을 가르쳤습니다. 서양 철학은 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를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인류문명을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물질의 영역에 국한해서였지요. 그러나 정신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공허함을 다른 차원의 정신으로 채우려 했고, 그 과정에서 불교를 찾아낸 겁니다. 내 마음이 평화로워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부처님의 생각은 서양인들에겐 경이로운 세계관이었지요. 따라서 서양인들은 부처님 방식대로 살아보자고 결심하고 꾸준히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불교가 서양문명을 이끌 추세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고원영: “독일에 이미 19세기 초기에 불교경전이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중아함경을 읽고 싯다르타와 데미안을 썼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도 십수년 전부터 초기 경전 공부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초기불교를 먼저 공부했어야 불교의 바탕을 잘 알 수 있으리란 자각때문 인거 같습니다. 또한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폐단이 현 한국불교의 폐단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설조스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가 발전해서 생긴 겁니다. 대승불교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지, 대승불교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 원음이 초기불교에 잘 녹아 있으리란 생각에 초기불교를 선호하는지 모르겠지만, 대승불교로도 얼마든 부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나라마다 기후가 다르고, 기후에 따른 풍습이 다르고, 입는 옷, 먹는 음식이 다르잖아요. 대승불교건 초기불교건 여건에 따라 부처님 말씀을 다르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에 어떤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초기불교가 부처님 말씀에 가깝고, 대승불교가 부처님 말씀에 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멀든 가깝든 얼마만큼 진실하게 받아들였냐가 중요하지요. 진실하면 먼 것도 가까이 느껴지고, 부처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면 가까운 것도 멀게 느껴지겠지요. 예컨대 달라이라마 스님을 생각해봅시다. 달라이라마는 대승불교의 영향권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티베트와 몽골에서 거룩하고 신성한 성자로 추앙받는 사람입니다. 그 달라이라마가 대승불교 수행자라서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수행자에 비해 존경을 덜 받나요. 수행자가 얼마만큼 부처님 정법으로 수행하냐, 수행자가 진실하냐, 이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원인스님: “달라이라마는 초기불교를 바탕으로 설법을 전개하는 사람이에요. 그가 태어난 티베트는 대승권이고 밀교 쪽이지만 달라이라마는 초기불교에 바탕해서 대중과 소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조스님: “달라이라마도 대중과 쉽사리 소통하려다 보니까 초기불교를 자주 인용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초기불교 경전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부처님 생각을 전하고 있으니까요. 대승불교 경전도 마땅히 쉽게 풀이해서 이야기처럼 들려줘야 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 스님네의 몫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거 우리나라 큰스님들의 법문은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를 사용했어요. 한문을 그대로 읽어주는 형식을 취했던 겁니다. 듣는 쪽에서는 그러려니 할 뿐 정작 뜻을 알 수 없었지요. 그전 60년대에 한 스님이 은해사에 주석했었어요. 그 당시로선 드물게 일본에 건너가서 대학을 나온 스님이었고, 그래서 젊은 대학생들이 그 스님을 찾아와 법문을 청하곤 했지요. 그 스님의 법문은 먼저 ‘조사어록’을 읽고 발음하는 방식이었는데, 어떤 대학생이 ‘큰스님, 그 말씀을 한문으로 읽어주지 마시고 우리말로 풀어서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문제를 제기했어요. 스님은 기분이 상했는지 ‘도를 알면 다 이해할 수 있다’라고 면박했어요. 그러자 젊은 학생이 기다렸다는 듯, ‘정말 그렇습니까? 스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알아들으실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하고 반문하더니, 영어로 질문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은해사 스님의 얼굴이 이내 벌게졌지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처님께선 보통의 언어로 일반인과 소통했습니다. 부처님은 무슨 주술 같은 걸 외우거나 도통을 보이시거나 그러신 적이 없어요. 달라이라마도 그 나름 현명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초기불교 경전만을 인용해야 대중과 소통이 잘된다는 쪽으로만 이해해선 곤란합니다. 경전이야 어쨌든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교화의 폭이 넓어지겠지요.”
