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시학>에서 시를 설명하면서,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시의 내용이 더 보편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상 역사는 일회적이고 반복되지 않는 사건들을 서술하지만, 시는 모든 사람에게 두루 적용되고 반복되는 마음을 표현한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찾아온 절절한 슬픔을 표현한 시는 또는 노래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연탄재를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남을 위해 뜨거웠던 적이 있는가”라는 그 유명한 시도 많은 이에게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인 것을 논하는 것은 “더 철학적”이라는 위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철학이다. 그런데 철학은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개념들의 얼개 속에서 헤매는 일은 가끔 지적인 만족을 줄 수는 있지만, 대체로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삶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고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철학을 하는 일은 대개 삶에서 소외된 채로 지내는 일이다.
그래서 불교학을 강의하다 정년퇴임하는 교수는 퇴임사에서 “이제는 책을 떠나 마음껏 마음의 수행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말한 듯하다. 또한 그래서 카톨릭 철학의 표준서인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는 노년에 “지금까지 내가 써온 것들은 그저 지푸라기들로 보입니다”라고 말한 듯하다. 물론 과제나 소명으로 철학을 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칭찬받을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삶이 철학에 의해 소외되는 것은 여전히 기쁘지 않은 일이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삶은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는 다소 다르게 시인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를 보며 사진을 찍고, 꽃을 감상하며 흥엉거리고,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고, 더러는 사람들과 언쟁을 하고, 그리고 후회하며 속상해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상한 시인이나 기행적 시인의 삶을 따라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도의 마명 보살이 쓴 <대승기신론>의 주석서들 중 가장 잘된 주석서로 알려진 <대승기신론소>를 쓴 원효 스님도 “시장에서 술 먹고 춤추면서 포교를 행했다”고 한다. 물론 시인들이 원효를 따르는 것인지, 원효가 시인들을 따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동영상 만들기를 위해 책을 읽고 책의 오류를 고치고 하는데 시간을 쏟다 보니, 나의 삶이 거의 소외된 듯하다. 게시판의 많은 이야기가 이미 오래된 글들 뿐이다. 물론 코로나가 외출을 위축시킨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핑계에도 불구하고, 철학 때문에 삶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투비 오아 낫투비, 댓 이즈 쾌션‘이라고 자신의 철학적 고민을 말한 햄릿도 친구 호레이쇼에게 “천상에서보다는 지상에 더 많은 것들이 있다네”라고 말하여 천상의 관찰보다 지상의 생활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