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이현우의 우리고장 문화유산 이야기
한응인(韓應寅) 묘역(墓域)
한응인[1554(명종 9)~1614(광해군 6)] 묘역은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18-6번지 새말이라고 하는 마을에 있다.
한응인의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부사직 경남(敬男)의 아들로 태어나,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에 뽑혔고, 이어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 지평(持平) · 정언(正言) ·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적발하여, 그 공으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르고 승지(承旨)를 지냈으며 1590년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왕을 따라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으나,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유인 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였다. 이에 왕을 뒤따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요동에 건너가 원병의 급속한 출병을 요구하였고,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오자 접반관(接伴官)으로 이여송을 맞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조 · 호조 · 병조의 판서를 거쳐 1607년(선조 40) 우의정에 올랐다.
한응인 묘의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합장묘이며,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으로 방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 ·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가까이 모여 있고, 묘역 앞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1994년 묘역을 새로 정비하면서 묘비의 기대(基臺) 부분과 상석 · 향로석· 계체석(상석을 경계로 상하단을 구분하기 위하여 장대석을 이용하여 단을 만드는데 이를 계체석(階砌石)이라고 한다. 이 단을 중심으로 봉분 쪽을 계절(階節), 그 아래쪽을 배계절(拜階節)이라고 하여 공간을 구분한다. 계절은 죽은 사람의 공간이고 배계절은 산 사람의 공간이다. 능원에서는 단을 세 단 정도로 두는데 이때는 각각 위에서부터 상계(上階), 중계(中階), 하계(下階)로 구분하여 부른다. 상계와 하계 무인석까지는 비교적 평탄하며 대부분의 석물들이 여기에 배치된다. 그러나 무인석부터 하계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여기를 사초지(莎草地)라고 한다. 사초지 끝에는 제사를 위한 정자각이 놓인다) 등의 석물을 교체 설치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의 50m 우측 전방에 위치하는 데, 우진각지붕형 가첨석(加檐石, 전후면 지붕과 측면 지붕이 만나는 추녀마루 끝에서 모이게 되는 형태의 비석 지붕돌), 비신(碑身), 기대(基臺)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비신은 옥석(玉石)으로 되어있어 그 가치가 높다.
규모는 비신이 79×23×179cm, 가첨석이 143×95×58cm, 기대가 145×100×59cm이다. 이 신도비의 양식적 특징은 가첨석의 하단부 건물에 기둥석부와 지붕 사이에 있는공포(拱包)의 형상을 조각해 놓음으로써 압박감을 덜어주어 안정감있게 보이도록 한 것이다. 비문은 김류(金瑬)가 찬(撰)하고 한인급(韓仁及)이 글을 썼으며, 김광현(金光炫)이 전액(篆額)을 써서 1642년(인조 20)에 건립한 것이다. 현재 청주한씨 충정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1995년 8월 7일 경기도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내고장 안산』(내고장안산편찬위원회, 1990)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1999)
『디지털안산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안산시사』(안산시사편찬위원회 2011)
『안산 아름다운 향토문화』(안산시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