고원영: “현대사회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능력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개인의 수행을 더 중요시해서 공동체의 이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스님께선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조스님: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에 당신과 가장 가까웠던 다섯 비구를 찾아갑니다. 그들을 먼저 교화하고, 당신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차례로 교화했지요. 당신 혼자만 수행하지 않았습니다.스님들도 그래야 합니다. 항상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과 아픔을 함께해야지 혼자만 수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스님이 신도들에게 법문할 때면 당신의 떨림을 보통의 언어로 전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지식을 과신하여 어렵게 법문한다든지, 일부러 어려운 한문을 쓴다면 신도들을 교화하기 어렵겠지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왜 음악회에 가겠습니까. 시디로 음악을 듣는 것이 훨씬 저렴한데 말입니다. 비싼 입장료를 주고 음악회에 가는 것은, 가수를 직접 봐야 가수가 노래하는 그 떨림을 더 가까이 느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도들도 그런 떨림을 느끼고자 스님을 찾는 것이지요. 불교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는 사부대중이 함께 공감을 나누는 공동체였습니다. 불교 자체가 공동체를 의미했다는 방증이지요.‘
고원영: “한국불교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 사회에 이익을 주는 종교로 발전하지 못하고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기복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불자들이 무종교인보다 더 이기적이라는 소리도 들리더라고요. 이를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요?”
설조스님: “내가 행복하면 내 주변도 행복해야 합니다. 내 주변뿐이 아니라 더 멀리까지 행복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대자비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주변보다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는 건 지극히 비불교적인 행위지요. 주변이야 어째든 나만 잘 살겠다는 건 이기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고원영: “그런데 어떤 스님들은 기복신앙 때문에 한국불교가 지금껏 지탱해왔다. 믿음은 없이 이해의 차원으로만 불교에 접근하는 사람은 믿음을 지닌 기복신앙자보다 못하다고 질책하더라고요. 스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조스님: “글쎄요. 난 암만 생각해도 기복을 긍정하기 어렵네요. 기복이란 이기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봐요. 옛날에 이 나라 전체가 어렵게 살았을 때, 형제가 한집안에 사는 경우가 흔했어요. 그러다 아우가 먼저 세상을 뜨기도 했지요. 명절 때면 큰아버지가 당신 자식보다 아우네 자식, 그러니까 조카에게 먼저 옷을 사줬어요. 아버지 잃은 어린 조카가 가엾어 설빔을 입혔지요. 그런데 기복이란 게 아우네 자식은 멀리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부처님 자비하고는 먼 행위지요. 주변이야 어쨌든 자기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더불어 살자고 하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입니다.”
고원영: “설조스님이 우정국 뒤뜰에서 단식한다는 걸 모를 리 없는데도 그 자리 한번 쳐다보지 않고 지나는 조계사 신도들도 있더라고요. 물론 조계사에 가서 기도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요.”
설조스님: “그건 업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에겐 조계사 스님을 욕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더불어 잘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부처님은 인도 전역을 두루 다니면서 진리를 전했지요. 부처님이 당신의 혈연인 석가족만을 배려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잖아요. 이웃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한 삶이 바로 부처님이 전한 진리입니다.”
고원영: “한국불교를 치마불교라고 합니다. 스님들이 여성만을 상대하고 남자는 거북하게 여긴다는 말이 있어요. 개신교나 가톨릭은 남자 신도들의 역할이 크잖아요. 장로가 교회 운영을 도울뿐더러 감시자 역할도 하고요. 한국불교도 절에 오는 남자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조스님: “부처님 말씀이 여자에게 더 합당해서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여자 신도가 남자보다 더 많은 건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불교가 더 심한 건 사실입니다. 여성들은 이치를 따지기보다 우선 믿고 들어가는 성향이 있긴 합니다. 스님들을 외호하려는 마음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고요. 스님들이 교리에 더 치중해서 가르치고 수행 위주로 절을 운영하면 거사들이 늘지 않을까요. 우리 교단의 숙제라고 볼 수 있겠네요.”
고원영: “절에서 천도재 지내는 것은 사라져야 할 기복신앙이라거나 기복신앙을 이용해 절 수입을 늘리려는 불자가 있는데, 스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설조스님: “제사 지내는 걸 기복으로 여기는 건 지나친 생각입니다.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잖아요. 조상의 얼을 계승하고 자손의 행복을 비는 건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입니다. 다만 천도재를 지낼 때 돈이 많이 드니, 신도들 형편을 절에서 고려해야겠지요.”
고원영: “불교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설조스님: “우리 집 가문은 양양에서는 명문가 가세를 지녔어요. 17대조 할아버지가 양양 부사로 부임하셔서 400여 년을 양양에서 살았고, 대대로 행세깨나 했지요.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치르면서 가세가 기울었어요. 증조할아버지는 일본식 교육을 극구 반대하셨어요 ‘일본놈한테 교육받으면 일본놈이 되고 만다’고 하셨죠. 누구나 그렇지만 한때 내게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는 예민한 시기가 찾아왔어요. 하루는 앞집 사람이 다니는 안식일 교회에 따라갔어요. 그렇게 기독교와 인연을 맺었지만, 얼마 안 가서 목사와 다퉜어요. 목사가 설명하는 창세기를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목사는 나더러 ‘믿음이 없어서 문제’라고 꾸짖었고, 나는 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지 않느냐’고 대들었지요.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때라 나는 백과사전을 사다가 기독교를 공부했는데, 그쪽 세계는 왠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 무렵 나는 독서에 빠졌는데, 이광수 선생님의 소설 ‘원효대사’를 읽고 새로운 길에 눈이 열리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낙산사와 신흥사를 찾았고, 거기서 금오스님이 계신 청계사로 갔지요.”
고원영: “스님께선 수행하다가 어떤 신비 체험을 했던 적은 없었나요? 그 순간 미간이 열린다는 말도 있던데요.”
설조스님: “용성스님이 지으신 ‘육자대명왕경’이란 손바닥 크기의 해설서를 우연히 보았는데, 화두에 들기 전에 그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용성스님은 못 뵀지만, 그 책을 읽고 크게 감흥을 느꼈지요. 그 순간 세상이 열리는 느낌이었는데 그걸 뭐라 표현할 길이 없군요. (스님은 ‘그 순간을 얘기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 말끝을 흐렸다.)그 후, 세월이 흘러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감흥을 까마득히 잊었다가 전라도 장수에 있는 용성스님 생가 죽림정사에 들렸더랬어요. 그 집 유물관에서 근 60년 만에 육자대명왕경을 보고 뭉클했습니다. 저는 용성스님에게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원영: “ 단식을 통해 저항한 조계종 비리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1994년 개혁 종단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적주비구인가요?”
설조스님: “네, 적줍니다.”
고원영: “적주비구란 비구계를 받지 않은 스님을 도둑에 비유한 말인데, 받지 않은 까닭이 뭘까요? 어떻게 보면 비구계를 받지 않고 총무원장 자리에 있었다는 게 현 조계종 문제의 시발점 같은데요.”
설조스님: “비구계를 받을 의사가 없으니까 안 받았겠죠. 비구로서 응당 갖춰야 할 소양을 갖추지 않을뿐더러, 도업에도 뜻이 없는 사람들이 정화 이후 인재부족을 틈타 종무를 맡았어요. 신분까지 조작해서 말이지요. 월주스님, 그 사람이 총무원장을 할 때마다 문제가 생겼잖아요. 전두환 때는 10.27법난을 겪었고, 김대중 정부에서도 경찰병력 수천 명이 조계사에 들어와 불교를 유린했지요. 월주스님, 그 사람뿐 아니라 서정대, 이자승, 전설정이 모두 적주비굽니다. 적주비구가 총무원장을 하니 대형사고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총무원장을 못하도록 종단의 종정이니 원로니 율사니 이런 스님들이 시비를 가려야 하는데 꿈적도 안 해요. 지금은 오히려 그 적주들한테 잘 보이려고 눈치를 보는 모양샙니다.”
고원영: “설정 총무원장이 단식장에 두 번 찾아왔는데 무슨 제안은 없었나요?”
설조스님: “‘비웠다’고만 했어요. ‘다 비웠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이삼분도 아니고 1분 20초 만에 가버렸어요. 다른 얘긴 일절 없었습니다.”(1분 20초란 말에 병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웃었다)
고원영: “10.27법난 때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러셨는데…….”
설조스님: “그렇습니다. 그때 송월주 스님이 총무원장할 때인데, 공화당 유력 인사가 신군부에서 덮치니 큰 화를 입기 전에 나가라고 했어요. 난 안 나가겠다고 했죠. 세상에 불이 났는데 어찌 혼자만 나가느냐고 했죠. 그래도 두 달 나가 있으라고 채근해서 10월 27일 저녁 8시 24분 KAL을 탔습니다. 처음엔 L.A에 한 달 반 정도 있다가 샌프란시스코에 빈 절이 있다 해서 그리로 갔습니다. 그곳이 여래사입니다. 여래사에 있는 동안 고국 생각에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현실에 맞서 싸우지 않고 도피한 것이잖아요. 오죽하면 위장병까지 앓았답니다.”
고원영: “다시 귀국해서 1994년 조계종 개혁에 참여하셨죠?”
설조스님: “노태우 정권 때 다시 왔지요. 그때가 1991년이었나…? 94년 개혁에 참여하고는 불국사 주지를 4년 맡았죠. 그 후, 일 년이면 반은 미국에서 지냈고, 반은 법주사에 지냈습니다.
고원영: “설조스님께서 한국과 미국을 왕래한 것은 평탄치 않은 우리나라 불교 현대사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 같습니다. 유럽에는 명상을 중심으로 불교가 널리 퍼지고 있다는데 미국은 어땠나요?”
설조스님: “처음 미국에 가니 교회가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기독교가 퇴조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던 거죠. 반면, 달라이라마의 영향으로 불교에 대한 미국인의 호기심이 커졌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00년 12월 31일 제야방송에서 CNN의 래리 킹이 신년맞이 인터뷰를 하는데, 달라이라마와 먼저 하더라고요. 기독교단체의 거두 빌리 그레이엄이 그 뒤를 잇고요. 미국에서 불교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지요. 미국인들의 종교적 성향은 ‘교리를 어떻게 현실에 실천하냐’인데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숭산스님이 모범을 보였죠. 미국인들은 숭산을 신뢰했습니다.”
고원영: “스님은 단식법문에서 자주 ‘죄송하다’고 했는데, 초기경전 번역으로 유명한 전재성 박사가 인용하길, 불교에서는 도덕적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우주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라고 했습니다. 비리로 얼룩진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무엇보다 이런 자각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조스님: “내가 ‘죄송하다’라는 말을 되풀이한 것은 말로써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데, 내가 법력이 부족해 그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몸으로라도 개혁을 외쳐야겠다 싶었던 거지요. 한국불교의 스님네들이 어떻게 대중에게 잘못을 사과해야겠습니까? 교단의 잘못은 어떤 수식어로도 부족하다 할 것입니다. 나로선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참 무지한 표현이지만, 교단의 변화를 내 몸을 학대해가면서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더라고요.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감동했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몸만 남은 나로선 그 말조차도 구차했습니다.”
고원영: “올여름 유례없는 더위였습니다. 100년 만의 더위라고 하는데, 그 뜨거운 햇볕을 천막 하나로 버텨낸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지진 않으셨는지요?”
설조스님: “아니오.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저녁이더라고요. 나는 한 30일 살면 내 목숨이 끊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루가 그렇게 빠르게 지나갈 수 없었어요.”
고원영: “소금 한 포대를 누가 보내왔던데요?”
설조스님, “처음엔 몰랐는데 어떤 여성신도가 ‘소금을 천막 주변에 뿌리면 해충이 들어오지 않는다’면서 보내왔던 거지요. 처음에 난 그걸 다 먹으라는 줄 알았어요.”(다들 웃음.)
고원영: “조계종의 갈등만큼이나 갈등이 많은 사회입니다. 부처님께선 이런 경우 어떤 해법을 내놓으셨을까요? 노구에 41일이나 단식하면서 변화를 외치신 분으로서 불자와 국민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설조스님: “모든 시작은 늘 나로부터입니다. 한 사람의 바른 생각에 이웃사람이 감동하고, 이웃사람의 생각도 바르게 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교단도 바르게 변하지 않겠는지요. 교단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일수록 자기 생각을 바르게 하여 그 생각이 널리 확대되길 소망해야겠지요. 소망이 바르지 않고 증오심이나 욕심을 품는다면 어떤 일이든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정견(正見)을 떠올렸는데, 역시 ‘바르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
고원영: “종단 개혁을 위해 승려대회를 하는데, 성공하리라 보십니까?”
설조스님: “그건 잘 돼야지요. 하는 거만큼 되니. 힘껏 하면 좋겠습니다.”
고원영: “마지막으로 전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설조스님: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불자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일이 ‘성사되고 안 되고’에 관계없이 옳은 주장을 하고, 옳은 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내가 그 말에 ‘승려대회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냐’고 물었더니, 설조스님은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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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절에 다니는가?
법석에서 누가 대뜸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던 말이 기억난다.
진부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거창한 행복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자유,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권리이다.
나 하나 침묵한다고 바뀔 세상이 안 바뀔까. 분노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 생각이 그 한 사람에 해당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만연하면 절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를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
불교포커스 기사 2018.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